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루보틀이 드디어 국내에 상륙했다. 지난 5월 3일 성수동에 1호점이 문을 연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수백 명의 인파가 새벽부터 몰렸다. 1호 손님으로 당당히 문턱을 넘은 사람은 심지어 자정부터 와서 기다렸다고 한다. 첫날 평균 대기 시간은 4시간에 달했고, 대기자 중에는 직장에 휴가를 내고 온 이들도 있었다. 문 연 지 열흘이 흐른 지금도 여전히 100여 명이 평균 1시간 이상 자신의 순번을 기다린다. 이쯤 되니 블루보틀이 사람들을 줄 세우는 비결이 궁금하다.
블루보틀을 한마디로 정의하면 ‘스페셜티 커피 전문점’이다. 몇 해 전부터 간간이 들리는 스페셜티 커피는 말 그대로 특상의 커피를 뜻한다. 사실 아직까지 스페셜티 커피를 정의하는 법적 기준은 없다. ‘특수하고 이상적인 기후에서 재배한, 향과 맛이 독특하고 결점이 없는 원두’가 가장 보편적으로 수용되는 기준이다. 관련 단체 중 가장 권위 있는 미국 스페셜티 커피 협회(SCA)는 이 기준을 구심 삼아 전 세계에서 생산한 원두를 채점하고, 그중 100점 만점에 80점 이상 획득한 커피에 스페셜티 커피 등급을 부여한다. 커피 본질에 충실하고자 한 블루보틀은 높은 원가율에도 불구하고 스페셜티 커피 등급을 받은 원두를 고집한다.
스페셜티 커피는 생산자의 손에서 결정되지 않는다. 로스터와 바리스타가 원두의 개성을 최대치로 끌어냈을 때 비로소 스페셜티 커피가 완성된다. 블루보틀은 스페셜티 커피의 개성을 잘 살리기 위해 생두를 약하게 볶는다. 강하게 오래 볶을수록 산미와 특유의 풍미가 날아가기 때문이다. 블루보틀 창업주인 제임스 프리먼은 커피 카트를 끌고 시장에서 장사할 때부터 볶은 지 48시간 이내의 원두를 사용하고, 주문이 들어오면 그때 원두의 무게를 재고 갈아 드리퍼로 커피를 내렸다. 드립 커피 기계로 미리 내려놓은 커피를 콸콸 따라 마시고, 에스프레소 기계로 순식간에 추출한 커피를 마셔온 미국 사람들에게 이는 무척 생소하고 유별나 보였을 게다. 그럼에도 프리먼은 갓 볶아 분쇄한 원두를 드리퍼로 천천히 내려야 진정한 스페셜티 커피가 완성된다고 여겼고, 그 생각을 여전히 고수하고 있다. 그리하여 블루보틀은 비슷한 규모의 프랜차이즈 카페가 미리 볶은 원두를 본사에서 매장으로 일괄 제공하는 데 반해 매장에 로스팅 기계를 두고 직접 볶는다.
한편 블루보틀에는 우리가 으레 카페에서 기대할 법한 것들이 없다. 우선 매장을 애써 꾸민 흔적이 보이지 않는다. 커피 바와 테이블이 전부다. 편안하게 앉을 수 있는 소파가 없을뿐더러 노트북이나 휴대폰을 충전할 수 있는 콘센트, 무료 와이파이 서비스도 없다. 프리먼은 사람들이 커피에 집중하는 데 방해가 될 만한 요소를 철저히 덜어냈다. 음료의 사이즈 구분도 부재하다. 쇼트에서 톨, 그란데는 물론 벤티까지 선택의 폭이 넓은 기존 시장 분위기에서 탈피해 단일 사이즈로 과감히 통일했다. 이는 가장 훌륭한 맛을 유지할 수 있는 사이즈로 일괄하여 맞춤으로써 품질의 일관성을 높이겠다는 전략이다. 또 캐러멜, 바닐라, 모카 시럽 등 커피 본연의 풍미를 흐리는 첨가물도 두지 않았다. 블루보틀은 사이즈를 하나로 통일하고 첨가물이 든 커피 음료를 배제한 덕에 지금처럼 메뉴를 단출하게 구성할 수 있었다.
우유가 들어간 따뜻한 음료를 주문하면 바리스타는 라테 아트를 해준다. 라테 아트야 우리에게 이미 익숙한 커피 문화지만, 한편으로는 속도가 생명인 대형 프랜차이즈 카페에서 기대하기 어려운 서비스이기도 하다. 블루보틀은 손님이 제아무리 밀려들어도 일일이 라테 아트를 한다. 사실 이러한 라테 아트 서비스는 주문을 받으면 그제야 원두를 갈아 드리퍼로 내리는 추출 방법과 더불어 블루보틀의 대기 시간을 늘리는 주된 원인이다. 그만큼 회전율을 떨어뜨리고 손님에게 불편을 끼치는 등 서로 손실을 떠안지만, 블루보틀은 자신의 뜻을 결코 굽히지 않는다. 어쩌면 이렇듯 고집스러운 태도 때문에 많은 사람이 이곳의 커피를 오래 기다려서라도 마실 만한 가치가 있다고 여기는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블루보틀이 일본에 이어 세계에서 두 번째로 한국에 진출한 이유는 무엇일까. MIT와 공동 연구하여 지금의 드리퍼를 개발하는 등 블루보틀이 더 우수한 커피를 만들기 위해 여러 기술을 접목한다는 점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이러한 노력 덕에 추출 기법도 계속 진화했다. 초창기에 에스프레소에 힘을 실었다가 점차 브루잉 기법으로 추출 방식을 수정해나갔다. 그런데 이때 브루잉 기법은 지금의 핸드드립과는 거리가 멀었다. 오히려 물을 한 번에 붓고 막대로 젓는 푸어 오버에 가까웠다. 블루보틀이 지금의 핸드드립 기법으로 정착한 때는 2007년이다. 일본식 핸드드립을 접한 프리먼이 이쪽이 커피의 풍미를 살리는 데 유리하다는 결론을 내린 직후였다. 그는 일본식 핸드드립에서 영감을 받아 사업의 큰 틀을 수정한 만큼 그 어느 나라보다 일본에서 인정받고 싶었다. 그러던 중 스페셜티 커피 문화가 보급되고 과학적 추출 기법의 필요성이 대두되는 등 일본만의 확고한 커피 문화에 변화의 조짐이 일자 비로소 진출한 것이다. 일본에 이어 한국에 진출한 이유 또한 최근 국내에 스페셜티 커피 문화가 빠른 속도로 확산되는 광경을 가까이에서 목도했기 때문이다. 국내에 블루보틀이 상륙한 것은 필연이었던 셈이다.
일각에서는 카페에서 노트북을 켜놓고 여러 시간 앉아 커피를 소비하는 국내 정서에 와이파이와 콘센트가 없는 카페가 과연 맞을지 의구심을 품는다. 지금의 인기가 한국인의 냄비 근성, 집단주의에서 비롯된 일시적 현상이라는 목소리도 높다. 한편 업계 종사자들은 오히려 블루보틀의 진출을 반기는 눈치다. 그들은 개별 업체들이 커피 문화의 다양성을 위해 애쓴 성과가 조금씩 가시화되는 상황에서 블루보틀처럼 강력한 존재가 힘을 보탬으로써 변화에 가속도가 붙을 거라고 기대한다. 물론 지금은 대기자가 워낙 많아 느긋이 앉아 노트북이나 휴대폰을 들여다볼 엄두를 내지 못하니 콘센트나 와이파이가 없다는 사실에 불평하는 일도 당분간 없을 게다. 블루보틀이 태우듯 볶아 쓴맛과 구수한 맛만 강조한 프랜차이즈 커피에서 더 많은 사람을 구제하고 계몽할지 기대를 모아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