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신은 그렇게 시작된다 | 에스콰이어 코리아 (Esquire Korea)

아이폰에서 갤럭시로 스마트폰을 바꾸고 나서 깨닫게 된, 혁신에 관하여. | 애플,칼럼,아이폰,삼성,갤럭시

꼬박 사흘 동안 후회했다. 온통 낯설었다. 무작정 불편했다. 속으론 하루에도 수십 번씩 “나 돌아갈래”를 외쳤다. 약정의 노예만 아니었다면 진작 돌아가고 말았다. 도대체 왜 갑자기 제 발로 휴대폰 대리점을 찾아가서 생전 써본 적도 없는 낯선 새 스마트폰을 장만한 걸까. 1년 전 일이다. 꼬박 7년 동안이나 써왔던 애플 아이폰에서 난생처음 쓰는 갤럭시 노트로 갈아탔다. 믿음을 바꾸는 개종의 스트레스나 이념을 뒤집는 전향의 압박이 이 정도일까 싶었다. 생각해보면 휴대폰 기종 하나 바꾸는 작은 일일 텐데 말이다. 나흘째 되던 날이었다. 아침에 무심코 새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리기 시작했다. 갤럭시의 안드로이드 OS가 조금씩 이해되기 시작했다. 화면을 열고 닫고 앱을 켜고 끄고 기능을 쓰고 말고 등의 작동 원리가 ‘납득이’처럼 하나씩 납득되기 시작했다. 그때였다. 뇌세포들이 새로운 논리 구조에 따라 재배열되는 찰나의 순간을 느꼈다. 포맷되고 리셋되는 컴퓨터의 기분이 이럴까. 지난 7년 동안 애플 iOS에 최적화돼 있던 두뇌가 어느 날 갑자기 갤럭시 안드로이드 OS에 새롭게 최적화돼버린 그런 느낌이었다. 막상 안드로이드 OS의 유저 인터페이스에 익숙해지자 또다시 신선한 경험을 하게 됐다. 갤럭시 노트를 쓴 지 일주일쯤 지났을 때였다. 지난 며칠 동안 무엇 때문에 그렇게 괴로워했는지 도무지 기억이 나지를 않았다. 그때 나는 왜 그토록 “나 돌아갈래”를 외쳤던 걸까. 그토록 돌아가고자 했던 나는 원래 무엇이었을까.지난 10년 동안 스마트폰이 우리에게 미친 영향력은 우리가 인식하는 것보다 훨씬 광범위하며 근본적이다. 스마트폰 시대를 사는 인류는 사실상 사이보그다. 사이보그는 인간과 기계가 결합된 존재다. 의 여주인공 쿠사나기 모토코를 떠올리면 된다. 인간과 기계가 뒤섞인 채 살아가는 쿠사나기는 끊임없이 정체성의 혼란을 겪는다. 쿠사나기의 사이보그 육체는 여성의 형태를 하고 있지만 실제론 가공할 만한 파괴력을 지닌 살상 무기다. 쿠사나기 모토코는 과연 여성인가, 인간인가, 아니면 여성의 모습을 한 남성인가, 인간의 모습을 한 무기인가. 확실한 건 하나뿐이다. 인간만 기계를 정의하는 게 아니다. 기계도 인간을 정의한다. 스마트폰 시대야말로 기계가 인간을 정의하는 시대다. 지금 우리는 결국 iOS형 인간과 안드로이드 OS형 인간으로 양분된다. 특정 OS를 쓴다는 건 단지 특정 휴대폰 하드웨어를 애용하는 것 이상이다. 애플과 구글이 구축한 세계관과 생태계 안에서 세상을 보고 듣고 이해한다는 의미다. 이때 스마트폰은 우리 두뇌의 연장이다. 스마트폰의 유저 인터페이스는 우리 두뇌가 디지털 정보를 습득하고 연산하는 방식과 직결된다. 이때 기계에 의한 인간의 사고 체계의 재정의가 이뤄진다. 스마트폰의 논리연산에 인간의 두뇌가 병렬화된다는 말이다. 이건 단지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 같은 테크놀로지적인 부분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브랜드 마케팅 차원에서도 이뤄져왔다. 애플은 스티브 잡스라고 하는 전설적인 존재를 앞세워 창의적인 브랜드 이미지를 구축해왔다. 아이폰은 곧 창의성이다. 개인의 정체성과 브랜드의 정체성은 깊게 연관되면 각인 효과가 일어난다. 스스로 크리에이티브한 사람이라고 믿는 예술가는 당연하다는 듯이 아이폰을 쓴다. 창의적이어서 아이폰을 쓰는 것인지 아이폰을 써야 창의적으로 보이기 때문인지를 구분하는 건 무의미하다. 이쯤 되면 스마트폰은 물질적 차원을 넘어 정신적 차원에서까지 우리를 규정한다. 이들은 우리의 라이프스타일을 지배한다. 우리는 스마트폰 사이보그다. 애플 아이폰을 쓰다가 안드로이드 갤럭시를 쓰면서 느꼈던 극심한 분열은 분명 스마트폰 사이보그로서의 정체성 혼란과 맞닿아 있었다. 더 이상 아이폰 유저가 아니라는 건 더 이상 창의적인 사람이 아니게 되는 것만 같았다. 갤럭시 노트를 쓴 지 1년이 넘은 지금은 정반대다. 스스로를 갤럭시형 인간으로 묘사할 때가 종종 있다. 삼성전자는 구글 안드로이드 OS를 기반으로 사용자에게 극한의 편리함을 제공하는 유저 인터페이스를 진화시켜왔다. 아이폰은 직관적이다. 설명이 필요 없다. 솔직히 고성능 스마트폰은 직관만으로는 완전히 작동시키기 어렵다. 갤럭시를 쓰다 보면 거의 모든 기능에 자세한 해설이 작은 팝업 창으로 뜨는 경험을 하게 된다. 처음엔 귀찮지만 쓰다 보면 친절하다. 차츰 본의 아니게 스마트폰의 헤비 유저로 진화하게 된다. 갤럭시 노트 특유의 S펜이 대표적이다. 갤럭시 노트는 S펜을 통해 더 깊은 기능을 이끌어내게 설계됐다. S펜은 신체의 연장으로서 스마트폰과 인간을 보다 촘촘하게 연결해준다. 기계와 인간이 한 몸이 되는 경험이다. 기계가 인간을 진화시키는 경험 말이다.이렇게 아이폰이 창의적이라면 갤럭시는 혁신적이다. 혁신적이라는 이미지는 갤럭시 노트와 결합될 때 특히 강한 각인 효과를 낳는다. 1년 전 갤럭시 노트를 쓰겠다는 개종 내지는 전향을 결심했을 때도 진정 얻고자 했던 것은 혁신성이라는 정체성 그 자체였다. 혁신적이어서 갤럭시 노트를 쓰는 것인지, 갤럭시 노트를 써서 혁신적으로 보이고 싶어 하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창의성과 아이폰의 관계와 마찬가지다. 사이보그한테 기계가 먼저인지 인간이 먼저인지 묻는 건 무의미한 일이다. 1년 전 겪은 스마트폰 개종의 작은 경험은 평소 가졌던 혁신에 대한 인식 자체를 크게 바꿔놓았다. 혁신은 내가 직면한 세상을 바꾸는 일이라고 생각했었다. 혁신은 문제를 해결하는 개선이나 문제의 원인을 제거하는 개혁과는 달랐다. 혁신은 본질적으로 자기 자신부터 바꾸는 작업이다. 정작 한번 관점을 달리하고 나면 세상이 이제까지와는 전혀 다르게 보인다. 변화는 생각처럼 대단한 일도, 어려운 일도, 심각한 일도 아니다. 오히려 되돌아보면 이제까지의 과거를 이해하기가 어렵게 느껴진다. 진정 성공한 혁신은 언제나 이렇게 미래를 선명하게 만들고 과거를 낯설게 만들어버리는 법이다. 이번에 실리콘밸리를 취재할 기회가 있었다. 혁신에 관한 또 하나의 관점을 얻을 수 있었다. 나를 재정의하는 것이 혁신이라면, 더 나아가서 나를 규정하지 않는 것이 더 민첩한 혁신의 태도였다. 실리콘밸리에선 너무나 보편화된 삶의 태도였다. 이노베이션은 더 이상 테크놀로지의 문제가 아니었다. 라이프스타일의 주제였다. 수많은 미래가 수시로 태어났다 사라지는 이런 시대에서 일회성 혁신은 의미가 없다. 지속적인 혁신을 이루려면 함부로 나를 정의 내려서는 안 된다. 수시로 나를 바꾸고 관점을 바꿀 수 있어야만 한다. 미래는 하루에도 수십 번씩 바뀌기 때문이다. 이런 혁신적인 태도를 갖지 못하면 내 안에 갇혀서 변화를 놓치고 변화를 받아들이느라 고통스러워하다가 시기를 놓치게 된다. 이젠 거의 모든 것에 유연하지 않으면 거의 모든 부분에서 전진할 수 없다. 오늘의 나와 내일의 나는 얼마든지 다른 나일 수 있다. 이것이 라이프스타일로서의 혁신이다.가 무엇이냐는 질문을 종종 받는다. 얼마든지 어떤 식으로든 정의할 수 있다. 남성지. 패션지. 라이프스타일 매거진. 정작 스스로 믿고 싶고 그렇게 만들고 싶은 의 본질은 따로 있다. 는 과거에 무엇이었고 지금 무엇인지에 결코 얽매이지 않고 내일 얼마든지 다른 무엇이 될 수 있는 존재이길 바란다. 는 한사코 혁신적인 태도를 잃지 않는 매거진 브랜드이고 싶다. 우스갯소리 같지만, 필요하면 얼마든지 아이폰과도 갤럭시와도 한 몸이 될 수 있었으면 싶다. 그런 극적인 변화에서도 필요 이상의 고통을 느끼지 않고 스스로를 위트 있게 변모시킬 수 있는 무한히 유연한 존재였으면 싶다. 세상 모든 것에 극단적으로 개방된 미디어. 그렇다. 혁신은 의 라이프스타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