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 연대와 우주의 중력 | 에스콰이어 코리아 (Esquire Korea)

연대의 우주와 생의 중력, 알폰소 쿠아론의 '로마'는 영화 역사에서 두고두고 회자될 완전한 시네마다. | 영화,로마,멕시코,넷플릭스,Roma

정사각형 블록이 질서 정연한 패턴으로 이어진 바닥을 가만히 비추는 흑백 영상 너머로 새가 지저귀는 소리가 들린다. 그리고 발자국 소리와 무언가를 끄는 듯한 소리가 들리더니 잠시 후 파도 치는 듯한 소리와 함께 화면 위로 물이 밀려온다. 마치 해변의 파도가 밀려오고 밀려가듯이 흑백 영상 안으로 들이친 물은 흰 거품을 품어내며 흩어지고 나면 또다시 밀려온다. 좀처럼 미동이 없던 이미지가 움직이는 영상으로 변한다. 그리고 물에 젖은 바닥에 빛이 반사된다. 사각의 창을 내듯 하늘이 비친다. 이윽고 멀리서 비행기 날아가는 소리가 들려오더니 바닥에 반사된 하늘로 비행기가 지나간다. 마치 바닥에 설치된 스크린에 투사된 영상을 보는 것처럼 영화적인 순간이 무심하게 흘러간다. 그리고 거듭 밀려오고 밀려가는 물살 위로 흩어졌다 다시 제 모양을 찾는 사각형의 하늘이 맺힌 바닥의 풍경 위로 떠오르는 제목 ‘ROMA’. 그 뒤로 바닥을 비추던 카메라가 수직으로 살며시 고개를 들 듯 움직이면 호스를 정리하는 한 여자의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어딘가에서 사람들의 말소리도 들려온다. 비로소 영화 가 시작된다.의 오프닝 타이틀 시퀀스는 ‘시네마(cinema)’라는 단어로 명명된 최초의 영화를 닮았다. ‘움직이다’라는 뜻의 그리스어 ‘kinema’에서 유래한 ‘시네마’는 최초의 영사 장치를 발명하며 영화라는 개념을 대중에게 소개한 뤼미에르 형제의 영사기 시네마토그래프에서 빌려온 말이다. 뤼미에르 형제의 영사기로 촬영한 최초의 영화는 달리는 기차를 촬영한 3분짜리 흑백 영상 이었다. 1985년에 공개한 이 영상은 오늘날 우리가 아는 영화의 기원이다. 이는 곧 최초의 영화라는 것이 움직이는 이미지를 영상으로 기록하는 것이며, 영화를 보는 최초의 관객이 가진 감흥이란 움직이는 기록을 구경하는 흥미였던 것이다. 그러니까 시네마란 가장 근원적인 영화적 체험, 움직이는 것을 지켜보는 것 자체가 경이적이던 시대성에서 출발하는 언어이자 그 이후의 영화가 유전자적으로 품을 수밖에 없는 근원적인 체험의 뿌리를 환기시키는 이름인 것이다. 시네마로부터 진화한 오늘날의 시네마. 는 바로 그 시네마의 뿌리에서 시작된, 가장 근본적인 체험으로부터 출발하는 영화인 것이다.사실 이후로 5년 만에 공개될 알폰소 쿠아론의 신작 제목이 ‘로마’라는 것을 알았을 때 이탈리아의 로마를 지칭하는 줄 알았다. 하지만 알폰소 쿠아론의 는 멕시코시티의 번화가 로마를 지칭하는 것이라 했다. 멕시코 태생의 감독이 멕시코 배경의 영화를 찍는다는 건 중력에 이끌리듯 자연스러워 보인다.그런데 는 단순히 멕시코를 배경에 둔, 멕시코 출신 감독의 영화인 것만은 아니다. 는 멕시코에서 보낸 유년 시절의 경험과 기억을 온전히 영화적으로 재현하고 스스로 체험하는, 알폰소 쿠아론의 사적인 영화이면서도 그의 사적인 경험이 바탕이 돼 공적인 세계로 창을 여는, 어떤 인물과 어떤 시대와 어떤 지역에 대한 기록적 환기에 가깝다.는 멕시코시티의 중산층 백인 가정에서 가정부로 일하는 클레오(얄리차 아파리시오)를 중심에 둔 영화다. 클레오는 가족과 함께 그 집에 상주하며 빨래와 청소, 요리 등 온갖 집안일을 해내면서 네 아이를 깨우고 재우는 등 엄마 노릇을 대신한다. 한 가정에 고용된 처지이지만 가족 구성원처럼 느껴질 정도로 친밀한 정을 공유하고, 가족과 다름없는 존재로 인식된다. 는 알폰소 쿠아론에게도 그런 존재로 기억되는 한 여성에 대한 환기에서 출발한 작품이다. 영화의 엔드 크레디트가 떠오르기 전에 등장하는 ‘리보를 위하여(Para Libo)’라는 헌정사는 알폰소 쿠아론이 생후 9개월이 될 무렵 그의 가정에서 일을 시작했다는 멕시코 원주민 출신인 믹스텍족 여성 리보 로드리게즈에게 바치는 것이다. 알폰소 쿠아론은 유년 시절에 그녀가 춥고 배고팠던 유년 시절의 이야기를 들려줬던 것을 기억했다. 하지만 당시 어린 소년이었던 그는 그 이야기를 일종의 모험담이라 여겼다고 한다. 뒤늦게 사회적인 자각이 생길 무렵 알폰소 쿠아론은 그녀의 역할과 존재를 다시 생각했다. 단순히 자신에게 스무디를 가져다주고 빨래를 대신 해주기 위해 존재하는 것만이 그녀의 삶이 아니었음을 깨달았다.“나는 당대의 시대성이 만들어낸 거품을 누리고 사는 백인 중산층의 멕시코 아이였다. 부모님은 우리보다 특혜를 받지 못하는 사람들을 잘 대해야 한다고 말했지만 그 시절의 나는 그런 의식을 갖기에는 너무 어렸다. 는 당시의 사회적 역학, 계급적 역학, 인종적 역학에 대해 뒤늦게 죄책감을 느끼는 나 자신의 감정이 반영된 작품이다.” 알폰소 쿠아론은 각본을 쓰면서 리보 로드리게즈의 삶을 되짚고 조사해나가기 시작했다. 그럼으로써 그녀의 생에 본래 자리하고 있었던 그녀 자신의 삶과 그녀의 삶에 영향을 주고받는 주변인들과의 관계를 보다 면밀히 이해하게 됐다.알폰소 쿠아론은 유년 시절 비행사나 우주 비행사가 되는 것이 꿈이었다. 그래서 리보 로드리게즈에게 자신이 커서 비행사가 되면 여행을 데려가겠다고 약속했다고 한다. 리보 로드리게즈는 종종 쿠아론 형제들을 극장에 데려갔다고 한다. 그리고 알폰소 쿠아론은 어린 나이였지만 영화에 매혹됐다. 그레고리 펙이 주연을 맡은 나 존 스터지스가 연출한 SF 스릴러 같은 작품에 흥미를 느꼈다. 실제로 두 작품은 에 직간접적으로 등장하기도 한다. 심지어 속의 한 장면은 영화의 흐름과 무관하게 인서트 컷 방식으로 등장하기도 하는데, 해당 장면은 알폰소 쿠아론의 를 연상시키는 동시에 해당 장면에서 클로즈업된 그레고리 펙의 얼굴이 조지 클루니와 유사해 보이면서 더더욱 기이한 위트로 다가온다. 이는 알폰소 쿠아론을 영화라는 우주로 이끈 중력이 그 당시의 경험이었다는 것을 전하기 위한 메시지처럼 읽힌다. 자신을 영화로 인도해준 여성에게 보내는 감사이자 자신의 삶에 큰 영향을 끼친 영화에 대한 경의를 담아낸 장면처럼 보인다.결과적으로 는 알폰소 쿠아론의 지극히 사적인 노스탤지어를 위해 탄생한 영화이면서도 관객에게는 현존하는 모든 영화를 통틀어 가장 시네마틱한 체험을 안겨주는 작품 중 하나로 기억될 것이다. 는 알폰소 쿠아론의 영화 대부분에서 격정과 심연의 이미지를 완성해낸 촬영감독 엠마뉴엘 루베즈키의 손을 빌리지 않고 알폰소 쿠아론이 직접 촬영까지 해낸 첫 번째 작품이다. 본래 루베즈키가 촬영할 계획이었지만 일정상 불가피해진 상황에서 루베즈키를 대체할 만한 멕시코 출신의 촬영감독을 구할 길이 없어서 직접 카메라를 잡았다. 알폰소 쿠아론은 의 촬영 스태프를 완전히 멕시코 사람으로 채워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에서 카메라의 움직임은 대부분 좌우로 고개를 돌리듯 패닝하거나 인물을 좇아 수평으로 이동하는 트래킹 숏으로 이어진다. 단 한 번도 시선이 흔들리지 않는다. 좌우로 이동할 때도 수평 구도에서 벗어나는 일이 없이 정갈하고 결벽하다. 반대로 오프닝 시퀀스를 비롯해 고개를 들듯이 카메라를 수직으로 들어 올리는 틸트 샷이 네 차례 등장하는데 마찬가지로 일말의 흔들림도 없다. 고요한 시선으로 명확하게 바라본다. 그럼으로써 관객을 클레오의 주변부에 자리한 유령 같은 존재로 만든다. 이는 알폰소 쿠아론의 시점을 대변한 결과물처럼 보인다. 그에게 클레오의 영화를 만들어나가는 과정이란 역설적으로 자신의 유년 시절을 추측하고 되돌아보는 또 다른 영화적 경험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는 지금까지 자신이 만들어온 영화와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촬영해야 한다고 생각했다.알폰소 쿠아론이 를 촬영할 때 세운 원칙은 세 가지였다. 리보 로드리게즈에게 집중된 이야기여야 할 것. 알폰소 쿠아론 자신의 기억에서 추출된 결과물일 것. 마지막으로 흑백으로 촬영할 것. 리보 로드리게즈에게 집중된 이야기란 그녀의 화신과 같은 클레오를 중심에 둔 이야기라는 의미일 것이다. 알폰소 쿠아론은 클레오 역을 맡을 배우를 멕시코 전역에서 찾아 나섰다. 그리고 알폰소 쿠아론 자신의 기억에서 추출된 결과물이라는 건 그 누군가와 상의해서 합리적인 이야기를 만들어나가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자기 자신만의 이야기로써 창작하고 보존하는 작업을 해나가겠다는 의미였을 것이다. 실제로 알폰소 쿠아론은 언제나 영화의 방향성을 논의했던 영화적 동지인 기예르모 델 토로나 알레한드로 이냐리투와 에 관해서는 일절 상의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리고 현장에서도 영화의 전체 각본을 알고 있는 이는 유일하게 알폰소 쿠아론뿐이었다. 알폰소 쿠아론은 매일 배우와 스태프에게 당일 촬영 분량에 해당하는 대본을 전달했고, 보기 드물게 영화의 서사순으로 촬영을 진행했다. 그럼으로써 가 예측할 수 없는 인생의 나날을 맞이하듯 촬영하는, 삶과 밀착된 경험으로써 완성되는 영화이길 바랐던 것이다.알폰소 쿠아론이 를 흑백영화로 만들고자 했던 건 가 흐릿해진 과거를 돌아보는 경험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낡은 기억을 길어 올리는 영화가 되길 바라지 않았다. 현재의 선명한 관점을 통해 과거로 침투하는 영화를 만들고 싶었다. 그래서 입자가 눈에 띄는 셀룰로이드 필름 카메라가 아니라 선명한 감도를 자랑하는 알렉사의 디지털카메라로 촬영하는 길을 선택했다. 이런 방식은 결과적으로 가 알폰소 쿠아론의 기억을 재현하는 사적인 영역에서 벗어나 어느 시대의 공기를 목격하는 체험의 영역으로 확장하는 데 조력한 거 같다.는 1970년과 1971년 사이의 멕시코시티를 배경에 두고 있으므로 필연적으로 당대 멕시코에서 치열하게 전개된 민주화 항쟁의 분위기가 영화에서도 극명하게 드러날 수밖에 없다.민주화를 외치며 반정부 시위에 나선 수많은 인파 중 120여 명에 달하는 이들이 과격한 우익 단체에 살해당한 ‘성체 축일 대학살’의 현장 한복판을 클레오의 눈으로 목격하는 것이 그렇다. 이는 가 알폰소 쿠아론이라는 개인의 경험을 프리즘 삼아 당시의 시대상을 스펙트럼처럼 펼쳐 보이고 전 세계적인 목격을 권고하는, 알폰소 쿠아론이라는 감독의 야심이 깃든 결과물임을 깨닫게 만든다.“는 내가 50년 전쯤에 경험한 사건들에 대한 기억을 담아내려는 시도다. 이는 시대와 반비례하게 역행한 멕시코 사회계층의 현실과 민족적 역사를 탐험한 결과이자 나를 사랑으로 키워준 여성들에 관한 친밀한 초상화이기도 하다.” 는 중산층 가정의 가정부로 일하는 클레오를 통해 낯선 가정과 낯선 사회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남성에게서 버림받은 두 여성의 연대와 남겨진 가족들의 유대를 그리는 작품이기도 하다.실제로 열 살 무렵 아버지가 가족을 떠나는 경험을 한 알폰소 쿠아론은 유년 시절의 아픔을 녹인 이 작품을 통해 되레 그 시절의 상처를 극복하는 동시에 그 시절 자신을 돌봐준 이들의 존재감을 명징하게 깨달았다고 한다. 그럼으로써 상실감을 서로 감싸 안고 연대를 통해 극복해나가는 존재들을 위로하는 동시에 위로받을 수 있는 극적인 순간을 연출해냈다. 파도를 헤치고 아이를 구한 뒤 클레오와 모든 가족이 해변에 모여 서로를 부둥켜안는 극 후반부 신은 에서 가장 반짝이는 순간이자 가장 심도 높은 감동으로 다가온다.끊임없이 밀려오는 파도처럼 매일같이 피할 수 없이 밀려오는 삶은 그래서 피로하고 고단한 것이지만 떠밀려가고 떠밀려오는 희망을 붙잡아 떠올라야만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는 바로 그런 고단한 절망으로 떠내려가지 않는 연대의 우주와 생의 중력에 관한 송가다. 그 어느 때보다도 광막하게 침잠하는 알폰소 쿠아론의 카메라는 어느 개인을 둘러싼 관계와 사회의 풍경을 드넓게 포착하고 깊숙이 관여함으로써 그 어떤 영화보다도 생생하게 공명하는 체험으로 관객을 인도한다. 단언컨대 는 영화사에서 중요한 한 점을 차지하는 영화로 기록되고 회자될 것이다.동시에 넷플릭스가 이러한 영화적 유산을 잉태하는 자궁 노릇을 해냈다는 점은 현시대에서 특별한 시사점을 안겨주는 것 같다. 할리우드의 스타 배우가 등장하지 않는 멕시코 배경의 흑백영화에 투자하고, 감독의 창작 방향을 최대한 존중함으로써 영화의 취지를 훼손하거나 왜곡하지 않는 넷플릭스의 태도는 현존하는 그 어떤 영화 제작사보다도 영화의 가치를 가장 본질적으로 존중하는 것처럼 보인다. 는 바로 그런 태도의 결실이자 증명이라 할 만한 완벽한 시네마다. 믿을 만한 가치에 투자하고 그 결실을 자신 있게 선보이는 것. 가장 확실한 태도는 결국 실력이라는 것을 증명해내는 자신감. 그런 측면에서 는 지금 이 세상에서 가장 실력 있는 영화 공장이 넷플릭스라는 것을 방증하는 역설의 실현처럼 보인다. 흥미롭다. /글_민용준https://www.youtube.com/watch?v=6BS27ngZtx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