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 기사의 반격 | 에스콰이어 코리아 (Esquire Korea)

긴 글을 읽지 않는 시대, 무덤이 될 줄 알았던 온라인에서 다시 긴 텍스트가 사랑받기 시작한 이유는 무엇일까? | 미디어,콘텐츠,긴글,텍스트,뉴미디어

2019년 초부터 소셜 미디어를 중심으로 입소문을 모은 기사가 한 편 있다. 시사 주간지 이 2019년 신년 기획으로 선보인 ‘대림동에서 보낸 서른 번의 밤’ 르포다. 외부의 시선으로 피상적으로 묘사된 서울시 영등포구 대림동 재한 조선인 집단 거주지의 실상을 알아보기 위해 은 기자가 직접 대림동에서 생활하며 내부의 시선으로 그 속살을 살펴보는 기획을 마련했다. 김동인 기자는 대림2동 대림중앙시장 근처 고시원에 방을 얻어 한 달 동안 동네 주민으로 생활하면서 기사를 썼고, 그 결과는 대림동의 역사와 현재, 한국 내 재한 조선족 네트워크의 형성 과정과 계층 분화를 꼼꼼한 자료와 인터뷰를 동원해 설명한 5개 장 13개 절의 방대한 르포였다. 잘 만들어진 다큐멘터리를 보는 듯 흥미진진한 대림동 르포는, 이 기사를 더 잘 보여주기 위해 이 새로 만든 프로젝트 페이지(daerim.sisain.co.kr)에 힘입어 소셜 미디어의 핫 이슈로 떠올랐다.잘 쓴 기사가 화제가 되는 건 당연한 일이다. 재한 조선족 커뮤니티를 바라보는 내국인들의 시선 중에 여전히 불필요한 혐오와 오해가 많기에 소셜 미디어상의 논쟁이 되는 것 또한 당연한 일일 것이다. 그런데 글쟁이들 사이에서는 의 대림동 르포가 조금 다른 이유로도 화제가 됐다. 바로 기사의 방대한 분량 때문이다. 프로젝트 페이지에 올라온 기사의 분량은 2만4000자. A4 용지 기준 16페이지, 200자 원고지 기준으로 120매 분량이다. 바로 감이 안 온다면 지금 이 글을 기준 삼아 셈해보면 빠르다. 이 원고는 5000자짜리다. 이 글을 다섯 번 읽는 분량의 기사가 온라인 페이지에서 소비된 것이다. 짜임새 있는 구조 덕분에 단숨에 읽혀 그렇게 긴 글인 줄 실감하지 못하다가 막상 다 읽고 난 뒤 그 방대함에 놀란 독자가 한둘이 아니다. 독자들도 놀랐겠지만 동종업계 글쟁이들이 받은 충격은 더 컸다. 십수 년간 ‘이제 더 이상 긴 글은 안 팔린다’는 이야기를 가스라이팅 수준으로 듣고 살던 사람들 입장에서는 원고지 120매 분량의 르포 기사가 온라인에서 엄청난 호평을 들으며 화제를 모으고 있다는 소식에 놀라지 않을 재간이 없었다.갈수록 문자 기반 콘텐츠 산업이 위축되면서 언론계와 출판계는 ‘사람들이 더 이상 긴 글을 안 읽는 시대’를 대비하자는 목소리로 붐볐다. 문자 기반 콘텐츠를 보며 성장한 세대에 비해 영상·이미지 기반 콘텐츠를 보며 성장한 디지털 네이티브 세대는 글에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이 짧아져서 긴 글을 소비할 수 없다는 이야기였다. 기사의 페이지 뷰는 날이 갈수록 하락하고, 온라인 커뮤니티 게시판만 가봐도 댓글란이 온통 “세 줄 요약 좀 해줘라”, “좋은 글이군요. 물론 읽지는 않았습니다만” 같은 댓글로 가득하니 이런 비관적인 전망이 퍼진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기사나 칼럼이 원고지 15매만 넘어가도 너무 길어서 온라인에서는 소비되지 않는다고 말하는 이들이 업계의 주류를 이뤘고, 다른 한쪽에서는 페이스북을 중심으로 유통되는 카드뉴스야말로 언론의 미래라며 가로세로 900픽셀짜리 파워포인트를 만드는 데 전념하는 사람들이 등장했다. 출판 시장에는 인스타그램풍의 감성 사진에 뻔한 아포리즘을 곁들인 ‘힐링 북’ 기획이 우후죽순 등장했다. 그러던 와중에 대림동 르포가 보기 좋게 홈런을 친 것이다.어떻게 된 일일까? 2019년 들어 갑자기 사람들이 다시 긴 글에 대한 사랑을 되찾은 걸까? 사실 징조는 그 전에도 있었다. 2015년 등장한 유료 콘텐츠 퍼블리싱 서비스 ‘퍼블리’는 2017년부터는 월정액제로 유료 콘텐츠를 무제한 구독할 수 있는 서비스를 제공 중이다. 나 기사 중 에디터들이 엄선한 기사를 번역해 큐레이팅해주는 콘텐츠부터 정보화 시대 마케팅 전략의 진화, 글로벌 엔터테인먼트 산업의 미래 등 전문가들이 참여한 프리미엄 콘텐츠 등을 독점으로 제공한다. 최근 들어 공격적으로 서비스를 확장하면서 콘텐츠가 빈약해지고 있다는 비판을 받기도 하지만 온라인으로 공짜로 뉴스를 보는 게 당연하다고 여기는 시대에 선명한 타깃과 콘셉트를 앞세운 콘텐츠로 유료 결제를 유도하는 데 성공했다는 점은 간과하기 어렵다. 온라인을 기반으로 한 문자 기반 콘텐츠 구독 서비스가 가능성이 있다는 판단이 들자 다른 플레이어들도 속속 이 시장에 뛰어들기 시작했다. 전자책 회사 ‘리디북스’는 월정액 서비스로 책을 구독할 수 있는 ‘리디셀렉트’ 멤버십을 선보였다. 신생 전자책 회사 ‘밀리의 서재’ 또한 월정액 서비스로 독자들에게 어필 중이다. 온라인에서는 성공할 수 없다고 여겼던 길고 깊이 있는 문자 기반 콘텐츠 서비스가 2019년 지금 그 어느 때보다 더 전성기를 누리고 있다.문자 기반 콘텐츠의 무덤이 될 줄 알았던 온라인에서 다시 긴 텍스트가 사랑받기 시작한 이유는 무엇일까?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가장 큰 이유는 정보의 유통량이 폭증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소셜 미디어의 등장으로 누구나 정보를 생산, 가공하고 유통할 수 있는 시대가 되자 공론의 장에 참여하기 위해 필요한 비용이 대폭 낮아졌다. 모든 사람이 뉴스 소비자인 동시에 생산자인 시대인 셈이다. 물론 발언권이 모두에게 주어진다는 것은 민주적인 현상이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유통되는 정보의 질을 장담하기 어렵다는 단점이 있다. 문턱이 낮아진 탓에 검증되지 않은 정보가 범람하며 온갖 루머와 음모 이론, 가짜 뉴스가 지식 생태계를 오염시키고 있는 것이다. 이럴 때일수록 사람들은 날카로운 지식과 검증된 정보를 필요로 한다. 정보의 격류 속에서 스스로 판단할 수 있는 힘을 기르기 위해 그 기준점으로 삼을 만한 검증된 지식에 대한 니즈가 증가한다. 그리고 깊이 있는 정보를 제공하는 데 가장 최적화된 콘텐츠 형식은 여전히 문자 기반 콘텐츠다. 같은 양의 정보를 제공한다고 가정했을 때 영상 콘텐츠나 음성 콘텐츠에 비해 문자 기반 콘텐츠는 훨씬 더 경제적인 형태다. 같은 시간 동안 전달할 수 있는 정보의 양이 압도적이며, 유통에 필요한 데이터의 사이즈도 작다. 프리미엄 콘텐츠를 제공하기 가장 좋은 형태로 문자 기반 콘텐츠의 가치가 다시 부각된 셈이다.인터넷 초창기와는 달리 온라인에 맞는 스토리텔링 포맷이 어느 정도 자리 잡았다는 점 또한 주목할 만하다. 인터넷이 데스크톱 기반으로 돌아가던 시절, 뉴스 사이트나 포털 사이트의 레이아웃은 가로 2단으로 자리 잡아 오랜 시간 이렇다 할 변화 없이 유지됐다. 메인 콘텐츠를 제공하는 메인 창 하나, 그 옆에 각종 메뉴와 광고, 실시간 검색어 등의 부가 콘텐츠를 제공하는 사이드바 하나. 얼핏 다양한 정보량을 한 번에 보여줘서 경제적인 것처럼 보이는 이 레이아웃은 사실 긴 글을 읽기에는 최악의 형태였다. 짧은 글이나 러닝타임이 짧은 유튜브 영상처럼 소비에 소요되는 시간이 짧은 콘텐츠일 때는 상관없지만 보다 긴 시간과 집중력이 필요한 긴 콘텐츠의 경우에는 사이드바가 제공하는 부가 정보가 심각한 방해 요인이 된다. 글을 읽다 말고 자극적인 제목의 실시간 인기 기사나 화려한 광고 이미지에 주의를 빼앗긴 경험이 있는 이라면 무슨 이야기인지 알 것이다. 자연스레 중도 이탈률이 증가하게 되고, 그와 같은 소비 패턴이 습관이 된 소비자들 사이에서 ‘긴 글은 읽기 어렵다’는 이야기가 나오기 시작했다. 사실 그건 ‘긴 글을 읽지 못하는 세대’가 등장했다기보다는 아주 오랫동안 인터넷 환경이 긴 글을 읽기에 최악의 레이아웃으로 돌아갔다는 의미에 가까울 것이다. 하지만 한번 자리 잡은 소비 패턴은 쉽게 바뀌지 않으니 자연스레 ‘디지털 네이티브는 긴 글을 읽지 못한다’는 미신이 정설처럼 굳어졌다.의 인터랙티브 기사 ‘스노폴’이 등장해 퓰리처상을 받았을 때 사람들은 이것이야말로 문자 기반 콘텐츠의 미래라고 흥분했다. 눈이 몰려오는 영상을 HTML5로 화면 전체에 뿌리고 각종 인포그래픽과 동영상을 적재적소에 배치해 독자들을 매료시킨 스노폴은 온라인 저널리즘의 미래처럼 보였다. 그런데 사람들은 스노폴의 흥행 이유를 심각하게 오해했다. 핵심 콘텐츠에만 집중할 수 있도록 좌우에 신경을 분산할 만한 사이드바를 제거한 새로운 페이지를 만들고, 스토리텔링에 필요한 인포그래픽과 동영상이 따라붙도록 HTML5 기술을 구현한 것이 스노폴의 흥행 비결이었다. 그러나 스노폴에 자극을 받아 인터랙티브 기사를 선보인 매체 중 대부분은 HTML5로 범벅되어 로딩되는 데에만 한세월이 필요한 페이지들을 선보였다. 콘텐츠의 핵심이 되어야 할 문자가 돋보이는 게 아니라 얼마나 현란한 페이지를 만들어 과시하느냐에 집중한 것이다. 결과적으로 문자 기반 콘텐츠가 어설프게 동영상 콘텐츠를 흉내 낸 것 같은 물건들이 등장했고 사람들은 빠른 속도로 인터랙티브 기사에 대한 관심을 잃었다.한바탕 열풍이 지나간 뒤에 등장한 기사들은 사뭇 달라졌다. 무리하게 화면 전체를 뒤덮는 동영상이나 현란한 인포그래픽을 넣으려고 노력하는 대신 좌우 사이드바를 제거하고, 가로 1단 통으로 콘텐츠를 제공하며, 눈이 덜 피로한 폰트를 채택하는 방식으로 변화했다. 효과적인 스토리텔링에 필요한 것만 남기고 나머지는 다 제거한 것이다. 인터넷이 데스크톱 중심에서 모바일 중심으로 바뀌면서 이런 개편은 더 가속화됐다. 앞서 예를 들었던 의 대림동 르포 기사 또한 인터랙티브 기사지만 현란한 기술로 도배하기보다는 텍스트를 잘 보여주는 쪽에 집중하는 방향을 택했다. 스노폴의 교훈을 제대로 학습한 사례다.새로운 미디어가 등장할 때마다 올드 미디어의 종말을 예견하는 비관론이 힘을 얻었다. 콘텐츠의 유통 방식과 소비 환경의 변화가 올드 미디어의 수요 자체가 소멸하는 것처럼 보이는 착시를 유발하기 쉽기 때문이다.그러나 TV의 등장에도 라디오가 살아남았고 인터넷의 등장에도 TV가 살아남은 것처럼 영상의 시대에도 문자 기반 콘텐츠의 수요는 여전히 존재할 것이다. 지난 십수 년간 ‘긴 글은 안 팔린다’는 비관과 체념이 주류를 이룬 건 그 편이 새로운 환경에 맞는 방식의 스토리텔링 형식을 고민하는 것보다 훨씬 쉽기 때문은 아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