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FE

12명의 남자가 밝힌 올해 총결산 '최고의 소비'

소비도 지극한 탁월함에 닿으면 모종의 성취가 될지니. 독자적인 취향을 가진 열두 명의 남자에게 물었다. 올해 당신이 구입한 것 중 가장 흡족한 물건은 무엇인가?

BYESQUIRE2019.12.18

總決算 총결산

 
01 殄
라가불린 12년산 리미티드 컬렉션
박성민(티앤프루프 오너 바텐더)
스코틀랜드 아일라 지방의 스모키 위스키다. 아일라 위스키는 이탄(peat) 향 때문에 호불호가 많이 갈리는데, 라가불린은 개중 맛의 밸런스가 좋은 편이라 장벽이 낮다. 흔히 말하는 ‘병원 냄새’보다는 ‘바비큐’의 풍미가 난달까. 물론 예전부터 알고 있던 술이지만 올해 12년산을 마시다 새삼 재발견하게 된 순간이 있었다. ‘어, 좋은데?’ 하고. 국내에서 많이 마시는 건 16년산이지만 맛은 12년산이 오히려 더 깊이 있다. 재밌는 건 가격도 16년산보다 훨씬 더 비싸다는 것. 나란히 놓고 마셔보면 직관적으로 그 이유를 알게 된다. 물론 좋은 술이라고 모두 사 모으는 건 아니다. 라가불린을 컬렉팅하기 시작한 건 매해 나오는 리미티드 에디션 때문이다. 이렇게 줄 세워놓고 흐뭇해하는 재미가 있으니까.
 



02 津 
플로나 체어
황인섭(애프터 저크 오프 대표)
1969년도에 제작된 빈티지 체어 플로나. 잘빠진 형태의 폴딩 체어이면서도 모던한 구조와 진중한 분위기를 지녔다. 잔카를로 피레티가 디자인한 의자로는 카스텔리에서 제작한 폴딩형 플라스틱 체어 프리아가 더 유명하겠으나(주로 센스 있는 사무실에서 구비해놓는 오피스 체어로), 자자한 명성만큼 속편과 모조품이 많은 데 비해 희소성은 플로나 체어가 더 높다. 라이선스 문제로 더는 생산되지도 않으니까. 사실 내 나이에 사기엔 너무 고가의 제품이 아닐까 마음에 걸리기도 했는데, 의자가 선사하는 달콤한 몽상 때문에 구매할 수밖에 없었다. 황색 조명, 샤르도네 와인, 담요, 의자에 폭 파묻혀 책을 읽다 빠지는 선잠…. 지금은 애프터 저크 오프에 비치해두었다. 좋은 공간, 좋은 의자에서 좋은 술을 마시는 기분을 공유하고 싶어서. 다만 내심은 아무도 모르게, 티 안 나게, 스리슬쩍, 다시 집으로 가져갈 날을 기다리고 있기도 하다.
 

 
03 溱 
소포라
이석우(산업 디자이너, SWNA 대표) 
식물을 잘 사는 편은 아니다. 식물이야 선물받는 경우도 많고, 또 워낙 잘 못 키우기도 하고. 무엇보다 아내가 워낙 식물을 많이 키워서 굳이 내가 살 필요가 없다. 한창때는 집에 화분만 140개가 있었으니까. 그러니 내가 소포라를 구입한 것은 필요나 관성에 의해서가 아니다. 유독 끌리는 구석이 있었기 때문이다. 뭐랄까, 꼭 커다란 나무를 축소해놓은 듯하달까. 커다란 식물은 덩어리(mass)로 인식하게 되는 경향이 있는데 이 식물은 작고 섬세해서 세부에 집중하게 되고, 그러다 보면 오히려 큰 식물을 볼 때보다 더 깊이 자연을 만끽할 수 있다. 가지, 잎사귀, 흙… 계속 보고 있으면 꼭 그림 같다. 식물의 특성상 일주일에 한 번쯤 물을 줘야 한다. 그래서 나는 월요일 아침마다 물을 주고 있다. 그런 교류에서 오는 의미도 있다. 일주일의 ‘시작’을 자각시킨달까. 간혹 까먹고 넘어가는 날도 있는데, 그런 때를 되짚어보면 꼭 정신적 컨디션이 안 좋았던 날이다. 늦게나마 물을 주며 심기일전하곤 한다.
 

 
04 溱
달항아리
김대철(레리치 대표)
좋은 물건에서는 그게 만들어진 과정을 느낄 수 있다. 과정과 형식을 충실히 이행한 옷은 그 감상이 단순히 ‘핏이 좋다’에서 끝나지 않는 것처럼. 도예가 한정용의 달항아리는 달항아리 중에서도 특히나 담백하고 절제된, 모던한 느낌을 준다. 거기에 들인 오랜 시간과 집념이 아주 단순한 에너지의 형태로 드러난달까. 여타 미술 작품처럼 감상 포인트를 짚어 말하기 어렵지만, 어디에 가져다 놓든 주변의 공간과 분위기를 압도한다. 문제는 1년에 한두 개만 만드시니 작품을 구하기가 하늘의 별 따기라는 것. 그러니 그의 작품을 소장하게 된 것이 단연 올해의 성취라 할 만하다.
 

 
05 殄
비오그라픽치온 굿즈
유승보(일러스트레이터, 베로니카 이펙트 대표)
비오그라픽치온(Biografiktion)은 독일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3인방 일러스트레이터다. 그림 책방 베로니카 이펙트에서 소개한 것을 시작으로 간간이 연락하고 지내왔는데, 어쩌다 올해 한국 전시의 기획과 큐레이션까지 맡게 됐다. 지난 9월 갤러리 프로타쥬에서 열린 가 그 결과다. 해당 전시의 굿즈 격으로 실크스크린 프린트와 리노컷 판화, 책으로 세트를 만들어 판매했으며 나도 구매했다. 친구이기도 하지만 워낙 팬이니까. 폴더 안쪽에 사인도 받았는데, 일러스트레이터에게는 사인이 일종의 퍼포먼스다. 팬의 눈앞에서 순발력으로 그림 그리는 걸 보여주는 ‘라이브 드로잉’인 것이다. 그래서 볼 때마다 참 다층적인 감흥이 들곤 한다. 작품이면서 한편으로는 선물 같기도 하고,  동시에 올해 내가 한 일을 돌이키게 해주는 이정표라서.



 
06 津
JBL 파라곤
임성은(헬카페 대표)
60년 전 JBL의 위상은 지금과는 좀 달랐다. 스튜디오 스피커, 극장용 스피커로 널리 쓰이던 미국 최고의 음향 기기 브랜드였으니까. 그들이 당대 기술력으로 ‘최고의 스피커를 만들어보겠노라’ 하고 만든 게 바로 파라곤이다. 올해 이 스피커의 소리를 직접 들어보려 삿포로의 재즈 카페까지 찾아갔고, 결국 귀국하자마자 동업자에게 말했다. “언제가 될지는 몰라도 내가 꼭 JBL 파라곤을 사주겠다.” 워낙 고가인 데다 매물이 5년에 하나 나올까 말까 한 제품이니, 나보다 더한 음악 애호가인 친구에게 이 최고의 스피커를 선물해주고 싶은 마음이나마 전했던 것이다. 50일 만에 매물을 찾게 될지도, 이 귀한 물건을 헬카페 이촌동 매장 안에 두게 될지도 모르고 말이다. 특유의 음색은 물론 디자인까지 마주할 때마다 흡족하다. 뭐랄까, 삶의 한 시즌을 마감한 듯한, 다음 페이지로 넘어온 듯한 감흥도 들고 말이다.  
 

 
07 溱 
바버 재킷
조셉 리저우드(에빗 오너 셰프)
여행은 레스토랑 에빗의 스태프들에게 아주 중요한 요소다. 틈틈이 국내 곳곳을 돌며 식재료가 어떤 곳에서 어떻게 자라는지 직접 눈으로 확인하고, 그를 바탕으로 메뉴를 개발하기 때문이다. 바버 재킷을 올해 가장 잘 산 물건으로 꼽는 건 그래서다. 사실 처음에는 영국의 헤리티지 브랜드라는 특유의 이미지 때문에 택했는데, 실제로 사용해보니 실용성이 뛰어났다. 따뜻하고, 활동하기도 편하고, 궂은 날씨에도 든든하고. 무엇보다 마음에 드는 건 곳곳에 달린 널찍한 주머니다. 수첩, 휴대폰, 지갑, 포켓 나이프 등 온갖 소지품을 분류해 보관할 수 있는 데다 현장에서 발견한 식자재를 아무렇게나 넣어두기에도 좋다. 방금 왼쪽 가슴에 달린 주머니에서 찾은 이 산수유 열매처럼.
 

 
08 津 
오메가 스피드마스터 문 워치 아폴로 11호 30주년
황재환(바버샵, 팔러 대표)
반골 기질로 한반도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운 친구가 어느 날 술자리에서 시계를 자랑했다. 1999년에 발매된 오메가 스피드마스터의 아폴로 11호 달 착륙 30주년 기념 한정판 모델. 단 몇 마디에 이미 미혹된 나는 거래를 종용했으나 야살스러운 기질을 타고난 그는 끝내 ‘안 팔 꺼지롱’을 시전하며 귀가하기에 이른다. 이튿날 눈뜨자마자 ‘내놔’, ’팔아’, ’제발’ 등의 메시지를 끊임없이 보내봤으나 그는 묵묵부답으로 일관했고, 이윽고 해외로 출국해버린다. 결국 내가 시계를 차지하게 된 것은 그의 귀국일. 그가 미처 여장을 풀기도 전에 찾아가 강탈했다. 나에게 팔아줘서 고맙다 주현아. 너는 정말 대단한 인물이야. 이토록 나의 애간장을 태운 이는 네가 유일하다. 다행히 그의 자랑은 입에 발린 소리가 아니었던지라 구매는 여전히 흡족하다. 우선 평소 나의 라이프스타일에 잘 어울리는 캐주얼함과 포멀함을 겸비한 특유의 분위기가 있다. 포멀한 차림이나 여름철에는 메탈 스트랩으로, 캐주얼한 차림이나 겨울철에는 가죽 스트랩으로 바꿔가며 그야말로 사시사철 착용할 예정이다. 오메가에서 지금도 유사한 모델이 신제품으로 나오고 있긴 한데, 신제품 특유의 위화감보다 20년이라는 시간을 머금은 이 시계의 자연스러움이 내게는 더 특별해 보인다.
 

 
09 溱 
캘러웨이 에이펙스 머슬백 아이언 세트
마서우(리마장82 대표)
올해 새 아이언 세트를 들였다. 캘러웨이의 에이펙스 머슬백. 꽤 다루기 어려운 모델이라 들었는데, 워낙 뭘 사든 디자인이 예쁜 걸 고르는 편이라 감수하고 택한 것이다. 놀라운 건 오히려 아이언을 바꾼 후에 ‘라베(Life Best Score: 개인 최고 기록 점수)’를 찍었다는 점. 물론 그것 때문에 골프 클럽을 올해 가장 흡족한 소비로 꼽는 건 아니다. 한번 최고점을 찍은 후로 쭉 내리막길을 걷고 있으니까. 그보다는 이 아이언들을 쥐고 연습하는 시간이 참 좋다. 내게 골프 연습 시간은 아무 생각도 하지 않을 수 있는 시간, 잠시 쉬어갈 수 있는 시간이라는 의미가 큰데, 역시 군더더기 장식 없이 매끄럽고 단단한 아이언의 생김이 그 감흥에 한몫하지 싶다.
 

 
10 殄 
페이즈원 중형 카메라
김용관(건축 사진가, <아키라이프> 발행인)
혹자는 말한다. 사진을 크게 출력할 게 아니라면 굳이 중형 카메라가 왜 필요하냐고. 무슨 뜻인지는 알겠지만, 어불성설이다. 일단 중형 카메라는 단순히 크기의 문제가 아니다.  1억5000만 화소로 담은 풍부한 데이터는 동일한 사이즈에서도 선명한 차이를 만든다. 그리고 기능성을 떠나서도, 이토록 정보 값이 높은 사진을 소장한다는 것 자체가 사진가에게 커다란 포만감을 선사한다. 나는 필름 시대에 이력을 시작해 대형 원판 필름으로 작업을 해온 건축 사진가다. 한 장의 사진을 위해 혼신을 다하는 태도, 남길 수 있는 최고의 사진 퀄리티를 좇는 열망을 여전히 간직하고 있다. 지상 최고의 퀄리티를 자랑하는 카메라인 페이즈원 IQ4 150MP XF 카메라 시스템을 들인 건 어쩌면 당연한 일. 선택이 만족스러우며, 여전히 기대되고 흥분된다. 이 카메라로 인해 하게 될 새로운 경험들을 생각하면 말이다.
 

 
11 溱
제이백 쿠튀르 재킷
신용일(합 대표)
백지훈 디자이너의 제이백 쿠튀르를 무척 좋아한다. 3~4년 전에 처음 알게 되어 그때부터 매 시즌마다 한두 벌씩 꾸준히 구매하고 있다. 한국적인 소재를 모던하게 해석하는 태도 면에서 나와 잘 맞는 부분이 있달까. 무엇보다 그 친구도 나도 누빔 천을 너무 좋아한다. 이 재킷도 쇼룸의 다른 재킷을 보고, 소재를 누빔으로 바꿔달라고 해서 따로 맞춘 것이다. 소장 중인 제이백 쿠튀르의 옷 중에서도 단연 애용한다. 입으면 너무 편하지만 마냥 편해 보이지는 않는 옷이라서. 사실 누빔 천은 사용하기에 따라 승복처럼 보이게 될 수도 있는 소재인데, 이 재킷을 입은 날은 그냥 티셔츠에만 걸쳐도 이런 질문을 듣곤 한다. “오늘 어디 좋은 데 가?” 내가 입으려고 산 건 아니지만, 성취로 치자면 올해 제이백 쿠튀르에서 맞춘 합 매장 유니폼도 빼놓을 수 없다. 워낙 믿을 수 있는 친구라 난생처음 유니폼에 생각이 미친 건데, 역시나 미감뿐 아니라 활동성, 범용성, 내구성까지 꼼꼼히 따진 결과물을 내놨다. 맞추길 참 잘했지 싶었다. 백화점 매장의 여사님들께서 ‘옆 가게 직원들이 부러워한다’며 자랑스러워 한다는 걸 들었을 때 특히나.
 

 

12 溱
목재 지류함
김서룡(패션 디자이너)
패션 디자인을 하기 전에는 그림을 그렸다. 얼마 전부터 자꾸 다시 그림을 그려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결국 5월께 숍 옆 건물에 공간을 얻었다. 아틀리에로 삼을 요량으로. 기본적인 화구 몇 가지와 이젤, 지류함도 들였다. 패션 디자이너로 일한 시간보다 화가였던 시간이 더 길었는데, 어쩌다 보니 지류함을 산 건 이번이 처음이다. 예전에 샀다면 양질의 물건을 더 저렴하게 구할 수 있었을 텐데. 신문사나 출판사에서 흔히 지류함을 쓰던 시절, 혹은 해당 기업들의 작업 방식이 디지털로 전환되며 지류함이 매물로 쏟아지던 시절이 있었으니까 말이다. 당시 매물들은 현재 빈티지 마니아들의 인테리어 소품으로 고가에 거래된다고 들었고, 나는 지금도 여전히 지류함만 만든다는 목수를 어렵사리 수소문해 주문을 했다. 요청 사항은 딱 두 가지였다. 디자인 작업에 쓸 패턴 종이도 함께 보관할 수 있도록 좀 크게 만들 것, 그리고 아틀리에 안에서 이리저리 옮기기 좋도록 바퀴를 달 것. 나머지는 다 그분에게 맡겼다. 이게 그 결과로 받은 지류함인데, 보고 만질 때마다 감탄이 절로 나온다. 손으로 나무를 하나하나 깎은 솜씨와 마감이 경이로워서. 좀 미안할 정도다. ‘이런 작품을 고작 100만원에 누려도 되는 건가?’ 보고 있자면 어서 종이를 꺼내 그림을 그리고 싶어지고, 다 그린 그림을 넣을 때에는 일 년 내 열심히 일한 농부가 쌀을 아늑한 곳간에 채우는 기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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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edit

  • EDITOR 오성윤
  • PHOTOGRAPHER 박기훈
  • WEB DESIGNER 김유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