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FE

사회적 거리두기가 바꿔놓은 운동장

팬데믹 사태와 함께 요구된 사회적 거리두기가 내향적 사람에게는 어떻게 받아들여질까.

BYESQUIRE2020.05.25
 

사회적 거리 두기가 바꾼 운동장이 있다

 
기울어진 운동장. 최근에 배운 단어다. 얼핏 보기에는 공정해 보이지만 알고 보면 근본부터 누군가에게 더 유리하도록 만들어진 게임을 포괄하는 용어. 성차별이나 지역 차별 같은 우리 사회에서 벌어지는 차별의 원리를 설명하는 개념이기도 하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기울어진 운동장은 정말 어디에나 있다. 그렇게 세상이 기울어진 것 중 하나가 성격, 그중에서도 외향성과 내향성 사이의 운동장이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 이건 단지 미사어구가 아니라 필연성, 인간 생존의 비결이 사회성에 있다는 뜻이다. 두 발로 다니면서 얻게 된 지구력을 제외하고는 개개인의 인간이 다른 동물에 비해 나은 경쟁력은 거의 없다. 인간의 진짜 힘은 다른 인간들과 한 집단으로 모여 협력할 때 발휘된다. 인간은 언제나 공동체를 구성해서 생존하고 번성했다. 그래서 우리의 뇌는 생면부지의 환경에 던져졌을 때 제일 먼저 다른 사람을 찾도록 프로그래밍되어 있다. 심지어 사람이 안 보이면 사람 비슷한 것이라도 찾아내서 상대하려 든다. 우리가 평소 당연하게 사용하는 ‘언어’나 그 언어를 도구로 하는 ‘생각’도 모두 상대가 있어야 활성화되는 기능이기 때문이다. 영화 〈캐스트어웨이〉의 톰 행크스가 무인도에 떨어진 다음에 배구공 ‘윌슨’을 친구로 삼은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서은국 교수는 “인간의 뇌는 사람에게 중독되어 있다”고까지 표현한다. 외향성은 이러한 사회적 인간의 속성과 일치하는 성향이다. 사람을 찾고 만나고 친해지고 더 자주 만나고 더 많이 대화하고 그러다 보면 자연스럽게 부산물을 얻는다. 그 대부분은 본인이 더 잘 사는 데 도움이 되는 것들이다. 그래서 외향적인 사람은 행복하다. 이건 심리학계에서 가장 오래되고 확고한 사실이다. 서은국 교수는 〈행복의 기원〉에서 “외향성은 행복과 가장 손을 꼭 쥐고 있는 짝”이라고 말한다. 이 둘 간의 관계는 최근에 발견된 것이 아니라 30년 전 성격에 대한 연구를 통해 우연히 발견된 이후 지금까지 계속 확인되어왔다. 그러니까 외향적인 사람은 이 세상을 살아가는 데 별문제가 없다. 이 세상은 외향적인 사람에게 딱 어울리게 만들어져 있다.
문제는 내향적인 사람이다. 내향적인 사람은 혼자 있어야 심리적 에너지가 충전되고, 어디 나가서 사회적 교류를 하는 동안 그렇게 충전한 에너지를 방전하며 사는 사람이다. 외향적인 사람이 왁자지껄한 파티를 통해 삶의 활력을 되찾는 동안 내향적인 사람은 지쳐간다. 원래부터 세상은 내향적인 사람에게는 기울어진 운동장이었다. 외향적이지 않다는 것만으로도 여기저기서 부적절한 존재가 되었다. 그들은 이 세상에 적응하고 살아가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발에 맞지도 않는 신발을 신고 뛰어다니듯 불편함을 감수하며 지내왔다. 기술의 발달이 해결책이었을까. 2000년대 초반, 인터넷 중독에 대한 연구를 하면서 발견한 사실은 인터넷 중독자의 본질이 사회적 관계로부터의 도피라는 점이었다. 그들은 우울했고, 세상에 나서기가 너무나 두렵고 힘겨운 사람들이었다. 인터넷은 그런 그들에게 최적의 도피처였다. 웬만한 온라인 커뮤니티가 대부분 자칭 타칭 ‘아싸’들로 가득 찬 건 그런 곳이 그들에게 가장 편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인터넷이 주류가 되면서 상황이 바뀌었다. 인터넷도 외향적인 사람 편이었다. 그들은 페이스북이나 인스타그램 같은 소셜 네트워크를 통해 자신의 외향성을 글로벌하게 꽃피웠고, 내향적인 사람은 그곳에서도 조금씩 밀려나 온라인 커뮤니티의 익명 게시판 같은 곳에서 자기 자리를 찾았다.
그런데 팬데믹이 모든 것을 바꾸었다. 면대면 만남의 비용이 커진 거다. 사실 면대면 만남은 처음부터 소모적이었다. 어울리는 옷을 고르고 매무새를 단장하고 외출해서 약속 장소까지 시간 맞춰 도착하고, 누군가를 만나서는 얼굴 표정을 관리하고 사소한 언어적 비언어적 메시지를 캐치해가며 그에 맞는 적절한 반응을 타이밍 맞춰서 해주는 지난한 작업이 면대면 만남이다. 단지 그 절차만이 문제가 아니다. 예측할 수 없고 통제가 되지 않는다는 점이 더 심각하다. 만남의 내용은 원래 계획이나 의제와는 상관없이 제멋대로 뻗어나가기 일쑤다. 인간은 원래 변덕스러운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원래 어젠다에 초점을 맞추는 것도 쉽지 않다. 내게 권한이 없는 경우도 많다. 만남의 종료조차 상대방이 충분히 동의하는 시점에 적절한 방식으로 마무리해야 한다. 잘못하다간 2차, 3차 미팅으로 이어지는 고난이 펼쳐지기도 한다. 외향적인 사람에게는 이게 숨 쉬듯 편안한 일상일지 몰라도 내향적인 사람에게는 하나하나가 에너지를 소모하는 일이다. 그렇게 소모적인 면대면 만남이 이제는 심지어 바이러스를 전파하다니!
그 결과, 이 팬데믹 사태와 함께 요구된 ‘사회적 거리 두기’가 외향성과 내향성 사이의 기울어진 운동장에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인류 역사가 시작된 이래 지금까지 수많은 격변과 혁명에도 불구하고 변함없던 그 기울기가 변하기 시작했다. ‘사회적 거리 두기’라니. 그것이야말로 내향인에게는 일상이 아니던가. 사회적 거리 두기를 요구하는 세상은 외향적인 사람에게는 끔찍한 감옥일지 몰라도 내향적인 사람에게는 유토피아 그 자체다. 사람을 만나지 말라는 것도 아니고, 단지 직접 만나지 말고 온라인으로 만나라는 것 아닌가. 나 역시 올해 초부터 수많은 오프라인 회의와 강연이 취소되거나 온라인으로 바뀌었다. 덕분에 시간도 에너지도 여유가 생겼다. 생각할 시간도 늘고 글을 쓸 시간이 늘었다. 물론 작금의 사태가 수많은 서비스직, 비정규직 노동자들에게는 절박한 생존의 위협이다. 그러나 이런 생존의 문제를 제외하고 오로지 성격이라는 틀로만 바라보자면, 이 시국에 밖으로 나다니지 못하고 파티를 하지 못해서 온몸이 배배 꼬이는 외향적인 사람들과 비교해 사회적 거리 두기로 인해 처음 만나는 편안함을 조용히 만끽 중인 내향적인 사람들이 눈에 들어온다.
아직도 전 세계가 팬데믹에 휩쓸리는 와중이지만, 이 시국도 언젠가는 끝날 것이다. 그때쯤에는 내향적인 사람들 편으로 기울어졌던 이 운동장도 결국 제자리를 찾으리라. 인류에게는 다행이지만 내향적인 사람들에게는 조금 아쉬울지도 모른다. 물론 이번에 전 세계가 반강제적으로 경험한 재택근무와 온라인 만남의 경험이 그냥 사라지지는 않으리라. 앞으로의 세상이 코로나19 사태 이전으로는 결코 다시 되돌아갈 수 없다는 전문가들의 말이 맞다면, 내향적인 사람에게 더 편안한 공간이 조금은 더 늘어날 수도 있다.
우리 같은 내향적인 사람들이 기대하는 것도 그 정도다. 운동장 전체의 기울기를 바꾸는 것이 아니라 내향적인 사람들 편으로 기울어진 지점이 조금 더 늘어나는 것 말이다. 따지고 보면 이 세상에서 안 기울어진 운동장을 찾는 게 더 힘들지도 모른다. 공정함은 운동장을 평평하게 만듦으로써 찾을 것이 아니라 더 다양한 기울어짐을 통해 찾을 일인지도 모른다. 우리가 게임을 해야 하는 운동장이 한둘이 아닐진대, 그 운동장들이 제각각 이리저리 기울어지다 보면 누구에게나 자신에게 불리한, 혹은 그 반대로 더 유리한 운동장이 부여되지 않겠나.
 
Who’s the Writer?
장근영은 심리학 박사이자 한국청소년정책연구원 선임 연구원으로 다양한 강연과 기고를 통해 현재 사회의 흐름을 심리학 기반으로 설명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