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FE

최영미 시인의 조용한 용기

말을 잘 못한다는 시인의 달변, 겁이 많다는 시인의 용기. 시인 최영미와 이야기를 나눴다.

BYESQUIRE2020.01.07
 
 

말과 겁 

 
 
 
길이 보이지 않아도 나는 이 햇살 아래 오래 서 있고 싶다.”
- 〈다시 오지 않는 것들〉 중
 
일산의 오피스텔촌에 있는 어느 커피숍에서 최영미 시인을 만났다. 일산의 오피스텔은 사각 블록 안에 있어서 처음 오면 길을 알기 힘들다. 약속 장소를 찾지 못해 옆 건물에 있는 시인을 만나 커피숍으로 들어왔다. 그는 ‘칼로리가 좀 있는’ 음료를 찾다가 밀크티를 시켰다. 곧 거품이 잘 얹힌 밀크티가 나왔다. 시인은 밀크티가 뜨거운 줄 알고 잠시 투덜거렸다. 다행히 밀크티는 별로 뜨겁지 않았다. 찻잔을 든 시인이 이야기를 시작했다. 클래식 FM 아침 방송에 나올 듯한 옛날 서울 여자 말씨였다.
 
평소에 인터뷰를 잘 안 하죠?
조심스러워서요. 미투 이후엔 더 안 했어요. 왜냐하면… 보세요. 정치인도 인터뷰에서 무슨 말을 하면 상대가 꼬투리를 잡아서 물고 늘어지고 골치 아프잖아요. 그래서 재판 걸리기 전부터 인터뷰를 조심하고 안 하려 했어요.
그래서 반신반의하며 인터뷰를 청했는데 허락해주셔서 놀랐습니다.
끝났으니까. 항소심에서 이겼고. 그리고 내 페이스북 보면 아시겠지만 오늘 (고은 측이) 상고를 포기했어요. 이걸로 끝난 거예요. 상고 기한이 그저께였어요. 상고장을 안 냈어요.
사전 질문지로도 이야기 나눴죠. 축구를 좋아하는데 요즘은 유럽 축구를 못 본다고 했어요.
볼 시간이 어디 있어요. 제가 10월부터 일이 많았어요. 재판 있었고, 출판사에서 책을 냈고, 대만 여성 대회에서 패널 디스커션에 참가했잖아요. 연설문도 써야 하고 이사까지 했지. 여러 가지 일을 혼자 처리했어요. 저는 차도 없어요. 차나 택시가 있다면 하루에 다 볼 수 있는 볼일을 하루에 하나씩만 하다가 너무 필요할 때는 도움을 요청했어요. 어머니 퇴원하시는 날 택시가 안 잡히는 거예요. 그래서 근처 사는 선배 언니에게 SOS를 보냈어요.
면허는 있나요?
면허는 있는데 (운전은) 겁이 많아서 못 해요.
겁이 많다고 하기엔 시 속의 말에는 망설임이 없는걸요.
그게 양면이에요. 제가 얼마나 겁이 많으냐 하면 저는 차선 바꾸는 게 무서워요. 운전을 하는 모든 사람이 경이로워. 1999년인가 2000년에 강원도에서 면허를 땄죠. 한번은 내가 중앙선을 넘은 적이 있어요. 지방 도시라 밤에는 도로에 거의 차가 없으니까요. 그때는 몰랐는데 나중에 그 공포가 너무 심해서 운전을 못 하겠는 거야. 속초에서 다시 수도권으로 이사 올 때 후배가 비행기를 타고 강릉에 와서 그 차를 몰고 갔어요. 속초에서 강릉까지는 갈 수 있는데 강릉에서 서울까지는 너무 겁이 나서 도저히… 그래서 후배에게 부탁했어요. 나는 공항까지 마중 나가고. 후배에게 너무 고마워요.
그럼 원고를 쓸 때는 다른 사람이 되는 건가요?
예리한 지적인데, 사람이 모든 면에서 겁이 많지는 않아요. 누구는 어떤 면에는 강하고 어떤 면에선 약하고 그런 게 있잖아요. 나는 언어에 강하니까. 글을 쓸 때는 주저함이 없는 것 같아요.
글로 만들 수 있는 문학도 여러 가지가 있잖아요. 소설도 있고 시도 있고. 처음에 시를 고른 이유가 있나요?
원래 소설가를 꿈꿨어요. 소설이나 드라마를 쓰고 싶었는데 얼마 이상 진도가 안 나가는 거야. 글이 안되는 거 있잖아요. 그때 일기장에서 시를 발견했어요. 국문학을 전공한 선배한테 시를 보여줬더니 좋다고 하더라고요. 격려해주면서 신춘문예 말고 문학 잡지에 투고해보라고 했어요. 투고를 했는데….
그래서 나온 〈서른, 잔치는 끝났다〉가 시대의 선언 같은 게 됐네요.
그렇게 되어버렸죠.
내가 만든 구절 하나가 시대의 간판이 되면 어떤 기분이 들까요?
이 사회의 한 귀퉁이에 내 자리가 마련된 것 같았어요. 그때는 진지하게 시인을 직업으로 생각했어요. ‘내가 드디어 글을 쓰는 작가가 됐구나. 직업인이 됐구나’ 싶어서 굉장히 뿌듯했죠. 시집이 한 시대의 상징이 되거나 사람들이 여러 의미를 부여해줬을 때는 솔직히 당황스럽기도 했어요. 내 의도와 다르게 그 말들이 쓰이니까.
제가 이번에 산 〈서른, 잔치는 끝났다〉가 개정판 8쇄예요. 50여만 부나 팔려나간 책이라면 오독할 수학적 확률이 생길 것 같아요.
누군가 그런 말도 하더라고요. 통계적으로 계산하면 우리나라 열 집에 하나쯤은 그 책이 있는 거라고. 그래서 제가 감당해야 할 후유증도 있었죠. 지금은 그냥 뭐 덤덤하게 받아들여요.
선생님의 시는 영시의 한글 번역본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정확하게 표현하는 개념어가 많아서 그렇게 느껴졌어요.
그렇게 볼 수도 있어요. 언어학을 전공한 분도 비슷한 말을 했어요. 내 시어가 아주 정확하다고. 내 시에는 한국어에만 있는 의태어도 있지만 주어, 목적어, 서술어가 비교적 정확하죠. 서양 문학을 많이 읽어서 그럴 거예요. 한국 문학책보다 서양 문학책을 더 많이 읽었어요.
그때는 어떤 작가를 좋아했어요?
닥치는 대로 읽었어요. 중·고등학교 교과서에 작품명만 소개된 ‘세계의 명작’ 있잖아요. 〈죄와 벌〉이나 〈적과 흑〉 같은. 그걸 다 읽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중·고등학생 때 책을 엄청 많이 빌려 읽었어요. 도서관 문 열 때 들어가서 문학 작품을 읽다 정신을 차려보면 주변에 애들이 아무도 없었어요. 방학 때는 거의 매일 가고, 방학 아닐 때는 일요일에도 갔어요. 점심, 저녁 도시락 두 통을 싸 들고.  
시인이 되겠다, 문학을 하겠다, 그런 생각은 없는 채로 그런 거예요?
그냥 좋아서. 그냥 어두운 새벽에 떠나는 거예요. 집에서 문을 열고 나가면 일곱 시쯤인가, 어슴푸레한 새벽빛이 있던 때부터 언덕을 내려가는 버스를 타고.
서울 종로구에서 살았다고 들었어요. ‘김신조 루트’로 간 거죠?
그 길이죠. 신영동에서 오래 살고 평창동에서도 살았어요. 135번이나 60번을 타고 중앙청(조선총독부 청사, 구 국립중앙박물관 건물로 1996년 철거됐다) 그쯤 내리잖아요. 거기서 정독도서관까지 가는 길에 가을이면 은행잎이 쫙 깔렸어요. 겨울에 그 길에서 흰 눈을 밟으면 사각사각 소리가 나고. 그때의 독서가 저를 키운 것 같아요. 서양 문학이 더 재미있더라고요. 더 드라마틱하다고 해야 하나? 더 넓고 다양한 세상, 거기 빠진 거죠. 〈플루타르크 영웅전〉이 진짜 재미있었어요. 그때 독후감 노트를 만들어서 마음에 드는 구절을 옮겨 적었어요. 그게 내 글쓰기 연습이 된 것 같아요. 그 인용구를 아직도 기억해요.
외람된 말씀이지만 세련된 소녀였네요. 대학도 서양사학과로 갔죠.
(전공 선택도 그때의) 영향이 있었던 것 같아요. 역사 이야기가 재미있잖아요. 리얼 스토리.
1980년도에 대학교에 입학했습니다. 시대의 한복판에 있었던 거군요.
그렇죠. 제가 1학년 때 광주 사태가 일어났고. 멋모르고 당했죠. 5월에 갑자기 학교 문이 닫혔어요. 신문에 보도가 안 되니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도 몰랐어요. 학교 문이 열린 가을에 뒤늦게 알았죠. 그걸 내가 뒤늦게 알았다는, 몰랐다는 자괴감이 있었어요.
그 당시에 그걸 어떻게 알았겠어요.
그렇긴 해요. 2, 3학년은 되어야 아는데 나는 신입생이니까. 사람들을 많이 만나는 성격도 아니었고요.
그때 마르크스의 저작물을 몰래 번역한 건가요? 시대에 빚진 기분 때문에?
번역은 졸업한 뒤에 했어요. 그때는 (부채감 같은) 그런 것도 있고, 뭔가 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선생님이 속한 세대인 또래 운동권의 잔치는 시집 제목과 달리 하나도 안 끝난 것 같아요.
끝났죠.
여전히 현실 세계의 많은 분들이 다양한 종류의 권력을 갖고 있잖아요.
어떤 사람들이 저보고 ‘최영미가 잔치를 끝냈다’고 비판한 때도 있었어요. 잔치는 내가 끝낸 게 아니라 그들이 끝냈어요. 더 이상 말로 설명할 수는 없어요. 잔치는 그들이 끝낸 거예요. 최근에. 몇 달 전에. (그렇게) 알아들으시라고. 난 더 이상 설명하고 싶지 않아요.
 
 
맑은 눈들에게
- 〈내가 사랑하는 시〉 중 
 
선생님의 시집 중 〈돼지들에게〉를 가장 좋아합니다. 아시겠지만 영국 낭만주의 시대의 천재 시인들은 미래나 기술에도 관심이 많았습니다. 그래서인지 그들의 시 중에는 지금 보면 거의 예언 같은 것도 있어요. 〈돼지들에게〉의 몇몇 시도 그렇습니다. 특히 ‘시대의 우울’ 같은 시가요.
아, “박정희가 유신을 거대하게 포장했듯이 / 우리도 우리의 논리를 거대하게 포장했다 / 그리고 지금, 그 대가를 치르고 있다” 부분. 나는 내가 쓴 시를 거의 다 외워요.
그 구절이야말로 2019년의 한국을 한 줄로 정리한 것 같아요.
특히 최근에 그 이야기를 들었어요. 어떻게 이렇게 미리 알고 썼느냐고. 모르죠. 그때나 지금이나 세상이 안 변하는 것 같아요. 〈돼지들에게〉는 독특한 시집이라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시집 한 권이 50만 부 넘게 판매됐으니 여러 기회가 있었을 것 같아요. 세속이든 명예든, 손을 뻗으면 가질 수 있는 게 있었을 텐데요.
(기회는) 많이 있었죠. 새로운 걸 무서워했어요. 첫 시집이 잘나가니까 난 평생 시 써서 소박하게 먹고살 수 있을 줄 알았어요. 광고 제의도 많이 왔어요. 맥주, 신문사, 구두, 백화점 상품권, 좀 우아한 광고들요. 광고에는 미련이 없는데 영화는 아까워요. 인생이 변했을 테니까. 이창동 감독이 본인이 시나리오를 쓴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에 출연을 권했어요. 그때 이창동 감독이 한 말이 지금도 기억나요. “영미 씨가 이 영화를 하면 인생이 바뀐다.” 그 말이 겁났어요. 나는 내 인생 이 괜찮고 잘나가는데 그게 무슨 뜻일까. 대학원 논문도 걸려 있었고. 영화는 내가 가지 못한 길이라 기회가 되면 한번 하고 싶어요.
지금 운영하는 출판사를 할 거라고도 생각하지 못했을 것 같은데요. 그건 어때요?
처음에는 내 온몸의 피를 바꾸는 것처럼 고통스러웠어요. 내가 소문난 기계치예요. PDF 파일도 열 줄 몰랐어요. 내가 대표이고 편집장이니까 교정을 봐야 하는데 〈다시 오지 않는 것들〉 본문 디자인 파일을 인쇄할 수가 없었어요. 아래아한글만 쓰다 보니 아무 프로그램도 안 깔려 있어서. 그때는 원인도 몰랐죠. 난 또 파일로는 교정을 못 해요. 옛날 사람, 구시대, 올드 패션이에요. 아는 출판사 편집자들에게 물어보니 설명은 해주는데 못 알아듣겠는 거예요. 노트북 갖고 서교동 사무실로 오라고 해서 갈까 하다가, 집 가까이에 독립 서점이 있어서 ‘젊은 친구들이 해결해줄 거야’ 싶었어요. 갔더니 애들이 여러 명 있어서 너무 반가운 거야. ‘이걸 열어야 하는데 인쇄가 안 된다’고 했더니 한번 보더니 뷰어 문제라며 어도비를 설정하니 금방 되는 거예요. 너무 고마워서 나중에 책 나오자마자 많이 줬죠. 그 친구들에게 감사하다고 말하고 싶어요. 그런 건 배우면 되는데 가장 힘든 건 홍보였어요.
홍보. 이제는 작가들도 가만히 있을 수가 없죠.
옛날에는 누가 ‘최영미 책이 좋다’고 하면 난 가만히 있으면 됐는데 이젠 내가 나가야 해요. 그게 내 성격에 안 맞고요. 저는 그 전까지는 ‘내 책은 안 읽는 사람이 손해’라고 생각했어요. 내가 날 인정하니까 홍보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어요. 내 페이스북에 같은 내용을 올리는 건 품위 떨어지는 일이잖아요. 무안하고. 그래서 남이 내 책을 좋다고 해주는 게 굉장히 고마웠어요. 그걸 따다 복사해서 붙여야 하는데 내가 기계치여서 그것도 잘 못해요.
21세기 작가들은 할 일이 많죠.
지금도 트위터에 있는 걸 페이스북에 못 옮겨요. 페이스북으로는 옮길 수 있지만 트위터는 비밀번호를 잊어버려서 노트북으로는 로그인을 못하고 스마트폰으로만 트위터를 해요. 그러면 (노트북에 데이터가 있으니까) 내가 트위터에 내 시를 일일이 다 쳐야 돼. 파일 주고받는 것도 너무 힘들었어요. 소송할 때 변호사님들하고 카톡방이 있는데 거기서도 PDF를 못 열었어요.
그런 걸 따라가기 너무 힘들지 않나요?
힘들어서 많은 사람의 도움을 받았죠. 사람들이 응대가 늦다고 오해하기도 해요. SNS에 고맙다고 댓글을 달아야 하는데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어떻게 하는지 모르니까 어떨 때는 되고 어떨 때는 안 돼요. 간신히 하고 있는 거예요.
아까 홍보 이야기 중에 ‘품위’라는 표현을 했어요. 품위나 아름다움을 중요하게 여기는 분이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으스대고 그런 생각을 한 적은 없지만 최소한의 자존심은 있죠. 내가 어느 정도까지는 타협하고 넘어가지만 이걸 건드리면 못 참죠.
아, 그게 뭔가요?
그때그때 달라요. 측정하긴 어렵지만 내 느낌이에요. 나도 많이 달라지긴 했어요. 요새는 그냥 넘어가는 것도 많아요. 타인의 실수에도 내 실수에도 관대해지고. 그렇지 않으면 살 수가 없어요.
그런 분이라고 생각해요. 하지만 선생님의 시 ‘괴물’은 일련의 ‘미투 정세’에 영향을 미쳤습니다.
이 정도로는 말할 수 있겠죠. 생각해보면 ‘왜 이 잔이 나에게 왔을까’ 싶었어요. 심하게 표현하면 ‘쓰레기 치우는 일을 왜 내가 해야 하나. 나보다 더 잘할 사람이 많은데’라는 생각도 했어요. 그런데 저보다 훌륭한 문인들이 침묵해서 제가 나서는 것처럼 보인 거예요. 저는 나서는 걸 싫어해요.
하긴 그간의 대외 활동도 그렇고, 기사를 검색해도 선생님 기사의 대부분은 다 최근 기사였어요.
나는 한 번도 문인 단체 같은 데서 나선 적이 없어요. 송년회도 안 나가고 사람도 안 만나고, 지난 20년간 거의 문단을 떠났어요. 그런데 어쩌다 〈황해문화〉의 청탁을 받아 시를 썼고 그 일이 커진 거예요. 그 시 하나로. 처음엔 너무 놀랐어요. 무섭고. 처음 언론사 몇 군데에서 연락이 왔을 때는 시치미 떼고 ‘시로 봐달라’고 했어요. 그런데 우리나라 언론이 빨리 돌잖아요. 너무나 많은 데서 연락이 오고 검색어에 오르고. 어느 순간 마음먹었어요. ‘이 시를 썼기 때문에 내가 책임져야 할 게 있다.’
어떻게 보면 페미니스트의 대표 격 중 한 분이 되기도 했고요.
여성 서클에 있었을 때 처음 여성해방 이론을 접했어요. 1980년대의 대학 문화는 세미나 등을 통해 선배들로부터 배우던 문화였어요. 수업은 거의 안 했고, 교수님의 영향보다 선배의 영향의 절대적이었어요. 그때 한 학기 동안 시몬 드 보부아르나 시몬 베유를 배웠고, 그들을 배우며 느낀 충격을 아직도 기억해요. 하지만 난 이론으로 페미니즘을 열심히 공부한 사람은 아니에요. 실생활에서도 아들 없는 집의 맏딸이에요. 어릴 때부터 부모님에게 “넌 여자니까 못 해” 같은 말 은 들은 적 없어요. 어릴 때 운동도 많이 했고.
반사 신경도 무척 좋다고요.
엄청 좋죠. 신호등 앞에 서 있다가 신호 바뀌면 제일 먼저 건너는 사람이 저였어요. 어릴 때 야외 운동도 굉장히 즐겼고요. 페미니즘 얘기하고 있었죠? ‘나는 페미니스트야’라고 자각하면서 글을 쓰지는 않았어도 내 속에 페미니즘 요소가 충분히 있었다고 생각해요. 첫 시집의 ‘어떤 족보’라는 시가 작년 미투 사건 이후 회자되더라고요. 구약에 빗대서 아브라함은 누구를 낳고 누구를 낳았는데 ‘허무하다 그치?’ 하면서, ‘어릴 적, 끝없이, 계속되는 동사의 수를 세다 잠든 적이 있다’라고 쓴 시. 그게 수십 년이 지나서 어떤 분이 페미니즘 계열 여성 시인의 시를 엮으며 그걸 넣었고요. 놀랐죠. 그 시를 쓸 때는 그냥 좀 이상하다고 생각했는데.
사전 질문지에 비슷한 질문이 있었습니다. 스스로를 어떤 시인이라고 생각하는지. “저는 스스로를 어떤 시인이라고 규정하거나 하지 않아요. 제가 시인인 것도 때로 잊고 사는데요”라는 답을 주셨죠. 이 대답이 좋았습니다.
저는 제가 어떤 주의자라고 생각한 적이 없어요. 나는 그냥 글쟁이, 글 써서 먹고사는 사람 정도. 그 이상 더 깊게 인식한 적은 없어요.
〈다시 오지 않는 것들〉 속표지에 “길이 보이지 않아도 나는 이 햇살 아래 오래 서 있고 싶다”라는 구절이 있어요. 왜 이 구절을 넣었나요?
그냥 그 문장이 왔어요. 그건 전에 쓰던 소설에서 온 문장이에요. 장편소설은 큰 흐름으로 쓰는 건데 나중에 보니 그 문장이 끼어들 데가 없는 거예요. 아깝지만 그 문장을 나중에 딴 글 쓸 때 쓰려고 따로 빼놨어요. 나중에 시집 낼 때 시가 모자라서 옛날 노트나 일기장을 뒤적거리며 건질 게 있나 했죠. 그걸 시집 속표지에 넣은 건 편집자 김소라 님의 아이디어예요. 나는 그 편집자 의견을 존중했고. 시는 내가 쓰지만 시 배치라든가 어떤 표지의 시구, 이런 건 내가 객관적으로 못 봐요. 편집자 의견을 존중해요. 그 의견을 따라야 해.
그런 구절 중 저는 〈내가 사랑하는 시〉의 맨 앞에 있는 “맑은 눈들에게”라는 표현이 좋았어요. 만나고 싶은 독자 역시 ‘맑은 눈들’인가요?
그렇죠. 눈 맑은 사람들.
아까 한 이야기처럼 최영미의 시는 안 읽으면 손해니까?
그건 반은 농담 반은 진담이지만 적어도 하나는 자신 있어요. 내 글은 시든 산문이든 결코 지루하지 않을 거라고. 지루할 틈을 안 주지 않나? 어떤 흡입력 같은 것. 소설이든 시든 한번 내 작품을 읽으면 놓지를 못한다고.
그게 진짜 중요하죠. 지금 문장의 다음 문장을 계속 읽게 하는 게요. 비결이 있어요?
몰라요. 일단 문학을 시작할 때부터 했던 생각이 있어요. 글로 사기 치지 않는다. 가끔 글로 사기 치는 인간들 보면 역겨울 때가 있어요. 보통 독자들은 몰라요. 다 속아요. 전문적인 독자들은 알죠. 나는 절대 글로 사기 치지 않아요. 그리고 가능한 한 적합한 표현을 좋아해요. 비록 그 표현이 내 약점을 드러내더라도 내 생각을 정확하게 표현해야죠. 약점이 보이지 않는 시, 글, 소설도 있어요. 나는 그런 작품 좋아하지 않아요. 조금 모자라도 자신의 약점을 드러내는 글을 좋아해요.
약점을 드러낼 줄 아는 게 용기겠죠.
사람도 자신의 약점을 보이는 사람을 좋아하지, 완벽해 보이는 사람을 믿지 않아요. 완벽해 보이는 것들이 가장 위험해. 이거 멋있는 말이지?(웃음)
시인 최영미는 본인의 원칙대로 살면서 여러 현실 세계의 어려운 일을 겪었습니다. 그래서 결국 개인 출판사까지 냈고요. 그 일련의 일이 멋있었어요. 사람들은 보통 압력이 들어오면 굴복합니다. 그런데 기계치라는 분이 혼자 책을 내고, 자기 시를 영어로 번역하고, 더 넓은 세계로 나가려 하고 있어요.
그런데 제가 아직 (영미권 시장을) 못 뚫었어요. 아마존 셀러 등록에 실패했고, 대만 여성 대회에 나갔을 때 주최 측에서 영어로 된 시집을 가져오면 자기들이 전시하고 판매해주겠다고 해서 한두 달 사이에 빨리 만든 거예요. 어떤 시는 이미 일부 영역되어 있었고, 새로 좀 추가해서 낸 거고. 크게 내 시를 알려야겠다고 생각한 게 아니라 외부에서 왔을 때 반응한 거죠. 대만 여성 대회에 초대받고 책 가져오라고 하지 않았으면 그 책 안 냈을 거예요. 나는 혼자 일을 만들지는 않아요. 웬만한 시 전문 출판사에서 시집을 안 내주는 것 같고, 그래서 ‘내가 내지’ 생각했어요. 어렵나, 뭐.
그와 달리 많은 사람이 자기도 모르게 어느 집단에 들어가 그 일부가 되잖아요. 그게 문단이든 뭐든. 한국에서 개인으로 사는 건 아직 어려워 보입니다. 저는 개인으로 사는 분들을 좋아해요.
감사합니다. 성격 같아요. 여럿이 하는 일보다 혼자 하는 일을 더 잘하고, 비사교적인 건 아니지만 혼자 있을 때 제일 마음이 편해요. 이제 시간이 거의 된 것 같고요.
마지막 질문 하려고요. 〈다시 오지 않는 것들〉에서 가장 좋았던 시는 ‘마법의 시간’이었습니다. “기다려찌/ 어서와찌/ 만져줘찌” 이렇게 ‘찌’로 끝나는 시요.
아, 그거 있어요. 화장품 회사 러쉬와 시 이벤트를 했는데, 그때 유치한데 한번 써본 거예요.
이 시집에서 ‘마법의 시간’ 같은 시는 그 시 하나뿐이에요. 강인하거나 처연하거나 생활감 있는 시가 더 많습니다. 그런데 제가 시인 최영미를 그런 이미지로 기억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냥 솔직하고 경쾌한 분이라고 생각하고 싶어요. 최근에는 투사로도 비쳐졌지만 해야 할 일을 한 거고요. 시인 최영미는 호전적인 사람이라기보다는 물러나지 말아야 할 때 물러나지 않은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인터뷰를 하고 싶었어요.
그렇죠. 누가 날 건드리니까 대응한 거지. 정확한 표현이에요. 아무튼 감사하고요. 이제 사진 찍고 끝내야 할 것 같아요.
그런데 종종 쏠 듯이 자극적인 시어와는 달리 말투는 진짜 품위 있네요.
글쎄, 내가 말을 잘 못해요. 말을 잘 못해서 글로 잘했나. 사진 찍고 가면 되겠다.
 
인터뷰는 이 말과 함께 끝났다. 최영미가 처음 우리에게 허락한 시간은 2시간 반이었다. 하지만 인터뷰에서도 보다시피 시인은 바쁘다. 인터뷰한 총시간은 57분이었다. 시인은 오기 전 사진 촬영 장소로 봐둔 도보 5분 거리의 호수공원에 가는 것도 거절했다. “추워, 감기 걸려요”라고 시인은 말했다. 어쩔 수 없이 오피스텔 앞에서 사진을 찍었다. 그날 춥긴 했다. 다만 호수공원에서 찍었다면 훨씬 좋은 사진이 나왔을 것이다.
최영미는 인터뷰에 승낙할 때부터 완성된 원고를 미리 보여달라고 했다. ‘말로 소통하면 언제든 오해의 여지가 있어서’였다. 이해했다. 여러 일이 걸려 있었으니까. 〈에스콰이어〉 편집부에 양해를 구하고 1차 완성본을 보냈다. 크게 문제없어 보이는 부분까지 삭제해달라는 요청이 왔다. 어떻게 대응할까 잠시 고민하다 그의 시 ‘내버려둬’를 떠올렸다.
 
시인을 그냥 내버려둬/ 혼자 울게 내버려둬 (중략) 누구누구에게 잘 보이라고 훈계일랑 말고/ 저 혼자 잘난 맛에 까칠해지게 내버려둬 (중략) 사교의 테이블에 앉혀 억지로 박수 치게 하지 말고/ 편리한 앱을 깔아주겠다,/ 대출이자가 싸니 어서 집 사라,/ 헛되이 부추기지 말고 (중략) 제발 그냥 내버려둬"
 
다만 최영미는 예민할 뿐 무례하지 않았다. 원하는 것과 그 이유가 모두 확실했다. 도움 준 사람마다 고맙다고 말했다. 시인과의 일 역시 까다로웠을 뿐 불쾌하지 않았다. 예민하지도 않은데 예민한 척하며 무례한 사람들이 수도권 곳곳에 있다. 최영미는 반대였다. 그래서 시인의 말을 따랐다. 최영미가 문제 삼은 구절은 모두 삭제되어 있다.
 
 
 
이곳이 촬영 장소로 점찍어두었던 일산 호수공원이다. 길 끝의 인물은 테스트 컷을 위해 선 인터뷰어 박찬용이다.
이 멋진 장소에 같이 좀 가주시지. 사진 속 인물이 최영미 시인이 아니라 박찬용 기자라는 사실에 에디터로서 괴로웠다.
시인의 전신 사진을 합성하는 방법도 고려했으나 금세 없던 일로 하였다.
글로 사기 치지 않는 시인 인터뷰에 사진으로 사기 칠 수는 없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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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edit

  • EDITOR 김은희
  • WRITER 박찬용
  • PHOTOGRAPHER 송시영
  • ART DESIGNER 김동희
  • DIGITAL DESIGNER 이효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