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년에 한가락 하던 기계들 '레트로 테크놀로지' | 에스콰이어 코리아 (Esquire Korea)

왕년에 한가락 하던 기계들, 죽지도 않고 또 왔소.


포노컷

포노컷

‘추팔’이라는 표현이 있다. ‘추억팔이’의 준말로, 복고 트렌드나 해당 시류에 기댄 마케팅을 낮잡아 이르는 말이다. 과히 멸칭인 셈. 물론 그 속에 깃든 경멸을 이해하지 못할 바는 아니다. 술집에서 맥락 없이 틀어놓는 1990년대 히트곡 메들리에 시달릴 때, 가히 고물이라 할 만한 집기로 채워진 카페를 맞닥뜨릴 때, 보리차병으로 재활용하곤 했던 추억의 주스병을 2만원에 (그것도 공병으로) 재출시한다는 소식을 들을 때, 이 안일하고 지리멸렬한 유행을 비관하지 않을 이는 없을 테니까. 다만 경계해야 할 태도는, 경멸로 인해 과거로의 회귀적인 모든 형식을 무작정 폄훼하는 것이다. 급변하는 현대사회에서 복고가 이토록 세계적이고도 장기적인 인기를 얻고 있는 것은 이 형식이 우연히 발생한 유행이 아니라 심리학적, 사회학적 면모를 지닌 현상이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책 <아날로그의 반격(The Revenge of Analog)>을 쓴 저널리스트 데이비드 색스(David Sax)는 복고 트렌드에서 소비 연령층을 특히 의미 있는 지표로 짚는다. 바이닐 레코드(소위 ‘LP’), 필름 카메라, 종이 노트, 보드게임 등 아날로그 콘텐츠의 판매율은 최근 몇 년간 다시 성장하고 있는데, 그 원동력이 10대와 20대라는 것이다. 일찍이 해당 콘텐츠를 경험해본 적 없는 세대 말이다. 우리 눈에는 회귀지만 누군가에게는 새로운 매체로 받아들여진다는 뜻. 이때 ‘추억팔이’라는 표현은 성립하지 않는다. 그들에게는 흥정할 추억이 없으니까.

잇츠 오케이

잇츠 오케이

반문할 사람도 있겠다. 뒤처진 기술이 어떻게 새로운 매체로 받아들여질까? 기술은 단일 상승 곡선의 형태로 발전하지 않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경우 기술은 더 효율적이고 효과적인, 즉 편리한 쪽으로 옮겨간다. 생산에 편리한 쪽이든 사용에 편리한 쪽이든. 편의성 대신 우리가 어떤 효용을 포기하는 건지 당장 깨닫기는 쉽지 않다. 수치로 설명되지 않는 효용의 경우에는 더욱 그렇다. 바이닐 레코드나 필름 카메라가 대표적인 경우다. 바이닐 레코드나 필름 카메라가 오늘날의 디지털 기술보다 음질이나 화질 면에서 수치적으로 더 낫다고 주장할 애호가는 없다. 다만 현대의 어떤 매체로도 구현할 수 없는 해당 매체의 독특한 속성을 말할 뿐이다. 밀레니얼 세대가 유독 두 매체를 즐겨 향유하는 이유도 동일할 것이라 추측할 수 있다. 물론 그냥 시류에 휩쓸리는 사람도 적지는 않겠지만. 추억‘팔이’가 성립되지 않는 경우도 있다. 테크 부문의 복고는 상품 가치가 남은 옛 제품을 그대로 파는 경우보다 현대 기술을 접목해 새로운 맥락을 만들어내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매그-레브(MAG-LEV)는 바이닐 레코드를 공중 부양시키는 턴테이블을 만든다. 턴테이블의 주요 변수인 수평과 진동 제어를 일거에 해결한 것이다. 사실 지금껏 가장 많이 나온 건 포터블 턴테이블일 것이다. 크기와 휴대성은 턴테이블의 가장 큰 단점으로 꼽혔으니까. 올해 ‘레코드 스토어 데이’를 위한 이벤트 성격의 제품이기는 했으나 크로슬리에서 내놓은 RSD3는 내장 스피커, 피치 컨트롤 슬라이더까지 포함하고도 손바닥만 한 크기를 자랑한다. 문제는 해당 턴테이블에 올릴 3인치 음반이 극도로 희귀하다는 것뿐. 사실 CD나 카세트테이프처럼 쉽게 만들 수 없다는 게 바이닐 레코드의 가장 큰 한계이다. 오스트리아의 스타트업 포노컷(Phonocut)은 놀랍게도 홈 바이닐 레코더를 만든다. 공 바이닐 판을 얹어놓고 다양한 사운드를 녹음할 수 있는 기계이다. 어릴 때 공 카세트테이프로 믹스테이프를 만들던 것처럼.
카세트테이프도 다시 인기를 얻고 있는 매체다. 다만 바이닐 레코드처럼 특유의 사운드를 예찬하는 목소리는 그리 많지 않으니 요체는 테이프가 선사하는 물리적 경험이다. 저마다의 ‘얼굴’을 가진 음악들을 손으로 쓸며 고민하고, 흡사 포켓몬처럼 하나를 뽑아 넣고(‘너로 정했다!’), 누르면 음악이 시작되는 감흥. 그리고 커버의 아트워크나 팸플릿을 들여다보며 음악과 조응하는 감흥. 홍콩 기반의 디자인 스튜디오 NINM 랩에서 내놓은 잇츠 오케이(It’s OK)는 세계 최초로 블루투스 기능을 탑재한 휴대용 카세트테이프 플레이어다. 카세트테이프의 매력은 고스란히 살리며 무선 헤드폰이나 이어폰, 블루투스 스피커까지 편하게 연동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아날로그 포켓

아날로그 포켓

크라우드 펀딩 사이트에 끊임없이 레트로 게임기가 올라오는 이유도 물리적 경험이 선사하는 매력 때문일 테다. 인터넷으로 에뮬레이터 프로그램만 다운받으면 손쉽게 고전 게임을 즐길 수 있는 시대임에도 굳이 하드웨어 게임기를 개발하니까. 닌텐도, 세가, 아타리, 코나미 등 가정용 게임기의 원년 제작사들까지 자사 제품의 복각 모델을 내놓고 있다. 클락워크 게임쉘(Clockwork Gameshell)은 휴대용 게임기인 닌텐도 게임보이를 본뜬 제품이다. 라즈베리 파이와 리눅스 기반으로, 에뮬레이터를 탑재해 과거 어느 회사에서 내놓은 타이틀이든 즐길 수 있다. 그러나 내년 출시 예정인 아날로그 포켓(Analogue Pocket)은 구태여 후면에 롬 카트리지(속칭 ‘게임 팩’)를 삽입하는 방식을 고집한다. 과거에 출시된 닌텐도 게임보이 타이틀과 호환되도록 한 것이다. 이들이 도모한 진화는 게임 제반 환경이다. 1600×1440, 615ppi의 3.5인치 LCD 디스플레이부터 스테레오 스피커, USB-C 타입 단자, 마이크로 SD 슬롯에 이르기까지 살뜰히 챙겼다.

폴라로이드 원스텝+

폴라로이드 원스텝+

고전적 기술에서 어느 부분을 살리고 어느 부분을 보완하며 어느 부분을 버릴 것인가. 즉 어떻게 동시대로 갖고 올 것인가. 아날로그 포켓이 보여주듯 어떤 효용은 불편에 기반하기에 분별은 더 어려워진다. 즉석 현상 카메라를 둘러싼 다양한 시도가 이런 측면을 잘 보여준다. 전통적 필름 대신 징크 페이퍼(Zink Paper: 훨씬 작고 저렴하며 인쇄 속도가 빠를뿐더러 화질도 좋으나 시장에서 철저히 외면당했다)를 도입하거나, LCD를 달아 촬영 결과물을 보여주기도 하고, 다른 카메라에서 촬영한 사진을 전송해 전용 필름으로 출력하도록 한 제품도 있었다. 그 와중에 폴라로이드 오리지널스는 옛 촬영 방식을 굳건히 따른 제품을 내놓는다. 그도 그럴 것이 시쳇말로 ‘찐’들이 만든 브랜드이기 때문이다. 사실 미국 폴라로이드사는 이미 2008년에 자사의 즉석 현상 필름 생산 중단을 발표했다. 이때 네덜란드 생산 공장을 인수한 게 폴라로이드 애호가들이 만든 ‘임파서블 프로젝트’였다. 폴라로이드사가 핵심 기술 이전도 거부하며 ‘우리 기술을 재현하는 것은 불가능(impossible)하다’고 답했기 때문이다. 임파서블 프로젝트는 즉석 현상 필름의 생산을 이어가는 한편 기본에 착실한 신제품 카메라들을 개발했고, 결국 2년 전 폴라로이드 상표권까지 획득하기에 이르렀다. 마름모꼴 심벌의 기존 폴라로이드와 구별하기 위해 ‘폴라로이드 오리지널스’라는 이름을 쓰고 있다. 이들이 폴라로이드의 이름으로 내놓은 첫 카메라는 전설적 모델 원스텝에 대한 오마주였다. 이름하여 원스텝2. 그리고 작년에 출시한 원스텝+(Onestep+)에는 이 단락의 첫머리에 언급한 고민, ‘어떻게 동시대로 가져올 것인가’를 좀 더 담아냈다. 스마트폰 앱과 연동되도록 한 것이다. 앱을 통해 리모컨, 타이머, 이중 노출, 라이트 페인팅 등의 기능을 활용할 수 있으며 매뉴얼 모드로 직접 촬영 조건을 조정하는 것도 가능하다. 단, 촬영 방식은 여전히 디지털 센서도 저장 장치도 없이 필름에 바로 투사해 출력하는 방식을 고집한다. 최근에 내놓은 제품 폴라로이드랩은 휴대폰에 저장된 파일을 즉석 현상 필름으로 출력해주는 프린터 개념인데, 역시나 디지털 센서나 저장 장치를 사용하지 않아 휴대폰을 뒤집어엎고 복사 촬영을 해야 한다(참고로 이 기사의 사진은 모두 폴라로이드랩으로 출력한 것이다).

후지필름 X-Pro3

후지필름 X-Pro3

폴라로이드나 코닥의 사례에서 볼 수 있는 아이러니가 있다. 복고가 대세라지만 거대 테크 기업에게는 여전히 소수 취향일 뿐이고, 소규모 기업이 해당 기술을 사들이거나 극도의 구조 조정이 되면 그제야 사업 기회가 된다. 거대 기업은 다만 과거의 유산에서 조금씩 힌트를 얻을 수 있을 따름이다. 클래식 레인지 파인더에서 디자인 모티프를 얻고 전자식 뷰파인더에 광학식 뷰파인더를 접목한 후지필름의 X 라인업이 그 좋은 예다. 이번에 출시한 플래그십 모델 X-Pro3는 아예 후면 LCD 액정을 틸트 패널 뒤에 숨겼다. 본래 LCD가 있던 자리는 정방형의 1.28인치 소형 메모리 LCD가 차지했는데, 사용 중인 필름 시뮬레이션과 감도 등의 정보를 알려준다. 옛날 카메라에 으레 달려 있던, 필름 포장지 한 면을 뜯어 넣도록 한 프레임처럼. 라이카도 후면 디스플레이를 없앤 M10-D를 출시한 적이 있긴 하지만 브랜드의 특수성이나 라인업 내 제품 입지를 고려하면 꽤 과감한 시도인 셈이다. 후지필름은 이런 시도가 ‘카메라 본연의 재미’를 고민한 결과라고 설명한다. “발표 당시에는 비관적인 의견이 많았죠. 그런데 정작 리뷰를 진행해보니까 반응이 달라지더라고요. 라이브 뷰로 확인하며 촬영할 때 얼마나 별생각 없이 찍었는지 이제야 알겠다고. ‘아, 우리가 이런 걸 잊고 살았구나’ 하고 말이죠.” 아, 우리가 이런 걸 잊고 살았구나. 후지필름 마케팅팀 선옥인 팀장의 인용구를, 이 칼럼의 마지막 문장으로 삼아도 좋을 것 같다.
왕년에 한가락 하던 기계들, 죽지도 않고 또 왔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