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수연, 골프 이후의 삶 | 에스콰이어 코리아 (Esquire Korea)

프로 골퍼 인생 22년, 강수연은 이제 다른 필드에 선다. | 인터뷰,스포츠,운동,골프,선수

지난 10월 초 제19회 하이트진로 챔피언십에서 은퇴식을 가졌습니다. 아직 실감은 나지 않죠? 네. 아직은 늘 그랬듯 올해 시즌 끝나고 겨울을 맞이해서 휴식기에 들어선 기분이에요. 아마 내년 3월쯤 새 시즌이 시작할 때, 저를 제외한 다른 선수들이 시합에 나가는 모습을 보면 실감이 나지 않을까요? 프로 골퍼 커리어를 쌓기 시작할 때 은퇴 시기를 정해놓은 건 아닐 텐데요. 그렇죠. 20대 때는 서른 살쯤 결혼하겠다 생각했지만 때가 지났고요, 마흔 살 되기 전에 은퇴하겠지 싶었지만 역시 마음대로 되지 않았어요. 제가 진짜 골프를 즐기기 시작한 게 30대 중반이었어요. 올해 초까지도 은퇴 계획은 없었는데, 상반기가 끝나갈 무렵 문득 회의를 느꼈어요. 골프 선수로 활동하면서 더 이상 행복하지 않다면 이제 내려놓을 때가 왔다고 생각했죠. 은퇴식을 치르던 날 아침, 기분이 어땠을까 궁금합니다. 시합을 워낙 많이 치르다 보니 떨리는 날이 많지 않아요. 우승이냐 아니냐를 다툴 때만 긴장되죠. 한데 선수로서 마지막 시합의 마지막 날을 준비하다 보니까 떨리더라고요. 최종 홀이 다가올수록 현역 선수로 필드를 밟을 수 있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생각에 울컥울컥 감정이 북받쳐 오르기도 했어요. 지금도 눈가가 촉촉해졌어요. 처음으로 골프 클럽을 잡은 순간이 기억나나요?초등학교 5학년 때 처음으로 골프를 시작했어요. 아버지가 유도를 하셔서 딸도 운동을 시키고 싶어 하셨어요. 원래 저는 스피드스케이팅을 하고 있었는데, 우연히 아버지를 따라 골프장에 놀러 갔다가 동석하신 프로님이 재능이 보인다고 골프를 권한 게 시작이었죠. 그때는 그저 연습장 가서 시키는 대로 골프 치고, 사람들하고 어울려서 놀기도 해서 재미있었어요. 나중에 정식 선수가 돼서 시합에 나가고 이런저런 일을 겪으면서 진지하게 받아들이게 됐죠. 성적에 따라 일희일비를 반복했어요. 투어를 다니기 시작한 지 22년, 골프를 벌써 31년 했어요. 그 긴 시간 동안 필드 위에서 이거 하나는 제대로 배웠다 싶은 건 무엇일까요? 자신을 다스리는 법, 나와 싸우는 법을 배웠어요. 골프는 아마추어든 프로든 자신과의 싸움에서 질 때가 많아요. 그리고 지치고 힘들어도 즐길 수 있는 법을 배웠죠. 필드 밖 강수연과 클럽을 든 골퍼 강수연은 차이가 있나요?저는 공과 사가 확실히 나뉘어요. 우스갯소리로 남자 친구와 다투면 일상에서도 감정적으로 힘들잖아요. 저는 필드에 서면 일상의 감정을 전혀 떠올리지 않아요. 진짜 골프에만 집중해서, 필드에서 내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만 생각해요. 지금까지 474개의 대회에 참여했더라고요. 그중 잊을 수 없는 순간이 있나요?그건 프로로 전향한 이후의 기록이니까 아마추어 대회까지 합치면 더 많아요. 최고의 순간이라고 하면 역시 미국 LPGA 투어에서 우승했을 때죠. 한국에서 좋은 성적을 유지하다 미국으로 진출해서 5년 만에 우승을 했어요. 매스컴도 그렇고 다들 ‘이제 강수연 골프 인생은 끝났다’는 말까지 할 때였어요. 그 어려움 끝에 얻은 값진 우승이었죠. 힘든 기억도 역시 그 시기인가요? 아니요. 은퇴하는 순간이 가장 힘들었어요. 골프 선수로 활동하면서 겪은 어려움은 대체로 비슷해요. 한데 은퇴는 저도 처음 하는 경험이니까요. 필드가 더 이상 나의 무대가 아니다, 31년 동안 서왔던 자리에 다시 설 수 없다는 생각에 마음이 무거웠어요. 눈물도 흘리지 않고 행복하게 끝맺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막상 그 순간이 찾아오니까 아니더라고요. 만약 시간을 되돌린다면 다시 해보고 싶은 경기가 있나요?골프는 매 시합마다 우승이 아니면 아무것도 남지 않아요. 금, 은, 동메달이 있는 것도 아니고요. 그래서 2등을 했던 모든 시합은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달려보고 싶어요. 골프에서 2등은 아무 의미가 없거든요. 한국, 미국, 일본의 프로 리그에서 활동했는데요, 현지 적응부터 만만찮은 과제였을 거 같아요.처음 미국에 갔을 때 무척 자유롭다고 느꼈어요. 한국은 매스컴, 스폰서, 협회 등 골프 외에 선수가 신경 써야 할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에요. 한데 미국은 제 자신을 최우선시하고 골프만 생각할 수 있어서 오히려 좋았어요. 그 후 10년을 미국에서 지내다 일본으로 갔는데, 거긴 크고 작은 제약이 많더라고요. 처음에는 답답하다 싶었는데 정해진 틀만 지키면 어떤 터치도 없어서 곧 편해졌어요. 외국 생활을 오래 하다 보니 가끔 한국 경기에 초청받아서 와보면 예전과 분위기가 많이 달라졌더라고요. 해외 진출을 꿈꾸는 후배 골퍼가 많을 텐데요, 주로 어떤 조언을 해주나요?미국은 실제로 거리가 굉장히 먼 타지여서 육체적으로 힘든 것은 물론이고 정신적으로도 향수병처럼 꼭 어려움이 찾아와요. 필드 위에서 화를 내도 누구 하나 뭐라고 하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자유롭지만 그야말로 혼자만의 싸움이에요.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하고 가야 해요. 집과 친구들이 그립고 문화도 전혀 다르고요. 일본은 물리적인 거리가 가까워서 마음의 부담이 적었고요.골프를 30대 중반부터 즐기게 됐다고 했는데, 슬럼프가 찾아온 시기와 겹치는 것 같아요. 미국에서 5년 만에 우승하고 몸 컨디션이 무척 좋지 않았어요. 목, 허리 디스크가 심해졌죠. 시합을 하지 않아야 하는 상황인데 조금만 나아졌다 싶으면 또 시합을 나가니까 성적은 떨어지고 슬럼프가 왔어요. 그 전에도 우승을 하지 않았을 뿐 아예 성적이 나빴던 것은 아니에요. 주변에서 계속 부정적인 평이 들려오니까 우울함도 커졌어요. 이 상태를 지속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슬럼프를 끝낼 어떤 계기가 있었나요?스스로 전환점이 필요하다고 느꼈어요. 20대 시절의 컨디션으로 돌아갈 수 없고 지금은 한국에서 뛰어난 성적을 내던 강수연이 아니라고, 제 위치를 받아들인 거죠. 밑바닥부터 다시 시작해서 현재를 즐길 수 있어야 예전의 위치까지 오르진 못해도 우승과 가까워질 수 있다고 생각을 바꿨어요. 하루 이틀 만에 일어난 변화는 아니고요, 끊임없이 반복적으로 생각하니까 내려놓을 수 있더라고요. 과정은 힘들었지만 그 짐을 내려놓고 나니까 마음이 정말 편했어요.달라진 강수연은 그때부터 골프가 즐거웠나요?예전에는 골프장 가는 동안 주변 풍경이 보이지 않았어요. 필드 위에서도 오로지 눈앞의 공만 보이고, 그다음에 어떻게 칠지만 생각했죠. 한데 마음가짐을 바꾼 이후로 골프장 풍경이 얼마나 멋진지, 공기가 맑으니 놀러 온 거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싶으면서 여유가 생겼어요. 그래서 요즘 후배들이 힘에 겨워 20대 후반에서 30대 초반에 많이 은퇴하는 걸 보면 안타까워요. 주위의 성화에 못 이겨서 힘든 상황을 빨리 벗어나고 싶은 것 같아요. 자신을 내려놓으면 필드 위에 더 오래 설 수 있어요. 그렇다면 은퇴를 하니 보이는 것, 오히려 좋은 점도 있을까요? 일 년 내내 스케줄을 짜서 시합을 다니다 보니 손이 부어서 감이 떨어질까 싶어 짠 것도 먹지 못하고, 8시간의 수면 시간을 지키기 위해서 잠들고 일어나는 시간도 경기마다 달랐어요. 스키도 워낙 좋아하는데 부상을 입을까 봐 제대로 즐기지 못했거든요. 이제 마음껏 자고 여행도 다니면서 새로운 즐거움을 찾고 싶어요. 이제 마음 놓고 부모님과 골프를 칠 수 있는 때가 왔네요. 시합 외에 골프장에 가는 것이 너무 싫어서 한 번도 함께 필드에 서본 적이 없어요. 사실 제가 이렇게 오랜 기간 선수 생활이 가능했던 건 부모님의 도움이 컸기 때문이에요. 아버지도 묵묵히 응원해주시고, 어머니는 제가 집에 머무는 동안 골프 외에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되도록 다 도와주셨고요. 힘들 때마다 가장 큰 힘이 되어준 것도 어머니예요. 앞으로 지도자의 길을 고려하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네. 리베라 컨트리클럽 골프 아카데미를 운영하고 있어요. 선수가 무엇을 원하는지 잘 아니까 적절한 타이밍에 필요한 조언을 해줄 수 있을 거예요. 그리고 강습할 때는 엄하지만 골프장을 벗어나면 함께 편하게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선생님이 되고 싶어요. 더 오랫동안 즐겁게 골프 선수로 활동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