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예지 <파리리뷰>와 <멀린>의 편집자, 기고가들과 함께 촬영한 단체 사진. 가운데, 눈썹이 부드럽게 휘고 체크 목도리를 한 인물이 피터 현 선생이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피터 현 선생은 범인으로는 상상키 어려운 대단히 굴곡진 인생을 살았다. 가난한 목사의 아들로 태어나 해방 직후 월트 휘트먼의 시집 한 권을 가지고 미국 유학길에 올랐고, 4년 뒤 반공산주의의 기치를 내건 매카시즘이 미국 사회 전반을 지배하게 되자 동명이인의 공산주의 극작가로 오해를 받아 스페인으로 추방당했다. 이듬해 랭보와 보들레르를 선망하며 파리행 기차에 몸을 실었다. 프랑스 유명 진보 주간지 <프랑스 옵세르바퇴르(France Observateur)>에 한국 관련 기사를 기고하며 언론에 몸담았고, <엘르>와 BBC 등 다양한 매체에 자신이 번안한 한국 시와 한국 전통문화를 소개했다. 파리 생제르맹 데프레 구역에 있는 유서 깊은 카페 ‘레 되 마고’와 ‘카페 드 플로르’에서 시몬 드 보부아르, 장 폴 사르트르, 알베르 카뮈, 마르그리트 뒤라스 등과 교류했다. 소설 <연인>과 <히로시마 내 사랑>의 작가 마르그리트 뒤라스는 선생을 “프랑스 여자와 다른 서양 여자들과 수없이 많은 사랑을 나눈 피터 현이야말로 <히로시마 내 사랑>의 남자 주인공 배역에 꼭 맞는 인물”이라 칭할 정도로 수많은 염문을 뿌린 ‘파리의 카사노바’이기도 했다. 그중에는 미국의 26대 대통령인 시어도어 루스벨트의 손녀도 있었다. 이후 미국의 <타임스> <뉴욕타임스> <뉴욕헤럴드트리뷴> <뉴스위크> 등에 기고하며 장막에 가려 있던 북한을 취재해 서구 사회에 알렸고, 외신 기자로 윤보선과 박정희 대통령의 인터뷰를 진행했다. 초현실주의 사진작가 만 레이와 극작가 아서 밀러, <탱탱(TinTin)>의 작가 조르주 르미, 저널리스트 에드거 스노, 건축가 김수근 등이 선생의 동료이자 친구였다. 그런 선생에게 ‘인생 최고의 낙’이 있었다. 바로 음식과 포도주다. 그의 회고록 <세계를 구름처럼 떠도는 사나이 피터 현>에도 같은 이야기가 나온다. “나는 원래 아주 지적으로 재미있는 사람들과 어울려서 맛 좋은 음식과 포도주를 즐기는 것을 최고의 낙으로 삼고 살아가는 사람이다.”
이런 피터 현 선생을 알게 된 건 사실 불과 몇 해 전이다. 새해의 달뜬 분위기가 가라앉던 늦겨울이었다. 결혼을 앞두고 해방촌에 있는 프렌치 레스토랑인 꼼모아에서 처음 선생을 만났다. 아내가 존경하는 분으로 청첩장을 드리고 참석을 청하는 자리였다. 내심 상견례보다 더 조심스러웠다. 부인 송영인 씨와 함께 식당에 들어선 선생은 하운드 투스 체크 재킷에 캐시미어 목도리를 정갈하게 두르고 있었다. 부축을 받으며 계단을 올랐지만 매서운 눈빛은 젊은 시절이 어땠을지 충분히 연상됐다. 악수를 청하려 손을 내밀자 손을 움켜쥐는 단단함이 느껴졌다. 아흔을 목전에 둔 선생이었지만 여전히 와인을 즐기고 맛없는 음식에 매몰찼다. 입맛에 대한 이야기가 대화의 주였지만 옛 이야기를 꺼내다 분위기에 어울리는 영시 한 문장을 읊조리던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대하기 편하지만은 않았던 선생과는 달리 부인 송영인 씨는 온화한 미소와 세련된 느낌이 묻어나는 말투와 동작이 눈에 띄었다. 접시가 비워지고 와인이 바닥을 보이며 자리를 일어설 무렵 선생은 꼼모아의 김모아 셰프에게 악수를 청했다. 이는 잘 먹었다는 선생 나름의 감사 인사였다.

시몬 드 보부아르, 장 폴 사르트르, 알베르 카뮈, 마르그리트 뒤라스 등과 와인을 마시며 토론하던 단골 카페 레 되 마고의 테라스에 앉은 피터 현.
피터 현 선생은 뉴욕에서 오랫동안 살았지만 미국 음식에는 늘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프랑스 음식이 최고고 동양에서는 중국음식이 최고라고 여겼죠. 미국 사람은 음식을 모른다고 불평했어요. 레스토랑 다니엘도 뉴욕에서는 최고 식당인데 음식이 그게 뭐냐고 핀잔을 줬죠. 여기서 프렌치 레스토랑 갈 돈을 아껴서 파리에 가서 먹자고 하셨죠.” 파리에서 자주 가는 식당은 유서 깊은 레스토랑이자 미쉐린 가이드 3스타 레스토랑인 기 사부아였다. 조엘 로부숑이 운영하는 레스토랑도 좋아했다. 단골인 카페 레 되 마고에는 아직도 선생의 사진이 걸려 있다. 1950년대부터 꾸준히 찾던 중식당도 있다. 천하낙원(엠파이어 셀레스트, L’Empire Celeste)이다. 가난한 파리 생활을 이어가던 선생에게 주인 할머니가 외상으로 음식을 주던 곳이다. 지금은 손녀딸이 운영하는데 그녀도 선생을 기억한다. “여름에 파리로 가면 주말에 꼭 들렀어요. 손으로 쥐어서 만든 만두가 맛있는데 늘 카베르네 소비뇽을 곁들였죠. 선생님에게 음식은 삶이었어요. 선생님에게는 두 가지 표정이 있는데 음식이 별로라는 표정과 아이 같은 해맑은 웃음이었죠. 배가 고파도 아무거나 먹지 않았어요. 시시한 음식이나 식당이라서가 아니에요. 맛있는 음식과 와인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지 찾아갔죠. 선생님을 보면서 그렇게 생각했어요. 미식가는 맛있는 음식을 먹는 사람이 아니라 음식에 대한 존경심과 그 음식이 만들어지기까지 지나온 과정, 어떻게 이런 음식이 만들어졌는지에 대한 호기심을 가진 사람이라고요.”
평생 수많은 글을 쓴 선생이지만 음식을 평하는 글은 쓰지 않았다. 추측하건대 음식에 대한 존경심 때문이었으리라. 다만 ‘먹는 삶’에 관한 글은 조금 남아 있다. 선생의 회고록에 나오는 글을 옮겨 적는다. 여기에 미식가로서의, 미식가의 먹는 행위에 대한, 그리고 무엇보다 음식을 사랑하는 사람으로서의 면모가 숨어 있다. 그리고 반추해본다. 이 시대의 미식가는 누구인가. “얼굴 한복판에 있는 코는 한낱 장식용이 아니라 여러 가지 냄새와 향기를 맡아서 즐기거나 기억하기 위한 주요 후각기관이다. 마찬가지로 입천장의 맛돌기는 여러 가지 맛의 서로 다른 정도까지 예민하게 느끼고 기억해내도록 훈련될 수 있다. 다른 감각기관도 그렇겠지만 후각과 미각은 즉각적인 사용가치를 발휘한다. 무엇이 타는 냄새로 화재를 경고해준다. 고기가 질기면 뱉어버린다. 물론 다른 감각과 마찬가지로 후각과 미각도 교육하고 훈련하기에 따라서는 정말 탐미적 쾌락이나 관능적 즐거움의 원천이 될 수 있다. 좋든 싫든 인간은 매일 먹고 마실 수밖에 없는데 하루의 식사를 의무나 지겨운 일로 여기기보다는 즐거운 취미로 삼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 요리학이 우리에게 제시하는 바는 바로 단조로움을 피하는 법과 여러 가지 음(飮)과 식(食) 속에서 조화를 이루는 법이다. 세계적으로 최고급 음식 문화의 다양성은 상상 이상으로 크다. 그 최고급 음식을 식탁에 차리기 위한 요리법도 헤아릴 수 없이 많다. 그러므로 일상 밥상을 아무렇게나 단조롭게 차리는 것은 변명의 여지가 없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