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 끝, 가을의 문턱에서 추천 도서 '그 여름의 끝' | 에스콰이어 코리아 (Esquire Korea)

여름의 끝, 가을의 기미


당신의 계절은 언제 오는가. 나의 계절은 어느 날 아침 출근길에 온다. 가방을 메고 현관문을 열었을 때. 버스 정류장으로 천천히 걸어가는 동안. 바람과 볕의 온도로. 봄이고 여름이고 가을이었다가 겨울인 것이 피부에 닿는다. 그렇게 문득 온다, 계절은.
새로운 계절의 문턱에서 나는 매번 아쉽다. 한 계절을 양껏 누리지 못한 것 같다. 꽃은 다 보기도 전에 지고, 여름의 파도는 순식간에 물러난다. 낙엽이 질 때쯤이면 별안간 눈이 내리고 다시 새봄. 계절의 문턱에서 나는 매번 걸려 넘어지듯 무언가 놓친 기분에 사로잡힌다. 2019년의 여름은 이렇게 가버렸다.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올여름은 어떠했던가. 나는 버스를 기다리면서 생각한다.
구름이 많았다. 몇 번쯤 느닷없는 비를 흠씬 맞았다. 예닐곱 권 새 시집이 나왔고 그중 어떤 시집은 부리나케 팔려나갔으나 어떤 시집은 외톨이처럼 남아 마음이 쓰였다. 매미 울음소리가 커지던 어떤 일요일에는 우는 사람이 있었다. 종종 찾아오는 독자였다. 아는 것이 없으니 해줄 말도 없었다. 울음 곁에 갑 티슈를 놓아두고 내 자리로 돌아와 잠자코 앉아 있는 수밖에. 훌쩍이는 소리, 티슈 뽑는 소리, 작게 내뱉는 한숨. 가만히 귀를 기울이면서 나는 그 모든 것이 사랑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영업시간이 끝나도록 울음을 그치지 못하던 그는 미안하다는 인사를 남기고 돌아갔다. 이번 여름은 모두 괜찮아지길 바라면서 갑 티슈를 놓아두듯 그렇게 보낸 것 같다.
조금 더 일찍 계절을 읽어낸 사람들의 옷차림에서 나는 슬쩍 가을을 엿본다. 계절감이라는 단어를 떠올린다. 계절에 이르러 움직이는 마음과 감정의 향방. 가을의 계절감은 가볍지 않다. 그래서 나뭇잎은 떨어질 채비를 하고, 자꾸 누군가를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취한 눈으로 몇 개의 문장을 적었다 지우는 그런 밤을 또 누군가는 맞이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아직은 가을이 아니다.
모든 것이 선명하고 변화무쌍한 여름에서 두툼한 무게의 가을로 가기 전, 지금은 환절기. 버스 안 누군가가 콜록거린다. 상념을 깨뜨리는 그 반복적인 기침 소리가 나는 싫지 않다. 환절기란 원래 그런 것이다. 아프고 아프지 않은 시절. 천천히 갈 수 있도록 끼어드는 계절과 계절 사이. 있지도 없지도 않은 마음을 간직하는 시기. 한 사람을 울린 여름의 사랑을 다독이는 것도 지금이다. 울었던 마음이 진정되고 나면, 가을은 그것을 간직할 것이다. 눈물이 남긴 의미도 함께. 그리운 마음과 조그마한 부끄러움마저도.
며칠 전엔 우체국에 들러 관제엽서를 몇 장 사가지고 왔다. 우체국 직원은 요즘도 관제엽서를 사는 이가 있어 반갑다며 웃는다. 사실 그건 내가 매일매일 느끼는 반가움이다. 시집이 잔뜩 꽂힌 서가 앞에 독자들이 모여 있을 때. 그들이 기꺼이, 그리고 기어코 자신만의 시집을 찾아내 가지고 올 때 나는 반갑다. 고맙습니다, 하고 인사를 한다. 사가지고 온 관제엽서를 서점 내 테이블에 놓아두었다. 누구든 와서 누런 여백 위에 시를 옮겨 적고 사연을 남길 수 있도록. 그러면 나는 그것을 우체통에 넣어줄 작정이다. 그 마음이 주인을 찾아갈 수 있도록. 엽서를 들이고 보니 모아둘 곳이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서점의 책장을 만들어준 목수에게 전화를 걸어 작은 편지함을 부탁했다. 그는 신중한 사람이다. 소나무와 아까시 나무를 두고 오래 고민할 것이다. 고민 끝에 나무를 자르고 조각과 조각을 이어 붙여 편지함을 만드는 그 시간은 환절기의 일. 그가 편지함을 들고 서점 계단을 올라올 때쯤 서점의 가을이 시작될 것이다. 그때쯤 서점은 여름을 잊게 되겠지.
버스에서 내리며 올려다보는 하늘의 색이 꽤 높아져 있다. 오락가락 분주하던 여름의 하늘은 다 쏟아 내버린 모양이다. 애틋함으로 손끝이 짜릿하다. 관제엽서를 처음 부치는 사람은 내가 되겠다 싶다. 떠오르는 이름이 많다. 그 이름들이 나의 안부를 받을 때쯤이면 완연히 가을이 한창일 것이다.

추천 도서 너무나 뜨거워 아픈 청춘의 종언인 이 시집은 여름 끝 정오의 햇빛처럼 눈부시다. 이 시집이 없었더라면, 나는 아마 시를 쓰지 못했을 거라고 생각한다. ‘만나지 않았으니 헤어질 리 없고 헤어지지 않았어도 손잡을 수 없는’ 마음의 사람들에게 기꺼이 건넨다. <그 여름의 끝>, 이성복, 문학과지성사, 1990.
여름의 끝, 가을의 기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