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일러가 바라본 런던 | 에스콰이어 코리아 (Esquire Korea)

겨울 런던 거리에서


ⓒ SEO DAR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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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같이 새빌 로를 향하는 출근길에 지나는 작은 상점들의 내부 장식이 차츰 겨울 분위기로 바뀌는 것을 보면 옷깃을 파고드는 한기보다 먼저 차가운 계절이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느낀다. 아케이드의 긴 통로를 거닐며 오밀조밀 귀엽게 장식된 가게들을 본다. 보석상 매대 위 패물의 번쩍임은 그대로인데 의류점 마네킹의 옷차림이 두꺼운 코트와 머플러로 감싸인 것을 볼 때마다 또 이렇게 한 해가 훌쩍 지나갔음을 알고 연말이 주는 감상에 빠지곤 하는 것이다. 서머타임이 끝나고 긴 어둠이 지배하는 런던의 겨울은 대여섯 달 안에 청명한 날 찾기도 힘이 든데 그 기간 동안 이곳 사람들은 벽에 불을 피워 장작 타 들어가는 소리를 들으며 술과 몇 가지 담소를 안주 삼아 이 우울한 기후를 버텨낸다. 나 또한 날이 추워질수록 몸을 데울 알코올과 따뜻한 음식을 찾는 날이 많아진다. 낮 동안 양복점에서 부지런히 바늘과 초크를 놀린 손이 저려올 때는 한 번씩 메이페어 주변의 바나 레스토랑을 찾는다. 일과 시간에 나의 신경을 괴롭게 짓눌렀던 근심은 몇 잔의 알코올에 풀어진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피로감을 견딜 수 있는 한 취기 속에서 안온하게 느낄 수 있는 인상과 경험을 쌓기 위해서다. 몸을 따뜻하게 데워줄 와인과 위스키와 런던 진을 찾기 위해 모이는 사람들로 겨울의 바는 여름날과는 상반된 활기로 성업 중이다. 사교를 하고 모임을 만들어 기율과 복장의 엄격을 정해두고 사적인 클럽을 만드는 것은 이곳이 시작한 문화인데 그것에 곁들이는 술을 마시고 부리는 유쾌한 주정에는 관대한 런던 사람들은 어떤 장소에 출입하며 겨울의 여흥을 즐길까.

쿠앤트(Kwãnt)는 새빌 로 안쪽의 고급스러운 바와 레스토랑이 밀집되어 있는 작은 골목 지하에 위치하고 있다. 이곳은 대나무 조각으로 마감된 실내와 은은한 침향이 공간을 채우는 모로코 스타일의 모던 바다. 바 주인 에릭 로린츠는 사보이 호텔 아메리칸 바의 10대째 헤드 바텐더였으며 2010년 세계 바텐더 대회에서 우승한 이력이 있다. 쿠앤트가 정식으로 영업한 지는 반년이 채 되지 않았으며 지하에 위치해 있고 바의 소재를 알리는 흔한 간판조차 없다. 그러나 알음알음 그의 새로운 바와 신선한 감성으로 블렌딩된 음료를 마시기 위해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칵테일, 위스키, 빈티지 샴페인 그리고 쉐리와 포트 와인까지 다양하고 내공 있는 레퍼토리를 구비하고 있어 내방객들은 신선하고 현대적이지만 깊은 분위기를 느낀다. 첫 방문 시에는 김렛을 시키고 술을 시작했다. 바가 아닌 테이블에 앉은 나와 눈높이를 맞추며 로린츠는 자신만의 김렛을 만들고 있다며 자신 있게 권했다. 김렛이라는 칵테일은 라임 주스와 진의 혼합액이라는 극도의 단순함이 특징이라 이 술을 주문하는 것은 그것을 풍부하게 제조할 수 있는 바텐더의 실력을 가늠하는 척도가 될 수 있다. 이곳은 정석과는 조금 다르게 옥슬리사의 런던 드라이 진을 베이스로 설탕 대신 오렌지 과즙과 아가베 시럽을 혼합한 이곳만의 김렛 ‘아우어 김렛(Our Gimlet)’을 만들어낸다. 정석을 과감히 변주하며 득의양양하게 권하는 로린츠의 모습과 달큰한 오렌지 향이 나는 색다른 칵테일에서 쿠앤트의 방향성을 알 수 있었다.
회사의 마스터 테일러인 스티븐과 나는 일을 하며 적잖은 시간을 같이 보내곤 하는데 그의 기술을 배우는 것과 동시에 그의 취향마저 조금씩 닮아가게 된다. 회사에서 한 블록 떨어진 매덕스 거리의 브라운스(Browns)에 갔다. 이곳은 레스토랑과 바를 함께 영업하는 곳인데 새빌 로의 양복점들과 가까워 가봉을 하러 가기 전후에 손님들이 찾아와 목을 축이고 간다. 이른 저녁 간단한 요기를 하기 위해서 스카치 에그와 진토닉을 시켰다. 브라운스는 1960년대 후반부터 1970년대까지 영국 양복의 호황기에 ‘웰스 오브 마이페어(Wells of Mayfair)’라는 비스포크 숍으로 많은 손님을 보유한 양복점 중 하나였다. 윈스턴 처칠도 이곳의 손님이었다. 스티븐은 20대 초반 소년의 티를 갓 벗어난 시점부터 이곳에서 양복 도제 일을 시작했다. 1990년대 후반에 양복점이 폐업하고 같은 자리에 인테리어를 바꾸지 않은 채 레스토랑이 들어섰다. 예순이 넘은 그는 이따금씩 유년기에 자신의 양복 인생을 시작한 이곳을 찾아 옛 추억을 회상하곤 한다. 그때의 피팅 룸은 이제 프라이빗한 예약실이 되었고, 재단 테이블은 바 테이블로 용도 변경되었다. 그러나 닳고 낡은 테이블 위에 그 시절의 추억만큼은 고스란히 간직되어 있다. 벽 한쪽에 걸린 태피스트리 도안처럼 지나간 옛사람의 추억을 듣는 것은 이런 종류의 그리움과 위엄을 주는 것일까. 자신의 왕년을 조용히 들려준 후 스티븐은 끊임없이 진을 입에 갖다 대며 말없이 상념에 잠겼다.
스티븐과 보낸 이른 저녁의 짧은 시간을 뒤로하고 리츠 호텔의 바 리볼리로 향했다. 바텐더의 안내를 받아 창가 쪽에 자리를 잡은 후 샴페인 리츠 리저브를 시켰다. 조금 전 먹은 음식으로 기름진 입안을 잠시 헹굴 요량이었다. 어느 가게를 가든 그곳의 대표 메뉴를 고르는 것이 실패 없는 주문의 방법이라면 이곳의 이름을 딴 샴페인은 나쁘지 않은 선택이었다. 리볼리는 2001년에 개업했지만 1906년부터 이어진 리츠 호텔 바의 전통을 계승 중이다. 매끈하게 광을 낸 녹나무로 벽을 마감하고 잘 세공된 라리크 크리스털이 조화를 이루는 이 장소는 곳곳에 리츠 호텔에서 표방하는 아르데코 양식의 흔적이 녹아 있다. 바텐더의 재킷도 크림빛이 감도는 백색의 서지(짜임이 튼튼한 모직물) 원단에 영국식의 양 트임이 아닌 트임이 없는 고풍스러운 콘티넨탈 스타일이다. 런던의 바라기보다는 유럽 대륙의 바를 연상시킨다. 샹들리에가 뿌리는 황색 조명 아래에 앉아 창 너머로 행인을 바라보며 샴페인을 홀짝이는 것은 리볼리에서 누릴 수 있는 작은 호사였다.
리볼리에서 빠져나와 크고 작은 호텔과 연회장이 모여 있는 하이드파크 방향으로 걷는다. 그 길에서 디너파티를 가는 행렬과 맞닥뜨렸다. 몸에 잘 맞는 턱시도와 연미복을 입은 신사들, 옷깃의 새틴과 벨벳 장식이 잘 손질된 머리의 반질거림과 이질감 없이 조화를 이룬다. 이미 주변은 어둑해졌지만 눈부신 빛이 감도는 형형색색의 드레스 차림에 머리 장식을 한 숙녀들, 데콜테를 채우는 진주와 호박, 사파이어 따위의 보석, 그리고 온갖 자연의 좋은 냄새만을 가져다 만든 그들의 향에 순간적으로 도취되었다. 좀 전의 취기는 이런 정경을 조금 더 낭만적으로 만든다. 그들은 파티 전의 설렘으로 달아올라 있었다. 어둑어둑 해가 지기 시작할 때 갈아입은 드레스는 연회장의 인조광에서 다시 번쩍번쩍 빛날 것이다. 잠시 동안 이목을 사로잡은 파티 행렬을 뒤로하고 다시 걸음을 재촉했다. 런던의 연말에 맞는 추위와 그 속의 온기를 찾아 이리저리 헤매며 또다시 이국에서의 겨울이 지나간다.

술과 몇 가지 담소를 안주 삼아 이 우울한 기후를 버텨낸다.

연말 파티 드레스 코드 해석법

1 연말 파티에서 남성의 드레스업은 ‘포멀’과 ‘팬시’의 미묘한 줄다리기다. 남자의 디너 슈트 색은 단연코 블랙이지만 때로는 일상에서 시도하기 어려운 질감과 컬러를 시도해보는 것도 좋다. 뭘 좀 아는 사람들은 은은한 푸른빛이 도는 미드나이트 블루를 택했다. 윈저 공도 그랬다.
2오늘날 연미복, 즉 테일 코트를 입는 일은 과거의 낭만이 되었으나 한 벌의 턱시도는 여전히 의외로 쓰일 데가 많다. 만약 턱시도가 없다면 짙은 색 슈트에 화려한 조끼나 포켓스퀘어로 파티의 목적에 맞는 코디를 한다.
3 결혼식 때 쓰는 탈착식 새틴 라펠로 턱시도를 입는 일은 넥타이를 직접 매지 못해서 매여 있는 타이를 하는 행동과 같다.
4 블랙 타이는 턱시도에, 화이트 타이는 테일 코트에. 드레스 코드가 명기되어 있지 않은 파티에서는 드레시한 스포츠 코트나 짙은 색 슈트를 입는 것이 좋다.
5 디너 재킷을 사지 않으면 결코 파티에 갈 일이 생기지 않는다. 이브닝 웨어를 준비하면 그에 걸맞은 자리가 따라올 것이다.







겨울 런던 거리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