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를 앞서가는 디자이너 정욱준이 만들고 싶은 것 | 에스콰이어 코리아 (Esquire Korea)

“이번 파리 컬렉션이 25번째였나, 헷갈리네.” 정욱준에게 참여 횟수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아 보였다. 이미 ‘파리에서 활동하는 한국인 디자이너’ 대신 ‘준지’라는 타이틀이 더 함축적이니까. 그는 조명과 가구를 만들고 싶다고 했다. | 준지,정욱준,JUUN.J,파리 컬렉션,패션 트렌드

「  Once Upon A Time In Paris 」   Once Upon A Time In Paris 벌써 10월이네요. 휴가는 다녀왔나요? 못 갔습니다. 남성 컬렉션이 끝나니 7월이었고 그 후 바로 여성복을 준비했어요. 얼마 전에는 1월에 있을 남성복 런웨이 때문에 미국 보스턴에 갔다 왔고요. 보스턴에는 왜 간 거예요? 리복과 협업을 준비 중인데 본사가 보스턴에 있어요. 일 때문에 간 거지만 진짜 좋았어요. 패션이랄 게 없는 도시의 모습이 참 아름답더라고요. 도시는 평화롭고 사람들은 느긋하고요. 아무리 좋아도 출장은 휴가와 다르잖아요? 그럼 여행은 거의 못 다니겠네요? 바쁜 건 둘째치고 키우는 강아지 걱정에 오래 집을 못 비워요. 다른 사람에게 못 맡기겠더라고요. 맡기고 떠나봐야 걱정되고 자꾸 눈에 밟히고. 그래서 1년에 두 번 3박 4일 정도 강아지와 함께 제주도를 가요. 케이지 무게까지 합쳐 5kg 이하면 기내에 함께 탈 수 있거든요. 그때가 일 년 중 가장 행복해요. 출장이나 여행 때 사 오는 물건이 있나요? 그릇과 조명을 사 와요. 수하물로 부치지 못하고 일일이 들고 와야 해서 번거롭고 힘든데, 그래도 이렇게 하나씩 사서 집에 놓는 재미가 있더라고요. 지금까지 파리를 70번은 갔을 텐데 매번 하나씩 사 왔어요. 디자이너 제품도 구입하고 빈티지 물건도 사고요. 그러다 보면 물건이 너무 많아지잖아요? 저는 물건을 충동적으로 산 적이 없어요. 아무리 마음에 들어도 그 자리를 떠나서 차분히 생각해봐요. 그게 정말 필요한지, 두고두고 만족할지. 아무리 사고 싶어도 불필요하게 쌓인다 싶으면 안 사요. 남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옷도 그리 많지 않아요. 스스로도 좀 피곤한데, 덕분에 집에 필요 없는 물건이 없죠. 얼마 전에 도산공원 근처에 플래그십 스토어를 열었어요. 왜 이 지역이에요? 매장을 낸다면 한남동 아니면 도산공원 근처였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막연히 했어요. 운이 좋아 한남동에 팝업 스토어를 열었고, 반응이 좋아 지금까지 계속 운영하고 있어요. 자연스럽게 이번 매장은 도산공원 근처를 알아보게 됐죠. 준지 플래그십 스토어에 앉아 있으니 낯선 행성에 와 있는 기분이 들더라고요. 제가 매장을 지을 때 가장 강조한 건 ‘덩어리감’이었어요. 여느 매장처럼 바닥, 기둥, 천장이 명확하게 구분된 정형화된 모습이 아니라 그 세 요소가 한데 섞인 공간요. 어떻게 보이길 의도한 게 아니라, 어떤 식으로든 보이길 원했어요. 피라미드, 우주 공간, 교회. 보는 사람 마음대로 해석할 수 있도록. 그리고 전체가 검정이죠. 가장 아름다운 색이니까요. 모든 색을  아우르고 있죠. 검정이 준지를 대표하는 색이라면 상징적인 형태는 기하학적 실루엣이잖아요. 무턱대고 부풀리거나 조여서 멋진 실루엣이 나오는 건 아닌 거 같아요. 남성복에서 가장 중요한 제품은 슈트, 기술은 테일러링이에요. 오버사이즈를 만들어도 슈트를 만들 듯 접근하는 거죠. 그다음부터는 조형적인 감각으로 다듬어가는 거예요. ‘구조적으로 비례가 아름다운가’ 스스로 질문을 던지며 계속 수정해나가는 거죠. 경우의 수를 굉장히 많이 만들어봐요. 이제는 경험이 쌓였고요. 2019 F/W 시즌에 캐나다구스와 협업한 외투를 대거 선보였어요. 누가 먼저 제안했어요? 캐나다구스 측에서 제안이 왔어요. 좋아하는 브랜드라 냉큼 수락했죠. 겨울이면 늘 캐나다구스의 익스페디션 모델을 입어서 익숙하고, 무엇보다 제가 협업을 좋아하기도 하고요. 그 전까지 정통 아웃도어 브랜드와 작업한 적이 없었어요. 협업이라는 게 한쪽이 다른 한쪽에 무언가를 넘기고 끝나는 게 아니라 계속 주고받으면서 ‘티키타카’를 해야 해요. 그러다 보면 자연스레 그들의 노하우가 드러나고 배우게 되죠. 이번 작업에서는 다운 충전재의 종류와 삽입 방법, 겉감의 소재에 대해 많이 알게 됐어요. 여성복도 론칭했어요. 입어보지 않는 옷을 어떻게 만들 수 있어요? 그간 준지의 고객을 보면 여성의 비중이 꽤 높았어요. 실제로 준지 남성복을 입은 여성을 많이 목격했는데 그때마다 약간 아쉬웠어요. ‘여성복 패턴으로 만들었다면 더 멋있었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래서 론칭했어요. 여성복 패턴을 배웠기 때문에 만들기 어렵지는 않았어요. 안타깝다면 직접 입어보고 체험해볼 수 없다는 것인데, 그렇기에 디자이너로서 판타지가 생기더라고요. 이제 와 생각해보니 2016년 소라야마 하지메, 2013년 앰부시와의 협업은 시대를 앞서갔다 싶어요. 가장 기억에 남는 협업은 무엇인가요? 제 대학 시절 우상이 소라야마 하지메였어요. 극사실주의 일러스트가 당시에 유행이긴 했지만 그 누구도 이 사람처럼 미래적이지는 않았죠. 그의 일러스트 책을 사려고 한참 돈을 모아 중국 대사관 앞에 있는 서점에 갔을 때의 기분이 아직도 생생해요. 몇 년 전 피티 워모에 게스트 디자이너로 초청받아 컬렉션을 만들 때 콘셉트가 ‘로봇’이었어요. 로봇과 테일러링을 결합한 옷을 만들고 싶었거든요. 갑자기 소라야마 하지메가 생각나 직접 메일을 보냈어요. 메일에 뭐라고 썼나요? ‘대학 시절부터 당신을 정말 존경했고 아직도 그 작품을 잊지 못한다. 이번에 피티 워모라는 큰 무대에서 런웨이를 여는데 당신과 함께 작업하고 싶다’고요. 내용이 특별하진 않지만 진심을 다해 썼어요. 감동을 주려고 애썼달까. 곧 수락 메일을 받았어요. 2014 F/W에는 삼성 갤럭시 탭을 런웨이로 내보냈어요. 당시에는 제4차 산업혁명, 디지털 같은 용어가 화두였어요. 그래서 그런 요소를 런웨이에 녹여내고 싶었죠. 실제로 제가 삼성 갤럭시 휴대폰을 꽤 오랫동안 사용했는데 일상에서나 작업할 때 자주 이용하는 디지털 기기를 액세서리처럼 활용해보고 싶었어요. 스케치 작업을 할 때도 휴대폰을 사용하나요? 빠르게 스쳐가는 아이디어를 어딘가에 적거나 그려야 하는데, 그러기에 휴대폰만 한 게 없잖아요. 오래전부터 삼성 휴대폰을 써왔고, 지금은 갤럭시 노트10을 사용해요. 화면이 선명하고 반응 속도도 빠른 데다 펜이 있어 참 편해요. 제품이나 장르 구분 없이 누군가와 함께 작업할 수 있다면 누구와 작업해보고 싶어요? 조명이나 가구 쪽 브랜드 혹은 디자이너와 협업하고 싶어요. 준지를 하우스 브랜드로 만들고 싶거든요. 매장에 가면 옷도 있지만 향수도 있고 의자나 패브릭도 있는 브랜드요. 침대나 소파처럼 본격적으로 가구를 만들고 싶진 않고 준지스러운 테이블과 의자, 조명을 만들어보면 어떨까 하는 거죠. 함께 작업해보고 싶은 가구 디자이너는요? 전부 돌아가셨어요. 과거에 거장이 많았죠…. 그간의 인터뷰를 보면 ‘조명을 만들고 싶다’는 이야기가 많이 나와요. 아무리 비싸고 좋은 물건이 가득한 공간이라도 그곳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단연코 빛이에요. 이 사실을 19세 때 처음 파리에 가서 깨달았죠. 집에서는 어떤 조명을 쓰나요? 좋아하는 브랜드는 없어요. 특정 브랜드의 한두 제품만 좋아하거든요. 예를 들어 집 식탁 위에 톰 딕슨의 펜던트 조명을 달아놓았는데 톰 딕슨에서는 딱 이 제품만 좋아요. 그리고 마틴 마르지엘라가 있던 시절의 마틴 마르지엘라에서 보드카, 럼 등의 술병으로 만든 조명이 나왔어요. 그걸 어렵게 구해서 현관 앞에 뒀죠. 마지막 질문 드릴게요. 길티 플레저가 있나요? 술. 저는 소주랑 레드 와인을 즐겨 마셔요. 저녁 때 음악 틀어놓고 와인 한 병 마시면 기분이 좋아지거든요. 생각도 정리되고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