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
옛날 TV 화면에서 머리가 벗겨진 남자가 조금 망설이다 이야기를 시작했다.
“지금 그 허화평 증인은 그렇게 생각 안 하실지도 모르겠는데, 많은 사람들이 허화평 증인은 5공의 핵심적인 인물이라고 생각하고 있다는 거를 알고 계시죠?”
“그렇습니다.”
머리숱이 많은 남자가 입을 꼭 다물고 있다가 입을 열었다. 다른 격앙된 목소리가 들렸다.
“보안사의 실세들이, 실세라고 하면 무슨 말인지 모르면 내가 설명해드릴게요. 누구누구가 실세라는 걸.”
입을 꼭 다문 남자는 이번에도 말이 짧았다. “한번 설명해주세요.”
“뭐 3허 씨. 이학봉 씨, 뭐 이런 것이 실세입니다. 알았습니까? (웃음소리) 알았죠?”
“저는 그건 잘 이해가 안 되는 소립니다.”
2018년 9월 16일: 본방송
당시 영상 위로 요즘 녹음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어떻습니까, 마지막 질문 5공의 핵심적인 인물 맞으셨습니까?” HD 화면 속 노인이 된 허화평은 젊은 날 청문회에 불려간 자신을 보다가 대답했다. “내 자신이 뭐, 많은 그 측근들 가운데 가장 중요한 인물이라고는 생각해본 적은 없고. 이건 확실하다고. 5공을 이야기할 때 허화평을 빼놓고는 이야기할 수 없는 거야. 내 그건 자신 있게 이야기할 수 있다.”
첫 장면의 대화는 1988년 열린 제5공화국 언론 통폐합 청문회 장면이었다. 주말 오전의 배경음악처럼
그게 허화평에서 시작하는 건 조금 이상해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허화평이라는 정권 밀착형 인사가 이야기를 시작하는 것이야말로 서울올림픽을 말하기 위해 가장 적합한 방법이었다. 서울올림픽은 권력자부터 소시민까지, 경제부터 문화에 이르는 한국 사회 전 분야에 영향을 미친 사건이었기 때문이다.
이 다큐멘터리의 등장인물을 보면 서울올림픽과 시대가 얼마나 연결되어 있었는지 알 수 있다. 시간순으로 나열한 이 다큐멘터리의 등장인물은 이렇다. 허화평, 김대중, 김영삼, 윤시내(가수), 김동건(KBS 아나운서), 구봉서, 남덕우(당시 총리), 박영수(당시 서울시장), 김택수(당시 대한체육회 회장), 정주영, 송승환(당시 탤런트), 남선현(KBS 기자), 당시 중구청장, 빌리 그레이엄(목사), 허참, 쟈니 윤, 김병기(탤런트), 정한용, 노태우, 이건희, 김승연, 김우중, 김흥기(탤런트), 정수라, 김현(디자이너), 김완구(당시 종합운동장역 역장), 이진희(당시 문화공보부 장관), 김원(건축가), 김석철(건축가), 신구, 김동원(<상계동 올림픽> 감독), 김진홍(철거민), 김을동, 백남준, 황병기, 이철수(컴퓨터 엔지니어), 이주일, 로널드 레이건, 드미트리 고르바초프, 헨리 키신저, 한승주, 김형곤, 김종필, 정미홍(목소리 등장), 이주일, 민해경(가수), 이계진, 김정흠(학자), 이한빈(학자).
사실 여기서 실제로 나와서 자기 이야기를 하는 사람은 적다. 허화평, 정수라, 김현, 김원, 김동원, 김진홍, 이철수가 등장해 자신의 목소리로 시대를 말했다. 나머지는 KBS의 아카이브 혹은 당시 영화에서 발췌한 것이다. 이렇게 자료 화면을 모아 만든 다큐멘터리를 푸티지 다큐멘터리라고 부른다. 그때의 자료 영상을 모아 일련의 흐름을 만드는 방식이다. 굳이 비유하면 연주와 샘플링 컷의 차이일 수도 있고, 기존 다큐멘터리가 록이었다면 이런 다큐멘터리는 힙합이라고 볼 수도 있다.
2008~2018: 잠재적 숙성기
이 작법을 진행하려면 전제 조건이 필요하다. 방대한 자료(아카이브). 자료가 없다면 이런 일은 진행조차 할 수 없다. 그런 면에서 아카이브를 이용한 다큐멘터리 작업은 공영방송의 역할이라고 볼 수도 있다. 공영방송이 아닌 민간단체가 이런 일을 하려면 영상 사용료부터가 굉장히 많이 들기 때문이다.
이 다큐멘터리를 만든 이태웅이 그렇게 대단한 의무감으로 이 일을 진행한 건 아니었다. “다큐멘터리는 스포츠국에서 기본적으로 별로 하고 싶어 하는 사람이 없는 분야예요.” 그는 나와 처음 만났을 때 이렇게 말했다. ‘스포츠는 KBS’라는 슬로건 속의 ‘스포츠’란 월드컵이나 올림픽 등의 대형 이벤트를 말한다. “그러다 보니 이건 제 맘대로 해도 누가 뭐라고 하는 사람이 없더라고요.” 하다 보니 아카이브 영상으로 만든 다큐에 의미가 있는 듯하긴 했지만 대단한 책임감으로 시작하지는 않았다는 뜻이었다. 이 산뜻한 균형 감각은 <88/18>을 비롯한 이태웅의 작업물에서 매우 중요하다.
<88/18>은 이태웅식 푸티지 다큐의 첫 작품이 아니다. 이태웅은 당시에는 이름이 정해지지도 않았던 1988년 기념 다큐멘터리를 취재하려 만나던 초창기에 <태극전사의 탄생>이라는 다큐멘터리를 추천해주었다. ‘태극전사’라는 말이 생긴 1986년 월드컵 국가대표 축구팀의 탄생 과정을 보여주는 다큐멘터리였다. 이것도 당시의 아카이브 영상과 이제는 중년이 된 그때 그 사람들의 인터뷰를 섞는 방식으로 만들었다.
이태웅식 푸티지 다큐는 <천하장사 만만세>로 이어졌다. 한국 현대사를 씨름이라는 렌즈로 바라본 다큐멘터리였다. 매스미디어 시대에 사람들을 즐겁게 할 엔터테인먼트가 필요해져 그중 하나로 씨름이 각광받았는데 시간이 지나며 씨름이 쇠퇴하는 과정을 보여주었다. 이 다큐멘터리에는 이런 교훈이 있었다. 관점에 따라 어떤 것이든 사회를 반영하는 이야기가 될 수 있다. 그러니 스포츠도 사회를 반영한다. 관점과 자료가 있다면 무엇이든 특유의 리듬을 가진 재미있는 이야기가 될 수 있다. 이를테면 이제는 인기가 많이 떨어진 씨름으로도.
56분 54초: 1시간에 담긴 10년
2018년의 <88/18>은 이태웅식 푸티지 다큐의 최신 버전이자 최대작이다. 최대작인 이유는 소재가 올림픽이기 때문이다. 지나고 나면 ‘그게 그렇게까지 큰일이었나’ 싶은 일이 있는데 한국에서 일어난 그 큰일은 단연 서울올림픽이었다. 다큐멘터리 중간에 나오는 문구 중에는 “올림픽은 한국인의 마음에 극적인 자의식을 불러일으켰다”가 있다. 이 말대로였다.
정신적으로뿐만 아니라 실질적으로도 올림픽은 중요했다. 올림픽 메달권 성적을 위해 재벌들이 주요 체육회의 회장이 되었다. 그건 훗날 정경유착이라 불리는 정치권과 경제권의 결합이 이루어진 계기 중 하나이기도 했다. 1987년 민주화 항쟁이 일어날 때도 올림픽은 어떤 역할을 했다. 국제 대회인 올림픽을 개최한다는 사실이 군부가 무력 진압을 할 수 없도록 만드는 제어 장치가 된 것이다(허화평은 이 다큐멘터리에서 군대를 사용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고 말하긴 했다).
동북아시아의 한반도에서 시선을 좀 더 줌아웃시켜도 서울올림픽은 아주 중요한 순간이었다. 거칠게 말하면 냉전은 한국전쟁에서 시작해 서울올림픽에서부터 마무리됐다. 서울올림픽은 동서 진영의 국가가 모두 참가하면서 당시 역대 가장 많은 출전국이 참가한 올림픽이 되었다. 냉전의 종언은 페레스트로이카와 베를린 장벽 붕괴였으나 냉전 붕괴라는 상징적 신호탄은 서울에서 쏘아 올려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88/18>의 메시지적 성과는 그걸 할 수 있는 한 쏠리지 않은 채로 보여주려 노력했다는 점이다. 지금까지 1980년대의 한국은 바라보는 시각에 따라 두 개의 평행 우주 같은 세상이었다. 기존 여당-전통적 엘리트층-주류 언론의 벨트에서 보는 1980년대의 한국은 자랑스럽고 눈부신 경제 발전을 이룬 시기였다. 기존 야당(현 여당)-386 세대(당시 체제 비판적 엘리트층)-진보 언론 벨트에서 본 서울은 민주화의 열망이 탄압된 암울한 시기였다. 둘 중 뭐가 진짜일까. 정답은 둘 다다. 그때의 한국은 경제적으로 발전하는 동시에 정치적으로는 후진적인 일들이 여전히 일어나고 있었다.
“정직하고 정의롭고 언제나 과단성 있는 소신으로 이 나라를 짊어지고 나아갈 우리의 지도자를 우리의 마음으로부터 선택을 했습니다. 자, 우리 모두의 가슴속으로부터 그분에게 힘찬 박수를 보내십시다.” 전두환이 당선될 때 한 김동건의 말이 이 시대의 우스운 면을 보여준다. 동시에 <88/18>의 세계는 아파트 단지가 생기고 마이카 시대가 열려서 한국형 중산층이라는 것이 태어나던 시기였다. 또 동시에 서울올림픽 때문에 ‘가시권 우선 개발’이라는 비인도적 정책에 따라 철거민들이 쫓겨나서 <상계동 올림픽> 같은 다큐멘터리가 나오던 시기이기도 했다. <88/18>은 그때 일어났던 일들을 최대한 양적으로 공평하게 보여준다. 그때 일어났던 여러 가지 일을 리듬에 맞춰 보여준다는 면에서도 <88/18>에는 훌륭한 사료적 가치가 있다.
거기 더해 <88/18> 안에는 당시의 입체적인 상황을 뛰어넘는 압도적인 에너지가 있다. 그 에너지란 젊은 사람들로 이루어진 국가의 생명력이다. 못사는 나라에서 잘사는 나라가 되고픈, 뭐라 표현하기 힘들지만 저화질 화면을 뚫고 2018년의 지금까지도 전해지는 강렬한 기운. ‘더 잘살고 싶다’, ‘더 높은 곳으로 가고 싶다’는 그 욕망의 에너지만큼은 진영과 이념과 상황을 떠나 그 시대 모두에게 가득했다. <88/18>은 당시의 아카이브 영상을 사용한 덕분에 냉동 보관되어 있던 듯한 에너지가 그대로 전달된다. 일견 웃기고 촌스럽지만 놀랍고 신선하기도 하다.
<88/18>에 사용된 레터링. 김기조는 총 32개의 각기 다른 레터링을 썼다. 매번 다른 스타일을 사용하되 색채 사용에서 통일성을 볼 수 있다. 텍스트만 순서대로 훑어도 제작진의 메시지를 읽을 수 있다.
이태웅 유니트: 그래픽, 음악, 구성
KBS의 아카이브 영상을 이용해서 올림픽이라는 이벤트를 렌즈 삼아 1980년대를 압축해서 보여주는 다큐멘터리를 만든다는 건 말이 쉽지 보통 일이 아니었다. “프로그램 목록 자체는 다 본 것 같아요.” 이태웅은 우선 1980년대에 나온 KBS 프로그램의 타이틀을 모두 훑어보면서 <88/18> 제작을 시작했다. “예능, 교양, 보도, 모든 장르의 프로그램 제목을 다 봤어요. 제목을 보면 그중에서 내가 무엇을 쓸지에 대한 감이 오니까요. 우선 제목을 다 보고 이 기획에 적합한 자료를 추리는 데에만 1개월 정도 걸렸어요.”
이태웅은 꾸준한 사람이다. 그의 전작 스포츠 다큐멘터리에서 나오는 일관성만 봐도 그의 꾸준함을 알 수 있다. 이태웅은 1개월 동안 약 800개의 영상물을 추렸다. “영상물이 800개니까 용량만 15테라바이트 정도 되더라고요. 시간으로 치면 1500시간. 그걸 다운로드하는 데에만 일주일 정도 걸렸어요.” 추려낸 영상물은 일일이 다 보았다. “2~3배속으로 틀어두고 계속 봤죠. 보다 보니 당시 시대를 설명하는 키워드가 잡히기 시작했어요. 키워드별로 영상을 분류하기 시작했습니다. ‘올림픽을 보는 외부의 시선’, ‘도시개발’, ‘냉전’, ‘컴퓨터 엔지니어링’, ‘디자인’, ‘중산층’ 등으로요.” 이태웅은 1500시간짜리 영상물을 일일이 다 보고, 한 번 더 추려서 40시간 분량의 주재료를 만들었다. 배추로 치면 땅에서 뽑아 흙을 털고 겉잎을 떼고 일일이 쪼개봐서 가장 실한 속잎만 남겨둔 셈이다. 그 40시간 중에서 다큐멘터리에 사용한 시간은 50분도 되지 않았다.
시선이 있고 재료가 있어도 <88/18>이라는 푸티지 다큐에는 한계가 있었다. 이 거대한 이야기를 다 하기엔 시간이 부족했다. 원래 <88/18>은 평창 동계올림픽 개막에 맞춰 4부작으로 준비하려던 다큐멘터리였다. 그런데 KBS 파업으로 4부작 계획이 취소됐다. 그 외 다른 일이 겹쳐서 4부작이었던 것이 2부작으로, 2부작이던 것이 1부작이 됐다. 올림픽의 정신적, 실질적, 경제적, 사회적, 국제적 의미를 담기에는 너무 짧은 시간이었다.
이태웅은 뼈 같은 메시지만 남기고 다 덜어냈다. 보통 다큐멘터리에 들어가는 내레이션을 없앴다. 영상 중간중간 등장해 당시 시대상의 의미를 설명하는 내레이터형 코멘터도 없앴다. 대신 아카이브 영상에 들어간 사람들과 인터뷰에 응한 사람들이 각자 시대상을 설명하거나 상징했다. 하지만 이걸로는 부족했다.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구체성이 떨어질 수도, 다양한 영상이 붙다 보니 하나로 흐르는 듯한 리듬감이 떨어질 수도 있었다. 이태웅은 본인과 함께한 아티스트들과 함께 이 부족함을 채웠다.
그래픽 디자이너 김기조는 이번 작업에서 30개 정도의 레터링을 담당했다. 폰트는 들어봤는데 레터링은 뭘까? “폰트는 어느 환경에서도 사용할 수 있는 글자 틀이고요, 레터링은 특정한 문장이나 글자에 맞춰서 제가 글자를 그리는 거예요.” 김기조는 이번 작업에서 폰트와 레터링을 둘 다 사용했다. 인물 설명이나 대사 설명에서는 AG 초특태고딕체를, “그 연결을 심화시키는 테크놀로지가 주목받기 시작한다”처럼 화면 전체에 떠서 내레이션 역할을 하는 장면에서는 레터링을 썼다. 모양과 더불어 그가 이번에 쓴 색은 여섯 가지뿐이다. 연파란색, 형광 초록, 형광 핑크, 샛노란색 등. “명도와 채도가 아주 높은 색이나 완전한 흑백만 썼어요. RGB 값으로 치면 0 혹은 255만 쓴 거죠.” 화질이 떨어지는 4:3 영상 위로 씌워진 초고명도 폰트는 그 자체로 하나의 미디어 아트 같은 느낌을 준다.
김기조가 유명해진 계기는 한국어 표어를 비틀었던 일련의 그래픽 결과물이었다. “오늘의 할 일을 내일로 미루자” 같은 것. “국가권력이 주는 메시지라는 게 웃길 때가 있잖아요. 그 메시지가 담긴 옛날 글씨체를 사용하면서 메시지를 조금 비틀면 재미있지 않을까 싶어서 그런 작업을 시작했어요. 작업을 하다 보니 그렇게 권력이 주는 유치한 메시지가 시작된 때가 5공화국 시절이더라고요. 그 시절에 대한 다큐멘터리에 참여하는 건 제 작업물의 기원으로 가는 의미이기도 했어요.”
“저는 아직도 88 서울올림픽 개막식 영상을 몇 번이나 봐요.” 김기조가 말한 올림픽 개막식 영상이 <88/18>의 주제 의식 같기도 했다. “그 개막을 알리는 아나운서의 목소리와 표정이 굉장히 신기해요. 흥분과 긴장을 뛰어넘은 극도의 고조가 있는데 태도 자체는 아주 침착해요. 정말 한반도 반만년 역사상 처음으로 이런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실감이 전해져요.” 그 고조된 고양감은 실제로 <88/18> 전체를 지배하는 감정이다. 김기조는 나름의 방식으로 그 고조감을 표현했다. 아주 높은 채도로, 그 시절이 생각나는 레터링으로.
“BBC에는 라이브러리 뮤직이라는 장르가 있어요.” 음악을 맡은 DJ 소울스케이프 역시 본인의 시선으로 이 시대의 소리를 만들었다. “영화음악 하시는 분들은 영상을 만들다 보면 음악이 영상보다 먼저 나간다는 이야기를 하기도 해요. 다큐멘터리 음악을 만들 때는 음악이 영상을 잡아먹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어요. 라이브러리 뮤직처럼 음악이 영상을 압도하지 않으면서도 장면과 장면을 연결하는 역할을 하기를 바라며 음악을 만들었습니다.”
이건 좀 겸손한 표현이다. DJ 소울스케이프는 경음악이라 치부되던 20세기 후반의 한국 밴드 음악을 소스 삼아 자기만의 음악을 창조했다. 본인의 아카이브라고 할 만한 한국 LP 사운드 소스를 활용해 아주 멋진 음악을 만들었다. 라이브러리 뮤직이 되길 바랐다는 본인의 바람처럼 영상을 타고 넘어오지는 않지만, 귀를 기울인다면 ‘어, 좋잖아’라는 느낌이 확실히 전해지는 음악이다.
이태웅의 기획과 이태웅이 뽑아낸 아카이브와 이태웅의 시선으로 다큐멘터리를 만든다 해도 이태웅 혼자서 이 일을 할 수는 없다. 누군가 옆에서 균형을 맞춰줄 사람이 필요하다. 이태웅과 함께한 사람 중에서도 중요한 사람은 구성을 맡은 작가 민혜경이었다. “저는 건조한 편인데 민혜경 작가는 따뜻한 시선을 가지고 있어요. 그래서 둘의 조합이 좋았던 것 같아요. 서로 보완이 많이 됐어요. 예를 들어 민혜경 작가는 전두환에 대한 비판을 한번 크게 하고 가자는 입장이었어요. 저는 그렇게까지는 하고 싶지 않았고요. 그 중간 지점 정도로 KBS 카메라맨이 1980년의 광주에 가서 KBS 카메라맨이 아닌 척하는 장면을 넣었죠.” 그 뒤로는 지금 보면 블랙 코미디다 싶을 정도로 전두환을 찬양하는 장면이 이어진다. 이런 흐름을 만들기 위해 이태웅과 민혜경은 계속 의견 조절을 반복했다.
“요즘은 스포츠를 보는 게 조금 힘들어요. 스포츠는 승부와 승패의 연속이니까, 그 뒤에서 아쉬워하는 사람을 보는 게 마음이 아파서.” 이 말만 들어도 민혜경 작가가 얼마나 따뜻한 사람인지 알 수 있었다. 그는 LG 트윈스를 좋아하고 어릴 때부터 온 가족이 스포츠를 봤다는 스포츠 애호가다. 하지만 따뜻한 민혜경 작가 역시 이태웅의 입체적인 방법론에 동의했다. “그 시대의 명암을 모두 보여줬다는 사실에 만족해요. 저조차도 그 순간에 내가 있었다면 어떤 판단을 내렸을까 싶은 장면들이 있었어요.” 민혜경의 말대로 명암을 보여준 덕분에 <88/18>은 <조선일보>와 <한겨레>에, <중앙일보>와 <경향신문>에 동시에 실리는 성과를 거뒀다. 민혜경이 말을 이었다. “저는 이게(이태웅의 결과물이) 쌓였기 때문이라고 봐요. 씨름, 축구, 양궁에 이어서요.”
그 말대로다. <88/18>은 이태웅식 작법과 겸업의 노하우가 쌓인 결과물이다. 김기조와 DJ 소울스케이프가 각자의 일을 앞두고 이태웅에게 받은 지시 사항은 이런 식이었다. “‘이런 걸 하려고 합니다’라는 이야기를 길게 나눴어요. 그리고 40시간 정도의 당시 영상을 그냥 보여줬어요.” 이태웅이 추려둔 1차 데이터를 나눠서 본 것만으로도 각 구성원이 각자의 일을 멋지게 해낸 것이다. 그동안 쌓인 결과물과 그만큼 쌓인 신뢰의 결과이기도 하다. 그 꾸준한 노력이 쌓인 덕분에 <88/18>은 놀라운 성과를 거두게 된다.
이태웅은 <88/18>에서 현재의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인물 섭외 외에도 한 가지 장치를 더 넣었다. 한국과 독일을 오가는 사진가 최다함에게 서울의 풍경을 부탁했다. 최다함은 지난여름 서울 곳곳에서 사진을 찍었다. 그의 사진은 대부분의 이미지 소스가 저화질 영상인 다큐멘터리 사이에서 신선한 책갈피 역할을 한다. 최다함은 수락산을 한참 올라가서 찍은 서울의 아파트촌 전경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고 말했다.
다시 2018년 9월 16일 오후 1시 20분:증명된 미래
<88/18> 본방송이 방영된 시간은 일요일 오후 1시 20분이었다. 전통적인 방송 편성론 개념에서 KBS1의 일요일 오후 시간대는 크게 시청률을 기대하지 않는 시간이다. 불리한 이 시간도 이태웅이 골랐다. “회사에서 두 가지 옵션을 줬어요. 다른 하나는 조금 더 많은 사람들이 보는 시간대였는데, 대신 편성된 시간이 적었어요. (일요일 낮으로 하면) 10분 정도를 더 쓸 수 있다고 해서 그 시간을 골랐어요.” 시간대 대신 시간을 고른 셈이다.
DJ 소울스케이프는 <88/18>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장면은 백남준이 나온 장면이었다고 말했다. “거기에 나온 사람들의 이야기 대부분은 앞으로 세계가 어떻게 될지 모르거나 혼란을 느끼는 경우예요. 그런데 백남준 선생만 유일하게 앞으로 세상이 어떻게 될지 정확하게 예측했어요. 이 다큐멘터리를 본 주변의 젊은 친구들도 그 장면이 가장 놀라웠다는 이야기를 많이 했어요.”
“미디어란 네 명이 보나 네 가구가 보나 400만 명이 보나 4억 명이 보나 가격은 마찬가지야. 그 경제성이 무시무시하지 않겠어? 그것이 이제 옵티컬 파이버(광섬유)나 이런 케이블로 말야(통해서 전송되고 유통될 것이다). 미디어 혁명의 진지는 ‘테레비’가 낙하산적인 상의하달로 시작됐는데 미디어 혁명이 케이블화하려면 이것이 전화의 연장이 되는 평면적인 커뮤니케이션 형태가 되어야 하거든. 컴퓨터도 마찬가지고.” 이 부분이 <88/18>에서 백남준이 말한 미래 예측이다.
백남준의 말을 풀어 말하면 이렇다. 광통신 등 정보기술로 인해 정보의 유통 비용이 격감한다. 그에 따라 메시지 전달 방식도 변한다. 텔레비전의 상의하달적, 수직적 메시지 전달 구조는 케이블 시대를 거치며 전화의 연장처럼 평면적인 커뮤니케이션 형태가 된다. 그가 이런 말을 하던 시기에 만들어진 작품이 국립현대미술관에 있는 ‘다다익선’이다. 1003개의 TV로 만든 미디어 아트다. 멀티채널과 멀티플랫폼 시대에 대한 예술적 은유라고 할 수 있다. 놀라운 통찰이다.
<88/18>은 본의 아니게 백남준이 말한 세상의 실제 예가 되었다. 주로 노년층이 보는 방송국의, 노년층이 보는 시간대에, 젊은 사람들이 반응할 법한 세련된 다큐멘터리가 방영됐다. 그런데 이걸 본 몇 안 되는 젊은이들이 트위터를 통해 실시간으로 이 다큐의 정체를 알렸다. 각자의 트위터 채널에 올린 다큐멘터리 감상문이 수백, 수천 회씩 리트윗됐다. 수직형 메시지 전달 시대였다면 금방 사라지고 말았을 콘텐츠가 수평적 메시지 전달 시대에 사용자의 힘으로 다시 떠올랐다. 역으로 SNS에서 화제가 된 덕에 <조선일보>나 <한겨레> 같은 주류 언론까지도 이 다큐멘터리에 지면을 할애했다. 이태웅이 백남준의 예언을 자기 방식으로 증명한 셈이 됐다. <88/18>은 최근 뉴욕 필름 페스티벌 참가가 결정됐다. 요즘 이태웅의 고민은 ‘이 불친절한 다큐멘터리의 영어 자막을 어떻게 만드느냐’다.
2018년 10월: 방송이 끝나고
“자식이 있으면 그렇게 생각하기도 쉽지 않아요.” 언젠가 이태웅이 내게 지나가듯 말했다. 한국이 디스토피아이고 어느 모로 봐도 희망이 없다고 묘사하던 어느 지식인에 대해 이야기할 때였다. 어느 시대에나 공포와 체념의 개념을 만들어 유통시키고 그 무기력한 개념을 강연료나 인세라는 형태로 현금화해서 먹고사는 사람들이 있다. 이태웅은 그런 걸 만들고 싶지는 않다고 했다. “<88/18>을 만든 데에는 이런 생각도 있었어요. ‘그래, 우리(한국 사람들)가 조금 촌스러웠던 적도 있어. 그게 뭐 어때서. 열심히 살아서 지금 잘됐잖아?’”
이야기를 만드는 직업을 갖다 보면 ‘우리 다 망했어’ 같은 주제의 코미디를 만드는 건 별로 어려운 일이 아님을 알게 된다. 코미디의 기본은 놀림이고, 자신을 놀리는 건 늘 먹히는 웃음 문법이기 때문이다. ‘잘해봅시다’ 같은 이야기를 만들기도 어렵지 않다. 희망가에는 근거가 필요 없다. 무작정 잘될 거라고만 하면 된다. 이건 인과가 없다는 점에서 사실상 이야기도 아니다. 자조적 농담에는 희망이 없고, 근거 없는 희망가에는 흥미가 없다. 희망과 근거 없는 이야기는 얼마 가지 못해 소멸하고 만다.
<88/18>이 귀한 이유는 풍자와 연민, 비판과 칭찬이 고른 비율로 들어간 채 보기 좋은 리듬으로 흘러가기 때문이다. ‘우리 이랬네요. 허참, 황당한 일도 많았지만 그래도 이때 참 에너지가 있었군요. 그 에너지도 괜찮지 않나요?’ 같은 느낌으로 흘러가는 이야기라는 말이다. 이태웅은 이 다큐멘터리를 둘러싼 수식어 중 ‘대한민국 80년대의 축약본’이라는 말에 “그런 프로그램이 되길 원했다”고 말했다. 이태웅이 56분으로 축약한 한국의 1980년대에는 여러 웃긴 일이 있다. 부당한 일도 있다. 하지만 그 안에는 화면 밖으로 가져오고 싶은 강렬한 에너지가 있다. 그 에너지를 아직 안 보신 분이 있다면 집에 가는 길에 <88/18>을 한번 보셔도 좋을 듯하다. 유튜브에도 올라와 있다(클릭). 지금은 2018년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