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지 TMI | 에스콰이어 코리아 (Esquire Korea)

여행은 저마다 다른 질감을 남긴다. 북아프리카부터 아라비아반도까지.

TEXTURE


Agrigento 아그리젠토
: 햇볕으로 만든 살갗
시칠리아섬 남쪽 끝으로 차를 몰면 격침당한 신전 앞에서 잠시 숨을 고르게 된다. 이 도시는 아그리젠토라 부른다. 도시를 비껴 돌면 새하얀 절벽이 나오는데, 결국 이곳이 아그리젠토를 되돌아보는 지점이 되었다. 정복된 절벽은 북아프리카를 바라본다. 미지의 대륙을 잇는 바다는 압도적으로 아름다워서 그대로 주저앉고 말았다. 발을 절벽 끝에 두고 앉았다. 꼬리뼈가 아플 만큼 긴장되는 높이, 바람은 충격적으로 강렬한 데다 모래가 섞여 살갗을 깨물 듯 때린다. 소나기 같은 모래바람, 하얀 절벽에 반사된 정오의 햇빛, 절벽을 향해 돌진하는 파도, 이 모든 것이 모여 만들어내는 어떤 정서를 몸에 새겨 넣기로 마음먹었다. 시간을 늘려 셔츠의 단추를 풀었다.
TIP 아그리젠토의 호텔은 신전이 많이 보일수록 호화롭고 비싸다. 즉흥적인 여행 스케줄 덕분에 몇백 년 된 올리브 농장을 호텔로 개조한 빌라 라 루미아 B&B(Villa La Lumia B&B)에서 하루를 보냈는데, 신기루처럼 보이는 신전을 바라보며 아침 식사를 했다. 올리브 나무와 수많은 고양이를 헤치고 활달한 할아버지가 카푸치노를 내주며 카푸치노와 라테의 차이점에 대해 또박또박 설명했다. 순간, 느긋해졌달까. 아늑해서 하루 더 머물기를 청했다.



Malta 몰타
: 고대의 섬
이탈리아 시칠리아섬과 북아프리카 중간에 작은 섬 몰타가 있다. 지중해의 섬은 품을 파고들수록 거칠고 황량한데, 몰타도 예외는 아니라서 풍요로운 바닷가를 따라 번영했다. 자동차 운전석은 영국식으로 오른쪽이라 차를 빌리지 않고 대신 2층 관광버스를 타고 섬을 둘러봤다. 거대한 항구보다 더 엄청난 성벽이 빼곡한데, 절벽보다 높게 쌓은 고대의 돌은 여전히 굳건하다. 섬 전체가 심해에서 건져 올린 신화 속 도시처럼 붉게 빛난다. 햇볕에 부스러질 것 같은 테라스, 물보다 싼 잔술, 유럽의 모든 언어가 울리는 밤 골목, 끝날 것 같지 않은 축제. 이국의 섬을 기억하려고 작은 타투 가게에 들어가 오른쪽 어깻죽지에 작게 ‘몰타’라 새겼다. 왼쪽 어깨는 전날 햇볕에 타버렸으니까.
TIP 가장 아름다운 바닷가는 유명한 호텔이 거의 차지했으니, 손쉽게 찾으려면 거대한 호텔 체인을 검색하면 된다. 음식이 그리 맛있진 않은데, 우연히 해물파전과 떡볶이를 파는 레스토랑 클럽 스시를 발견했다. 지중해에서 가장 맛있는 한국 음식을 만드는 레스토랑이라고 증언할 수 있다.



Muscat 무스카트
: 영원한 여행자의 도시
오만이란 이름을 대면, 그게 대체 어디에 있느냐는 질문부터 받는다. 아랍에미리트의 아부다비 바로 아래쪽이라 말하면 그제야 고개를 끄덕이지만 눈빛은 여전히 낯설다. 무스카트를 말할 때마다 영원한 모험가라도 된 듯 어깨에 힘이 들어가서 일부러 딱딱 잘라 씹어 삼키듯 발음했다. 큰 키와 날렵한 몸을 가진 남자들이 발목까지 오는 흰색 전통 의상을 입은 채 허리를 꼿꼿이 펴고 느슨하게 걸어 다닌다. 바람이 불면 모래 먼지가 날리지만 더러워진 옷을 입은 사람은 거의 없다. 고대부터 몸에 밴 풍요로운 삶의 흔적, 유물 같은 국제도시. 인도에서 온 남자는 건설 현장에서, 필리핀에서 온 상냥한 남자는 카페에서 일했다. 사막 운전을 위해 고용한 드라이버는 튀니지에서 왔다고 했다.
TIP 오만 유향은 지구에서 최고다. 인류 문명에서 가장 유명한 선물 중 하나로, 아기 예수가 탄생했을 때 동방 박사가 마련한 선물 중 하나였다. 귀한 손님이 올 때 매캐한 연기가 집 안을 뛰쳐나갈 정도로 피우는데, 잡스러움을 물리치는 침착한 향기다. 건조함이 빵 부스러기 같은 상인에게 샀는데 ‘내놓은 물건 말고 이 가게에서 가장 좋은 유향을 보여달라’고 호기롭게 말했다. 그리 비싸지 않았고, 한 봉지를 더 사고 나서야 공항 검색대 통과를 걱정했다.



Essaouira 에사우이라
: 예술가의 항구도시
모로코 마라케시에서 서쪽으로 세 시간 반쯤 달리면 항구도시 에사우이라가 나온다. 예술가들이 등을 맞대고 사는 곳으로, 퀭한 눈으로 바람을 향해 달리고 싶을 만큼 해변이 넓다. 해변 끝에는 배를 드러낸 채 주저앉은 큰 배가 있고, 그 뒤로 오래된 고깃배가 그물처럼 엉켜 있다. 한참을 둘러보다 늙은 어부를 지나쳤는데 그는 평생 에사우이라에서 살아온 것처럼 보였다. 에사우이라는 그즈음 읽은 소설책에 등장했다. 연인은 마라케시에서 에사우이라로 향해 가다 수상한 남자와 술을 마시곤 배탈이 났다. 이 페이지를 접어두고 이따금 들췄다. 늙은 어부가 그때 접어둔 책장 같아서 사진기를 꺼내 들고 말을 건넸다. 늙은 어부가 에사우이라의 가장 아름다운 단면인 것만 같아서.
TIP 모로코에는 손수 만든 아름다운 물건이 많지만, 에사우이라는 현대적 정서가 섞여 아름다움에 반쯤 눈먼 자들이 모여든다. 골목 깊숙한 곳까지 둘러보면 파리의 초현대적인 편집매장에서 파는 슬리퍼를 손에 쥘 수도 있다. 성벽 안쪽 구시가지는 하루면 넉넉히 돌아보니까 밤을 넘기지 말고, 슬쩍 아쉽게 돌아서도 좋다.



Mallorca 마요르카
: 안락한 해변에서
격정적인 파티가 열리는 섬인 이비자 근처라지만 마요르카는 오히려 차분하고 소박해서 골랐다. 마음에 드는 바닷가 근처에서 숙소를 찾았다. 가격이나 전경 같은 건 상관없었다. 허름한 아파트였는데, 눈 감고 걸어도 해변까지 3분이면 충분했다. 몸을 구겨 움직이지 않을 작정으로 차는 빌리지 않았다. 때늦은 점심은 해변 끝 테라스에서 새우를 입에 물고 차가운 와인으로 대신했다. 수돗물은 탁해서 머리가 매일 엉키고 묶이는 지경에 이르렀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마요르카는 근처 어떤 지중해 섬보다 질감이 풍요롭고 햇볕은 선명해서 마음이 맑아진다. 산타니 해변은 수만 번 끔벅이며 망막에 새겼으니 10년 뒤에도 집 앞 풍경처럼 생생할 것만 같다.
TIP 마요르카 공항에서 산타니 해변까지 택시를 타고 가면, 런던에서 마요르카행 비행기 요금 정도 나온다. 정확한 가격은 잊었으나, 손끝이 저릿했다. 택시를 불러도 한 시간쯤 여유를 부리니 작은 차라도 빌려두면 좋다. 해변에서는 비키니 수영복을 부족하게 입은 어머니들이 아이와 함께 놀곤 하는데 크게 동요치 말라. 이 모든 게 자연스러워서 풍요로운 체지방을 있는 그대로 드러낼 수 있다.



Tropea 트로페아
: 신들의 해변
‘신들의 해변’이란 수식어를 듣고 입꼬리를 올렸다가 막상 보고는 고개를 휙 꺾고야 말았다. 이탈리아 남쪽 끝, 시칠리아섬으로 들어서는 길목에 자리한 이 도시는 정박지라기보다는 종착이란 말이 어울린다. 여행 전 찾아본 사진 덕분에 머리로는 알았지만 막상 직접 보니 마음이 요동쳤다. 트로페아는 절벽 위 도시들의 절정이랄까. 제대로 보려면 보트를 빌려 타고 먼바다로 나가거나 있는 힘껏 수영을 해야 한다. 바위에서는 연신 소년과 청춘 사이에서 부유하는 자들이 뛰어내린다. 바닷물은 천연덕스럽게 맑아서 얕아 보이는데, 별생각 없이 뛰어들었다가 맹렬하게 팔을 내저었다. 아침마다 골목을 달린 뒤에는 신선한 치즈와 과일을 사 들고 숙소로 돌아오곤 했다.
TIP 밤이면 좁은 골목에 레스토랑을 비집고 테이블이 펼쳐진다. 서울 파스타 가격의 반값이지만 양은 거의 두 배. 진짜 맛있어서 코끝이 찡해지는 파스타를 세 접시나 내리 주문했다. 차를 빌리려 했는데, 그 많은 렌터카업체 중 자동변속 기어가 달린 차는 한 대뿐이었다. 비좁은 골목에서는 반 토막이 날 것 같아 불안해서 ‘풀 프로텍션’ 옵션으로 빌렸다. 직원은 차 키를 건네며, 절벽에 떨어트리거나 불에 타도 키만 반납하면 된다고 말하고는 활짝 웃었다.



Nizwa 니즈와
: 깊은 우물처럼 높은 산
오만의 옛 수도 니즈와에 다가갈수록 치솟은 바위산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게 숨겨진 고대 도시를 위한 이정표 같아서 달리는 차 유리창에 카메라를 대고 연신 셔터를 눌렀다. 황량한 길을 달리다 보면 간혹 대추야자나무로 둘러싸인 요새 같은 집이 나왔는데 아름다운 섬처럼 보였다. 언젠가 숨어야 한다면 이쯤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집들은 작은 성 같아서, 자금난에 허덕이는 외딴 놀이동산이나 기분파 사장님이 고안한 펜션을 떠올리게 했다. 과거의 영광을 더듬는 도시는 한낮에도 저녁 같았다. 허물어진 집과 호화로운 저택이 비스듬히 등을 맞대고 있는 모습이 아슬아슬해 보였다. 험난해 보였던 황량한 산은 오를수록 안락했고, 걸음마다 한숨을 흘릴 정도로 아름다워서 마음을 바늘로 살짝 찔린 것만 같았다.
TIP 사막과 험준한 산을 상상하며 도로를 꽉 채운 최신 GMC의 사륜구동 자동차를 빌렸으나 말 못 할 이유로 해발 2000m에서 차량을 바꿔야만 했다. 렌터카업체에 메일로 상황을 알렸고, 생각보다 빨리 작고 낡은 자동차가 배달됐다. 지구의 문명은 어느덧 이렇게 발을 맞춰 진화하고 있고, 이제 나는 거침이 없다.




Bellagio 벨라조
: 빌라 세르벨로니
이탈리아 북단, 산 위의 거대한 호수 코모를 파고들면 아늑한 도시 벨라조가 나온다. 호수를 끼고 도는 좁은 골목 끝엔 예쁜 호텔이 하나 있는데 ‘빌라 세르벨로니’라 부른다. 100년이 훌쩍 넘은 이 건물은 밀라노 귀족의 여름 별장으로 사용하던 곳. 이후 호텔이 되었는데 유명 배우들이 게스트 리스트를 촘촘히 채웠다. 호텔 별관에 있는 고전적인 체육관에는 각종 초현대식 운동기구를 마련해두었다. 뒷동산에 가면 거대한 나무로 둘러싸인 예쁜 테니스 코트가 있고. 그래도 가장 아름다운 건 수영장이다. 장엄하게 펼쳐진 호수 앞쪽에 자리해 있는데 지나침 없이 우아하다. ‘수영장은 이 정도면 됐다’라는 어떤 확신 같았다. 얼마 전 후배는 이 호텔에서 결혼했다.
TIP 코모 호숫가에는 전 세계 유명 인사의 호화로운 별장이 촘촘히 자리해 있다. 산책하거나 배를 타고 둘러보기에 하루가 모자라다. 밀라노에서 기차를 타면 코모까지 순식간에 도착하지만 벨라조까지는 차로 한참을 들어간다. 코모 호수에서 여객선이나 요트를 타고 국경을 넘어보지 않았지만 그대로 스위스까지 갈 수 있다. 호수에서 수영하면 어떤 비현실적인 기분이 든다. 돌밭이라 발바닥이 좀 아픈 것만 참으면 된다.

여행은 저마다 다른 질감을 남긴다. 북아프리카부터 아라비아반도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