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식 or 습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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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식 사우나에 앉아 있다 어느 순간이 지나면 단수였던 수도꼭지에서 물이 나오듯 땀이 줄줄 흐른다. 피부의 모든 구멍이 잠긴 듯한 겨울에 그렇게 땀을 흘리면 무척 상쾌하다. 레몬즙을 짜듯 사우나에서 땀을 흘리던 어느 날 뭔가가 생각났다. 애무도 건식과 습식으로 나눌 수 있겠구나. 손으로 하면 건식 애무, 입으로 하면 습식 애무.
건식 애무와 습식 애무를 원고 주제로 정한 날 김은희 에디터와 참치회가 녹을 때까지 이야기를 나눴다. 마침 함께 있던 사진가 송시영도 의견을 보탰다. 이날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사상의학처럼 좋아하는 애무에 따라 사람을 네 가지로 분류해보기로 했다. 건건인, 건습인, 습건인, 습습인. 내가 해주는 애무가 앞 단어고 내가 받는 애무가 뒤 단어다. 건건인은 해주는 것도 받는 것도 건식 애무를 좋아하는 사람이다. 건습인은 해줄 때는 건식, 받을 때는 습식을 좋아한다. 습건인은 해줄 때는 습식, 받을 때는 건식을 좋아한다. 습습인은 해줄 때도 받을 때도 습식을 좋아한다.
이렇게 네 가지 타입을 정해두고 각각의 성격을 가늠해보기도 했다. 건습인은 이기적일 것 같았다. 입 애무가 손 애무보다 좀 더 공이 많이 들 것 같은데, 할 때는 건식으로 하면서 받을 때는 습식을 원하니까. 반대로 습건인은 이타적이거나 결벽증이 있을 것 같은 느낌. 습습인은 열정적일 것 같고, 건건인은 고수 느낌.
내 섹스 칼럼에서 제일 중요한 건 어떤 질문을 만드느냐다. 사람들이 부담 없이 대답하면서도 일말의 자기 기호를 드러내는 질문을 짜는 게 중요했다. 그런 면에서 ‘건식 애무와 습식 애무’는 만족스러운 주제어라고 자평했다. 부담 없는 어감이니 대답하기도 쉽지 않을까. 역시 늘 그렇듯 현실은 내 예상과 달랐다. 바리스타 김혜미 씨도 카페가 떠나가라 웃기만 하고 본인의 성향을 말해주지는 않았다. 별수 있나. 거절당하는 것도 일의 일부다. 영업직과 큰 차이가 없다.
“난 늪이야. 습을 넘어서 늪이지.” 권헌준 씨는 어쩜 하는 말마다 저럴까. 삼겹살을 익혀가며 건식 애무, 습식 애무의 개념부터 건건인과 습습인의 개념까지 다 설명하자마자 저런 대답이 돌아왔다. 권헌준 씨에게는 건식 애무의 개념을 설명하는 게 더 어려웠다. “애무할 때 다 침 바르고 하지 않아? 질퍽하게” 아니 이게 무슨 말이야. 권헌준 씨는 손을 한번 혀로 핥고 애무를 시작하는 건가? 나는 그 이상은 상상하지 않으려 했다. 아무튼 권헌준 씨는 습습인이었다.
“상대방이 만족했을 때 기분이 좋습니다.” 인테리어 디자이너 김중훈 씨는 개념 설명을 들은 후 자신은 습건인이라고 했다. “저는 섹스할 때 제가 주도권을 잡는 걸 좋아합니다. 주도권이 다른 게 아니라, 제가 상대방에게 뭔가를 해줄 때 생기는 것 아닐까요? 섹스할 때 제 노동은 최대치로 하고, 상대방의 노동은 최대한 가볍고 캐주얼하게 하는 걸 좋아합니다.” 묘한 말이었다. 착한 것 같으면서도 야한 것 같기도 하고. 이타적인 것도 맞는데 더 높은 차원의 쾌락 같기도 하고.
“저는 상대방의 반응을 많이 살핍니다. 제가 좋은 것보다 상대가 만족하는지.” 자꾸 착한 이야기만 듣다 보니 나는 김중훈 씨의 속마음을 의심하기 시작했다. 김중훈 씨는 최근 여자 친구가 생겼다. 검찰이 기자에게 정보를 흘려 여론전을 하듯 나에게 착한 코멘트를 보내는 건 아닐까? 이 말을 그대로 보여주면서 ‘나 이런 남자야’라고 자랑하려는 것 아닐까? 김중훈 씨는 살짝 비웃었다. “제가 이 원고를 보여주면 여자 친구가 저보고 뭐라고 하겠습니까? ‘전에도 이랬지? 다른 여자랑도 이랬지?’ 같은 반응이 오지 않을까요? 저한테 이득일 게 없습니다.” 나는 납득했다. 김중훈 씨는 습건인.
사실 스스로를 습습인이라고 한 사람이 가장 많았다. 참치회 앞에서, 각자의 자리에서 만난 다른 사람들도 웬만하면 자기가 습습인이라고 답했다. “다들 그렇지 않을까요?”라는 말과 함께. 일리 있다. 기왕 하는 섹스, 열정적으로 하는 게 좋지 않을까. 최선을 다한다고 늘 최고가 되는 건 아니지만 최선을 다하다 보면 최고가 나올 수도 있다. 섹스도 마찬가지다. 그런 면에서 습습인 같은 자세는 좋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전 그냥 넣는 게 좋은데요. ‘삽입인’ 하면 안 됩니까?”라고 말한 김인건 씨 같은 사람은 건습인이라고 볼 수 있다. 상대방의 습식 애무를 마다할 남자는 별로 없을 테니까. 질문을 받은 사람 중 “습식을 안 좋아하는 남자가 어딨어?” 같은 말도 여러 번 들었다. 삽입을 좋아하는 김인건 씨는 평소에도 합리적인 편이었다. 손해도 안 보고 절세형 저축과 재테크에도 능하고 중고나라 거래도 잘했다. 섹스라는 마음속 깊은 곳의 기호가 평소 행실에서도 은근히 나오는 걸까? 모를 일이다.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고.
“난 건식, 습식 둘 다 좋은데? 건습 결합 애무는 안 되나요?” 김예리 씨는 건습·습건 인간 분류를 듣자마자 이 분류의 맹점을 짚었다. 역시 〈에스콰이어〉 섹스 칼럼의 뮤즈다운 디테일이었다. “난 남자에게 건식으로 애무를 받다가 습식으로 넘어가는 게 좋아요.” 마른안주 먹다가 탕 시키는 느낌과 비슷하려나. 김예리 씨는 내 의미 없는 맞장구를 뒤로하고 말을 이었다. “내가 해주는 건 습식이 좋고. 하지만 핵심이 뭐겠어요? 건습 결합이에요. 부지런하게!”
김예리 씨에게는 손과 입이 모두 쉬지 않고 움직이는 게 이상적인 애무였다. “맞아. 모두 부지런히 공략해줬으면 해. 놀면 뭐 해.” 김예리 씨 말대로 섹스도 부지런할수록 좋은 것이었다. 하긴 생각해보니 섹스야말로 부지런해야 하는 것 같다.

건습론으로 본 인간의 4종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