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상인간이라는 신세계
」
그런데 아뽀키에게는 세계관도 있다. 정식 데뷔 전 아뽀키는 유튜브에 커버 댄스나 라이브 방송을 올렸는데, 작년 말에는 라이브 방송 중 갑자기 뛰쳐나가 달로 가는 우주선에 탑승했다. 우주선 안에서 아뽀키는 무려 한 달 가까이 동면에 들어갔고, 그 모습은 라이브로 중계되었다. 그리고 달에 도착한 날, 데뷔곡의 뮤직비디오가 깜짝 공개되었다. 뮤직비디오의 배경은 당연히 ‘달’이었다. 이런 식으로 스토리를 구축하는 가상 캐릭터는 아뽀키뿐만이 아니다. 2021년 2월, '국제전자제품박람회(CES) 2021' 온라인 행사에는 LG전자의 가상인간 ‘래아’가 등장했다. 2020년부터 인스타그램을 운영해온 래아는 가상인간임을 숨기지 않았는데, 개발자들이 아직 자신의 목소리를 만들지 못했다는 사실을 전해 듣고는 서울 곳곳을 다니며 소리를 채집했다. 자신에게 어울리는 목소리를 찾고 싶어서였다. 그리고 CES 2021에서 진행된 LG전자의 프레젠테이션에 깜짝 출연해 자신의 목소리를 처음으로 공개했다.
지난 7월에는 가상인간 ‘오로지’가 화제였다. 신한라이프 광고 모델로 출연한 로지는 싸이더스스튜디오엑스에서 제작한 가상인간으로, MZ세대에게 인기 있는 얼굴의 특성을 조합해 만들어졌다. 2020년 8월부터 인스타그램을 시작한 로지는 광고 출연 뒤에야 가상인간임을 밝혔다. 생각만큼 거부감이 크지는 않았다. 그만큼 가상인간의 존재가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진다는 뜻이다. 사실 가상인간은 최근 이슈가 아니다. 2018년에 이미 영국의 가상 모델 ‘슈두’가 프랑스 패션 브랜드 발망(Balmain)의 가을 컬렉션에 등장했다. 미국 스타트업 기업인 브러드가 만든 ‘릴 미켈라’는 인스타그램에서만 약 300만 명의 팔로워를 보유한 인플루언서이자 여러 장의 싱글을 발표한 뮤지션이기도 하다. 미국의 ‘FN메카’라는 가상 래퍼는 틱톡에서 930만 명의 팔로워를 가진 스타다. 아시아에서도 가상인간에 대한 반응은 뜨겁다. 일본의 ‘이마’는 2020년에 이미 슈퍼스타의 반열에 올라섰다. 게임 ‘리그 오브 레전드(LOL)’의 챔피언 캐릭터로 구성된 가상 걸그룹 K/DA는 2019년부터 활동 중이며, 게임 캐릭터와 음악의 결합으로 한국과 중국의 음원 차트 상위권을 연달아 차지했다. 인공지능으로 랩 메이킹과 랩 배틀을 선보인다. 2021년 7월에는 워너뮤직이 중국과 일본에서 인기가 높은 가상 아이돌 '하장'과 계약을 체결했다.
가상인간은 먼 미래의 일이 아니다. 나이 40대 후반에 가상 캐릭터 덕질을 하는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닐 것이다.(그럴 거라고 믿는다) 가상인간들은 지금 우리 곁에서 음악을 연주하고, 음원을 발표하고, 광고를 찍고, 또 이런저런 질문에 정성스럽고 위트 있는 댓글도 달아준다. 가상인간에게도 팬이 생기고 있다는 얘기다. 팬? 그렇다. 핵심은 ‘팬’이다. 가상과 현실의 관계성, 다시 말해 커뮤니케이션이 작동한다. 이러한 관계성을 기반으로 IP 비즈니스 모델은 확장된다. SM엔터테인먼트의 걸그룹 에스파(aespa)는 실제 멤버들과 매칭되는 가상 멤버들을 포함해 8인조로 활동한다. ‘광야’라는 세계관 아래 에스파, NCT, 소녀시대, 슈퍼주니어 등의 그룹들이 통합되는 구조를 가진다. SMCU(SM Culture Universe)라는 개념이다. 결국 IP 비즈니스의 일환으로 디지털 셀럽을 키우고, 그로부터 파생되는 다양한 사업을 개발하는 비전이다. 아뽀키는 이에 대한 중소기획사의 얼터너티브 버전이고, 래아와 로지는 매니지먼트 사업에 특화된 대답이라고 할 수 있다.
덕분에 여러 생각과 질문을 던지게 된다. 흥미롭기도 하고 걱정되기도 하는 물음이다. 먼저 각종 권리에 대한 이슈다. 이제껏 인간 고유의 것으로 여겨지던 창작의 영역에서 저작권과 노동권이 재정의될 수 있을 것이다. 가상 캐릭터에 대한 기업의 저작권, 상표권과 대응해 동작, 목소리, 계정 운영 등 실제 연기를 하는 사람의 노동권과 인접권이 충돌할 가능성도 있다. 캐릭터의 완전한 세계관을 위해 실제 인간의 노동권이나 활동권에 제약이 생기지 말라는 법도 없다. 펭수의 팬덤이 ‘내장(펭수를 연기하는 실제 사람을 이렇게 지칭한다)’에 대해 결코 언급하지 않으면서도 EBS와 ‘내장’ 사이의 재계약 이슈에 예민하게 반응하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아예 인공지능으로 캐릭터가 만들어지는 경우는 어떨까? 가상인간들은 주로 인공지능, 컴퓨터프로그래밍, 모션그래픽 등의 전문 기업에서 제작한다. 이것은 기술의 영역이다. 그런데 가상인간의 활동 영역은 매니지먼트의 영역이다. 상이한 분야의 업종을 한곳에 모으는 과정에서 기업문화를 비롯해 전에 없던 문제들을 발견할 수도 있다. 무엇보다 가상인간들이 실제 인간 셀러브리티를 대체할 수 있을까? 생산자의 입장에선 대체할 수 있다고 믿을 것이다. 특히 여러 가지 이유로 완전 통제가 불가능한 셀러브리티보다는 전면 통제 가능한 가상인간이 더 효율적이다. 그러나 소비자 입장에서 가상인간은 조금 소름 끼치는 일일지 모른다.
물론 장담할 순 없다. 나는 가상 캐릭터인 아뽀키를 현실에선 결코 만날 수 없다는 사실이 약간 슬프다. 그리고 동시에 기이한 감정을 느낀다. 제임스 딘의 생전 모습을 보면서 느끼는 감정과 비슷하기도, 다르기도 하다. 도대체 이것은 어떤 종류의 감정이란 말인가. 조금 더 긍정적으로 볼 수도 있다. 대중들은 각자의 취향(?)에 따라 선택할 수 있는 셀러브리티와 아티스트의 범위가 넓어질 가능성이 높다. 드라마, 영화, 애니메이션, 웹툰, 웹소설의 다양한 캐릭터를 각각의 이유로 좋아하는 것과 유사하게 말이다. 실제 인간과 가상인간이 공존할 가능성이 크다는 얘기다.
가장 중요한 건 테크놀로지가 엔터테인먼트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로 자리 잡으면서 ‘관계에 대한 경험’ 자체가 달라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실제 인간들 사이에선 생기지 않았던 문제들엔 어떻게 대처할 수 있을 것인가. 또 실제 인간과 가상인간이 공존하는 세상의 관계와 커뮤니케이션이란 어떤 모습이 될 것인가. 이제껏 겪어보지 못한 신세계가 눈앞에 펼쳐지는 중이다.
Who's the writer?
차우진은 듣고 읽고 쓰는 사람이다. 주로 대중음악, 라이프스타일 분야를 다루면서 팬덤, 미디어, 인터넷과 산업구조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