미지의 세계에서 | 에스콰이어 코리아 (Esquire Korea)

아시아 여성과 혁신이라는 미래의 역사에 대하여. | ESQUIRE,에스콰이어,ESQUIREKOREA,에스콰이어코리아,TED

“인도에서 뭘 했다고요? 그래서 뭘 이야기할 거라고요?” (중략) “메리어트 벵갈루루에서 ‘우먼 인 이노베이션’이라는 주제로 TED 강연을 열었어요. 아시아 3개국 여성 리더들이 나와 강연했어요.” (중략) “여성 리더라고 하니까 빨간 하이힐, 빨간 립스틱 정도 떠오르는데 그런 이미지를 넣어보는 게 어때요? 거기에 마이크도 빨간색으로 해보면요?” 일러스트레이터와의 대화다. 혁신의 시대에서 여성을 말하려는 지점이 여기서부터다. 여전히 여성이라고 하면 빨갛고, 매혹적인 프레임을 먼저 떠올린다. 메리어트 호텔과 테드가 진행하는 TED 펠로 살롱에 다녀왔다. 이번엔 ‘우먼 인 이노베이션’이라는 주제로 강연이 열렸다. 어떠한 이유로 이 까마득한 도시에 모여 아시아 여성들과 혁신에 대해 이야기한 걸까.왜 인도 벵갈루루인지 모르겠다. 인도는 미지의 세계, 벵갈루루는 더 까마득한 곳이다. 혁신은 이런 미지의 세계에서 이뤄지는 걸까? 메리어트 테드 펠로 살롱이 인도 벵갈루루 메리어트 호텔 화이트필드에서 열렸다. 벵갈루루는 인도를 대표하는 혁신 기술의 허브 도시라 이곳을 정했다고 했다.인천 공항에서 오후 7시 30분 비행기로 출발해 8시간 걸려 인도 뭄바이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6시간을 경유하고 2시간을 더 날아가 벵갈루루에 도착했다. 시차는 한국보다 3시간 30분 늦다. 공항은 그 나라의 첫인상이 결정되는 곳이라 웬만하면 와이파이 정도는 빵빵 터지는데 무료라더니 잡히지도 않는다.“출장을 가야 할 것 같습니다.” “어디로요?” “인도입니다” 대화 종료. 출장이라고 하면 어떤 취지로 어떤 취재가 이뤄져야 하는지 물었어야 했는데 그러지 않았던 건 꼬박 밤을 새우고 마감을 끝낸 다음 날이라 마감 피로를 풀기 위한 편집장의 농담인 줄 알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더 이상 묻지 않은 거다. 테드 펠로 살롱 ‘우먼 인 이노베이션’에 초대한다는 메일 한 통을 받기 전까지는 이게 현실로 닥칠 거라곤 꿈에도 상상 못 했다. 인도, 이노베이션, 인비테이션, 세 단어가 머릿속에서 뒤섞여 싸움박질하는 것 같았다. 내 인생에 인도는 없었다. 내 인생에는 이노베이션이라는 단어도 없다. 현실을 사는 나는 그리 큰 꿈이 없는 사람이기 때문이다.“여자 혼자 어떻게”라는 말을 살면서 처음 들었다. 그때는 “나는 늘 혼자서도 잘해왔는데 뭐” 하며 넘겼다. 만나는 이들마다 그렇게 말하니 없던 공포감이 생겼다. 출발 전까지 스무 번은 더 들은 것 같다. 예상보다 매우 잘 도착했다. 공항에서 와이파이 연결이 안 된 것만 제외하면. ‘우먼 인 이노베이션’ 취재를 위해 일본, 베트남,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중국 아시아 6개국 여성 기자가 모였다. 생면부지의 사람들과 호텔 로비에 모였는데, 우리는 1분도 안 돼 묘한 동지애가 생겼다. 모두가 “여자 혼자 어떻게!”라는 주변 사람들의 걱정을 한 짐 안고 온 거다. 듣지 못한 사람은 홍콩에서 온 남자 기자 단 한 명이었다. 어쨌든 우리는 이곳에 왔다.2013년에 문을 연 벵갈루루 메리어트 호텔 화이트필드는 벵갈루루에 세워진 1호 호텔이다. 인도에는 109개의 호텔이 있는데 벵갈루루는 열세 번째로 생긴 곳이다. 객실 1박 요금이 20만원 정도다(5성급이지만 인도니까). 부킹닷컴으로 이 도시의 최저 숙박료를 검색했더니 1500원이 나온다. 인도는 그런 곳이다. 호텔 안은 와이파이 천국이지만 차로 20여 분 떨어진 어느 지역에 가면 휴대폰은 무용지물이 된다. 처음에는 당황했지만 나중에는 그냥 다 놓게 된다. 역시 이런 곳이다. 이곳이 지금 인도의 실리콘밸리라 불리고, IT 도시라고 하는 거다. 참고로 인도의 물가를 살펴보면 하루 2기가 LTE 사용이 가능하고, 전화는 무제한인 휴대전화 한 달 요금이 299루피(한화 4661원)라고 했다. 벵갈루루 도로는 도로 선도 없고 도로 표지판도 없다. 표지판 대신 도로의 무법자들에게 안전 운전을 알리는 ‘WEAR HELMET AND BE SAFE’라는 문구가 적혀 있다.콘크리트 정글. 호텔 밖은 지하철 공사가 한창이었다. 인도의 실리콘밸리라고 해 나름 크고 웅장한 IT 단지를 떠올렸는데 이제야 지하철 공사를 시작한다. 도시가 발전하는 데 교통수단이 미치는 영향이 꽤 크다. 이 지하철은 2022년 완공 예정이다. 호텔 관계자는 화이트필드가 곧 ‘골든 시티’가 될 거라 기대했다. 이 공사장 부지가 황금의 도시가 된다니만들기만 한다고 되는 게 아닌데 상상이 가지 않는다. 상권도 없는 곳에, 이 지역 사람들은 이 시설을 이용할 여유가 있으려나? 인도 메리어트 임원은 자신이 근무하는 델리를 벵갈루루와 비교했다. “벵갈루루는 사계절 내내 기온이 선선해요. 평균 기온이 23~25℃예요. 그래서인지 이곳 사람들의 성향은 온화한 편이에요. 비즈니스 도시이다 보니 방문하는 외국인이 많고, 그러니 사람들이 적대적으로 대하지 않죠. 델리는 여름과 겨울의 날씨가 극단에 치달아 사람들도 거칠거든요.”“, 남성 매거진 아니에요? 그런데 여성 이슈에 대해 취재한다고요? 신기하네.” 기자였다. 중국판 에서 여성에 대해 이야기한 걸 본 적이 없다고 했다. 우리의 주제에 대해 흥미를 보인 건 준 마키. 일본에서 20년간 프리랜서로 근무한 저널리스트다.그녀는 20년 전 뉴스 에이전시에서 근무했다고 했다. 당시 간부 명단에 여성이 단 한 명도 없다는 게 의아했다고 했다. 더 의아한 건 20년이 지난 지금의 상황이 그때와 별반 차이가 없다는 거라고 했다. “여성 성직자, 여성 주지사, 여성 시장도 나왔어요. 많은 사람들이 불합리한 상황을 변화시키려고 하지만 실질적인 불공평은 해소되지 않죠.” 오래 뿌리박힌 남성 지배 사회 구조 때문이라고 했다. 그녀는 굳이 여성 리더가 많아져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했다. 다만 모두에게 공평하게 기회를 주는 리더가 필요하다고 했다.“초반 3년은 스퍼트를 내 달려야 한다고 해서 정신없어요.” 인도에서 3일 만에 처음으로 한국 사람을 만났다. 전자 상거래 쪽으로 스타트업 기업을 운영한 지 1년째, 벵갈루루에서 사업을 꾸리고 있는 CEO 임인애. 스타트업 기업이 모인다더니 마냥 뜬구름 같은 이야기는 아니었구나, 안도감이 들었다. 한양대학교 수학교육과 3학년에 재학 중인 그녀가 인도를 찾은 건 3년 전이고 그때는 벵갈루루가 아닌 델리였다. 최근 KIB 인디아 1기에 선정돼 벵갈루루에 오게 됐다. 학교에 취업 휴학이 있다는 것도, KIB 인디아를 모집한다는 것도 모두 그녀가 직접 찾고 찾아낸 것들이다. 모르면 그냥 지나칠 기회를 그녀는 그렇게 손에 쥐었다.KIB 인디아 센터에서 이곳까지 오는 데 40분이 걸렸고 택시 요금은 3700원 정도 나왔다고 했다. 그녀가 인도에서 느낀 장점 중 하나가 교통비다. 제일 적게 낸 택시비는 10분 거리에 10루피(한화 약 155원) 정도라고 했다. 그리고 그녀 또한 짐작도 못 하는 게 인도의 교통 체증이다. 인도에 무작정 온 이유는 제3의 나라에서 대안 학교를 설립하겠다는 꿈 때문이었다. 배우지 못해 기회를 갖지 못하는 아이들을 위해 학교를 세우고 싶었고, 그러기 위해 자본이 필요했다. 인도 컨설팅 회사에 다니면서 매일 힌디어를 10문장씩 외웠다. 힌디어로 의사소통이 조금은 가능해졌다. 이곳에서 자신을 지키는 방법을 터득하고 성장하고 있다. 25살의 이 여성은 여기서 혼자 지내고, 심지어 사업을 한다.IT 강국이라 하는 인도, 인도 스타트업 기업의 70%가 이곳 벵갈루루에 모여 있다고 했다. 대다수가 벵갈루루에서 시작한다고 했다. “한국에서 청년 사업가라 할 경우 정말 나이가 청년이어야, 그래서 대개 39살까지만 지원해주잖아요. 인도에서는 청년 사업가라 하면 대기업에서 오랜 시간 근무하고 인도 시장을 많이 아는, 연륜 있는 40~50대가 대부분이에요. 혁신적인 아이디어에 의지하기보다, 시장에서 이미 통한 자신의 경험과 기술을 갖고 시작하는 거예요. 그러니 실패도 적은 편이죠.” 인도 유통 회사에서 3년간 근무하는 동안 여성 기업가를 본 적이 없다는 흥미로운 이야기도 더했다.페기 팡 로와는 17층 스위트룸에서 만났다. 메리어트 인터내셔널 아시아 태평양의 세일즈와 마케팅을 총괄하는 책임자다. 앞선 매체 기자와는 긴 테이블 앞 소파에 나란히 앉아 인터뷰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그녀에게 에너지의 원천을 물었다. “좋아하는 일이 아니면 내 시간을 할애하지 않는 편이에요. 내 에너지가 부족하다고 느낀 적도 거의 없어요. 나에게 영감을 주지 않는 일에는 신경 쓰지 않으니까요.” 1990년대 직장인 생활 백서에나 나올 법한 이야기도 했다. “내가 하는 일도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삶의 일부라고 여기는 거죠.”같이 일하고 싶은 사람에 대해 물었다. 곧 그녀가 업무와 사람을 대하는 방식이기도 할 테니까. “긍정적인 태도, 협력을 잘하는지, 소통이 잘되는지를 봐요. 어떤 분야의 전문가가 되어 있는 건 바라지 않아요. 배우고자 하는 열정이 있고, 자신이 원하는 건 무엇이든 밀어붙이는 추진력이 있어야 해요.” 그리고 자신이 에너지가 넘칠 수밖에 없는 이유는 긍정적인 일에만 집중하기 때문이라고 했다.여성의 권위가 높아지는데 왜 여전히 아시아 여성 리더는 소수인지에 대해서는 “기회가 동등하게 주어졌느냐의 문제죠. 그리고 하고 싶은 게 있으면 손을 들고 자신 있게 나설 수 있어야 해요. 기회는 자신이 만드는 거예요.” 성별 불문하고 대부분의 사람은 자신에게 기회가 오기만을 기다린다. 기다려도 잡지 못하는 경우가 부지기수지만 기다리기만 한다. 여성 리더의 중요성을 물었다. 다른 특별한 이유는 없었다. “조직 안에 여성 지도자가 있으면 자신도 그 위치에 오를 수 있을 거라고 느낄 테니까요. 성취 목표가 분명한 게 중요해요. 기회를 잡을 수 있다는 믿음을 갖고 두려워하지 않을 때, 그게 현실이 되는 거예요. 그게 혁신의 첫걸음이죠.” 그녀는 숲의 규모를 보고 나무를 세우라고 했다. 현실과 이상이 균형을 이뤄야 한다고 덧붙였다. 자신의 장점은 실행에 옮기는 거라는 말과 함께. 직접 해봐야 현실과 동떨어진 목표를 설정하지 않는다는 이유에서였다. “이상은 높은데 실질적으로 실행하지 못할 때가 있잖아요.” 그 간극을 잘 맞춰가야 한다는 이야기도 더했다. “다른 사람들이 당신을 믿고 따를 수 있는 비전을 세워야 해요. 당신과 함께하고 싶고, 당신을 존중하는 것. 그게 바로 내가 생각하는 리더십이에요.” 그리고 우리 자신이 되어야 한다고 했다.테드 펠로우는 세상을 바꿀 아이디어와 전략을 공유하는 프로그램이다. 이번 테드 살롱에는 혁신을 통해 커뮤니티를 변화시키고자 하는 아시아 여성 리더들이 강연자로 나섰다. “리더는 나 자신으로 사는 거예요. 여성성이라는 성별이 짐이 되지 않도록 노력해야죠.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스스로 존재감을 가져야 해요.” 인도 여성 건강 운동가 주바이다 바이의 말이다. 그녀는 개발도상국의 산모들을 위해 처음으로 위생 출산 키트를 만든 인물이다. 본래 직업은 엔지니어였다. 열악한 환경에서 첫아이를 출산하던 중 감염되어 제품의 필요성을 느끼고 출산에 필요한 도구를 찾아 나섰다. 개발도상국의 경우 이미 다른 누군가 출산을 하고 난 피범벅이 된 비닐 시트 위에서 집도하는 경우도 있어서, 차라리 땅바닥에서 아이를 낳는 이들도 있다는 에피소드를 전했다.온몸이 까맣게 그을린 아샤 데 보스는 스리랑카의 해양생물학자. 주먹을 꼭 쥐고 힘껏 말하는 강연자였다. 그녀가 말할 때마다 갈라진 팔 근육에 눈길이 먼저 갔다. 스리랑카에서 대왕고래 보호에 앞장서고 있는 그녀에게 여성 리더로 가는 방법을 물었다. “남자만의 일이라고 생각하고 지레 포기하는 이들이 있는데, 어떤 일이든 성별이 중요한 건 아니에요. 중요한 건 자신의 능력이죠. 고정관념이나 틀에서 벗어나 개인의 인생에 가치를 둬야 해요.” 허스키한 목소리로 힘껏 이야기했다.베트남의 농업 기업가이자 파그린 공동 설립자인 트랑 트란이 마지막 강연자로 나섰다. 추수 후 짚을 태우는 대신 버섯을 재배하자고, 친환경적이고 지속 가능한 방법을 제안했다. 사실 세 명의 강연자가 전 세계적으로 알려진 유명 인사는 아니다. 또 보편적으로 생각하는 여성 리더의 성공담과는 거리가 멀어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인도, 스리랑카, 베트남이라는, 여성들의 활동이 활발하지 않은 나라에서 자신의 길을 만들어간 아시아 여성들이고, 그 경험을 두고 사회에 공헌하려는 데에 혁신적인 인물이라 할 수 있다.공항으로 돌아오는 길에 인상적이었던 건, 내 키만 한 벽에 십자가만 꽂힌 작은 교회가 있고 바로 옆에 신을 모시는 사원이 나란히 있던 마을의 모습. 벵갈루루에서 경험한 혁신 중 하나다. 높낮이 없는 거리에 다름이 공존하는 것.꿈에도 생각한 적 없는 인도를 다녀왔고,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미래를 쟁취해가는 아시아 여성들을 만났다. 그들과 마주하며 생각했다. 혁신은 자신이 원하는 삶을 선택할 수 있을 때 시작되는 게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