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케의 세대교체 | 에스콰이어 코리아 (Esquire Korea)

보다 젊어진 사케와 함께 일식 바의 문화도 새로워지고 있다. | 술,미식,칼럼,음식,요리

사케에도 위기가 있었다. 지금도 그 위기에서 채 벗어나지 못한 상태다. 일본의 사케 생산량은 지난 10년간 21% 줄었다. 1999년 2000개에 달하던 사케 양조장은 현재 1000여 개로 반토막 났다.일본 사회는 주종을 불문하고 주류 소비량이 줄어드는 추세다. 주류 소비량이 절정에 다다랐던 1996년과 비교하면 13% 감소했다. 개인주의 성향이 짙어진 한편, 건강을 중시하는 성향이 굳어지면서 일본 사람들은 술자리를 기피하기 시작했다. 여기에 더해 청년층 인구가 감소해 소비 시장이 위축된 것도 한몫했다. 전체 주류 시장이 하향세로 돌아선 가운데 젊은 층이 사케보다 맥주를 선호하면서 사케는 더 큰 타격을 입었다.우리 입장에서 이국의 술인 사케는 보다 신선하고 새로운 주종으로 다가온다. 하지만 일본에서 사케란 전통주에 해당한다. 우리에게 막걸리, 청주가 그러하듯 일본 젊은이들은 사케를 낡은 문화로 인식한다. 장인 정신을 중시하는 엄격한 사회 분위기에서 변화를 거부해온 양조업자들이 이러한 이미지를 더욱 고착화시키기도 했다. 쌀로 만든 술 특유의 단맛과 점성은 아무래도 현대인의 입맛에서 벗어나 있다.15도에 달하는 높은 도수도 환영받지 못하는 분위기다. 현대사회에서 사케가 이렇듯 본질적 한계를 드러내는 가운데 소비자들이 아예 등을 돌리게 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오랜 역사를 지닌 양조장들이 몰래 알코올을 넣고 묵은 술을 섞어 팔다가 들통난 것이다. 꼭 극단적 사건이 없었더라도 전통 기법을 버리고 인공 첨가물에 기대어 대량생산한 사케가 다수를 이루면서 일본 내에서 사케는 더 이상 고급 술, 건강한 술로 인식되지 않았다.일본의 주류 소비 추이를 살펴보면 흥미로운 현상을 발견할 수 있다. 남성의 습관적 음주율이 52.5%에서 33%로 감소한 반면 여성의 음주율은 1% 증가했다. 특히 40대 여성의 음주율은 9.9%에서 15.6%로 5.7%가량 상승하며 가장 큰 상승폭을 나타냈다. 이 수치가 더욱 의미를 갖는 이유는 20대 남성의 음주율에 해당하는 10.9%보다 더 높게 나타났기 때문이다.이는 사케 양조업자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컸다. 그들은 더 이상 남성 소비자들만 바라보고 있을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실제로 2000년대 들어 일본에서 막걸리가 유행한 것도 여성의 음주율이 늘면서 생긴 이색 현상이었다. 막걸리 등의 저도수 술과 위스키에 탄산수를 섞어 마시는 하이볼 등이 유행하며 사케의 하향길은 더 가속화됐다.사케 양조업자들은 깨끗하고 정직하며 건강한 이미지를 되찾는 한편, 여심을 사로잡기 위해 강고한 틀을 깨고 변화를 모색하기에 이르렀다. 도수를 대폭 낮추는가 하면, 누룩 향을 잡고 와인처럼 풍미를 다채롭게 만들었으며, 때로는 스파클링 와인처럼 탄산을 주입했다. 교토의 한 양조장은 유리잔에 담긴 술을 마시는 일에 저항감을 갖는 여성들을 겨냥하여 종이컵 용기에 빨대를 꽂아 마시는 형태의 사케를 출시하기도 했다. 여성의 마음을 좀 더 세심히 읽기 위해 양조 전문가로 여성을 영입하는 양조장도 생겨났다. 이는 일본에서도 특히 보수 성향이 강한 전통 양조업계에서 천지개벽할 일이었다.땅에 떨어진 위신을 다시 일으키기 위해 양조업자들은 고급화 전략을 꺼내 들었다. 전략에 따른 전술로 그들 대부분은 전통 기법으로 돌아가 장인 정신을 강조하는 방법을 택했다. 그것이 오늘날 유행하는 서양의 술과 경쟁하여 차별성을 갖는 길이라고 여겼다. 그들은 다시 쌀과 물, 누룩만 써서 술을 빚는가 하면, 나무통에 담가 숙성시켰다. 병마다 맛의 차이를 보이더라도 천편일률적인 맛을 추구하는 것보다 차라리 낫다는 것이 그들의 태도였다.반면 아예 최첨단 기술을 적극 도입하여 술의 퀄리티를 높이 끌어올리는 양조장도 있다. 일본을 대표하는 사케 명가 아사히슈조가 그 대표적 예다. 아사히슈조는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이 아베 총리가 미국을 방문했을 때 만찬주로 낸 ‘닷사이’의 제조사로 국내에도 꽤 알려져 있다. 아사히슈조는 양조장을 최신 시설로 개조하고, 모든 기계를 IT 기술과 접목하여 양조 과정을 제어한다.지난 수십 년간 일본 음식은 전 세계에서 강세를 보여왔다. 1980년대 웰빙 열풍을 등에 업고 미국 서부를 중심으로 유행한 캘리포니아 롤이 전 세계로 뻗어나가면서 스시, 우동 등이 미식 도시들을 장악했다. 또 근래에는 라멘의 위세가 만만치 않다. 일본 음식이 꼬리에 꼬리를 물며 세계인의 환영을 받는 가운데 2013년 일식이 유네스코 무형문화유산에 등재되며 그 인기는 폭발하듯 증폭됐다. 일식 열풍은 덩달아 사케로 번져갔다.사케는 일본 음식과 가장 잘 어울리는 술로 인식돼왔다. 사케가 일본의 주식인 쌀로 만든 술이며, 일식과 함께 발전해온 만큼 당연한 이야기처럼 들린다. 그런데 그 이면을 찬찬히 들여다보면 고정되고 강요된 관념일 수 있다는 의문이 들기도 한다.2013년 일본 주류의 수출을 촉진하기 위해 민관 협의체를 마련한 일본은 ‘푸드 페어링’ 전략을 앞세워 자국의 음식과 더불어 사케를 적극적으로 홍보했다. 그 결과 런던의 저명한 와인 교육기관 WSET에 사케 강좌가 개설되기도 했다. 또 미국 공영 라디오 방송 NPR에 따르면 지난 15년간 일본 사케 수출량은 연평균 15%씩 성장했다고 한다.일본 내에서 외면받던 사케가 해외에서 두각을 드러내자 자국민의 인식도 차차 변했다. 몇 해 전만 해도 후계자를 찾지 못해 존폐 위기에 놓였던 양조장의 문을 30~40대 젊은이들이 두드리기 시작했다. 해외에서 경험을 쌓았거나 현대 문화에 익숙한 젊은 세대는 사케에 새로운 감성과 감각을 심었다. 그들은 라벨과 병 디자인은 물론 맛과 향을 현대의 감각에 맞도록 변화시키는 한편 개성을 불어넣는 일을 우선시했다.실제로 일본이 오랫동안 불문율처럼 여겨온 쌀의 정미율이 쌀의 개성을 살리기 위해 덜 깎는 방향으로 개념이 도치되기도 했다. 이러한 변화 속에 사케는 자연스럽게 세대교체가 이뤄지는 눈치다.사케의 공식, 개념이 바뀌고 그 스펙트럼이 넓어지면서 일본 주류 문화도 변화를 겪고 있다. 오랜 시간 변화를 두려워했던 일본의 사케 바와 이자카야가 서양이나 중국, 동남아, 인도의 요리 기법을 차용하거나 아예 그 요리를 들여오기 시작했다. 주인이 한 명이 아닐까 의심스러울 정도로 천편일률적이던 국내의 이자카야에도 변화의 조짐이 일고 있다.“기존에 국내에 산재한 이자카야들은 개성이 영 부족했어요. 비슷비슷한 인테리어와 분위기에 예전부터 전해온 레시피를 답습하는 수준이었죠. 지금처럼 개성이 없으면 살아남기 어려운 세상에 말이에요.”사케리아 잇콘 오너 셰프 하세웅 씨의 말이다. 강남구 신사동에 위치한 잇콘은 기존에 우리가 알던 이자카야에서 저만치 벗어나 있다. 편백나무 가구에 인조 벚꽃나무, 흰 조리복 등 일식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에서 탈피했을뿐더러 조도가 낮은 가운데 재즈 음악이 가게 전체를 가득 메우고 있다. 메뉴도 사뭇 다르다. 양식과 일식을 넘나드는가 하면, 클래식 사케와 영 사케, 와인이 혼재한다. 기존의 이자카야를 상상했다면 첫 방문에 놀랄 정도다.“애초에 스시나 가이세키를 배울 요량으로 일본에 건너갔어요. 스시 카운터 뒤에서 흰 조리복을 입고 절도 있게 요리하고 손님을 대하는 가게에서 쭉 일하다가 막판에 분위기가 전혀 다른 곳에서 일할 기회가 있었어요. 일식에 이탈리아 터치를 가미한 요리에 와인을 파는 바였어요. 그곳의 얽매이지 않고 자유로운 분위기에 신선한 충격을 받은 후 캐주얼한 사케 바를 꿈꾸게 됐어요.”잇콘의 분위기는 한마디로 정의하기 어렵다. 물론 인테리어에서 음식까지 복제하듯 베껴낸 국내 이자카야의 모호함과는 다른 차원이다. 음식과 인테리어에 여러 문화가 혼재돼 있는데, 그것이 모두 맛있는 술을 위해 귀결된 분위기다.카와세미 오너 셰프 김다운 씨는 오늘날 사케의 다양성이 자신의 요리 세계에 영향을 준다고 한다. “새로운 느낌의 사케를 만날 때마다 요리 세계가 조금씩 확장되는 것 같아요. 와인처럼 새로운 사케를 맛보며 메뉴를 수정하거나 아예 새로운 메뉴를 개발합니다.” 카와세미는 웨이스코팅을 활용하여 일본의 개화기 시절 건축양식을 재현했는가 하면, 아부리 시메사바의 소스로 간장 대신 콜리플라워 무스를 곁들이는 등 과감히 음식에 양식의 터치를 더했다.김 대표는 다양한 시음 방법이 사케를 더욱 특별하게 만든다고 귀띔한다. “온도에 따라 풍미가 바뀌는 게 사케의 특징입니다. 와인보다 온도 변화에 민감해 손님한테 낼 때 권장하는 적정 온도도 굉장히 다양한 편입니다. 상온으로 내는 술이 있는가 하면 ‘아즈캉’이라고 60도로, ‘조캉’이라고 40도로 데워 내거나, 레슈라고 차갑게 내는 등 술마다 적정 온도가 전혀 다릅니다.”한편 술에 따라 내는 잔의 질감이나 형태도 각기 다르다. 이러한 다양성이 결합하여 사케 문화를 풍성하게 만드는 동시에 사람들로 하여금 사케를 즐기는 일을 하나의 체험으로 여기게끔 한다. “세대교체를 위해, 현재의 흐름에 발맞춰 나가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생산자의 노력을 소비자들에게 전달하는 것이 저희의 또 다른 의무라고 생각합니다.”김 대표의 말을 듣자니 생산자의 철학이 유통업자, 판매자를 거쳐 소비자에까지 닿는 일본의 소비문화가 새삼 감동적으로 다가온다. 또한 음식이 술의 발전을 이끌고, 그것이 결국 음식의 발전으로 귀결되도록 이끈 일본의 촘촘한 전략이 부러울 따름이다. 전통문화의 세대교체는 어느 나라나 풀어야 할 숙제다. 사케의 다양성으로 확장된 일식 바에서 그 실마리를 찾아보는 것도 방법이겠다. /글_이주연(미식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