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FE

이스라엘, 그리스, 중국, 그리고 더 넓은 세상의 다른 와인들

세상의 다른 와인을 위한 반성.

BYESQUIRE2021.09.01
 
 

세상의 다른 와인을 위한 반성

 
지난 7월의 어느 날, 서울 그랜트 하얏트 호텔의 그랜드 볼룸은 검은색 주머니로 가려진 77종 232병의 와인들로 가득 채워졌다. 이게 무슨 일일까? 바로 서(西)그리스 와인 전시회였다. 보통 와인 전시회가 열리면 와인 전문인들이 몰려들어 행사장은 발 디딜 틈이 없다. 참석자들은 서로 인사를 나누고, 시음한 와인을 평가하고, 테이블 뒤에 있는 와인 생산자와 와인병 사진을 찍어대는 동시에 인터뷰까지 진행돼 그야말로 ‘대환장 파티’가 열린다. 웬만한 집중력 없이 제대로 취재하기 어려워 빨리 하나라도 더 많이 와인을 시음하고 정보를 얻으려면, (솔직히) 안면몰수는 기본이다. 맛있는 와인을 발견하면, 라벨을 찍어 정보를 찾아 메모했다가 괜찮은 와인 발견했냐고 묻는 수입사 대표님께 추천하기도 한다. 두어 번은 행사장에서 바로 수입이 결정되기도 했다.
 
그런데 이번 전시회는 모든 게 달랐다. 방역 지침에 따라 면적당 입장할 수 있는 인원 제한이 있으니 큰 공간에 매우 적은 수의 사람들이 한가로이 오갔다. 해외에서 온 와인 생산자들이 없으니 5종 와인들이 놓인 긴 테이블엔 소믈리에 1명만 덩그러니 서 있었다. 참석자는 소믈리에게서 와인을 받아 중앙 작은 테이블로 이동해 홀로 시음을 했다. 사회적 거리두기로 같은 업장에서 일하는 동료라도 같은 테이블에서 와인을 받아 함께 시음할 수 없었다. 10년 넘게 해온 일이 이렇게 낯설긴 처음이다.
 
평소와 가장 많이 달랐던 건 바로 번호만 붙어 있는 검은색 주머니였다. 입구에서 나눠준 소책자에 와인 번호, 포도 품종, 포도밭 위치, 포도나무 수령, 지리적 표시, 양조 방식은 있으나 와인과 와이너리 이름은 없다. 이게 뭐지? 이 행사의 목적이 수입사를 찾는 와인 전시가 맞나? 의심과 걱정이 동시에 들었다. 참가자는 소믈리에에게 절대로 주머니를 내려 마음에 든 와인을 보여달라고 하면 안 됐다. 이상한 와인 전시회였다. 수입할 테니 알려달라고 해도 소용없었다.
 
와인을 하나씩 시음하자 와인 시음과 관련된 감각과 뇌가 강하게 활성화되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익숙한 프랑스가 아니고 그리스, 그것도 서(西)그리스, 카베르네 소비뇽이 아닌 아브구스티아티스를 시음하며 와인에 녹아 있는 향, 풍미, 산도, 타닌, 복합성, 강도, 균형, 여운을 읽어내는 일은 정말 흥미로웠다. 그동안 내게 씌워졌던 관성과 틀에서 벗어나 와인이라면 다 신기하고 좋았던 순수의 시대 속 나로 돌아가는 기분이 좋았다. 대단히 집중해 시음하니 영화 〈루시〉의 스칼렛 요한슨처럼 뇌 사용 비율이 마구 올라가는 듯한 쾌감도 지금까지 잊을 수가 없다. 약 30종 와인을 고강도로 시음하고 나니 영혼은 반쯤 탈출하고, 몸은 녹초가 되었지만, 행복한 어느 날 밤을 맞을 수 있었다.
 
다음 날 아침, 모닝커피의 뜨거운 증기로 게슴츠레 눈을 뜨다 깨달았다. 내가 전날 겪은 낯선 풍경은 와인 세계에서 절대 주류가 될 수 없는 서(西)그리스 와인이 토착 품종과 테루아를 믿고 블라인드 시음으로 건 한판 승부의 장이었던 것이다!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올라오는 서(西)그리스 와인 전시회 반응은 그야말로 뜨거웠다.
 
검은색 주머니 속 와인을 떠올리며 ‘세상의 다른 와인들’을 생각해봤다. 그동안 와인 전문 기자로 활동하며 어떤 와인 이야기들이 흥미로웠는지 기억을 더듬어봤다. 중국 닝샤는 사나운 황하가 온순해지는 곳으로 모래언덕이 많다. 닝샤에서 일하는 후배는 봄이 되면 고마운 카톡을 보내준다. ‘누나, 모래 떴어요.’ 그러면 예외 없이 며칠 뒤 한국엔 황사 주의보가 뜬다. 닝샤엔 중국의 유명 와이너리가 밀집되어 있고, 와인 몸값도 후들후들할 정도로 비싸다. 그만큼 와인업계가 품질을 인정한다는 의미다. 닝샤의 일부 와인은 프랑스나 부르고뉴의 유명 와인 같은 맛과 품질을 지니고 있다. 게다가 변검 그림이나 한자를 휘갈겨 쓴 와인 라벨은 낯설고 강렬하면서 누가 봐도 중국 와인이라는 정체성까지 잘 드러내니 보고 있자면, 별 이유도 없이 질투가 났다.
 
이스라엘은 일반적으로 사막이 많은 땅으로 알고 있는데, 와인이 생산된다고 해서 놀라웠다. 프랑스에서는 완숙되기 어려워 보통은 피망 향에 시고 무척 떫은 프트 베르도가 이스라엘 사막 근처 포도밭에서는 태양을 충분히 받아 잘 익는단다. 평소 질색하는 품종으로 만든 와인인데, 잘 익은 검붉은 열매 향과 풍미에 고운 타닌과 놀라운 산미를 지녀 정말 맛이 좋았다. 이스라엘에선 관개농업을 하니 막상 가뭄보다 모래 폭풍이 빈티지에 큰 영향을 끼친다. 도무지 이해가 안 되어 물어보니 고운 모래 폭풍이 2~3주 이상 지속하면, 이산화탄소를 빨아들이는 잎 뒷면의 기공이 막혀 포도나무가 광합성을 하지 못한다. 그대로 생장을 멈춘 포도에서는 풋내만 난다는 이야기는 어려서 재미나게 본 〈신드바드의 모험〉, 〈모래요정 바람돌이〉, 파올로 코엘료의 소설 〈오 자히르〉에 나오는 모래 폭풍을 떠오르게 했다.
 
언젠가는 와인 품평회에 심사위원으로 갔다가 슬로베니아산 스파클링 와인을 선물 받았다. 디즈니 로고 같은 와인 라벨이 예뻤고, 〈기네스북〉에 오른 400세가 넘게 살아 있는 가장 나이 많은 자메토브카 품종으로 만든 귀한 와인이었다. 한국에 와인이 들어온 때부터 와인을 드신 분들과 함께 이 와인을 열었는데, 붉은 빛깔에 어려서 우유에 찍어 먹던 레몬 향 살짝 나는 사브레 과자 풍미가 좋은 와인이었다. 이 나무에 매달린 포도로 만든 와인을 살면서 또 경험할 수 있을까?
 
기억이 하나둘 떠오르자 “와인은 다양해서 좋아”라고 떠드는 내가 실제로는 얼마나 다른 세계의 와인들에 제대로 된 관심을 두었는지 살핀다. 나는 과연 와인의 탄생지라는 조지아를 한번 제대로 살펴보긴 했나? 취재로 세계 각국 와인을 만나며, 얼마나 그들의 포도와 테루아에 공정한 마음으로 대했나? 잘 모르는 와인 생산국이라고 해서 그 품질을 얕잡아본 건 아닐까? 어쩌면 와인 강대국에 필요 이상으로 높은 점수를 준 건 아닐까? 언제고 ‘그 와인 한국에서 안 될 거라야’라며 건방을 떤 적은 없는지 생각해봤다. 그러거나 말거나 와인 생산자들은 그들에게 허락된 환경과 상황에 맞춰 각자의 포도를 재배하고, 전통에 따라 또 나름의 가치관에 따라 각자의 와인을 열심히 빚고 있지 않은가.
 
검은색 주머니 와인 앞에서 겸허하게 초심으로 돌아가본다. 문득 영화 〈승리호〉에서 꽃님이가 한 말이 떠올랐다. “우주에는 위도 없고 아래도 없대요. 우주의 마음으로 보면 버릴 것도 없고 귀한 것도 없고요. 다 자기 자리에서 다 소중하대요.” 이 마음을 가지고 앞으로 만나게 될 세상의 다른 와인들과, 그 이야기를 사람들에게 전할 일들이 몹시 기대된다.
 

 
Who's the writer?
정수지는 와인 전문 기자이자 강사, 심사위원, 블로거다. 호기심만큼 겁도, 먹고 싶은 것도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