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FE

극복하는 사람과 도망치는 사람의 차이

온갖 잡초를 뽑아야 하는 현실을 저리 두고 나는 토끼풀을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BYESQUIRE2020.02.10
 
 

토끼풀과 270유로짜리 향초

 
 
온갖 잡초를 뽑아야 하는 현실을 저리 두고 나는 토끼풀을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잡초는 언제나 승리한다. 땅을 주무르는 생활을 해본 사람이라면 이 문장에 동의할 것이다. 지난 몇 년 동안 시골에서 살면서 내가 가장 두려웠던 건 텃세도 미래에 대한 두려움도 아슬아슬한 통장 잔고도 아닌 잡초였다. 여름 장마 같은 폭우가 쏟아지고 강풍이 몰아치더니 오늘은 봄 같은 비가 내린다. 고요한 겨울의 빗소리. 땅의 힘을 길러주는 고마운 비에 동네 할머니들의 맘은 흡족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집 앞 잔디밭에 자라나기 시작한 잡초를 어쩔까 고민하고 있다. 이런 날은 아침에 다르고 점심에 또 다르다. 도시에 살 땐 몰랐다, 이 추운 겨울에도 잡초는 아우성치며 자란다는 걸. 어떤 것들은 한 줌 볕으로도 근근이 생명을 이어간다는 걸.
이번에도 한발 늦은 것 같다. 잔디밭에는 이미 잔디가 아닌 풀이 더 많이 보인다. 이 시골집을 떠날 때까지 남은 시간은 한 달여 남짓. 그동안 저것에 손을 댈까, 아니면 방치해둘까. 녀석들은 빠르게 자라나고, 나의 마음은 조바심에서 야속함을 지나 공연한 분노로 옮겨가고 있었다. 대체 왜! 아끼는 화분들은 집 안에서 시들시들 시원찮은데 쟤들만 어쩜 저럴까? 옆집 남자가 내 남편 보약을 훔쳐 먹는다면 이런 기분일까?
그중 나를 가장 미치게 만드는 건 토끼풀이다. 잡초가 어릴 땐 호미 등으로 긁어내고 좀 더 자란 건 손으로 잡아 쑥 뽑거나 호미 끝으로 파내면 된다. 하지만 토끼풀은 포복하듯 땅을 기면서 자라고 그 마디에서 새로운 뿌리를 내리는 식으로 퍼진다. 문제는 그 뿌리가 머리카락보다 더 가늘게 자란다는 것. 그것을 완벽하게 캐내는 일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가느다란 뿌리가 한 조각이라도 남아 있으면 거기에서 다시 토끼풀이 자라기 때문이다. 낮은 포복으로 제 영역을 넓혀가다가 탁월한 조직 배양 능력으로 수많은 클론을 만들어내는, 실로 무시무시한데 이름은 귀여운 놈! 토끼풀!
심란한 마음으로 잔디밭을 둘러보다가 이 억척스러운 클론들을 그냥 둘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오늘부터 잔디밭이 아니라 토끼풀밭이라고 부르면 되잖아? 클로버 가든이라고 하면 왠지 더 고상해 보이고. 저 중에는 분명 네잎클로버도 몇 개쯤 있을 테니 행운을 가져다줄지도 모르고. 가만히 보니 거꾸로 된 심장 모양도 귀엽지 않아? 맨발로 밟으면 발바닥을 보드랍게 간지럽힐 거라고! 433년에 성 패트릭이 아일랜드에 가톨릭 교리를 전파할 때 토끼풀을 이용해 성삼위일체를 설명했다고 하니 또 얼마나 거룩한 느낌이야? 그만하자….
자기 앞에 놓인 문제와 고통을 침묵으로 견디는 이가 있고 고래고래 소리 지르며 그것과 싸우는 이가 있고 혼자서 열패감과 자기혐오에 빠져드는 이가 있다면, 내 경우는 문제를 저쪽에 내버려두고 딴청을 부리는 편이다. 온갖 잡초를 뽑아야 하는 현실을 저리 두고 나는 토끼풀을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내가 그런 사람이라는 걸 나도 최근에 알았다. 그래서 요즘 초월과 외면의 차이에 대해 자주 생각한다. 그리고 그 욕실을 떠올린다.
독립과 결혼 사이, 4년 동안 혼자 지낸 원룸이었다. 신발을 벗고 들어가면 방 안이 한눈에 보이던 나의 첫 공간. 무인양품에서 산 싱글 침대가 한쪽에 놓여 있고(이 침대를 살 때 매장 직원이 제품의 내구성을 뽐내며 “10년은 거뜬히 사용할 수 있어요”라고 말해서 20대 후반의 나를 분노하게 만들었다. 앞으로 10년 동안 싱글 침대에서 홀로 잠들라는 저주입니까?) 다른 쪽 벽에는 책과 옷이 아무렇게나 쌓여 있는 남루한 방이었다. 방에 딸린 욕실에는 변기와 세면대, 초소형 통돌이 세탁기가 나란히 놓여 있었고, 나는 아침마다 세면대와 세탁기 사이에 서서 내가 가진 가장 커다란 기계에 최대한 물을 튀기지 않도록 주의하며 샤워해야 했다. 좁고 천장이 낮고 환기가 잘 안되는 건 참을 수 있었는데 문제는 전등이었다. 내 얼굴만 한 둥근 전등이 천장에서 떨어져 전선 끝에 대롱대롱 매달렸다. 그걸 고쳐달라고 꼭대기 층의 집주인 할아버지에게 연락했더니 꼭대기 바로 아래층에 사는 그의 아들이 출동했다. 말이 없던 거구의 아들은 커다란 철제 공구함을 들고 나타났는데, 그것만으로도 나는 겁에 질렸다.
고쳐도 고쳐도 전등은 자꾸 떨어졌다. 천장이 낡고 삭아서 그렇다는 것을, 천장 공사를 해야 문제가 해결된다는 것을 우리 모두 알고 있었다. 알면서도 집주인 할아버지는 번번이 아들을 내려보냈다. 눈 가리고 아웅하는 집주인에게 “어르신! 왜 얕은 수로 절 속이려 하세요? 저는 이런 집에서는 도저히 못 삽니다. 당장 천장을 뜯어 고쳐주세요!”라고 소리쳤다면 좋았겠지만 나는 그러지 못했다. 나의 불편과 억울함을 쉽게 말하지 못하던 시절이었다. 기죽은 채로 능력에 넘치는 일들을 수습하고 휘적휘적 돌아와 잠만 자고 다시 나가던 시절이었다. 열렬히 소망하던 일을 드디어 하게 됐는데, 세상은 내 맘 같지 않았다. 사회 초년생들이 으레 그렇듯, 잘해내고 싶은데 밑천은 늘 초라했고 인간관계는 자꾸 꼬였다. 안팎으로 대책 없이 구겨졌다. 지난 마감에 허물어진 자존감을 보수하기도 전에 다음 마감이 돌아오곤 했다.
초년생의 사회적 자아는 끈덕지게 집까지 따라와 나를 쭈글쭈글하게 구겨놓았다. 세입자의 권리 따위를 주장할 에너지가 없었다. 집주인 할아버지는 여러 개의 원룸을 세놓은 지난 세월 동안 수많은 초년생들을 봐왔을 것이다. 말하자면 그는 쭈글이들의 습성을 잘 아는 사람. 이쪽은 난생처음 셋방을 살아보는 신생 쭈글이. 싸움의 승패는 이미 정해져 있었다. 납작해질 대로 납작해진 나는 다세대주택의 좁은 복도에 초라하니 서서 작은 소리로 어물어물 간청했다.
 
“저… 그럼 혹시 전등을 다시 달아주실 수 있나요?”
 
그날의 고된 노동을 마치고(땀 냄새로 알 수 있었다) 퇴근한 뒤에 공구함을 들고 도무지 해결되지 않을 문제를 직면하러 오는 집주인의 아들도 고역이었겠지만, 나는 말 없는 빅 보이와 단둘이 그 작은 공간에 있다는 사실에 매번 두려움에 떨면서도 최대한 예의를 갖추며 겁에 질리지 않은 척해야 했다. 그리고 전등은 자꾸 떨어져 위태롭게 매달렸다. 그것은 다만 중력에 반응할 뿐 인간들의 고통은 고려하지 않았다. 빅 보이가 네 번쯤 다녀간 뒤 어느 날 나는 해괴한 결심을 했다. 천하의 구두쇠 집주인 할아버지와 무기력한 빅 보이와 겁에 질린 20대 후반의 여자. 이 셋의 고리를 끊어버리자. 아무려나 저 전등은 매달리고 싶어 하는 전등. 나는 이제부터 욕실 불을 켜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이다!
그렇게 초를 켜는 생활이 시작됐다. 어둠 속에서 어른거리는 촛불에 의지해 머리를 감고 이를 닦고 똥을 싸는 날들이었다. 장딴지만 한 크기의 초를 어느 브랜드에서 선물 받아 그것을 변기 수조 뚜껑 위에 올려두고 사용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 초는 1643년부터 프랑스에서 생산되어 왕실과 대성당에 납품한다는 최고급 브랜드의 향초였다. 아, 그 기괴했던 방 분위기와 어른어른한 촛불과 성스러운 향이 떠올라 새삼 아련해진다. 그런데 가만 생각해보니 나 혼자 이유 없이 고통받은 것이 아닌가 싶다. 어쩌면 그것은 처음부터 집주인의 계략이었을까. 돈푼이라도 아끼려던 스크루지 영감의 꼼수에 나는 말려들었고, 촛불에 의지해 사는 주제에 이것도 나쁘진 않다고 생각하면서 그에게 감히 ‘메롱’ 한 번 날리지 못한 것이다. 눈 가리고 아웅은 저쪽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에게 한 것이 아닌가.
그리하여 나는 다시 초월과 외면의 차이를 생각해본다. 극복하는 사람과 도망치는 사람의 차이에 대해 생각한다. 나는 도망치는 사람이었다. 전등을 대롱대롱 매달아두고 그 곁에서 겁도 없이 물을 튀기며 샤워하는 사람. 어둠 속에서 초를 켜고 똥을 싸는 사람. 그 초가 세상에, 270유로짜리라는 것을 나중에 알고는 ‘오, 어쩐지 향이 좋더라’ 하며 그걸 추억 삼아 떠드는 사람. 견딜 수 없는 불운은 그저 피할 수밖에 없다는 태도로 살아왔다. 하지만 올해부터는 마음을 바꿔보려고 한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지금, 여기에서, 당장 하겠다는 태도를 가져보려는 것이다. 우선 비 그치면 토끼풀부터 뽑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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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EDITOR 김은희
  • WRITER 김자혜
  • DIGITAL DESIGNER 이효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