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르쉐는 기름 팍팍 태워가면서 타는 맛 아닌가요?” 차라면 페라리부터 람보르기니까지 두루 겪어본, 알 만큼 아는 그가 말했다.
나는 이렇게 말해주었다. “하지만 포르쉐는 전기자동차를 내놓을 거예요. 이미 생산할 준비를 마쳤고요.” 그는 가뜩이나 큰 눈을 더 크게 뜨며 말했다. “정말요? 아니, 포르쉐가 왜요?”
글쎄. 이유를 묻는다면, 시장 상황이 그렇게 움직이고 있다. 예컨대 포르쉐가 가장 공들이는 시장인 미국에서 원활하게 영업하려면 당장 2020년부터 판매하는 차량의 이산화탄소 배출 총량을 지금보다 27%가량 줄여야 한다. 자동차 회사에는 악몽과 같은 시나리오다.
방법은 셋 중 하나다. 시장에서 철수하거나, 어마어마한 페널티를 받아들이거나, 아니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이산화탄소 배출 총량을 줄이거나. 실상 첫 번째와 두 번째 방법은 고려 대상조차 될 수 없다. 차가 배출하는 반환경적 물질을 줄여야 한다는 강제는 전 세계 시장의 공통적인 움직임인 까닭이다.
그러니 남은 건 세 번째 방법뿐. 이를 실현할 방법은 기름을 팍팍 태우는 내연기관의 환경 성능을 획기적으로 끌어올리거나, 반환경적 물질을 거의 또는 아예 배출하지 않는 전기자동차 비중을 늘리는 것이다.
짐작하겠지만 내연기관은 환경 성능에서는 끝을 향해 가고 있다. 방법이 아주 없진 않겠지만 갈수록 막대한 비용이 요구될 터다. 그러니 그의 말처럼 ‘기름을 팍팍 태우며 달려야 제맛인’ 포르쉐조차도 플러그인 하이브리드 자동차(PHEV)나 배터리 전기자동차(BEV)에 관심을 기울일 수밖에 없다.
징조는 일찌감치 있었다. 포르쉐는 2010년 911 GT3 R 하이브리드를 선보였다. 911 GT3 R 경주차에 포뮬러1 경주차에 쓰는 에너지 회수 장치를 얹은 차였다. 3년 뒤에는 리튬 이온 배터리와 전기모터를 장착한 하이브리드 슈퍼카 918 스파이더가 나왔다. 887마력을 내고 배터리 에너지만으로 약 19km를 이동할 수 있었다. 이 차는 3년 동안 918대 한정 생산됐다.
2014년에는 919 하이브리드라는 경주차를 내구 레이스에 출전시켰다. 919 하이브리드는 2015년부터 2017년까지 3년 연속으로 르망 24시간 내구 레이스 우승을 차지했다. 그리고 919 하이브리드가 르망 24시간 첫 우승을 거머쥔 그해, 독일 프랑크푸르트 모터쇼에서는 미션 E라는 콘셉트를 선보였다. 포르쉐 최초의 순수 전기 스포츠카인 이 차는 지난 10월 ‘타이칸(Taycan)’이라는 정식 명칭을 얻었다.
독일 슈투트가르트시 주펜하우젠 구역, 최초의 포르쉐 공장이 있고 911과 718 시리즈를 생산하며, 최근에는 자동차 애호가들의 보고(寶庫) 같은 포르쉐 박물관으로 더 유명해진 장소, 말하자면 포르쉐 브랜드의 메카나 다름없는 이곳에서 지난 10월 초 전 세계 미디어를 대상으로 한 워크숍이 열렸다. 미션 E 콘셉트의 정식 명칭(타이칸) 발표와 동시에 이뤄진 행사였다.
그런데 워크숍 의제가 예사롭지 않았다. ‘How the Taycan will change Porsche as a company.’ 그러니까 ‘타이칸이 포르쉐라는 회사를 어떻게 변화시킬 것인가’다. 새로운 포르쉐 전기 스포츠카의 실체만 낱낱이 밝혀도 충분한 자리 아닌가? 그런데 회사로서 포르쉐의 변화까지 다룬다고? 자못 거창한 의제에 살짝 정신이 아득해졌다.
우선 모두가 궁금해할 제품 얘기부터. 아, 그 전에 미리 고백해야겠다. 나는 양산이 결정된 포르쉐 전기 스포츠카의 실물을 보지 못했다. 워크숍의 호스트가 꺼내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긴 그럴 만도 한 게 타이칸은 아직 한창 개발이 진행 중인 차다. 미션 E 콘셉트와 비교하면 캐비닛처럼 좌우로 여는 방식이던 앞뒤 문이 양산 차에서는 ‘평범하게’ 재래식 문 구조로 바뀌는 등 몇 가지 확정된 변화가 있고 개발 과정에서 추가적으로 몇 가지 세부가 달라질 것이다.
이날 워크숍에서 공개한 몇 가지 확정된 사항도 있다. 차는 파나메라처럼 어른 4명이 탈 수 있는 4인승 스포츠 세단의 속성을 띤다. 718 박스터나 카이맨처럼 앞뒤로 트렁크가 마련되며, 차체 길이와 높이는 파나메라보다 조금 짧다.
스포츠 세단이지만 운전 자세는 911과 비슷하며, 600마력의 출력을 지원하는 리튬 이온 배터리는 모두 객실 바닥에 담긴다. 이로써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점은 우선 타이칸의 무게 배분과 움직임 특성이 미드십 엔진 설계인 718 시리즈에 가까울 것이라는 점이다.
여기에 앞뒤 전기모터로 네 바퀴를 굴리는 4WD 방식을 쓰는 만큼 주행 안정감도 한층 높아질 전망이다. 예리한 조종 성능과 풍성한 안정감. 이는 최근 포르쉐가 추구하는 제품 개발의 주요 특징이기도 하다.
처음 시도하는 전기 파워 트레인의 스포츠카지만 그 성격이 그간 경험해온 포르쉐 스포츠카와 큰 차이 없을 것이란 의미. 누군가는 “또 외계인 납치해서 만들어내겠지” 하며 대수롭지 않게 여길지 모르지만(그만큼 앞선 기술을 선보인다는 의미) 실상 이는 백지 상태에서 새로운 종(種)을 빚어내는 것만큼 어려운 숙제다.
여기서 하나 더 유심히 살펴야 할 부분은 뒷자리 바닥의 형태다. 승객이 발 둘 공간을 마련하기 위해 2열 바닥이 오목하게 파인 형태로 만드는데, 이는 일반적인 전기차로 치면 배터리 팩이 담겨 있어야 할 자리다. 즉 승객의 공간을 확보하기 위해 배터리 팩 일부를 들어냈다는 얘기다.
이와 관련해 자동차 칼럼니스트 나윤석은 “포르쉐 엔지니어들 스스로 도전에 나섰다”고 해석했다. 무게중심을 잡기에 가장 이상적이며 차체 강성에 큰 몫을 차지하는 배터리 일부를 끄집어낸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날 제품 설명을 하는 이들의 입에서는 ‘뼛속까지 포르쉐’라는 표현이 심심찮게 나왔다. 그건 마치 ‘포르쉐다운’ 전기 스포츠카의 등장을 기대해도 좋다는 일종의 공포처럼 들렸다.
충전소 인프라를 확보해야 하는 과제
“혁신적인 자동차는 자동차 그 자체를 뛰어넘었을 때 비로소 혁신일 수 있다.” 포르쉐의 주장이다. 전기차 시장에 뛰어드는 모든 자동차 회사가 추구해야 할 지향점이기도 하다. 배터리 충전의 제약 때문이다. 전기차 충전 인프라가 꾸준히 늘고 있지만 여전히 부족하고 충전에 많은 시간이 걸리는 것도 문제다.
테슬라의 경우 슈퍼차저로 대표되는 고속 충전 설비 네트워크를 직접 구축하는 것으로 이를 극복하려 했다. 그들이 직접 마련한 충전소는 미국에 443곳, 유럽에 353곳 있고 고속 충전기인 슈퍼차저는 7320개가량 있다. 수년간 이를 지켜본 독일 자동차 회사들은 합심해서 고속 충전 네트워크를 구축하기로 했다. BMW, 다임러, 포드, 포르쉐가 속해 있는 폭스바겐 그룹이 투자해 만든 조인트 벤처 아이오니티(IONITY)가 그것이다.
아이오니티 연합은 2019년 말까지 350kW 고속 충전기를 갖춘 충전소를 유럽 주요 거점 400곳에 세운다는 계획이다. 미국에서는 폭스바겐 그룹이 60억 달러를 투자해 만든 일렉트리파이 아메리카가 고속도로와 도심 등에 2019년 여름까지 484곳의 충전소를 세운다.
포르쉐는 이에 더해 타이칸 출시와 함께 유럽의 호텔, 유락 시설 등에 테슬라 슈퍼차저 스테이션과 유사한 데스티네이션 교류 충전기를 2000개가량 마련한다. 전 세계 600여 개 포르쉐 전시장에 350kW 출력의 고속 충전기를 설치하는 것도 계획에 포함하고 있다.
여기에 포르쉐 차징 서비스가 잇따른다. 어떤 결제 수단으로든 세계 어디서나 충전할 수 있게 하는 서비스다. 신용카드 한 장만 있으면 어떤 주유소를 가든 기름을 채울 수 있는 지금의 운전 환경과 다르지 않다. 한발 더 나아가 충전 플러그를 꽂으면 자동으로 차를 인식하고 결제까지 이뤄지는 플러그&차지 방식까지 구상하고 있다.
충전에 소요되는 시간도 획기적으로 줄어든다. 300km 주행이 가능할 정도로 충전하려면 현재 기준 3.6kW 완속 충전기는 18시간, 50kW 출력의 급속 충전기로는 1시간이 걸린다. 하지만 출력을 150kW까지 높이면 휴게소에 머무는 20분 안에 문제가 해결된다. 350kW 출력의 초고속 충전기라면 주유소에서 기름을 채우는 시간과 큰 차이 없는 9분 정도에 불과하다. 계획대로라면 충전 시설이나 충전 시간과 관련한 불편은 거의 사라진다.
정지 상태에서 시속 100km까지 가속하는 데 3.5초 미만, 한 번 충전으로 주행 가능 거리 500km 이상, 100km 주행에 필요한 전력을 4분 만에 충전할 수 있는 800V 시스템 등을 목표로 삼은 타이칸이 비로소 혁신적인 자동차로 우뚝 설 수 있게 된다는 의미다. 현실에 부합하는 혁신은 거기서 그치지 않는다.
포르쉐는 이날 ‘포르쉐 프로덕션 4.0’이라는 새로운 대량생산 시스템을 함께 소개했다. 4차 산업혁명에 빗대어 지은 듯한 이 명칭은, 말하자면 새로운 전기자동차 시대에 대응하는 포르쉐라는 회사의 큰 그림 중 일부라 할 수 있다. 주펜하우젠 본사 부지에 새롭게 마련한 타이칸 생산 공장은 크게 모듈 제작, 도장 공장, 차체 공장, 조립 및 자재 물류 공간으로 구성된다.
이 중 핵심은 조립 및 자재 물류 공간으로 쓰는 4층이다. 미리 제작된 모듈과 도장을 마친 차체가 이곳으로 옮겨져 비로소 자동차 형태로 조립되는데, 전통적인 자동차 공장에 으레 있는 컨베이어벨트 생산 라인은 자취를 감췄다. 대신 오토메이티드 가이디드 비히클(AGV)이라는 자율 주행 로봇이 맨바닥에 그어진 라인을 따라 움직인다.
차체를 얹은 AGV는 작업 내용에 맞춰 작업대의 높이, 움직이는 속도, 이동해야 할 장소 등을 알아서 조정한다. 컨베이어벨트로 대변되는 기존 생산 라인이 하드웨어 라인이라면 포르쉐 프로덕션 4.0의 AGV는 소프트웨어 라인이라고 할 수 있다. 차체를 싣고 다니는 로봇이 곧 생산 라인이기 때문에 소위 혼류 생산으로 부르는 복수 차종의 동시다발적인 조립도 가능해진다.
당장은 타이칸 생산만 고려하고 있지만 다른 공장에서 기존 방식으로 조립하고 있는 911과 718 시리즈의 혼류 생산도 가능하다는 것이 포르쉐의 설명이다. AGV 기반의 유연한 생산은 주요 부품을 패키지로 묶은 모듈화와 함께일 때 효과가 극대화된다. 모듈화는 레고 블록 조립과 흡사하다. 정해진 위치에 정해진 모듈을 툭툭 꽂아 넣으면 그만이다.
그런 점에서 전기차는 내연기관 자동차에 비해 부품 수가 획기적으로 줄어 모듈화에 유리하다. 이는 최종 생산 단계인 제조사 공장뿐 아니라 부품을 공급하는 제2, 제3의 납품업체의 생산과 경영 효율까지 이어진다. 공급해야 할 부품(모듈) 물량이 일찌감치 결정되기 때문이다.
새로운 전기 이동성에 대한 구체적인 계획
물론 새로운 미래가 100% 낙관적일 수는 없다. 산업 형태가 송두리째 바뀌는 4차 산업혁명의 미래 역시 고용 불안이라는 그늘을 물리치기 어렵다. 자동차 산업도 불안한 미래의 한복판에 있다. 전기차는 부품 수가 적고 조립 공정이 단순하다. 지능화로봇화된 생산 방식은 공장 노동자들의 대량 실직 사태로 이어지기 마련이다.
두려움은 생산직 근로자에만 머물지 않는다. 고용이 줄면 자동차 제조사와 지역사회의 연계 고리도 약해진다. 사회적 지지를 얻지 못한 기업은 산업 내에서의 영향력도 성큼 줄어들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이번에 포르쉐는 타이칸 양산 발표와 함께 ‘60억 유로 투자, 1200명 신규 채용’을 공식화했다. ‘우리의 일자리는 사라지지 않습니다. 아무 걱정하지 마세요’라는 메시지를 분명히 한 것이다.
워크숍에서 만난 인사와 사회 기여 담당 임원 안드레아스 하프너는 ‘신규 채용 인력에 전기차 플랫폼에 적합한 직무 수행을 위한 트레이닝 프로그램을 준비 중’이라고 밝혔다. 지역사회와 한 가족처럼 움직이며 자동차 산업 구조의 대변혁에 대응한다는 의미다.
포르쉐는 스포츠카 브랜드이기에 앞서 시장을 선도하는 프리미엄 브랜드다. 그리고 ‘선도’한다는 것에는 성능, 기술뿐 아니라 몸담은 생태계의 미래를 이끌어간다는 의미까지 포함돼야 마땅하다. ‘타이칸은 포르쉐를 어떻게 변화시킬 것인가’라는 의제를 내건 미디어 워크숍에서 그걸 보여주었다.
새로운 전기 이동성 시대에 대비한 밑그림은 예상보다 깊고 넓었다. 기대되느냐고? 타이칸이라는 성능부터 스포츠카 브랜드 포르쉐가 그려갈 새로운 생태계의 모습까지, 의심할 여지없가없다. 아마도 ‘포르쉐는 기름을 팍팍 태워가며 달리는 게 제맛’이라던 그 역시 마찬가지일 거다. 한껏 기대감을 불어넣은 타이칸은 2019년부터 생산에 들어간다. 2020년이면 한국 도로에서도 만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