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의 여성 서사 영화와 남자 관객들 | 에스콰이어 코리아 (Esquire Korea)

남자도 ‘여성 서사 영화’를 제대로 감상할 수 있는가? 올해 개봉한 여성 감독의 작품들에서 우리는 어떤 지점을 놓쳤는가? 성별을 가늠키 어려운 영화평론가 듀나에게 이런 질문을 던졌고, 장문의 원고를 받았다.


82년생 김지영

82년생 김지영

2019년은 국내 여성 감독들의 작품이 유달리 주목을 받은 해였다. 이 문장은 조금 신중하게 읽을 필요가 있다. 한국 영화계에 격렬한 여풍이 불어 충무로에 ‘여초 현상’이 일어난 적은 없었다. 2019년 개봉한 한국 영화 중 여성 감독의 작품은 여전히 10% 미만이며, 그중 상당수는 가을 몇 개월 동안 몇 안 되는 아트하우스 몇 개 상영관을 두고 경쟁을 해야 했다. 특별히 영화에 관심이 없거나 아트하우스 극장을 이용할 수 없는 많은 사람에게 이들 작품 대부분은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위의 문단 역시 조금 조심스럽게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2019년은 여성 감독이 만든 상업 영화 상당수가 손익분기점을 넘긴 해이기도 하다. 그중 몇 편은 남성 중심 이야기이기 때문에 감독이 여성이라는 사실이 눈에 잘 들어오지 않았을 뿐이다. <돈> <말모이> 같은 영화가 이에 해당된다. 어느 쪽을 보더라도 우리는 변화의 시작(또는 시작의 시작)을 보고 있다. 그리고 이런 시기가 대부분 그렇듯 창작자와 관객의 변화 속도가 일치하지는 않는다. 창작자와 관객은 단일한 존재가 아니므로 이 현상은 말보다 더 복잡하지만, 여성 서사 영화의 경우 관객을 비교적 단순하게 분류할 수 있을 것 같다. 상당수의 남자 관객은 이들의 작품을 따라잡지 못한다. 갈등과 충돌이 시작된다.

벌새

벌새

여기서부터 이 글은 남자 관객들의 지식과 경험의 한계를 설명하고 개선을 호소하는 친절한 내용으로 이어져야 한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앞으로 열거할 이유 때문에 그런 우아한 글이 나오기는 어렵다. 시작해보자. 이 현상이 가장 노골적으로 드러나는 작품은 조남주 작가의 동명 베스트셀러를 영화화한 김도영 감독의 <82년생 김지영>이다. 아마 이 갈등의 가장 어이없고 우스꽝스러운 면모를 보여주는 작품일 것이다. 개봉도 되기 전에 엄청난 악플과 ‘별점 테러’ 공격에 시달린 영화다. 어느 정도였느냐면, 모 남초 사이트에 누군가가 이 영화의 예고편을 올리자 게시판 규정 위반으로 신고가 됐을 정도다. 더 어이가 없는 일이 뭐였는지 말해볼까? 해당 사이트의 일부는 예고편을 보았고, 어리둥절해했다. “왜 저 영화에 빙의(憑依)가 들어가지? 장르가 호러로 바뀌었나? 흥행하려고 내용을 고쳤나?” 다시 말해 이 영화와 소설이 싫다고 난리를 치고 욕설을 퍼붓고 어떻게든 흠집을 내려던 무리 상당수는 세계적 베스트셀러이고 가독성도 엄청나게 높으며 별로 길지도 않은 소설의 첫 몇 페이지도 읽지 않았던 것이다. 개중 몇은 이 책이 소설인지도 몰랐고 작가가 김지영인 줄 알았다. 이러면 숨이 막힐 수밖에 없다. 관객의 입장이 갈라지는 순간은 영화가 끝난 뒤여야 한다. 하지만 우리는 영화를 보지도 않고 볼 생각도 없는 사람들이 의미 없는 목소리를 시끄럽게 내는 시대를 산다. 이제 창작자는 공감 능력이 부족한 게 아니라 공감 자체를 거부하는 사람들을 상대해야 한다. 다행이라면 이들이 목소리의 데시벨만큼 흥행 면에서도 의미 있는 존재인 건 아니라는 것이다. 이 글을 쓰는 동안에도 <82년생 김지영>은 무심하게 손익분기점을 넘기고 흥행하는 중이다. <82년생 김지영>을 직접 보고 불평하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이 단계에서도 공감 거부 현상이 보인다. 여러 차례 지적되었듯 <82년생 김지영>은 공감과 설명을 위해 소위 ‘예술적’으로 분류되는 많은 장치를 포기한 작품이다. 다시 말해 굉장히 직설적이고, 수월하며, 보편적인 작품이다. 이 큰 그림을 오독하기 위해서는 오히려 적극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이런 선택에도 불구하고 관객이 영화에 설득되는 것을 마치 에일리언에게 임신이라도 당하는 것처럼 두려워한다면 창작자로서 할 수 있는 게 없다. 그렇다고 <82년생 김지영>이 오독 불가능하거나, 마음이 열린 관객들의 의견이 하나로 수렴될 수밖에 없는 영화라는 말은 또 아니다. 어느 영화도 그렇게 단순할 수 없다. 이 영화에서 가장 영리하면서도 사람들을 혼란스럽게 하는 ‘게임’은 이 이야기가 극단적인 불행을 이야기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김지영은 나쁘지 않은 환경의 수도권 아파트에 사는 중산층 기혼자다. 대한민국 주류 사회가 ‘여자의 행복’이라고 꾸준히 세뇌하는 삶을 살고 있는 이 사람의 고통이 무엇인지 이해하려면 ‘정상성의 환상’이라는 허들을 넘어야 한다. 대현(김지영의 남편 역, 공유 분)처럼 ‘좋은 남편’을 두고 있는데 저 여자는 왜 아직도 불만인가. 대현 정도인데도 괜찮은 남편이 아니라고? 그렇다면 나의 위치는 뭐지? 이 사람들이 생각하는 ‘좋은 남편’이 되려면 나는 무엇을 또 ‘희생’해야 하지? 그건 각자 알아서 생각할 일이다. 내가 말할 수 있는 건, 이 정도까지 남자 관객들을 혼란시킬 수 있다면 영화는 자기 일을 했다는 것이다. 예술 작품이 하는 일은 질문을 던지는 것이지 답을 챙겨주는 것이 아니다. 다른 영화로 넘어가보자. <82년생 김지영>은 흥행 히트작으로 많은 사람들이 보았고 (그중 상당수는 아무 정보값도 없는 소음에 불과했지만 그래도) 적극적인 피드백이 있었다. 하지만 앞으로 이야기할 작품들은 모두 아트하우스 상영관에서 제한 상영되었고 당연히 본 사람도 적다. 그리고 아트하우스 영화를 알아서 찾아가는 남성 관객이라면 <82년생 김지영>의 영화 정보에 악성 댓글을 남기는 남자 평균과 성격이 조금 다를 것이라고 생각해야 한다. 예를 들어 나는 <벌새>를 최다 관람한 관객이 남자라고 들었다. 그 관객에게 이 작품이 어떤 영화길래 그렇게 필사적으로 보았는지는 아는 척하고 싶지 않다. 세상에는 영화를 보는 수천만 가지 다양한 이유가 있다. 그러나 여전히 관객의 성별 차이는 존재한다. 김보라 감독의 <벌새>는 개중 가장 사랑을 받은 작품이고 GV(관련자 초청 시사)도 많았기 때문에 다양한 보고가 이루어지고 있다. 예를 들어 어떤 남성 관객들은 의도적으로 얄팍하게 그려진 캐릭터인 주인공의 아버지와 오빠에 과잉 집착하며 이들의 눈물을 과잉 해석한다. 그리고 GV 질의 시간에 감독에게 ‘다음에는 남자아이 이야기를 만들 생각이 없느냐’고 묻는다. 다시 말해 어떤 이들은 여자아이를 중심으로 한 보편 성장 서사로 만든 영화를 보면서도 끊임없이 남자에 이입하며, 남자들을 변명하고, 왜 남자가 더 없느냐고 묻는 것이다. 목소리 큰 사람이 꼭 다수는 아닐 것이다. 하지만 이들은 충분히 시선을 끌 만큼 꾸준히 GV에 등장했으며 종종 행사 자체를 물리적으로 위협하기도 했다. 이들에게 할 말은, 세상에는 여자가 주인공인 영화가 있으며 그게 존재한다는 것을 인정하라는 것밖에 없다. 이들에게 부족한 건 정보가 아니라 정보를 받아들이는 태도의 진지함이다. 어차피 1990년대에 여자 중학생이었던 아이의 이야기를 여자 관객이라고 해서 모두 단번에 따라갈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이후 영화들에 대해 이야기하는 건 더 까다롭다. <벌새>까지는 그래도 관람한(또는 관람하기를 거부한) 남자들의 반응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유은정 감독의 <밤의 문이 열린다>와 한가람 감독의 <아워 바디>에 대한 이들의 반응은 거의 찾을 수가 없다. 이 둘은 여러 가지 면에서 남자들의 반발심을 일으킬 영화는 아니었다. 그렇다고 안전한 영화였다는 말은 아니다. <밤의 문이 열린다>는 이 원고에서 다룬 영화 중 성별 진입 장벽이 가장 낮은 영화다. ‘나는 남자이기 때문에 이 영화를 이해 못 하겠다’는 핑계가 통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빈곤 청년들을 주인공으로 한 이 시간 여행 유령 이야기는 주인공이 어느 성별이라도 상관없는데, 그래도 남자 대신 여자를 택했다. 이 선택에는 당연히 정치적 의미가 있다. 하지만 영화의 난도를 높이지는 않는다. 여성 서사를 다룬 다른 영화들을 위협적으로 느낀다면 이 영화부터 시도해보기를 권한다.

아워 바디

아워 바디

한가람 감독의 <아워 바디>가 남자들의 반발심을 불러일으키지 않은 이유는 두 가지다. 일단 남자들이 많이 안 봤다. <82년생 김지영>처럼 안 봤으면서 두들겨 팰 이유도 찾지 못했고, 관람한 남자 관객들은 그냥 어리둥절해하며 토론에 끼어들지 않았다. 고시 공부를 포기하고 달리기에 집착하면서 다시 또 달리기 친구에게 집착하게 되는 이 영화에 대해, 부정적인 반응 대부분은 여자 관객에게서 나왔다. <아워 바디>의 내용은 어떤 여자가 자신의 욕망에 따라 아주 이상한 행동을 하는데 그 행동이 이해가 안 될뿐더러 종종 불편하기 짝이 없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많은 관객이 주인공이 중년 남자 상사와 섹스하는 장면을 싫어했다. 그런데 그 장면의 핵심은 이 작품이 진부한 욕망과 인간관계에 바탕을 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전혀 그렇지 않으며, 심지어 주인공 자신도 스스로의 욕망을 명쾌하게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이다. 앞에서 언급한 세 편의 영화는 모두 어느 범위를 커버하건 보편성에 호소하는 구석이 있지만 <아워 바디>는 보편성의 지원 없이 홀로 이상한 골목으로 달아난다. 이들 영화와 이에 대한 반응은 과도기적 시대의 스냅샷과 같다. 보편성에 호소하는 여자들의 이야기가 나오지만 남자들은 반발하고, 그 사이에 끼어 있는, 자신만의 욕망을 드러내는 여자의 이야기는 여자들에게도 온전히 환영받지 못한다. 전자를 기반으로 후자가 점점 늘어나며 이야기의 다양성을 확보해가는 과정을 따라가는 건 즐거울 것이다. 하지만 그러는 동안에도 우리는 쉽게 멈출 것 같지 않은 무의미한 불평의 소음을 견뎌야 할 것 같다. →
남자도 ‘여성 서사 영화’를 제대로 감상할 수 있는가? 올해 개봉한 여성 감독의 작품들에서 우리는 어떤 지점을 놓쳤는가? 성별을 가늠키 어려운 영화평론가 듀나에게 이런 질문을 던졌고, 장문의 원고를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