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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파트가 대체 뭐가 나쁜가?

아파트는 한국 사회 거의 모든 문제의 근원으로 평가받았지만, 결국 승리했다. 왜 이겼을까. 나쁜 주거 환경이라던 아파트가 승리한 이유와 그 승리 이후를 생각해봐야 한다. 아파트를 다시 생각해야 한다.

BYESQUIRE2021.02.26
 
 

아파트가 뭐가 나쁜가?

 
아파트는 악마다. 자유로운 창의와 균형 잡힌 정의의 발상을 가두는 성냥갑이다. 서울을 둘러싼 아름다운 산세를 가려 도시경관을 해치고, 고층 빌딩 숲 사이 단일한 통행로로만 거주인이 다니도록 하여 이웃과의 관계를 단절하고 삭막한 개인 의식의 끝에 다다르게 하는 파괴자다. 자산 양극화의 원인이며 부동산 약탈국가의 약탈 수단이다. 그렇다면 아파트 단지는 무엇인가? 악마들이 모여 있으니 악마들의 군대다. 고층 아파트 단지는? 거대한 악마들이 모여 있는 거대 악마들의 군대다. 이 아파트와 아파트 단지는 서울, 더 넓게는 한국을 좀먹고 있다.
대단지 아파트는 서울을 오래 지속될 수 없는 하루살이 도시로 만들고 있다
이제는 지나치게 자주 언급되어 인용하기도 민망한 프랑스 지리학자 발레리 줄레조의 책 〈아파트 공화국〉의 마지막 문장이다. 2007년에 출간된 이 책은 “한국의 아파트 단지는 권위주의 산업화의 구조와 특성, 여기서 비롯된 계층적 차별 구조와 획일화된 문화양식을 가장 잘 보여주는 사례이자 그 산물”이라는 말로 한국 지식인들을 사로잡았다. 아파트는 그 전에도 나빴지만 더 나쁜 집이 되었다. 서양 사람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천박한 주거 형태가 되었다. 그래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발레리 줄레조가 서문을 쓸 당시에 전체 주택 중 아파트의 비중은 52.7%였다. 그 이후 15년, 한국 주택 중 아파트 비중은 62.3%다. 악마는 승리했다.
 
아파트가 이렇게까지 완벽하게 승리하기를 모두가 바란 것은 아니다. 비슷한 시기엔 ‘주택보급비율이 100%를 넘어서면 사람들이 성냥갑 같은 아파트의 공동생활을 버리고 도심 외곽의 단독주택을 선호하게 될 것’이라는 나이브한 예상이 돌았다. 타운하우스 붐이 일던 시절에는 ‘이제 아파트는 끝났다’고 예단한 이도 있다. 이 예측 혹은 기대는 한참 빗나갔다. 최근 부동산 정보업체 다방이 3년 이내 결혼 계획이 있는 예비 신혼부부 2743명을 대상으로 뻔한 조사를 해 보도자료를 냈다. 전체 응답자 중 매매를 원하는 예비 신혼부부의 비율은 34.9%였는데, 이 매매를 원하는 신혼부부가 원하는 주택 유형으로는 아파트가 압도적이었다. 응답자 중 85.1%가 아파트를 선호했다. 부동산 정보업체에서 한 조사라는 이유로 그 신뢰성을 의심할 필요는 없다. 우리가 체감하는 영끌 욕망의 정도가 이 수치와 큰 차이가 없지 않은가? 당연하게도 신혼부부를 포함한 주택 구매 희망자들이 이사 비용을 축내고 전세로 전전하면서까지 아파트 구매를 선호하는 가장 큰 이유는 미래 가치 때문일 것이다. 깔고 앉아 있으면 내 아파트의 가격이 오르리라는 기대, 눈에 띄게 오르진 않더라도 다른 주거 형태에 비해 그 상승 폭이 작지는 않으리라는 기대다. 그러나 과연 아파트의 승리 이유는 미래 가치에 대한 기대뿐일까? 신문 기사에서 아파트는 ‘집단 이기주의의 상징’ ‘자산계급의 투기 수단’으로 그려진다. 그러나 한국 혹은 서울의 아파트라는 집합 주거 형태 그 자체에 대해서는 크게 고민해본 바가 없다. ‘아파트를 다시 생각한다’며 거창하게 시작한 이 글은 좀처럼 찾기 힘든 아파트 옹호자들에게 야금야금 모은 아파트에 대한 변명 혹은 약간의 찬사가 될 예정이다.
 
문제는 아파트가 아니다

흔히 하는 말이 있다. “돈이 있으면 왜 아파트에 사느냐”는 말이다.
내 머리로 도저히 이해가 안 되는 것은 아파트를 좋아하는 취향이다. 사실 서구에서 아파트는 주로 서민층이 거주하는 곳으로 인식된다. 중산층 이상이면 벌써 도시 외곽의 단독주택을 찾아 나가고, 상류층쯤 되면 경관이 좋은 곳에 커다란 저택을 지어 살기 마련이다.
2006년 〈월간중앙〉 12월호에 실린 진중권 교수의 글 일부다. 이 글이 특별히 잘못됐다는 의미로 가져다 쓴 건 전혀 아니다. 그 시기에 비슷한 생각을 가진 이들이 꽤나 있었기에 이 글이 〈월간중앙〉에 실릴 수 있었을 것이며, 바로 그 점이 당시의 분위기를 시사하기 때문이다. 방점은 ‘서구에서’라는 표현에 찍힌다. 서구의 아파트를 한국의 아파트와 비교할 수는 없다. 〈아파트 공화국〉 발레리 줄레조의 나라 프랑스의 집합 주거 단지를 보자. 2005년 10월 27일, 클리시-수-부아(Clichy-sous-Bois)에서 경찰에 쫓기던 10대 소년 두 명이 변전소로 숨어들었다가 숨지는 일이 있었다. 이 사건으로 분노한 프랑스 청소년들이 학교, 주택, 차량을 불태우며 도시를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이 소요로 약 8000대의 차량이 불타고 2760명이 체포됐다. 이 사건의 배경에 프랑스의 ‘아파트’가 있다. 클리시-수-부아는 파리는 아니지만 파리로 출퇴근하는 하층민들이 사는 ‘방리유’다. 이곳에는 ‘그랑떵성블’ 또는 ‘시테’라 불리는 대규모 건물군이 자리한다. 1960년대까지만 해도 젊은 부부들에게 환영받았던 이 단지들은 1970년대 제1차 오일쇼크를 거치며 쇠락의 길을 걷기 시작해 줄레조의 표현에 따르면 ‘주로 이민자 출신들의 하층민들이 유입’되었다.
 
시테는 잘못이 없다. 쇠락을 가르는 가장 큰 열쇠는 모여 사는 건물이라서가 아니라 시테가 장기임대주택이었다는 점이다.
서구권에서 아파트가 지속 가능하지 않은 집합 주거 수단이었던 이유는 자산이 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유럽이나 미국의 거대 주거 단지는 대부분 공공임대이다 보니 유지·보수 비용을 국가의 세금으로 충당했죠. 결국 관리를 등한시했고, 노후화되었으며 결국엔 게토화가 진행되었어요. 그 대표적인 예가 미국의 1950년대 프루이트 아이고(Pruitt-Igoe) 대규모 공공 주택단지 프로젝트입니다. 결국 폭파라는 극단적인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했지요.
지난해 말 〈아파트가 어때서〉를 낸 양동신 작가의 말이다. 줄레조 역시 “프랑스의 모든 대단지 아파트들이 이런 실추의 나락을 겪은 것은 아니다. 매매가 가능한 파를리 2단지, 벨리지 2단지, 혹은 파리 근교 지프-쉬르-이베트의 단지는 달랐다”고 쓴 바 있다. ‘집을 사는(living) 곳이 아니라 사는(buying) 것으로 여기는 세태’라는 비판은 아파트에 국한하면 오히려 옹호의 발언이 된다. 사고팔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사는 곳의 가치가 유지됐을지도 모른다는 해석이다. “한국의 아파트가 미국이나 유럽의 아파트와 다른 건 개인에게 매우 중요한 자산이라는 점입니다. 아파트를 보수하기 위해 장기수선충당금 등을 내서 관리비에 포함시키죠. 아파트가 자산이 되니까 이 돈으로 내서 엘리베이터가 노후화되면 바꾸고 건물에 하자가 생기면 보수하는 겁니다.” 양 작가의 말이다.
 
아파트의 현대성
‘현대적’이란 표현은 한 학자가 평생을 바쳐 연구해도 정의하기 힘든 개념이지만, 많은 경우 ‘최신’과 호환된다. 특히 미적 가치가 아닌 효율과 편리의 측면에서 보면 더욱 그렇다. 예를 들면 아궁이에 나무 장작을 넣는 온돌보다는 도시가스로 돌아가는 보일러가 현대적이다. 한국의 아파트에는 무언가 현대적이면서도 섬뜩한 구석이 있다. 초고층 주거 건물에 둘러싸인 대도시의 모습이 하루가 다르게 바뀌는 모습이 그렇고, 또 그 모습이 과거의 누군가가 그린 미래의 모습과 무척 닮았기 때문이다.
고층 아파트가 도시 미관을 해친다는 비판이 많은데, 쉽게 동의할 수 없습니다. 현대건축의 3대 거장이라고 하면 보통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 미스 반데어로에, 르코르뷔지에를 꼽아요. 세 사람의 공통점은 철근 콘크리트와 판유리를 써서 고층 건물을 설계했다는 점이죠.
양 작가는 말을 이어갔다. “특히 르코르뷔지에의 부아쟁 계획(Plan Voisin)을 보면 그가 원한 바는 용적률을 높이고 건폐율을 낮추는 거였어요. 그가 설계한 공동주택을 보면 1층을 비어 있는 필로티 구조로 만들어 커뮤니티 공간을 확보하는 형태도 있었죠. 하층에 상가와 커뮤니티 시설을 갖춘 최근 한국의 주상복합 아파트와 비슷한 구조입니다.” 한 세기를 잇는 발전의 역사를 지나치게 단순화한 해석일 수 있으나, 개념의 측면만 보면 영 틀린 말도 아니다.
 
부아쟁 계획은 르코르뷔지에가 ‘300만 거주자를 위한 현대 도시’ 개념을 파리라는 실제 도시에 적용한 모델이다. ‘300만 거주자를 위한 현대 도시’를 포털 사이트에 검색해보면, 파리의 개선문 뒤편으로 늘어선 중층의 빌라 단지와 고층 아파트 단지가 그려진 디오라마를 볼 수 있다. 이 이미지를 보고 내 머릿속에 처음으로 스친 생각은 “방배동인가?”였다. 르코르뷔지에가 그린 ‘300만 거주자를 위한 현대 도시’의 모습은 그만큼 현대 서울과 닮았다. 르코르뷔지에의 영향으로 현대의 서울이 탄생했다는 뜻은 아니다. 다만 도시와 건축을 편리와 효율의 관점에서 바라본 그가 고층의 집합 주택을 계획했다는 점이 한국 아파트의 발전 방향과 어렴풋이 겹치는 것만은 사실이다.
 
효율의 미래
우리가 아파트의 가치 측면에서 가장 과소평가하는 것 역시 그 지점이다. 바로 집합의 효율이 주는 이점. 집합의 이점은 아파트라는 주거 형태와 ‘단지’라는 특성 모두에서 찾을 수 있다. 주식회사 이젠파트너스의 대표이사이자 에너지 흐름을 연구하는 공학박사인 김재민은 열효율에 입각한 아파트 옹호자다. “김부선 씨의 난방비 사건이 터졌을 때, 저는 ‘난방비 0원’이 가능하다고 봤어요? 반드시 김부선 씨의 케이스가 이에 해당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지만요.” 김 박사는 사면이 다른 집의 벽에 접해 있는 아파트의 경우 내 집보다 실내 온도를 높게 설정해둔 집에 둘러싸여 있다면 겨울철 난방비 ‘0원’이 나올 수도 있다고 말한다. 이런 현상은 아파트 각호간 단열이 취약한 오래된 아파트일수록, 또한 타워형이 아닌 판상형 아파트일수록 더 잘 일어난다.
실제로 사면이 다른 집과 맞닿아 있는 아파트에서 겨울철 실내 온도를 23도 정도로 설정하면 보일러가 돌지 않는 경우가 꽤 있어요. 스웨덴의 경우 공동주택 거주자 중 일부러 자기 집의 설정 온도를 낮춰 난방비에 이득을 보려는 사람들이 있어 사회문제가 되기도 했을 정도죠.
 
‘0원 아파트’ 현상에 대한 그의 견해는 아파트의 에너지 효율이 다른 주거 형태에 비해 확연히 높다는 걸 보여주는 예일 뿐이다. 그리고 다른 주택 유형과 아파트의 효율 격차는 점차 벌어지고 있다. 아파트에 돈이 몰리고 각종 기업들이 브랜드 품질 경쟁에 뛰어들어서다. “1990년대 말부터 아파트가 브랜드화되기 시작하면서 그 품질이 높아졌다고 봅니다. 시공의 완성도, 에너지 효율성, 주거 쾌적성 면에서 과거 아파트와 현재의 아파트는 분명한 수준 차이가 있습니다. 주거 환경으로만 보면, 미국이나 유럽의 공공 아파트 수준과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좋아요. 아파트를 고층의 고품질로 이렇게 빨리 지을 수 있다는 점은 오히려 한국 건설업계 고유의 경쟁력이라고 봐도 좋을 정도죠.” 김 박사의 말이다. 효율은 미래 세대를 위한 가치에 부합하는 미덕이다.
기후변화 대응 측면에서 주택의 에너지 소비를 통한 탄소 배출 저감은 매우 중요해요. 유럽의 경우 단독주택을 선호하지만, 건물이 소비하는 에너지 문제가 꽤 크거든요. 오히려 환경을 중요시하는 유럽의 정책 집행자들은 집합 주거인 고층 아파트를 통해 에너지절감형 주거 환경을 구축하고 싶어 할지도 몰라요. 다만 국민들이 그런 집합 주거 문화에 익숙지 않고 원치 않기 때문에 불가능할 뿐이죠.
단지를 생각해
물론 열효율이 아파트의 존재를 정당화하는 충분한 근거일 수는 없다. 그렇다면 아파트가 아닌 아파트 단지에 대해 생각해보면 어떨까? 2010년대에 들어 아파트에 대해 가장 깊게 파고든 저서는 현 국가건축정책위원장이자 명지대학교 주거건축 교수인 박인석의 저서 〈아파트 한국사회〉라고 본다. 그는 ‘아파트’가 아니라 ‘아파트 단지’가 문제라 말한다. 또한 한국 사회가 ‘단지 공화국’이 된 것은 전략적인 정책 선택의 결과라고 지적한다. 1970년대 이후 본격적인 경제성장 시기에 한국에 필요한 것은 주거와 공공 환경에 대한 투자였다. ‘산업역군’들은 소득수준이 높아지고 주거 환경에 대한 욕구가 높아지자 이에 맞는 동네와 집을 찾기 시작했다. 차를 사고 싶으니 주차장이 있는 집을 사고 싶었고, 아이를 낳아보니 놀이터가 있는 동네가 좋았다. 저녁을 먹고 산책할 가로수길이 있으면 좋겠고, 가끔 주말에는 테니스를 칠 수 있으면 더할 나위 없으리라. 점점 높아지는 시민들의 욕구를 환경에 대한 공공투자 없이 만족시킬 수 있는 방법이 있었으니 바로 ‘근린주구’ 형태의 아파트 단지 개발을 촉진하는 일이었다. 놀이터를 만들고, 수영장을 만들고, 녹지를 조성해 단지를 만드는 일을 개발업체들에 떠넘기고 개발업체는 이 시설 비용을 수요자들에게 전가하며 선장했다. 공공투자의 비용을 산업역군에게 떠넘기며, 산업역군의 주거 욕구를 해소해주는 척을 하고, 동시에 건설산업까지 급성장시켜 총생산을 늘리려는 작전. 이것이 바로 박 위원장이 이름 붙인 개발 시대의 ‘단지화 전략’이다. 박 위원장이 한국 아파트 단지의 역사와 현상을 살펴보고 진단한 문제와 이에 대한 인식은 대부분 수긍할 만하며 매우 중요한 지적이다.
 
그런데 개인에게 단지는 어떤 의미인가? 한국의 다양한 거주 형태를 경험해본 보통의 사람을 찾아 이야기를 나눴다. 수도권에 거주 중인 40대 남성 M은 어린 시절에는 부모님과 단독주택과 빌라에 살았고, 결혼을 하면서는 나홀로아파트에 자리를 잡았다. 몇 년 후 M은 나홀로아파트를 청산하고 9000세대 대단지 아파트로 자리를 옮겼다. 거의 모든 유형의 주택에 다 살아본 셈이다. 그에게 왜 큰돈을 주고도 관리비까지 내며 아파트 단지로 주거를 옮겼는지 물었다.
빌라나 단독주택은 정해진 요일에 쓰레기를 거리에 내놓잖아요. 그게 그렇게 보기 싫더라고요. 아파트는 합의가 있거든요. 주민들끼리 분리배출을 제대로 하겠다는 합의죠. 다들 그걸 지키리라는 믿음을 갖고 나도 지키면 모두가 깨끗하게 살 수 있는 거니까요.
그의 이야기는 폐기물 처리에 국한된 이야기가 아니다. 단지 안에 형성된 작은 지자체와 지자체 구성원들이 맹세한 약속들이 삶의 질을 확연히 바꾸어놓았다고 말한다. “커뮤니티가 크니까 뭐랄까 우리가 원하는 작은 사회를 만들 수 있다고 느껴요. 아파트를 구입하는 가격과 관리비가 이 커뮤니티 안에 속해서 얻을 수 있는 권리와 비교했을 때 합당하다고 판단한 거죠.” 대단지 아파트 밖에서 비슷한 수준의 주거 환경을 찾을 수 있을까? 국회 더불어민주당 재선 의원실에 있는 황종섭 비서관에게 물었다. 그는 한때 조희연 교육감 체제의 서울시교육청에서 대단지 아파트 주민들과 학교 설립 문제 등으로 활발하게 소통한 전력이 있다. 정책의 눈으로 아파트를 보는 시선이 그에게는 있다.
단지화를 비판할 수도 있지만, 그 반대로 생각할 수도 있어요. 단지가 아닌 곳에서는 가정을 이루고 아이를 키우는 게 너무 힘들다는 거죠. 거대 단지 안에는 어린이집이 있고, 초등학교가 있고, 단지 상가에는 병원이 들어서 있죠. 부모가 직장에 가는 걸 빼면 아이가 중학교에 올라갈 때까진 모든 게 단지 안에서 가능한 거예요. 심지어 중학교가 단지 안에 있는 곳도 있고 말이죠. 이러한 주거 환경에서의 이점이 아파트 가격에 포함되어 있다고 봐야 합니다.
서울시립대학교 도시사회학과 남기범 교수는 “있기야 하겠지만 서울 안에서 그런 환경을 갖춘 타운하우스를 사려면 50억원은 줘야 할 것”이라고 밝혔다. 남 교수와는 아파트와 단지에 관해 꽤 오랜 시간 이야기를 나눴다. “단지 커뮤니티에 속하고자 하는 욕망은 무시할 수 없을 만큼 크다고 봐요. 가격이 비슷한 아파트가 하나의 단지를 이루고 그 안에 살면서 나와 경제적 수준이 같은 사람과 어울리고 싶다는 욕망, 우리 집단만 교류하고 그 안에서 사유화를 하고 싶다는 욕망이죠”라고 밝혔다. 그는 이런 욕망을 인정하고 ‘나누어야 한다’고 말한다. “공공정책의 층위에서 고민할 일과 개인의 일을 구분해야죠. 다들 아파트값이 오르는 게 문제라고 얘기하지만, 실제를 보면 자기 아파트가 오른다고 불평하는 사람은 없어요. 그게 현실입니다. 책임 없는 전문가들은 천민자본주의라며 비판을 하죠. 공공의 영역에선 그런 식의 비판을 해선 안 됩니다. 개인의 욕망을 욕할 게 아니라 공공의 정책으로 개인의 욕망을 터주는 방향으로 정책을 잡아야죠.” 앞서 언급한 황 비서관 역시 비슷한 말을 남겼다. “욕망과 싸워서 이길 수는 없어요. (한 정책자가) 언제까지 우리가 시민들의 욕망에 타협할 것이냐고 불만을 토로하는 걸 들은 적이 있어요. 정책을 다루는 사람이라면 욕망을 인정하고 사적인 이익이 공적인 이익과 연결될 수 있도록 하는 역할을 해야죠.”
  
욕망의 현상
아파트 단지는 지금의 한국을 만든 원인이면서 그 욕망이 구체화한 현상이다. 그 욕망은 1981년생인 내 인생 동안 단 한 번도 뜨겁지 않은 적이 없었고, 지금의 모양새를 보면 앞으로도 꽤나 뜨거울 것이다. 취재를 하면서 그 누구에게도 아파트 시장에 대해서는 묻지 않았다. 세상의 모든 매체가 그 얘기를 하고 있는데 나까지 부동산 시장 얘기를 보탤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서다. 또 그보다 더 중요한 문제는 그간의 논의를 되돌아보고 앞으로의 계획을 세우는 일이라고 생각해서다.
 
남 교수는 아파트와 단지 그 자체의 존폐보다는 단지의 발생으로 일어나는 변화에서 문제가 생기지는 않는지 지켜봐야 한다고 말한다. “대단지를 만들 때 최근에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단지가 지어진 곳과 인근에 근방에 살던 선주민들의 삶이 어떻게 변하는지입니다. (일부 오래된 시영아파트처럼) 건물은 소유했지만 토지 소유권이 없거나, 오랜 기간 임대로 살았던 분들이 문제가 되거든요. 예전에는 먼 곳에 임대주택을 지어서 이주를 시켰어요. 그런데 한 곳에서 오래 터전을 닦은 분들을 그렇게 옮겨버리니 문제가 생길 수밖에 없죠. 지금은 그 단지에 최우선 적으로 들어갈 수 있게 해주는 게 중요한 사회문제로 대두되고 있어요.” 남 교수의 말이다. 대단지의 높은 밀도 탓에 대단지 주변 선주민들과의 정치·경제적 균형이 기우는 것 역시 문제가 될 수 있다. 대표적인 것이 ‘님비(NIMBY) 현상’과 브랜드 아파트 단지의 학부모들이 임대아파트 아동들과의 초등학교 분리를 요구하는 등의 모습이다. 경희대학교 공공거버넌스연구소 연구교수 송경재는 아파트 커뮤니티를 분석해 논문을 낸 바 있는 정치학자다. “아파트 단지처럼 이익을 공유하는 집단은 그 결속력이 강할 수밖에 없고 목소리가 클 수밖에 없어요. 그런데 이걸 참여민주주의의 요소로 보면 오히려 아파트 단지가 자신들의 이해와 요구를 대변한다는 점에서 긍정적으로 볼 수도 있는 거죠. 이건 마치 동전의 양면, ‘코인사이드’ 같은 겁니다. 대단지 공동체의 발전이 지역 전체를 활성화하는 측면이 있고, 공동체 전체의 정치 참여 수준을 높이는 측면도 있는 게 동전의 앞면이라면 그 뒷면에는 님비 현상이나 분리 요구 등이 있는 거죠.” 송 교수의 말이다.
집단 거주지에서 인구가 팽창함으로 인해 다른 집단의 이익을 훼손하는 경우가 생겨요. 정치, 여기서 ‘거버넌스’란 바로 이런 집단 간의 균형을 조정하는 일입니다. 지금 아파트 단지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보면 동전의 뒷면만 드러나고 있어요. 거버넌스 체계가 제대로 작동하지 못하고 있다는 거죠.
 
아파트는 악마인가?
“(아파트는) 애초에 잘못 꿰어진 공간이에요. 제가 아무리 (아파트에 사는 게) 편하다고 해도 그걸 좋다고 말할 수는 없는 거예요. 저도 지금 아파트에 살고 있고 몇 달 동안은 그렇겠지만, 그런 것까지 생각하면 호화로운 감옥에 살고 있는 거예요. 나라가 만든 정치적인 산물 안에 살고 있다는 사실이 저는 너무 슬퍼요.” “이게 안 바뀌니까 대학 입시도 바뀌지 않는 거예요.” “아파트는 장기적으로 정말 비전이 없어요. 강남이나 이런 곳, 각 대도시의 특정 아파트만 살아남고 나머지는 슬럼화될 수밖에 없어요. 인구가 줄어드는데 어떻게 할 거냐고요.” 지난 2019년, 건축가들이 건축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한 유튜브 채널 영상에서 나온 말들이다.
 
이 기사에 실린 아름다운 아파트 사진은 독립모형상점 서울과학사의 엔지니어 최종언이 개인적으로 촬영한 작품이다. 최 작가는 아파트를 향한 비판에 익숙하다.
아파트를 나쁘다고 말하는 데는 무척 익숙해요. 너무 자주 들어온 말이죠. 이런 말은 조금 조심스럽지만, 건축하시는 분들이 아파트를 싫어하는 것 같아요. 빼곡하게 들어선 초고층 아파트의 빌딩 숲 사이에 서면 그분들의 주장이 이해가 안 가는 건 아녜요. 그렇지만 그렇지 않은 아파트도 있거든요. 그걸 다 묶어서 ‘아파트는 나쁘다’라고 말하는 건 좀 아닌 것 같아요. 오히려 근린주구가 구현된 아파트를 돌아다니다 보면 나무도 많고 산책길도 있고 좋은 주거 환경이라는 생각이 들거든요.
아파트는 악마고, 현대건축의 아버지인 르코르뷔지에 역시 악마다. 종종 과대망상가로 표현되는 그는 1922년에 ‘300만 거주자를 위한 현대 도시’를 발표했다. 이 개념을 파리에 적용하려면 사실상 개선문, 노트르담대성당, 엘리제궁 등의 주요 문화유적 및 기념물을 제외한 파리 중심부를 싹 밀어 건축부지로 만들어야 했다. 가능성 없는 이 계획은 당시의 극우파에게서는 공산주의적이라는 비판을, 당시의 극좌파에게서는 자본주의의 앞잡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심지어 ‘적 그리스도’라는 비난까지 받았다고 하니, 그는 악마다. 〈르 코르뷔지에 : 근대 건축의 거장〉(2006, 살림)에 따르면 ‘그를 비판하는 이들은 파리의 고풍스럽고 낭만 있는 가로들을 쓸어내고 그 위에 거대한 마천루가 즐비한 현대 도시를 건설하려는 그의 사고에 혐오감을 드러냈다’고 한다. 르코르뷔지에는 이에 대해 “파리가 무엇인가? 파리의 아름다움은 어디에 있는가? 파리의 정신은 무엇인가?”라고 반문했다. 이 질문의 핵심은 비판의 가장 밑바닥에 있는 논지에 대해 물었다는 점이다. 악마 취급을 받는 현대 도시 서울과 아파트에도 같은 질문을 던져보자. 서울이란 무엇인가? 서울의 아름다움이란 무엇인가? 주택이란 무엇인가? 개성이란 무엇인가? 개인이란 무엇인가? 개인의 개성은 주택으로 표현되어야 하는가? 공동체란 무엇인가? 공공이란 무엇인가? 그 질문의 끝에서도 아파트는 악마인가?
 
한남대학교 건축학과 교수이자 소보건축사사무소의 소장인 신현보는 이제는 다른 논의가 펼쳐져야 한다고 말한다.
아파트를 비판하는 요지 중 중요한 논점은 두 가지인 것 같아요. 획일적이라는 비판, 그리고 투기의 수단이라는 점이죠. 내 집과 남의 집이 똑같다. 획일적이다. 그 아래 있는 논의를 다시 생각해봐야 합니다. 획일적이라서 나쁜가? 단독주택에 살면 창의성이 좋아지고 감수성이 높아진다고 하는데 정말인가? 다시 물어봐야죠. 그건 건축이 아닌 사회학이나 심리학 또는 교육학 등 더 근본적인 차원에서 이뤄져야 하는 논의인데 그런 논의 없이 담론이 흘러가는 게 건축가인 저로서도 어색해요. 단지 문화가 투기를 부추긴다는 데 대한 비판은 나름 말이 되긴 해요. 다만 부동산을 통해서 투자 이익을 보려고 한다면 오히려 아파트는 (땅이나 빌딩 또는 다세대주택 건축에 비해) ‘가장 저렴한 수단’이라는 점, 또 같은 수준의 주거 환경을 가진 주택을 찾으려고 하면 아파트 말고 다른 선택지가 없다는 점을 이해해야 합니다. 인구의 3분의 2가 이미 살고 있는데 나쁘다고만 해선 안 됩니다.
이제는 아파트를 ‘악’(惡)으로 해석하는 관점을 버릴 때다. 아파트를 비판하던 논의가 정말 의미가 있는 말들이었는지, 논지의 땅이 얼마나 단단한지 보다 더 근본적인 학문의 도움을 받아 두드려봐야 할 때다. 그 연구와 함께 앞으로 대단지 아파트가 더 늘어날 수밖에 없는 ‘포스트 빅토리’의 상황을 받아들이고 공공 거버넌스의 영역에서 아파트 승리 이후에 확립되어야 할 시스템을 생각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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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EDITOR 박세회
  • PHOTOGRAPHER 최종언
  • 참고 문헌 <아파트 공화국>/ 발레리 줄레조/ 후마니타스
  • 참고 문헌 <아파트가 어때서>/ 양동신/ 사이드웨이
  • 참고 문헌 <아파트의 문화사>/ 박철수/ 마티
  • 참고 문헌 <아파트 한국사회>/ 박인석/ 현암사
  • 참고 문헌 <르 코르뷔지에>/ 이관석/ 살림
  • DIGITAL DESIGNER 김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