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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발 300m가 넘는 산 정상에 기하학적 건축물이 세워져 있다. 산 정상에 누군가 거대한 빨대를 꽂아둔 모양새. 건물 아래로 수십 미터 움푹 파여 있다는 점도 인상적이다. 홀멘콜렌 스키 점프대다. 1892년 개장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세계 최초로 스키점프 대회가 열린 장소다. 그동안 보아온 최신식 스키점프대와 달랐다. 어쩌면 당연했다. 개선한 것이 아니라 창조한 것이니까 말이다. 이전에 없던 새로운 개념을 만들어낸 장소였다. 이런 어마어마한 경사를 활강해서 스키어가 하늘 높이 점프할 수 있다는 상상을 누가 했을까? 그것도 127년 전에. 당시에는 결과를 알 수 없는 무모한 도전이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지금은 이 분야의 선구자로 그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특정 분야의 선구자가 되는 것은 의미 있는 일이다. 그러나 쉽게 선구자가 될 수는 없다. 일부는 계획적으로 후발 주자를 선택하기도 한다. 어설픈 완성도를 앞세워 시장을 개척하기보다 모든 것이 제 기능을 할 때까지 기다린다. 완벽한 타이밍을 노린다.
“메르세데스-벤츠가 이제야 전기차를 내놓는다고요?”EQC를 설명하면 사람들이 가장 놀랍고 궁금해하는 부분이다. 메르세데스-벤츠는 늘 새로운 영역에 발 빠르게 도전하는 진보적인 브랜드였다. 그래서 순수 전기 구동 SUV를 이제야 내놓는다는 사실에 많은 이들이 놀랄 만도 하다. 엄밀히 말해 EQC는 메르세데스-벤츠 브랜드 최초의 양산 전기차가 아니다. EQ 브랜드 최초다. EQ는 메르세데스-벤츠의 전기차 브랜드이다. ‘일렉트릭 인텔리전스’라는 의미를 담은 것처럼 EQ는 단순 전기 구동계가 아니라 미래 모빌리티 생태계 구축을 꿈꾼다. 메르세데스-벤츠는 2025년까지 전체 판매량의 15~25% 이상, 2039년에는 전체 판매량의 절반 이상을 탄소 중립적인 제품으로 채울 것이란 목표를 세웠다. 그러니까 내연기관 130년 역사를 가진 브랜드 입장에서 EQ는 대단한 변화이다.
“EQC가 기존 전기차와 다른 부분이 무엇인가요? 고유의 특징이 있나요?”
핵심을 관통하는 질문이었다. 이에 피터 콜브 EQC 제품개발총괄은 일순간의 망설임도 없이 답했다.
“EQC는 곧 메르세데스-벤츠입니다.”
당연한 답변이었다. 메르세데스-벤츠 엠블럼을 달고 있으니 EQC는 당연히 메르세데스-벤츠였다. 하지만 그 답변에 많은 내용이 담겨 있었다.
풀이해보면 ‘메르세데스-벤츠의 기준으로 만든 차’였다. 피터 콜브 제품개발총괄은 EQC를 ‘성숙한 기술’이라고 표현했다. EQ 브랜드로는 첫 번째 제품이지만 현재 전기차 시장에 나온 타사 제품과 비교할 때 성숙하다고 할 만큼 발전한 차라는 뜻이다. 무슨 의미일까? 어떤 기준으로 그런 주장을 할 수 있는 것일까? 모든 의문의 끝에서 메르세데스-벤츠는 한결같이 답했다. ‘EQC는 메르세데스-벤츠입니다.’
제품을 경험해야만 정확하게 결론을 내릴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전기차의 천국’이라 불리는 노르웨이 오슬로에서 EQC를 장시간 테스트했다.
EQC는 기존 전기차와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차 중심부, 가장 낮은 부분에 배터리를 배치하고 앞뒤 구동축에 각각 모터를 달았다. 앞뒤 모터에서 합친 시스템 출력은 408마력(78.0kg·m)이다. 한 번 충전으로 450km(유럽 기준)를 달릴 수 있다. 수치로 보면 모든 것이 기존 전기차보다 조금 더 발전한 범위에 있다.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좀 다르다. 거의 모든 부분에 메르세데스-벤츠의 기준이 완벽하게 녹아들었다.
EQC 400을 타고 거리로 나왔다. 한참을 달렸다. 차를 구석구석 살폈다. 모든 기능을 시도했다. 흥미로운 것은 차를 타는 동안 전혀 낯설지 않았다는 점이다. 차에 앉자마자 익숙한 위치에 있는 시트 조절 버튼에 곧바로 손을 댔다. 눈으로 보지 않고도 스티어링 휠 뒤의 칼럼식 레버로 기어를 변경했다. 중앙 정보 창을 쓱쓱 만져서 익숙한 인터페이스를 뒤졌다. 그리고 스마트폰을 연결해 음악을 들었다. 이 모든 행위가 자연스럽게 이뤄졌다. 과거에 메르세데스-벤츠를 타본 경험을 통해 곧바로 실현할 수 있었다.
EQC는 내연기관 자동차 제작 역사가 130년이 넘는 전통적인 자동차 회사가 새로운 플랫폼을 만들며 고민한 결과이다. 여기서 메르세데스-벤츠가 찾은 해답은 시장의 기준이 아니라 자신의 기준에 맞추는 것이었다. 주행 성능도 그만큼 높은 수준을 구현한다는 것이다.
다섯 가지 드라이빙 모드가 특징이다. 컴포트, 스포츠, 인디비주얼(맞춤형 설정)은 설명하지 않아도 목표를 이해할 수 있다. 주목할 부분은 에코와 맥스 레인지다. 에코는 높은 주행 효율성과 낮은 배터리 소모가 목표이다. 맥스 레인지는 최대 주행거리를 달성하는 모드다. 각 기능에서 운전자가 임의로 제동력에 따른 충전(회생 제동)에 적극적으로 개입할 수 있다.
에코 모드로 달릴 때 가속 페달을 천천히, 깊게 밟으면 최대 가속력의 70% 수준에서 페달 조작에 경계가 느껴진다. 이 기능을 햅틱 패달이라고 부른다. EQC는 그때가 딱 좋은 효율성을 발휘한다며 계기반에 게이지를 파란색으로 표시한다. 이 경계는 가속 페달을 더 세게, 혹은 깊게 밟으면 사라지기도, 다시 나타나기도 한다.
맥스 레인지 모드에서는 내비게이션의 맵 데이터와 주행 센서, 운전 보조 기능을 총동원해 주행거리를 길게 만들어낸다. 예를 들어 내비게이션 경로상 전방에 내리막길이나 코너가 등장한다고 치자. 그럼 EQC가 미리 전기모터의 출력을 살짝 낮추면서 에너지 낭비를 줄이는 데 적극적으로 개입한다.
컴포트, 에코, 맥스 레인지에서는 회생 제동 범위도 다섯 가지로 설정할 수 있다. 스티어링 휠 뒤에 좌우에 달린 패들 버튼으로 D+, D, D 오토, D-, D--를 설정한다. ‘+’는 일반 자동차 같은 관성 주행이 가능하다. 버려지는 에너지를 배터리로 많이 회수하지 못한다. 대신 운전이 편하고 자연스럽다. ‘-’가 많아질수록 회생 제동이 급격하게 강해진다. D--에서는 브레이크 페달을 밟지 않아도 완벽하게 시내 주행이 가능하다. 가속 페달에서 발을 떼자마자 급격하게 차가 속도를 줄였다. 버려지는 에너지를 아주 효율적으로 배터리로 재충전하고 있었다.
글로 이해하는 건 어렵지만 사용해보면 금방 익숙해진다. 두어 시간이면 자유자재로 쓸 수 있을 만큼 직관적이다. 메르세데스-벤츠가 이런 기능을 강조하는 것은 결국 전기차 플랫폼의 가능성 확장이다. 물론 그들도 대부분의 소비자가 ‘D 오토’를 주로 사용할 것을 예상한다.
탁 트인 비행기 활주로에서 EQC를 타고 장애물을 피하며 차의 운동 성능의 한계를 경험해봤다. 강력한 토크가 초반부터 쏟아졌다. 가속력은 힘차고 상쾌했다. 코너링에서는 타이어의 남은 접지력을 온몸으로 정확히 느낄 수 있었다. 결과적으로 모든 것이 매우 자연스럽다. 엔진이 내는 소리만 없을 뿐 이전 메르세데스-벤츠 3.5L 가솔린 모델처럼 달렸다. 순수 전기차여서 희생한 부분이 없었다. 전기차만의 간지러운 주행 특성을 메르세데스-벤츠의 풍요로운 주행 감각으로 꽉 채웠다.
EQC는 앞뒤 바퀴에 각각 전기모터가 달렸다. 앞 모터는 저·중간 부하 범위에서 효율성을 발휘하고 뒤 모터는 역동적인 주행 환경에서 특성을 발휘한다. 쉽게 말해 이전의 지능형 네 바퀴 굴림(AWD)처럼 작동한다. 앞뒤 모터는 서로 물리적으로 연결되지 않지만 주행 상황에 따라 동력을 지능적으로 분산한다. 그래서 때론 안정적인, 때론 스포티한 주행이 가능하다.
이번에 집중적으로 테스트한 것은 배터리였다. 80kWh 리튬 이온 배터리는 전류 안전성을 포함해 모든 부품이 시장의 충돌 안전 기준보다 높은 수준으로 만들어졌다고 했다. 모든 전자 기기가 그렇듯 배터리 효율을 높이려면 냉각과 예열이 중요하다. 그 부분에 많은 투자가 이뤄졌다. 높은 충전 효율성도 자랑이다. 이는 EQ 브랜드에서 강조하는 핵심 요소이기도 하다.
가정에서 완속 충전(7.4kW)을 기본으로, 전용 월 박스에서는 220V 소켓보다 세 배 빠른 속도로 충전이 가능하다. 고속 충전은 CCS(유럽과 미국) 방식이나 차데모 외에도 110kW급 급속 충전을 지원한다. 일상적인 상황으로 설명하면 배터리 용량 10%에서 80%까지 충전하는 데 단 40분이 걸린다. 실제 테스트에서는 배터리 용량 35%에서 78%까지 대략 18분 걸렸다. 배터리 용량 78%에서 주행 가능 거리가 320km 이상이었으니 EQC가 제안하는 배터리 충전은 충분히 현실적이다.
EQC는 작은 차이가 모여서 큰 변화를 만든다는 것을 증명하고자 한다. 가끔은 너무 자연스러워서 이 새로운 전기 SUV가 특별해 보이지 않는 순간도 있었다. 하지만 눈을 크게 뜨고 살필 때는 보였다. 급가속 중 가속 페달에서 갑자기 발을 뗐을 때 모터 출력이 갑자기 끊기면서 차체가 울컥거리는 여느 전기차와 달랐다. EQC는 그런 기분 나쁜 울컥거림이나 진동, 소음 없이 부드럽게 가속을 줄였다. 이런 작은 차이가 곳곳에 존재했다.
“EQC가 이전 메르세데스-벤츠의 감각을 충실히 구현하는 데 힘썼다면 앞으로 나올 EQ 브랜드의 제품은 서서히 미래적인 새로운 감각을 구현하는 쪽으로 변할 겁니다.” e드라이브 전략 담당인 만프레드 슈타이너의 짧은 설명에서 EQC의 마지막 모든 의문이 풀렸다. 메르세데스-벤츠는 전기차 분야의 선구자는 아니다. 동시에 후발 주자도 아니다. 그저 자신들이 생각하는 기준에 맞춰질 때를 기다려 적절한 타이밍에 등장한 제품이다. 그런 관점에서 명확한 가치를 품었다. 한 브랜드의 철학이 고스란히 녹아든 차세대 전기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