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MERICAN BEARTY & THE BEA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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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에비에이터 디자인의 영감을 암시하는 사진 몇 장이 있다. 우아한 발레리나의 춤사위, 창공을 누비는 글라이더의 비행, 치켜세운 매끈한 손가락과 노을이 깃든 바닷가 별장의 테라스가 그것이다. 그러고 보니 매끈하게 빚어낸 실루엣과 테일 라인이 보트를 닮았다. 항공기 터빈과 흡사한 역동적인 휠 디자인과 에어플레인 행어는 어떻고! 앞으로 출시될 링컨의 SUV 군단은 ‘여행’을 테마로 한 이름을 부여받는다니 뜻 모를 알파벳을 조합하던 시절보다는 훨씬 나은 선택이다.
자꾸만 들여다보니 어딘지 모르게 실루엣이 랜드로버의 아이코닉 직선과 흡사하다. 문득 치프 디자이너의 이력이 궁금하다. 맞다. 데이비드 우드하우스는 재규어 랜드로버 시절부터 PAG를 거쳐 포드와 링컨에서 럭셔리 감성을 매만졌던 디자이너다. 올해 6월부터 닛산의 디자인 수장이 되었으니 ‘콰이트 플라이트’ 철학의 정수는 오롯이 에비에이터의 몫이 될 듯하다. 쉘비 GR1과 포드 리플렉스 시절부터 팬이었고 링컨 에비에이터 콘셉트에 감동했던 터라 그의 디자인 철학을 직접 듣고 싶었으나 그런 이유로 만나지 못해 아쉬웠다.
미리 세팅된 내비게이션은 우리를 욘트빌 외곽 산길로 안내했다. ‘대형 SUV를 테스트하는데 어찌 이런 코스를 골랐을까?’라는 의구심을 품고 액셀러레이터를 밟았다. 질주 본능을 품은 V6 터보 엔진은 활기차다 못해 터질 듯하다. 10단 변속기가 굼뜨지 않을까 우려했는데 아주 매끈하고 기민하다. 심지어 10단은 채 넣어보지도 못했다. 무려 2.2톤에 이르는 육중한 SUV에 대한 선입견은 이내 무너졌다. 나도 모르게 입꼬리에 살짝 고였던 조소가 가셨다. 이건 스포츠카의 역동성이다.
손끝에서 조율된 지시에 따라 에비에이터는 좁고 가파른 산길에 완벽하게 적응하며 내달린다. 차선을 가득 채우고는 천리마처럼 내달리는 기세에 맞은 편 운전자들이 눈을 휘둥그레 뜨고 쳐다볼 법하다. 후륜 베이스의 사륜구동은 감성 터지도록 운전자를 자극한다. 50:50 구동 배분의 완벽한 밸런스를 치켜세우고 싶다. 이토록 재미난 공룡이라니, 할 말을 잃었다. 오직 질주에만 몰두한다. 폭이 2m가 넘는 거대한 덩치지만 중형 세단을 운전하듯 부담스럽지 않다. 아주 만족스럽다.



그런데 세상에, 에비에이터 그랜드 투어링은 하이브리드 심장마저 품었다. 두 개의 심장이 시너지를 일으켜 야누스적인 파워를 끌어낸다. 색다른 매력이다. 과급기로 무장한 데다 영구 자석으로 아낌없는 파워를 보탠다. 폭풍 같은 질주지만 고요하고 매끈하다. 제품 설명회 때 들었던 미사여구가 자연스레 떠올랐다. “어그레시브가 아니라 인텐셔널이에요. 한층 강력하면서도 섬세하게 만든 항공기의 움직임이죠. 그래서 우리는 ‘콰이트 플라이트’라고 부른답니다.” 그래, 당신들 말이 다 맞소이다.
실로 엄청나다. 494마력, 86.41kg·m의 최대 토크를 갖춘 풀 파워 스포츠 사륜구동 SUV! 그런데 7인승 미니밴으로도 변신한다. 과시적인 몸짓으로 네 바퀴를 아스팔트에 짓이기며 도로를 장악하다가도 어슴푸레한 새벽에는 유령처럼 은밀하게 차고로 스며들 수도 있다는 얘기다. 모든 건 운전자의 의지와 발끝을 까딱이는 행위에 달렸다. 어떤 스타일을 고수해도 나름의 맛이 충만하다. 고성능을 강조한 하이브리드 모델만의 매력이다.
“와, 이건 뛰쳐나가는 파워가 확실히 달라요. 엔진 사운드는 다소 줄어든 느낌인데 몸으로 체감하는 가속력이 한 급 위의 차 같네요.” 영상 녹화를 위해 끊임없이 멘트를 날리던 파트너가 입을 꾹 다물고는 한참을 운전에 집중한 뒤 내뱉은 첫 마디였다. 앞서 시승했던 에비에이터가 화끈했다면 에비에이터 그랜드 투어링은 폭풍처럼 강렬했다. 안락하고 강력하며 우아한 자동차라는 데 이견이 없다. 언뜻 모순적인 특징이 한데 모여들어 높은 점수를 기록한다.
오직 전기모터만 쓰는 퓨어 EV 모드에서는 이론상 3~4시간 충전해 약 40km를 달릴 수 있다. 실제로는 주행 여건에 따라 달라지는데 이번 주행 테스트에서는 32km를 달려냈다. 도로 환경과 운전자의 습관에 따라 달라지는 ‘스마트’ 하이브리드 시스템이다. 내리막길을 달릴 때 남는 힘은 배터리로 75%까지 재충전된다. 유해한 이산화탄소를 내뿜지 않고도 30km(과격했던 시승 기록)를 달린다니 자그마한 충전기 하나 집에 달아두면 출퇴근쯤은 환경론자로 살아갈 수 있다는 얘기다.
재미난 게 평소에는 스쿼시 고무공처럼 쫀득하게 감기는 운전대지만 퓨어 EV 모드에서는 새끼손가락으로 휘감아도 돌아갈 정도로 가벼워진다. 운전 모드에 따라 특성이 상당히 바뀌는데, 기분 내키는 대로 골라 쓰는 게 아주 매력적이다. 링컨 코-파일럿 360이라 부르는 운전자 보조 시스템 기능 또한 차고 넘친다. 드라이브 어시스트 기능을 켠 채 운전대를 잡지 않으면 정확하게 15초 뒤부터 속도가 줄어들어 멈춘다. 운전자의 신변에 이상이 생겼다고 판단한 데 따른 결정인데 테슬라 오토파일럿의 사고 사례로 볼 때 적절한 기능이다. 자연스럽게 천천히 도로 바깥 차선에 안전하게 멈추어 선다.

서스펜션은 군데군데 널려 있는 포트홀과 교량 이음매를 싹 지우고 매만지며 달린다. 로드 프리뷰 기술은 12개의 센서와 4개의 전방 카메라로 도로를 미리 스캔해 적절한 감쇄력과 리바운드 반응 속도를 조절해 승차감을 매만진다. 어댑티브 서스펜션은 범프를 만날 때 내심 예상했던 움직임을 완전히 상쇄시킨다. 노틸러스만 해도 서스펜션의 단단한 움직임이 ‘투닥탁’ 노출되는데 에비에이터는 시종일관 진중하고 매끈하다. 출렁거림 하나 없이 스포티하면서도 편안한 승차감을 조율하기란 쉽지 않다. 21인치 대구경 타이어를 달고도 구름에 달 가듯이 이렇게 편안하다니. 첨단 기술은 이처럼 우아하게 구현되어야 한다.
젊은 링컨이다. 그렇다고 커다란 액정 하나에 모든 기능을 담아놓은 불친절은 없다. 노인처럼 돋보기를 끼고 고개를 치켜든 채 디지털 버튼을 누를 필요가 없다는 얘기다. 두툼한 막대기를 손으로 붙들고 휘젓거나, 운전대 옆에 붙은 자그마한 작대기를 딸각거릴 필요도 없다. 링컨의 수평 나열된 버튼형 기어 셀렉터는 어쿠스틱 피아노 건반을 두드리는 것처럼 아주 고급스럽다. 자주 쓰는 오디오나 크루즈컨트롤 같은 버튼류는 운전대에 말끔하게 심어놨다. 평소 익숙하게 사용했던 감각이라 이질감이 적다.


예술 같은 승차감에는 오피스 가구의 명가가 손을 보탠 마사지 시트가 일조한다. 알 만한 사람은 고개를 끄덕이는 허먼 밀러다. 몸의 굴곡을 감싸는 듯한 편안함과 등을 매만지는 안마의 손길이 잘 어우러진다. 이처럼 세심하게 세팅할 수 있는 럭셔리 소파는 대기업 중역 사무실에도 없는 호사임이 분명하다. 산길을 오르내릴 때 과격한 움직임을 꽉 잡아주지 못한 홀딩 감각이 유일하게 아쉽지만 내 차가 되는 순간 이내 사라질 불만이다.
반면 2열에 입성하면 다소 실망스럽다. 운전석에 앉은 것처럼 화려하고 고급스러워 승객이 살짝 압도되어야 제맛인데, 검박하고 단정하다. 고급스러운 리무진 시트를 기대했는데 접이식 모던 체어 같은 느낌이다. 조지 넬슨이 설계한 심플한 공간에 앉아 있는 기분이랄까? 캡틴 체어와 센터콘솔로 꾸민 블랙 레이블 모델조차 그렇다. 분명 우리나라에 들어오면 골프 셔틀로도 쓰일 텐데 세그먼트를 감안해 최상급 트림에 한해 뒷좌석 독립 시트를 앞좌석만큼만 고급스럽게 만들어줬으면 바랄 게 없겠다. 볼보 XC90 엑설런스와 BMW X7의 그것처럼.

AMERICAN BEARTY & THE BEAST
에비에이터는 핵심 가치를 두루 설파한다. 계산기를 두드리며 치열한 셈법으로 뽑아낸 자동차와 대척점에 있다. 494마력이라는 수치는 풍요로움을 담보한다. 에비에이터는 고속도로의 황태자이자 산악 도로의 지배자다. 나직하게 속삭이는 전기차이자 느긋하게 순항하는 골프 크루저이기도 하다. 주인 잘못 만나 차고 신세로 전락할 이유가 없다. 모든 게 가능한 전천후 모델이다. 그러면서도 가격(북미 기준)마저 합리적이다. “내가 탈 차라면 당연히 모든 걸 갖춘 그랜드 투어링 블랙 레이블이죠.” 에비에이터의 아버지이자 치프 엔지니어인 존 데이비스가 웃으며 일침을 놓는다. 반론을 제기할 수도, 의례적인 얘기라고 넘길 수도 없었다. 링컨 에비에이터 그랜드 투어링, 풍요로움은 어디에나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