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2년생 김지영>
<82년생 김지영>은 제목 그대로 김지영(정유미)이라는 여성에 관한 영화다. 김지영은 허구적인 세계 속에 자리한 특정한 개인이지만 현실의 여성들을 대변하는 총합적인 존재이기도 하다. 그는 매일같이 육아와 가사를 해결하는 전업주부다. 집안일을 하고 아이를 돌보는 하루하루가 쳇바퀴처럼 돌아간다. 남편의 아침을 차려주고 출근시킨 뒤 잠시 앉아 한숨을 돌리니 아이의 울음소리가 들린다. 하루 일과가 다시 시작됨을 알리는 알람처럼. 그나마 자상하고 배려심 많은 남편 정대현(공유)은 아내의 고생을 덜어주려고 노력한다. 일찍 퇴근해 집에 돌아와서 어린 딸의 목욕을 돕고, 시댁에서 고생하는 아내를 위해 어머니 눈칫밥을 먹으면서도 설거지를 대신한다. 하지만 대현에게 가사는 ‘해줄게’라며 도와주는 일이다. 지영은 어쩔 수 없는 벽을 느낀다. 그래도 하루하루가 그럭저럭 흘러가는 것 같다. 정작 김지영만 모르는 김지영의 문제를 알기 전까진.
“그냥 옛날 생각 자꾸 나고, 해 질 무렵에는 가슴이 쿵 하고 내려앉는데, 그래도 괜찮아.” 아내 지영의 말을 듣는 대현의 표정이 심상치 않다. 아내만 몰랐다. 자신이 이상하다는 것을. 아내는 언젠가부터 자신이 아닌 존재가 돼서 말을 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장모님이었다. 장난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귀신이 들린 것인지, 병에 걸린 것인지 알 수 없었지만 아내에게 문제가 생긴 건 확실했다. 그래서 대현은 자신에게 어떤 문제가 있는지 전혀 알지 못하는 아내를 대신해 의사를 찾아간다. 아내의 증상을 말하고 상담을 받는다. 남편은 고민한다. 아내를 치료받게 하고 싶지만 상처를 입히고 싶진 않다. 그 와중에 지영은 회사에 출근하는 젊은 여자를 보며 자신이 다니던 첫 회사에서의 기억을 떠올린다. 마음속에서 꿈틀거리는 무언가가 느껴진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자면 <82년생 김지영>은 올해 한국 영화계가 수확한 성취 중 하나라 해도 부족함이 없는 작품이다. 원작의 순행적인 서사를 반복적인 플래시백 구조로 재구성하며 영화만의 화법을 확보한 각색, 미려한 시선과 담담한 온도를 일관성 있게 유지하는 연출에는 빠지는 구석이나 지적할 만한 흠이 딱히 없다. 무엇보다도 영화에 생생한 숨을 불어넣은 배우들의 호연은 <82년생 김지영>이 주목하는 일상의 풍경과 현실의 고민을 살아 있는 울림으로 끌어올린다. <82년생 김지영>을 여는 마스터키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정유미는 극사실적인 존재감을 통해 인물에 대한 깊은 공감대를 이끌어낸다.

<82년생 김지영>은 결국 우리 모두의 이야기이자 우리 모두에게 가능한 해피 엔딩이다.
<82년생 김지영>은 한국 사회에서 여성들이 감내해야 하는 고충을 직접적으로 드러내면서도 함께 고민할 수 있는 장을 열어주고자 마련된 무대 같다. 여직원이 타 온 커피를 마시면서 육아휴직을 마치고 돌아온 여직원 앞에서 ‘엄마가 키우지 않으면 반항심이 생긴다’는 말을 농담이랍시고 하는 남자 상사의 파렴치함과 졸업을 앞둔 딸의 취업 가능성이 불투명하자 속상한 마음을 감추고 시집갈 준비나 하라는 아버지의 엇나간 부성애가 교차한다. 마음을 쓰는 결은 다르지만 동일한 관성에서 비롯된 말은 결국 여성이라는 존재가 육아와 가사의 주체여야만 한다는 구태의연한 뿌리에서 자라난 것이다.
하지만 영화는 그들의 혐오를 비난하거나 힐난하는 것보다 오랜 시간 동안 혐오를 감당하며 살아온 여성들의 얼굴과 인생을 마주하길 권한다. 그것이 여성 혐오라는 걸 생각해보지도 않았던 세대와 그것이 여성 차별임을 생각해볼 필요도 없었던 시대를 거듭 감당해야 하는 여자들의 굳은 얼굴, <82년생 김지영>은 그 얼굴을 통해 시대를 비추는 영화다. 그럼으로써 공중화장실 곳곳에 몰카가 없는지 살펴야 하는 여자들의 끔찍함과 ‘맘충’이라는 혐오까지 뒤집어쓴 채 육아를 감당해야 하는 엄마들의 비참함이 방치되고 있는 사회적 현실을 환기시킨다. 부조리한 현실을 인내하는 여성들의 주변에 산재한 차별과 혐오가 결코 그들 개인이 감당해야 할 문제가 아님을 실감하게 만든다. 당연한 것이라 치부함으로써 되레 당연하게 해결되지 않았던 문제의 심각성을 환기시킨다. 뉴스 속의 사건이 아니라 사람이 처한 현실임을 깨닫게 만든다. 이해가 아닌 공감을 권한다.
이렇듯 <82년생 김지영>은 한국 사회와 가정에 방치된 오랜 비극에 관한 이야기다. 그 주인공이 여성인 이유는 한국 가정사의 오래된 비극의 볼모가 바로 여성이었기 때문이다. 육아라는 전쟁과 출산이라는 지옥 안에서 집안일 하는 사람으로 규정돼버린 엄마 세대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요즘의 여성들은 전통적 가치관을 고수하는 가족 문화 전체와 대립하거나 포기해야 하는 억울한 상황에 놓여 있다. <82년생 김지영>은 바로 그런 체제의 중력에 저항할 겨를도 없이 끌려들어간 여성에 관한 이야기일 수밖에 없다. 한국의 가족 신화를 지탱하기 위해 대를 이어 가사 노동에 투입되길 강요당하는 현대 여성들의 괴리감을 마주한다는 것은 그런 입장을 강요당하는 여성 당사자들에게는 생생한 재현일 것이다. 또 그런 입장을 방관해온 가족 구성원들에게는 뚜렷하게 초점을 맞춰보는 경험일 것이다.

<82년생 김지영>은 결국 우리 모두의 이야기이자 우리 모두에게 가능한 해피 엔딩이다.
<82년생 김지영>은 그렇게 맑은 종과 같이 울리는 물음표를 쥐여주고 말을 거는 영화다. 나와 우리 모두가 알아야 하는 어떤 이야기. 너무 잘 알기 때문에 감당하는 법에 익숙해진 여자들과 잘 몰랐기 때문에 방관하는 데 익숙해진 남자들의 시대는 지났다고, 그러니 새로운 시대를 나란히 걷자고 손을 내민다. 온화하면서도 단호하게. 영화가 원작보다 따듯한 결말을 선택한 건 그래서다. 그 결말은 결국 객석의 관객을 향해 내미는 손이다. 그 누구의 무엇이 아닌 너와 나로서, 서로의 가능성을 존중할 수 있는 우리가 될 수 있다는 제안. <82년생 김지영>은 결국 우리 모두의 이야기이자 우리 모두에게 가능한 해피 엔딩이다. 더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을 것이다. 팥빵이 아닌 크림빵을 들고 찾아가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