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텔 그리고 파인다이닝 | 에스콰이어 코리아 (Esquire Korea)

호텔 그리고 파인다이닝 | 호텔,호텔 레스토랑,호텔 셰프,특급 호텔,요리

 불과 몇 시간 전까지 구김 없이 앉아 있던 젊은 호텔리어의 손짓이 헐거웠다. “요즘 누가 호텔에 식사하러 가요? 저도 안 가요.” 사석의 술자리였다. 편한 자리여서 취기로 느슨했고, 자정은 옅은 오크 향의 여운을 남기며 넘어갔다. 우연찮게 호텔 출신의 노련한 셰프와 서울 특급 호텔의 F&B 마케터가 동석자였다. 자연스레 요즘 이슈가 되는 몇몇 호텔 레스토랑 이야기가 오갔다. 이어진 호텔리어의 이야기는 스파이시한 위스키처럼 뒷맛이 아렸다. “그래 봤자죠. 특급 호텔 식음업장은 대부분 만성 적자에 시달려요. 높은 임대료와 고급 식자재, 수많은 전문 인력을 쓰니까요. 수익에 민감한 4성급 이하 호텔은 식음업장을 외주 업체로 전환하는 추세예요. 특급 호텔도 적자를 벗어나려면 과감한 변화가 필요한데 경영진은 대부분 안정을 추구하죠.” 이를테면 10년 전까지 기존의 국내 특급 호텔 레스토랑은 X와 Y로 진화하기 이전의 염색체에 가까웠다. 서울에 파인다이닝이라는 단어가 제대로 자리 잡기 이전이었고, 호텔 이용자는 주로 부유층이었으며, 호텔 레스토랑이 과장된 입소문을 업고 미식의 성지로 추앙받던 시기다. 서울 주요 특급 호텔은 유연한 변화나 진화보다 안주와 유지를 고수했다. 객실 판매 수익으로 식음업장의 적자를 메우는 고착화된 수익 구조도 한몫했다. 그 시점에 롯데호텔이 파리 미식의 정점을 이식한 피에르 가니에르 서울을 열었다. 2008년이었다. 그즈음 유학파 셰프들도 국내로 유턴하기 시작했다. 이를 기점으로 서울의 미식은 큰 전환점을 맞았다.   호텔리어의 푸념에 위스키 잔을 만지작거리던 셰프가 호텔 레스토랑에 대한 농밀한 이야기를 꺼냈다. “피에르 가니에르 서울은 셰프 위주의 파인다이닝 레스토랑이 무엇인지 국내에 제대로 알려준 계기였어요. 셰프의 철학이 요리와 서비스에 어떻게 깃드는지요. 이전까지 호텔 셰프는 한 기업의 중간 관리자일 뿐이었거든요. 그러니 자신의 색깔을 보여줄 수 있는 메뉴보다 해외 유명 레스토랑의 시그너처 메뉴나 초청한 게스트 셰프의 레시피를 카피했어요.” 요리에 철학이 없으니 스타일은 고정됐고, 재현에 급급하니 조리법에 대한 이해도 떨어졌다. “피에르 가니에르 서울이 끼친 영향이 한 가지가 더 있죠. 덕분에 구하기 힘들던 유럽 식자재가 많이 수입됐어요.” 이는 요리의 폭과 질을 높였다. 더불어 유학파 셰프들은 분자 요리나 팜 투 테이블, 제로 웨이스트, 심지어 수렵과 채집 형태의 노르딕 퀴진까지 들여왔다. 국내 제철 식재료에 대한 활용도 고민했다. 그럼에도 호텔 레스토랑은 기존의 영업 형태를 고수했다. “변화가 가능했던 기회도 있었죠. 롯데호텔이 피에르 가니에르 서울을 준비하자 다른 특급 호텔도 해외 유명 셰프의 레스토랑 오픈을 준비하거나 검토했거든요. 하지만 피에르 가니에르 서울이 엄청난 적자를 기록하자 모두 중단됐죠.” 그사이 호텔 레스토랑은 대중에게서 점차 멀어졌다. 호텔에 변화가 감지된 건 <미쉐린 가이드> 서울판이 출간된다는 소문이 돌면서다. 평가나 줄 세우기에 민감한 대기업이 모기업인 서울의 특급 호텔 사이에서 보이지 않는 자존심 싸움이 벌어졌다. 하지만 타성에 젖어 있던 운영 방식을 하루아침에 쇄신하기란 쉽지 않았다. 스타 레스토랑의 면면이나 공신력 논란은 차치하고 <미쉐린 가이드> 서울판의 결과는 놀라웠다. 오너 셰프 레스토랑과 뉴 코리언의 기치를 내건 한식 레스토랑이 대다수를 차지했다. 이듬해에도 그다음 해에도 큰 차이가 없었다. 야닉 알레노를 앞세운 롯데호텔의 스테이만 추가로 선정됐다. 그러자 꿈틀거림이 감지됐다. 몇몇 호텔 레스토랑이 코리안 컨템퍼러리를 표방했고, 유명 셰프처럼 보이는(?) 이들을 영입했으나 참패했다. 호텔의 철학과 자신의 철학을 요리와 서비스에 담을 수 있는 셰프 영입이 아니라 셰프의 대중적인 인지도에 의지한 영입 결과였다. 연이은 TKO패의 성적을 받아 든 호텔은 그제야 진정한 변화를 꾀했다. 시작은 포시즌스 호텔 서울의 ‘아키라 백’이다. 올 초 1스타 레스토랑인 도사 바이 백승욱의 시그너처 레스토랑 아키라 백을 열었다. 포시즌스 호텔 로비에서부터 시작되는 접객과 마치 뉴욕의 재패니즈 레스토랑을 방문한 것 같은 인테리어, 모던한 직원들의 유니폼, 간결하지만 합리적이고 맛깔스러운 음식은 호텔 레스토랑이 보여줄 수 있는 장점을 모두 보여줬다. 르 메르디앙 서울의 ‘허우’도 그렇다. 신라호텔 팔선을 이끈 후덕죽 셰프를 영입해 차이니스 파인다이닝 레스토랑이라는 수식어에 걸맞은 중식의 정점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반얀트리 클럽 앤 스파 서울은 밍글스의 강민구 셰프와 함께 페스타를 ‘페스타 바이 민구’로 리뉴얼했다. 더 플라자는 아예 1스타 레스토랑인 ‘주옥’을 호텔에 들였다. 그뿐만 아니라 이준 셰프가 운영하는 ‘디어 와일드’, 이영라 셰프의 ‘르 카바레 씨떼’, 박준우 셰프의 ‘더라운지’ 등 4개 매장을 오픈했다. 자존심을 버리고 상황에 맞는 최선책을 찾은 결과다. 몇몇 호텔 레스토랑 방문기를 풀어놓자 묽어진 올드 패션드를 만지작거리던 셰프가 다시 끼어들었다. “호텔의 접근성이나 뛰어난 시설은 셰프에게 상당히 매력적이죠. 개인과 기업의 자본력은 비교할 수 없잖아요. 또 호텔의 개런티나 새로운 고객으로 인한 추가 이익도 창출할 수 있죠. 고객 입장에서도 도심이 내려다보이는 호텔 레스토랑은 일상을 잠시 벗어나게 해주는 새로운 여행지 아닐까요?” 바로 환대를 받으며 떠나는 새로운 미식 여행지다. 변화의 물결은 시작됐지만 그럼에도 의문의 여지는 있다. “어쨌든 해답은 철학과 요리에 달려 있죠. 전 아직까지도 반신반의해요.” 더 지켜봐야 한다는 말이었고 셰프의 뒷말은 취기에 묻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