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LTURE

서점 사람들

싸리비에 쓸려가는 싸락눈은 참으로 쓸쓸한 무늬를 남긴다.

BYESQUIRE2020.01.09
 
 

서점의 사람들

 
 
 
싸리비에 쓸려가는 싸락눈은 참으로 쓸쓸한 무늬를 남긴다.
 
 
오전에는 눈이 내렸고, 서점 창문 너머로 가득 눈이 내렸고, 저 잘고 작고 하얀 것들로도 사람은 온전하게 만족할 수 있구나 싶어진다. 하염없이 구경만 하고 싶지만 비질 역시 서점의 일. 싸리비에 쓸려가는 싸락눈은 참으로 쓸쓸한 무늬를 남긴다. 꼭 누군가의 마음 같네. 중얼거리며 쓸다가 쓸기를 멈추는 것은 그런 까닭이다.
난롯가 가까이 서서 젖은 옷을 말리면서 귤껍질을 벗긴다. 톡톡 터져나가는 귤 향. K가 보내온 귤이다. 나와 K는 자주 만나지 못한다. 아니, 사실 몇 번 만나지 못했다. 한 사람은 제주에 살고 다른 한 사람은 혜화동에서 서점을 하고 있으니까. 잠시 생각한다. 우리는 친구일까. 귤이 달다. 다니까 우리는 친구가 맞다고 확신하고 만다. 이상하지만, 친구가 아니고서야 매해 겨울, 이렇게 다디단 귤을 보내줄 리가 없지 않은가. 나와 K는 이 작은 서점에서 만났다. 그는 손님이었고 나는 서점지기로 그를 맞이했다. 그다음은 생각이 나지 않는다. 분명 무언가 사연이 있을 법한데도. K를 생각하면 겨울 찬 바람과 귤 맛이 떠오를 뿐이다.
눈을 털면서 들어오는 것은 J다. 하루가 멀다 하고 찾아오는 단골이다. 알기로 J는 이 근방 어느 커피숍에서 파트타이머로 일하고 있다. 늘 웃는 사람이다. 때로 며칠씩 보이지 않기도 한다. 그럴 때면 슬쩍, 나도 모르게 기다리곤 하는데 불쑥 나타나서, 어디어디에 여행을 다녀왔다고 알려주는 것이다. 그런 그가 최근 얼굴이 어둡다. 집어 드는 시집도 온통 어두운 제목뿐이다. 실연을 한 것인지, 직장에 무슨 문제라도 있는 것인지 걱정이 앞서지만 사연을 묻는 것은 서점의 일이 아니니까 차를 한 잔 내주거나 출판사에서 받아 온 사은품을 챙겨두었다가 건네는 것으로 위로를 대신하고 있다. 오늘은 오랜만에 환하다. 나는 그에게 귤을 하나 건넨다. 달아요, 그거. 하면서.
선물을 하고 싶은데 어떤 시집이 좋을지 모르겠다는 이가 있다. 친구가 서점과 가까운 대학 병원에 입원해 있다고 했다. 다행히 중병은 아니라고 덧붙여주니 마음이 한결 가볍다. 사실 나의 서점에 꽂혀 있는 천여 권의 시집 중에 직접적으로 위안을 전해줄 만한 것은 없는 것 같다. 그럴 때 한껏 초라해지기도 하는데, 그깟 시가 뭐라고 내가 이렇게 열심인가 싶기도 한 것이다. 중병이 아니라니까 열(熱)이 높은 것도 좋겠고, 말놀이가 현란한 시집도 좋겠다. 이런저런 궁리를 한참 하다 한가득 시집을 골라버렸다. 모두 구매하시라는 것은 아니에요. 살펴보시고 마음에 드는 것으로 하나만 고르는 게 좋겠어요. 멋쩍어 돌아선 내 등 뒤에서 그는 마다하지 않고 시집을 하나하나 신중하게 살펴보고 있다. 마침내 두 권을 골라 내미는 그를 보니 이만한 문병 선물이 또 어디 있겠나 싶고.
눈은 어느새 그쳐 있다. 조금은 쌓였어도 좋았겠으나 흥건할 뿐 아무것도 없다. 그러나 아직 겨울은 한창이니 한두 번은 더 그런 눈이 내리지 않을까. 구름은 채 거두어지지 않은 모양이지. 다섯 시도 되지 않았는데 창밖은 밤에 가깝다. 멀리 군고구마 노점이 보이고, 장작 위에서 흔들리는 불빛도 보이고, 그 앞에 서 있는 사람은 종종 서점을 찾는 사람이다. 매번 찾아와 어려운 책을 주문하는 사람. 그는 말이 없고 잘 웃지도 않으며, 언제나 이어폰을 꽂고 있다. 인근 식당에서 한두 번 마주친 적이 있다. 언제나 그는 혼자였다. 가볍게 눈인사를 하면서 그때마다 참 외로운 사람 같다고 생각했다. 그런 그가 군고구마를 사고 있다니. 뜨거운 고구마를 후후 불어 먹으며 이 까만 밤을 보낼 그를 상상하니 그것은 그것대로 참 근사하다.
곧 서점을 닫을 시간이다. 아무도 오지 않는 시간이 길어지고 있다. 읽는 것도 쓰는 것도 뜻대로 되지 않아 서성거리고 있을 때, 비뚤어진 책을 바로잡고 잘못 꽂혀 있는 책을 찾아 바로잡기도 하면서 그럭저럭 시간을 버텨내고 있을 때, 하얀 소국을 한 다발 들고 찾아오는 사람은 사서 H 씨이다. 혜화동에서 한참 떨어진 곳에 살며 근무하는데도 기꺼이 여기까지 오는 그가 참 고맙다. 언젠가 H 씨의 초청으로 그의 일터에서 강연을 한 적이 있었다. ‘구름과 시’를 주제로 두 시간 정도 이야기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그가 이렇게 먼 길을 찾아오는구나 하고 공연히 시큰한 적도 있었다. 나의 서점에는 시집만 있는데. 그런데도 이렇게 먼 길을. H 씨는 아니라고 했다. 먼 길인 건 맞지만 이 서점에 시집만 있는 것은 아니라고. 어쩌면 H 씨의 눈에 이 서점은 조금 다른 모양과 빛을 가지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 ‘조금 다른’ 것이 무엇인지 나는 모른다. 어쩌면 내내 모를지도. 서점에 참 잘 어울릴 것 같아서 샀다는 그 흰 소국 다발을 건네고 그는 약속이 있다며 부리나케 가버린다. 무어라 대꾸를 하기도 전에.
하나둘 불빛이 사라져 이윽고 깜깜해진 서점을 난 참 좋아한다. 인근 가로등 불빛이 들이쳐 어두운 서점의 일부가 어슴푸레 드러난다. 꽃병에 꽂힌 꽃이 보인다. 눈으로 시작해 꽃으로 끝이 난 하루다. 신통찮은 매출에도 어쩐지 부자가 된 것만 같아서 웃음 지었다가 이내 거두는 그런 하루다. 어찌 되었든 내일도 서점을 열어야 하고 몇 명이든 사람을 맞이해야 할 테니까, 이제 서점이 곤한 잠에 들 시간이다. 쿵 소리가 나게 문을 닫는다. 안녕. 오늘도 수고했어. 잘 자. 내가 서점에게 건네는 밤 인사다.
 
 
〈우리가 함께 장마를 볼 수도 있겠습니다〉, 박준, 문학과지성사, 2018.

〈우리가 함께 장마를 볼 수도 있겠습니다〉, 박준, 문학과지성사, 2018.

이달의 시집
‘우리’라는 말을 가장 다정하게 부릴 수 있는 시인은 분명 박준이다. ‘곁’이라는 단어를 실온으로 바꿀 줄 아는 시인 역시 분명 박준이다. 그러니 새해의 시인 역시 박준이어야 하지 않을까. 우리를 위해 기꺼이 곁을 내주는 시를 쓰는 사람이니까. 그의 언어는 ‘기꺼이 서로의 머리를 털어줄 것’이다. 그러니 안심하고 새해의 어느 다짐 속에서 읽어가기를.
 
 
〈샤넬: 하나의 컬렉션이 탄생하기까지〉, 글 레티시아 세낙, 그림 장-필립 델롬, 오부와, 2019.

〈샤넬: 하나의 컬렉션이 탄생하기까지〉, 글 레티시아 세낙, 그림 장-필립 델롬, 오부와, 2019.

이달의 책 
왜 그리 비싼 건지 심드렁하던 마음이 넷플릭스 〈D-7 카운트다운〉 샤넬 오트쿠튀르 쇼 편을 보고 조금은 누그러진 기억이 있다. 얼마큼은 더 인정하는 마음도 생겼다. 샤넬을 만드는 이들에게 부끄러움이란 없었다. 부끄럽지 않을 만큼 기력을 다해 만들기에. 샤넬의 바느질 한 땀까지 놓치지 않은 기록이 나왔다. 칼 라거펠트는 물론 샤넬의 실크, 캐시미어, 단추 등을 만드는 공방 프리미에르들과의 인터뷰까지, 하나의 샤넬이 탄생하기까지의 대장정을 담았다. 특히 물욕이 괴로운 이들에게 추천한다. 명분이 생긴다. 사물이 아니라 가치를 산다는, 실체 없으나 분명한 명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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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edit

  • EDITOR 김은희
  • WRITER 유희경/김은희(이달의 책)
  • DIGITAL DESIGNER 이효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