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얀마 사람이 되고 싶었던 이유 | 에스콰이어코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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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얀마 사람이 되고 싶었던 이유

미얀마 사람이 되고 싶었던 이유.

ESQUIRE BY ESQUIRE 2021.04.02
 
 

미얀마 사람이 되고 싶었던 이유

 
사람들은 각자 나름의 생존 전략을 갖고 있다. 동남아시아라고는 배낭여행은커녕 쌀국수랑 똠양꿍 몇 번 먹어본 게 전부였던 내가 한국을 떠나 미얀마에서 생활하게 됐을 때, 나는 ‘정체를 숨기는 것’을 생존 전략으로 삼았다. 말 그대로, 최대한 한국인처럼 보이지 않으려고 했다. 국가의 이름을 내걸고 개발 원조를 지원하는 ‘국제개발협력’이라는 직업의 특성을 철저하게 위반하는 일이었지만 그랬다.
 
처음 미얀마에 파견된 2014년의 일이다. 당시 미얀마 사회에는 옅지만 분명한 변화의 기운이 감돌고 있었다. 군부 정권의 오랜 통치를 겪던 미얀마는 1988년 8월 8일 벌어진 8888 항쟁을 신호탄 삼아 민주화운동을 시작했다. 민주화에 대한 열망이 지속된 결과, 2010년에는 군부 정권이 민간에게 정권 이양을 약속하고 지금의 국가 고문이자 미얀마 민주주의의 상징인 아웅산 수치 여사의 가택 연금을 해제했다. 정치는 물론 사회, 경제적으로도 많은 변화가 일어난 시기였다.
 
발령 초기만 하더라도 지금 이 나라가 버마인지, 미얀마인지 혼란스러웠다. 큰 변화의 상황 속에서는 빨리 동화되는 게 우선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현지화’가 나의 생존 전략이 됐다. 현지화를 위해서는 겉모습을 바꾸는 것이 필요했기에 전통 의상 론지(Longyi)를 구입했다. 긴 원통형 천 조각 속에 몸을 넣고, 요령껏 매듭으로 허리춤에 고정하면 치마처럼 입을 수 있는 옷이다. 길거리 어디서나 1000원, 2000원이면 살 수 있었던 론지는 전통 의상인 동시에 일상복이기도 했다. 론지 차림으로 슬리퍼를 끌고 거리를 활보하는 동안 나는 이방인이라는 정체를 쉽게 감출 수 있었다.
 
그런 나의 모습을 가장 좋아해준 사람은 함께 일하던 현지 직원 볼리였다. 대학에서 영어를 전공하고, 고향을 떠나 미얀마 최대 도시인 양곤(Yangon)으로 올라온 그녀는 나의 현지화를 위해 내 일상의 작은 부분까지 세심하게 챙겨줬다. 미얀마에서는 팔짱을 끼는 것이 공손한 자세라거나, 우산은 머리에 쓰는 모자와 같은 것이기 때문에 절대 땅바닥에 둬선 안 된다는 생활 예의를 알려주는 것부터 시작해 숟가락 하나로 국수를 먹는 법처럼 ‘찐 미얀마인’들만 할 수 있는 것들도 전달했다. 시간이 꽤 지난 후에는 “정전이 빈번하니까 엘리베이터를 타기 전에는 소변을 꼭 미리 봐야 해요” 같은 장난까지 치며 나를 한층 더 미얀마화(?)했다.
 
볼리와 함께 현지 협력기관과의 회의를 진행한 날이었다. 돌아오는 길에 나는 볼리에게 “거기 대표님 인상이 참 좋더라고요. 앞으로 사업을 같이 잘 진행할 수 있을 것 같아요”라고 별 뜻 없이 말했다. 볼리의 표정이 잠깐 어두워졌다.
 
그 사람, 군부 출신이에요. 지금은 우리와 이렇게 웃으면서 이야기하지만, 저는 가끔 소름 끼칠 때가 있어요. 그렇게 웃는 얼굴로 얼마나 많은 사람을 죽였을까요?
 
미얀마 사람들 속에 스며들고 싶은 나였지만, 그들에게는 이방인인 내가 결코 닿을 수 없는 아픔이 있었다는 걸 그때 처음 깨달았다.
 
그해 11월, 볼리는 조심스럽게 퇴사 의사를 밝혔다. 함께 점심 식사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그녀는 사무실 문 앞을 가로막고는 이제 그만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고 싶다며, 고향에서 후배들을 가르치는 교사가 되는 게 오랜 꿈이었다고 말했다. 더는 이 문을 열고 들어올 일이 없을 것이라고 온몸으로 말하는 듯했다. 굳게 닫힌 커다란 문 앞에 서 있던 작은 그녀를, 나는 응원할 수밖에 없었다. 이듬해  1월, 버스로 왕복 50시간이 걸리는 볼리의 고향까지 그녀를 배웅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나 역시 발령지가 바뀌어 미얀마를 떠나게 됐다.
 
새로운 거처가 된 베트남에는 론지도 없고 볼리도 없었지만, 나의 생존 전략은 여전했다. “베트남 사람인 줄 알았다”는 말을 최고의 칭찬으로 여기며 지낸 지도 벌써 6년째다. 아마 론지를 입고 볼리를 만났기에 가능했던 일이었을 것이다. 볼리와는 비록 국경을 사이에 두고 멀리 떨어졌지만, 우리는 소셜 미디어를 통해 서로의 일상을 확인하며 종종 안부를 전했다. 교단에 서서 제자들과 함께 웃고 있는 사진 속 볼리는 행복해 보였다.
 
그해 미얀마에서는 총선거가 이뤄졌다. 변화의 바람을 타고 미얀마에는 민주 정부가 들어섰다. 볼리는 프로필 사진을 아웅산 수치 여사로 바꾸며 기쁜 마음을 숨기지 않았다. 그녀의 생애 한편을 늘 짓누르던 군부의 존재가 조금씩 사라져가고 있었다. 안타깝게도 기쁨은 오래가지 않았다. 올해 발발한 미얀마의 군부 쿠데타는 그녀를 포함한 많은 미얀마인에게 다시금 커다란 상처를 남겼다.
 
지난 2월 1일, 미얀마 군부는 비상사태를 선포했다. 민간인들이 죽음에 내몰리는 상황이 반복됐다. 그런 와중이지만, 볼리는 민주화 행렬에 앞장서고 있다. 인터넷마저 차단됐지만 볼리는 잠시라도 접속될 때마다 현장의 상황을 전하고 있다. 오늘도 집 앞 골목에서 총소리가 들리고 있고, 어젯밤에는 친오빠가 군부에게 쫓기다 다쳤다고 했다. 나라를 지키고 헌신하기 위해 무장을 한 군인들이 무고한 시민의 목숨을 빼앗고, 시민을 보호해야 할 경찰로부터 보호받긴커녕 스스로를 지켜야 한다고 말했다. 볼리는 아픔과 슬픔을 분노에 담아 절규하고 있다.
 
외국인으로서 그 사회의 일원인 것처럼 구는 것이 때론 얼마나 오만한 행동인지 생각하곤 한다. 그럼에도 한국인이라는 이름을 지우면서까지 정체를 감추려고 했던 건, 그들의 기쁨과 아픔을 조금 더 공감하고 느끼기 위해서다. 개발도 협력도 중요한 일이지만, 나에게는 그런 마음이 더욱 중요했다. 현지화는 생존 전략이었지만, 현지인들의 희로애락을 좀 더 깊게 이해할 수 있는 방법이기도 했다. 나는 지금 볼리의 마음에 내 마음을 덧대며 함께 울부짖고 있다. 고향을 사랑하고 제자들을 아끼던 그녀를, 민주주의를 향한 열망을 품고 있던 그녀를, 미얀마 사람처럼 보이고 싶어 하는 나를 누구보다 좋아해주던 그녀를 잘 알고 있기에.
투쟁 중인 미얀마의 친구들을 생각한다. 민주 정부가 들어섰다고 기뻐하던 볼리를 생각한다. 미얀마는 언제쯤 평화를 찾을 수 있을까. 자유를 위해 거리로 나온 그들에게 나의 목소리가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길 간절히 기도했다.
 

 
Who's the writer?
조용석은 개발도상국의 빈곤 문제 해결을 위해 활동하는 국제개발협력 활동가다. 미얀마를 거쳐 현재는 베트남 남부의 작은 시골 마을에서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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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edit

    EDITOR 김현유
    WRITER 조용석
    Illustrator 이은호
    DIGITAL DESIGNER 김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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