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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NS 세상에서만 입을 수 있는 디지털 옷, '더 패브리칸트'

벌거벗은 임금님

BYESQUIRE2019.12.26
 
더 패브리칸트의 디지털 쿠튀르 드레스 이리데센스.

더 패브리칸트의 디지털 쿠튀르 드레스 이리데센스.

 
나이가 들수록 몇 세대 묵은 스마트폰처럼 방전이 빨라지는 것 같다. 물론 새해를 맞아 갑자기 생수통을 못 들게 됐다거나 3층 이상을 계단으로 오르내릴 수 없게 된 건 아니다. 다만 에너지를 쓰는 데 점점 더 디테일하게 인색해지고 있다. 예전에는 기꺼이, 심지어는 즐겁게 했던 많은 일이 번거롭고 귀찮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이를테면 SNS에 사소한 농담을 끄적거리는 경우가 크게 줄었다. 딱히 우울한 건 아닌데 뭐랄까, 유쾌한 상태를 지구력 있게 유지하기가 어렵다. 공적으로 혹은 사적으로 사람들을 만나 밝은 척을 최대한 끌어 쓰고 나면, 혼자 있을 때는 몸에 충전기라도 꽂고 음침하게 쉬고 싶어진다. 유머 감각을 지키는 데도 체력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요즘 들어 실감하고 있다.
 
같은 맥락에서 쇼핑에 대한 흥미도 거의 잃은 상태다. 보물찾기를 하듯 오프라인 스토어 구석구석을 훑으며 즐거워하던 시절이 기원전처럼 아득하게 느껴진다. 요즘은 탈의실에서 시착하기가 귀찮아서 옷을 사기가 망설여진다. 그렇다고 온라인 쇼핑이 늘어난 것도 아니다. 이미지만 보고 핏을 가늠하는 건 내게 너무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기껏 골라 왔지만 그래 봤자 거기서 거기인 검은 티셔츠들을 탈의실에서 하나씩 입고 벗고, 혹시나 하는 생각에 다른 사이즈를 찾아와서 다시 탈의실 앞에 줄을 서고, 남들은 눈치도 못 챌 미묘한 차이를 견주느라 또다시 입고 벗고, 집에 가서 쇼핑백을 열어봤더니 어쩐지 아까와는 다른 느낌이라 반품을 고민하며 한 번 더 입고 벗고…. 글로만 적어도 번거로워서 이미 상상 속에서는 마네킹들을 마구 밀치면서 매장 밖으로 뛰쳐나오는 중이다.
 
더 패브리칸트(thefabricant.com)에 관한 뉴스를 읽었을 때 누군가에게는 꽤 편리한 대안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부터 했다.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 위치한 이 패션 회사는 실물이 아닌 디지털 데이터로만 존재하는 옷을 만든다. 원단이나 실 대신 동원되는 건 보디 스캐닝과 모션 캡처, 3D 애니메이션 같은 기술이다. 이들은 스캐닝한 모델의 신체에 의상을 합성해서 거의 실사처럼 자연스럽게 움직이는 영상을 완성한다. 흥미롭기는 한데 국경을 뛰어넘는 글로벌 스케일의 오지랖은 문득 사업의 수익성을 궁금해하기 시작한다. 만져볼 수도 없는 옷을 선뜻 구입하는 사람들이 과연 얼마나 될까?
 
올해 5월 더 패브리칸트가 선보인 ‘이리데센스(Iridescence, 무지갯빛)’는 이른바 세계 최초의 디지털 쿠튀르 드레스다. 블록 체인 기반의 온라인 게임 크립토키티의 개발사인 대퍼 랩스와 인플루언서들의 인스타그램 필터 ‘뷰티 3000’을 만든 아티스트 요하나 야스코브슈카가 제작에 참여한 이 ‘의상’은 경매에서 9500달러(약 1100만원)라는 결코 적지 않은 금액에 낙찰됐다. 차별화와 화제성만 확실하다면 어딘가에서 홀연히 나타나 지갑을 여는 사람들은 있기 마련인가 보다. ‘뷰티 3000’의 SF적인 무드를 연상시키는 이리데센스는 과연 궁극의 ‘화면발’을 목표로 삼은 듯한 결과물이다. 총천연색의 불규칙적인 패턴이 신비롭게 어른거리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원단은 항상 완벽한 각도로 휘날린다. 블라우스와 팬츠 위에 케이프를 한 겹 두른 듯한 디자인인데 돌풍으로 옷이 뒤집어지는 거추장스러운 돌발 상황 따위는 당연히 일어나지 않는다. 시스루 소재지만 파파라치가 아무리 맹렬하게 플래시를 터뜨려도 입은 사람이 의도하지 않은 노출은 포착하지 못할 것이다. (실물이) 존재하지 않고 (실제로) 입을 수도 없는 옷이라니, 벌거벗은 임금님 캡슐 컬렉션처럼 들리는 아이디어다. 그런데 만약 임금님이 인스타그램 중독자라면 더 패브리칸트 제품에 꽤 만족할 것 같기도 하다. 적어도 온라인에서는 확실하게 과시할 수 있는 아이템이니까.
 
칼링스 디지털 컬렉션.

칼링스 디지털 컬렉션.

 
혹시 연말부터 연초까지 지출이 컸던 탓에 1100만원의 가격표가 부담스럽게 느껴진다면 좀 더 저렴한 대안도 있다. 북유럽의 패션 브랜드 칼링스가 온라인 게임 포트나이트에서 영감을 얻어 론칭한 디지털 컬렉션(digitalcollection.carlings.com)은 아이템별로 10~30유로(1만3000~4만원) 선에 판매된다. 제품을 고르고 결제하는 과정은 기존의 온라인 쇼핑몰과 비슷하다. 단, 자신의 사진 한 장을 반드시 함께 업로드해야 한다. 얼마 후 소포 상자 대신 직접 착용한 듯 감쪽같이 제품을 합성한 이미지가 전송된다. 사이트에 접속해서 칼링스의 컬렉션을 슬쩍 확인해봤다. 끔찍한 악몽 속이 아니라면 내가 저 가운데 하나를 실제로 입고 신도림역이나 명동에 갈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런데 칼링스 측은 미래에서 실수로 배송된 듯한 요란한 디자인이 디지털 패션에는 필수적인 요소라고 설명한다. 이 독특한 컬렉션의 고객들은 집에 100장쯤 있는 티셔츠나 청바지와는 전혀 다른 옷을 가상현실에서라도 입어보고 싶어서 결제 버튼을 누를 테니까.

 
더 패브리칸트나 칼링스가 목표로 삼는 고객이 있을 거다. 첨단 기술을 마케팅에 활용하려는 패션 브랜드, 자원의 소비 없이 패션을 즐기려는 환경주의자, 독창적인 스타일을 SNS에 과시하려는 패션 애호가 등등. 하지만 이들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내게도 디지털 패션은 은근히 솔깃한 신상이다. 나는 기술이 훨씬 진화하고 아이템은 좀 더 평범해질 몇 년쯤 뒤를 기다리고 있다. 그리 가깝지도 않은 후배의 결혼식이나 내키지 않는 친척 행사에 활용하기 위해서다. 왜 불참했느냐고 누군가가 따지고 들면 증거로 SNS 게시물을 들이밀 것이다. 사진과 영상 속의 나는 못 보던 옷을 갖춰 입고 모임에 자연스럽게 섞여 있다. 증거는 명백하다. 하지만 물론 나는 거기에 없었다. 부담스러운 숙제는 말쑥한 데이터에게 맡겨둔 채, 목이 하도 늘어져서 클리비지 룩에 가까워진 티셔츠를 걸친 채 집에서 넷플릭스 빈지워칭을 했을 것이다. 새 옷을 고르느라 탈의실을 들락거리며 귀찮아할 필요도 당연히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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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edit

  • EDITOR 김은희
  • WRITER 정준화
  • ART DESIGNER 주정화
  • DIGITAL DESIGNER 이효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