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시멀리스트 호더가 '클러터코어'를 만났을 때 | 에스콰이어코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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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시멀리스트 호더가 '클러터코어'를 만났을 때

맥시멀리시트가 되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다. 물건을 도저히 버리지 못하는 습관이 있었을 뿐이다. 어린 시절부터 그랬다. 나는 버리는 것을 늘 거부했다.

ESQUIRE BY ESQUIRE 2021.08.07
 
 

맥시멀리스트 호더가 클러터코어를 만났을 때

 
1980년대 한국인에게 이사란 그저 사는 곳을 옮기는 일이 아니었다. 이사는 라이프스타일을 한 단계 상승시키는 행위였다. 새로운 아파트로 가기 위해서는 헌 아파트의 기억을 버려야 했다. 기억을 버린다는 건 물건을 버린다는 의미다. 엄마는 페르시안 카펫과 꽃무늬 소파를 버렸다. 등나무와 유리로 된 정수기도 버렸다. 벽에 커다랗게 걸려 있던 입체 고양이 사진도 버렸다. 당신이 1980년대 유년기를 보낸 사람이라면 이 물건들이 얼마나 소리 내어 1980년대를 부르짖는 상징들인지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당연히 일본산 로봇 장난감과 아카데미과학의 유-보트도 버려야 했다.
 
새 아파트는 역시 달랐다. 천장을 가득 채우던 체리색 몰딩은 없었다. 모든 것이 1990년대적으로 모던했다. 부모님은 꽃무늬 소파 대신 지루한 베이지색 가죽 소파를 샀다. 카펫은 깔지 않았다. 아파트 바닥은 원목이었다. 나무 바닥은 1990년대 중산층의 상징이었다. 거기에 먼지가 잘 붙는 카펫 따위를 까는 것은 허락되지 않았다. 내 방의 가구들은 베이지색 리바트로 바뀌었다. 나는 도무지 적응할 수가 없었다. 어쩌면 내 취향은 부모님이 만든 것이었다. 그 취향은 꽤나 영국 남부 작은 마을의 할머니 같은 것이었다. 부모님은 취향을 버렸다. 나는 그 취향을 버릴 수가 없었다.
 
성인이 된 나는 서울로 올라왔다. 마음대로 집을 채우기 시작했다. 벽에는 오랫동안 모아둔 영화 포스터를 벽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붙였다. 여행을 갈 때마다 소품을 하나씩 사기 시작했다. 홍콩에서는 모택동 동상을 샀다. 그 무거운 걸 가방에 넣고 끙끙대며 돌아다니면서도 마음은 가벼웠다. 프랑스에 가서는 벼룩시장을 뒤집어엎었다. 100년 된 아이 흉상과 개코원숭이 세라믹 같은 것을 마구 담았다. 그렇게 20년이 지났다. 물건은 폭발했다. 사람들이 냉장고를 새것으로 바꾸는 동안 나는 친구의 전시회에서 그림을 샀다. 이베이로 핑크색 사슴 촛대 따위를 샀다. 촛불도 붙이지 않는 주제에 왜 그딴 것을 샀냐고 묻지는 마시라.
 
인생에는 그저 마음에 들어서 사는 수많은 쓸모없는 것들이 필요하게 마련이다. 친구들은 내 집을 ‘영국 할머니 집’ 또는 ‘애오개 박수무당 집’이라고 부른다. 나는 물건에 둘러싸여 살고 있다. 벽에 걸린 액자가 몇 개인지 지금 세어보니 15개다. 그러고도 나는 끊임없이 빈자리를 찾는다. 더 채우고 싶기 때문이다. 이 정신없는 집은 몇 번 인테리어 잡지에 나온 적이 있다. 기사들은 대개 ‘취향으로 가득한 집'이라는 제목을 달고 있었지만, 내가 편집장이라면 ‘맥시멀리스트 호더(Hoarder: 쓸모없는 물건을 버리지 못하고 집 안에 축적하는 병리적 행위)의 집’이라는 제목을 붙이고 싶었을 것이다.
 
나는 얼마 전 또 물건을 샀다. 1972년 뮌헨 올림픽 기념으로 나온 재떨이다. 나에게 더 많은 재떨이가 필요한가? 그렇지 않다. 뮌헨 올림픽에 관한 뭔가를 사고 싶었을 뿐이다. 그 재떨이를 보고 있으면 팔레스타인 해방기구 ‘검은 구월단’의 테러로 9명의 유대인 선수가 사망한 뮌헨 올림픽의 비극이 떠오른다. 나는 가까운 미래에 비극이 발생할 거라는 사실도 모른 채 기쁜 마음으로 재떨이를 만들었던 독일 세라믹 장인의 마음을 여기서 본다. 맞다. 이건 그저 물건을 산 뒤 스스로 내린 자기합리화에 불과하다. 나는 그렇게라도 물건을 사서 집을 채우는 행위를 정당화하고 싶은 것이다.
 
인테리어의 세계에는 당신이 익혀두면 좋을 몇 가지 용어가 있다. 당신도 미니멀리스트와 맥시멀리스트의 차이는 알고 있을 것이다. 전자는 비우는 사람이다. 후자는 채우는 사람이다. 채우는 인테리어는 맥시멀리즘이라고 부르기도 하지만 절충주의(eclectic)라고도 한다. 세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양식을 마구 섞어서 조화를 만들어내는 인테리어 사조다. 사람들은 새로운 용어를 만들어내는 걸 좋아한다. 지금 인테리어의 세계에서 가장 뜨거운 단어는 클러터코어(Cluttercore)다. 이는 한마디로 말하자면 물건을 버리지 않고 집을 꽉꽉 채우는 인테리어다.
 
나는 이 단어를 발견하자마자 기쁨에 휩싸였다. 인스타그램 해시태그 클러터코어를 검색하는 순간 언어와 문화를 떠난 깊은 형제애를 느꼈다. 세상에는 나처럼 수많은 물건의 혼돈 속에서 삶의 즐거움을 찾는 사람들이 꽤 많이 살아가고 있다는 존재론적 증거와도 같았기 때문이다. BBC는 얼마 전 클러터코어에 대한 기사를 내보냈다. 거기서 한 클러터코어러는 이렇게 말했다.
 
“코로나는 집이란 당신이 참고 견뎌야 하는 물건보다 사랑하는 물건들로 당신을 감싸는 곳이 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상기시켰다.”


확실히 클러터코어는 팬데믹 시대의 유행일지도 모른다. 집에 있는 시간이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당신은 깨닫는다. 잡지에 나오는 미니멀한 인테리어 디자인을 따라 하고 싶지만 그건 가능한 일이 아니다. 어떻게든 당신은 물건들을 껴안고 살아가야만 한다.
 
언젠가부터 미니멀리즘, 미니멀 라이프는 일종의 바이블 경구가 됐다. 사람들은 물건을 많이 사는 사람들을 미워하기 시작했다. 그들의 말이 아주 틀린 것은 아니다. 우리는 어느 때보다도 많은 물건을 사고 많은 물건을 버리는 시대에 살고 있다. 지구를 살리기 위해 덜 먹고, 덜 쓰고, 덜 사자는 외침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다. 그러나 나는 그저 그럴 수가 없는 사람이다. 나는 사는 것을 좋아하고 모으는 것을 좋아한다. 물건들에 둘러싸여 있을 때 마침내 평화를 찾는 사람이다. 나는 10년 전에 산 이제는 사이즈가 맞지 않은 티셔츠도 버리지 못하는 인간이다. 그 티셔츠를 볼 때마다 그걸 입고 지냈던 시절의 기억들이 떠오르기 때문이다.
 
삶은 언제나 윤리적일 수는 없다. 나는 기후변화를 막기 위해 요트를 타고 대서양을 횡단한 그레타 툰베리가 대단한 인간이라고 생각하지만 팬데믹이 지나가면 기쁜 마음으로 비행기에 오를 것이다. 그러나 당신은 나를 비난할 자격이 없다. 당신 역시 기쁜 마음으로 탑승권을 쥐고 맛없는 기내식을 위 속에 욱여넣을 준비가 되어 있다는 걸 나도 알고 당신도 안다.
 
그러니 곤도 마리에와 작별을 선언하자. 일본의 정리 정돈 전문가인 그는 넷플릭스 쇼 〈곤도 마리에: 설레지 않으면 버려라〉를 통해 세계적인 셀러브리티가 됐다. 나에게 이 쇼는 호러영화나 마찬가지다. 이 작고 가냘픈 여자는 자신보다 무게가 세 배는 나갈 것 같은 미국인들을 향해 일본인 특유의 과하게 친절하지만 무섭게 단호한 어투로 “설레지 않으면 버리세요”라고 말한다. 사람들은 때로는 눈물을 흘리면서 물건을 버린다. 그러고는 미니멀리즘의 성전처럼 표백된 집에서 또 기뻐서 눈물을 흘린다. 나는 이 쇼가 당신이 결코 이루지 못할 라이프스타일을 강요하는 매우 전체주의적인 2020년대 최악의 프로파간다라고 생각한다. 당신은 이 글이 그저 거대한 농담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이 문장만큼은 절대 농담이 아니다.
 

 
Who's the writer?
김도훈은 글을 쓰는 사람이다. 〈씨네21〉, 〈GEEK〉과 〈허프포스트〉에서 일했고 에세이 〈우리 이제 낭만을 이야기합시다〉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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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edit

    EDITOR 김현유
    Illustrator 이은호
    WRITER 김도훈
    DIGITAL DESIGNER 김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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