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BC, KBS, SBS 애잔한 지상파 채널들 | 에스콰이어 코리아 (Esquire Korea)

지상파의 노쇠 현상에 정말 답이 없는 걸까? | JTBC,드라마,스포츠,뉴스,보도

요즘 지상파 수목 드라마를 보고 있노라면 자꾸 스마트폰을 켜서 요일과 시간을 확인하게 된다. 한쪽에서는 황실의 큰 어른인 태후가 비서를 묶어놓고 콘크리트 반죽을 쏟아붓는 장면이 나오는 동안(SBS ), 다른 한쪽에서는 엄마가 딸에게 돈 많은 노인과 데이트 아르바이트를 나설 것을 강권하는 중이기 때문이다(KBS2 ). 내가 지금 보고 있는 게 수목 드라마인가 주말 드라마인가. 작가들의 이름을 보면 혼란은 한결 더 가중된다. 은 김순옥 작가가, 는 문영남 작가가 집필 중이다. 김순옥과 문영남이라니. 은퇴한 임성한 작가까지 더하면 한국 막장 드라마계의 트로이카 아닌가. 궁금증은 점점 커져만 간다. 김순옥과 문영남이 번갈아가며 두 자릿수 시청률을 찍고 있는 시간대, 이것은 주말인가 주중인가.시청률이 안 나오는 탓에 많이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지만, SBS와 KBS만 통속극 전문 작가를 수목 드라마에 배치한 게 아니다. 같이 ‘막장 드라마’ 출신이라 싸잡히면 억울하겠으나 MBC 의 이혜선 작가 또한 MBC (2017)와 KBS2 (2014) 같은 전형적인 통속극을 써온 작가다. 그나마 그쪽은 B급 판타지 코미디를 표방하며 통속극의 전형적인 설정을 비트는 중이지만, 앞서 말한 것처럼 이쪽은 시청률이 안 나온다. 물론 통속극을 쓰던 작가라고 해서 수목 드라마를 쓰지 말라는 법은 없다. 그러나 지상파 3사가 동시에 통속극 출신 작가를 등판시킨 덕분에 2019년 1/4분기 지상파 수목 드라마의 그림이 매우 애매해졌다. KBS2 (2018)처럼 실험적인 시도를 선보인 작품이나, MBC (2018~2019)처럼 마지막까지 흔들리지 않는 탄탄한 완성도를 보여준 작품이 실패한 뒤에 그 시간대에 차례차례 통속극 전문 작가를 배치하는 모습이라니. 이거, 영락없는 포기 선언 같지 않은가. “맞아요. 우리는 노쇠한 채널입니다”라는 자포자기.이런 이야기를 꺼내면 지상파 방송사 PD들은 이제 자기들 입으로 말한다. “아시잖아요. 괜찮은 드라마 대본은 일단 CJ ENM에 먼저 갔다가 다시 JTBC로 갔다가, 그다음에 지상파로 오는 거고.” 상암동 주변에서 쉬쉬하며 조심스레 떠돌던 소문은 몇 차례 언론 보도를 거친 뒤 이제 누구나 알고 있는 기정사실이 됐다. 아무도 지상파 방송사를 1순위로 놓지 않는다. (2016~2017)와 (2018), (2018)이 CJ ENM을, (2018)과 (2018)가 JTBC를 택했다. CJ ENM과 JTBC의 선택을 받지 못한 나머지가 지상파 몫으로 남았다. 드라마만 그런 게 아니라 총체적 난국이다. 지상파는 모든 방송사가 원하는 타깃 시청자층인 2049를 놓쳤고 광고 수주와 시청률, 화제성 면에서도 케이블에 뒤처졌다. 최근 몇 년간 지상파가 선보인 예능 중 가장 파괴력이 높았던 건 SBS 인데, 백발의 노모들이 나이 먹은 독신 연예인들의 삶을 안쓰러워하는 내용의 예능이 지상파 최고의 아웃풋이라는 건 비극에 가깝다.지상파라고 핑계가 없는 건 아니다. 지금까지 들어본 지상파 노후화에 대한 핑계 중 가장 우아한 건 이것이었다. “케이블 채널과 종편 채널이 젊은 시청자층을 공략해 성공한다고 해서 지상파까지 그 뒤를 따라간다면, 모든 세대를 아우르는 공공의 방송이어야 하는 지상파로서의 의무를 저버리는 것이다.” 모든 미디어가 2049를 타깃으로 삼은 프로그램을 만드는 데 혈안이 된 시대에 지상파라도 마지막 보루로 남아 중장년층과 노년층 시청자들이 좋아할 만한 프로그램을 꾸준히 제작해야 한다는 이야기다. 일리 있는 이야기일까? 글쎄, 단언은 이르다. tvN (2013~2018) 시리즈에 가장 많이 열광한 건 노년층이었다. 오랜 세월 우정을 쌓은 벗들과 함께 떠나는 배낭여행이라는 판타지가 어찌나 매력적이던지 그 무렵 어르신들을 대상으로 한 여행 상품이 줄지어 출시됐다. 졸지에 어르신들 여행에 짐꾼으로 끌려가 ‘우리 집 이서진’ 노릇을 해야 했던 3040 자식들의 비명이 하늘을 찔렀다. 그뿐인가. 유튜브에서 가장 빠른 속도로 세를 불리고 있는 집단은 보수 성향의 노년층이다. 노년층이라고 해서 더 이상 지상파만을 바라보고 살지 않는데 그 사실을 지상파만 모른다.그렇다면 우아한 핑계 말고 현실적인 이유를 한번 살펴볼까? “지상파는 케이블 채널과 종합 편성 채널에 비해 광고 영업이 불리한 탓에 제작비 경쟁에서 지속적으로 손해를 본다. 방송통신심의위원회는 케이블이나 종편에 비해 지상파에 더 엄격한 잣대를 들이댄다. 기껏 젊은 감각을 가진 스타 PD를 키워내면 외주 제작사나 케이블 채널, 종합 편성 채널에서 속속 스카우트해간다. 결국 보다 더 보수적이고 안전한 편성을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아까보다는 설득력 있는 이야기지만 이것도 섣불리 동의하기 어렵다. 지상파가 케이블보다 압도적 우위를 유지하던 시절에도 지상파는 장사가 잘된다는 이유로 막장 통속극을 한껏 편성하지 않았나. MBC (2004~2005)을, SBS (2008~2009)을, KBS2 (2008~2009)을 두고도 지상파의 노후화가 케이블과 종편 탓이라 말하는 건 민망한 일이 아닐 수 없다.어쩌다 이 지경이 된 걸까? 방송통신심의위원회와 한국방송비평학회가 2015년 5월 개최한 ‘저품격 드라마의 문제점과 개선 방향’ 토론회에서 한국방송작가협회 이금림 이사장은 씁쓸한 이야기를 꺼냈다.“현재 막장 드라마를 쓰는 작가 중에는 데뷔 초기 단막극을 써서 좋은 평가를 받았던 이들이 많다. A씨 역시 마찬가지다. 그런데 단막극이 방송사에서 사라졌고, 그 후 2~3년을 기다려도 섭외가 오지 않았단다. A씨는 그 나름대로 미니시리즈 시놉을 써서 방송사 PD들에게 보냈는데 던져버리고 보지 않더란다. 그래서 충격적인 시놉을 써서 가져갔더니 당장 편성이 됐다고 했다. 그리고 해당 작품은 시청률 40%를 찍고 중국에서 리메이크까지 될 정도로 화제가 됐다. 이후 A씨는 ‘내가 이름을 알렸으니 이제 좋은 작품을 써야지’라고 정상적인 대본을 써서 가져갔더니 PD들이 ‘당신은 하던 거나 해’라고 하더란다. A씨는 그렇게 계속 막장 드라마 작가로서 최고의 시청률을 올리는 국민 막장 작가가 됐다.”(‘방송사 vs 작가. 막장 드라마는 누가, 어떻게 만드는가?’ 2015년 5월 19일, , 권순택 기자)결국은 자업자득이다. 새로운 실험을 감행할 용기가 없으니 좋은 콘텐츠를 만들 생각 대신 돈이 되는 작품을 만들 생각을 하고, MBC (2000)나 (2001) 같은 단막극을 쓰던 김순옥에게 “당신은 계속 같은 거나 쓰라”며 막장 통속극을 양산하라고 등을 떠민 게 아닌가?드라마만 상황이 이런 게 아니다. 예능은 또 어떤가? 지상파는 MBC (2008~2017)나 MBC (2008~2015)처럼 대중의 사랑을 받는 예능 포맷을 하나 발견하면 시청자들이 질릴 때까지 해당 포맷을 우려먹으며 장르 자체의 생명력을 갉아먹었다.그나마 몇 년씩 우려먹는 데 성공한 작품은 운이 좋은 편이다. MBC (2011~2015)는 뒤따라 등장한 프로그램 KBS2 (2011~)에 스포트라이트를 빼앗기며 신선함을 잃었고, MBC (2013~2014) 또한 KBS2 (2013~)와 SBS (2014~2016)의 등장 탓에 참신함을 잃었다. 조금이라도 신선한 포맷을 선보이는 순간 서로가 서로를 베끼며 포맷의 새로움을 급속도로 소진하는 공멸의 길이 펼쳐졌다.지상파가 어설프게 CJ ENM의 프로그램을 베끼는 광경까지 가면 안쓰러워진다. 2010년 Mnet이 로 지상파와 정면 대결하는 데 성공한 이후 지상파는 스스로의 방식으로 새로워지는 길을 모색하는 대신 성공 사례를 좇기 바쁘다. MBC는 ‘우리는 왜 Mnet 같은 프로그램을 못 만드느냐’는 김재철의 말 한마디에 (2010~2013)을 만들었고, KBS는 tvN 를 보며 (2013~2014)를 론칭했다. Mnet (2016~2018)을 흉내 낸 KBS2 (2017~2018)과 MBC (2018~2019)이 등장했고, 가장 최근에는 Mnet (2015~2016)와 (2012~2018)의 카피캣이 되기를 갈망하는 MBC (2019)이 등장했다. 최근 몇 년간 지상파가 새로 선보인 예능 중 오리지널리티를 유지하면서 젊은 세대에게 어필하는 데 성공한 작품은 MBC (2015-2017) 정도가 유일하다. 지상파 방송사의 구성원들은 지금의 어려움의 원인을 외부적인 요인에서 찾고 싶겠지만 지상파가 노쇠해지기 시작한 건 시청률을 쉽게 추수하기 위해 스스로 젊어지기를 게을리한 탓이다.지상파에는 이제 정말 답이 없는 걸까? 지상파 관계자들은 체념한 눈치지만, 솔직히 말하자면 그조차도 배부른 소리이고 너무 쉬운 항복이다. 지상파는 여전히 케이블과 종합 편성 채널이 따라잡을 수 없는 역사와 누적된 아카이브, 브랜드 이미지를 지니고 있다. 한참 뒤에서 지상파를 힘겹게 추격하던 시절의 케이블에 비하면 지상파는 훨씬 더 많은 자원을 손에 쥐고 있는 것이다. 풍성한 지역 네트워크는 또 어떤가? SBS와 제휴 중인 지역 민방이나 지방 MBC, KBS 지방 지사들이 자체 제작하는 프로그램 중에는 지금 당장 전국에 방영해도 경쟁력 있을 만한 프로그램이 많다. 이처럼 케이블과 종합 편성 채널이 가지지 못한 압도적인 무기를 손에 쥐고도 수·목요일 밤 10시에 김순옥과 문영남을 등판시키는 것 말고는 답이 안 보인다면, 어쩔 도리가 없다. 스스로 늙어가는 길을 걷겠다는데 어쩌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