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가니스탄을 떠나며_6인의 리얼 스토리 | 에스콰이어코리아
LIFE

아프가니스탄을 떠나며_6인의 리얼 스토리

미국 역사상 가장 길었던 전쟁이 끝났다. 사령관, 스나이퍼, 통역사 등 아프가니스탄에서 복무한 여섯 명의 이야기를 들었다. 전투는 끝났지만, 이들이 치를 기억과의 전쟁은 이제 겨우 시작에 불과했다.

ESQUIRE BY ESQUIRE 2021.12.09
 

깔끔하게 끝나는 전쟁은 드물다.

아프가니스탄 전쟁이 깔끔하게 종결되는 작은 은총이라도 누리기를 바라는 사람들이 있다. 또 아프가니스탄엔 이 전쟁에서 그런 은총을 누릴 만한 일을 해낸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전쟁은 마치 인생과 같아서 순리대로 되지 않는다. 오히려 그런 사람들은 타깃이 될 뿐이다.
 
시작은 깔끔했다. ‘9·11 테러 사건’이 터지고 몇 주 뒤 미국은 조지 W. 부시의 명령에 따라 아프가니스탄을 공격했다. 미국을 공격한 테러 집단 알 카에다를 해체하고 파괴하기 위해서였다. 미국은 정의와 복수 중간쯤에 있는 무언가을 추구했다. 알 카에다, 알 카에다를 돕던 탈레반을 꺾겠다는 본래의 임무를 완수하고 나서도 미국은 그곳에 머물렀다. 이웃 국가 파키스탄에 있던 오사마 빈 라덴을 제거한 뒤에도 미국은 계속 남았다.
 
한때는 민주주의를 위해, 한때는 인권을 위해 남았다. 대(對)반란 전략을 믿는 사람이라면 국가 재건을 위해, 대(對)테러리즘을 믿는 사람이라면 ‘잔디를 깎기 위해’(테러리스트를 죽이면 테러리스트들이 더 많이 생길 뿐이라는 것을 돌려 표현하는 말이다) 머물렀다고 말할 것이다. 전쟁이 점점 길어지면서, 미국 대중의 관심과 지지는 사라져갔다. 지난 20년 동안 생각을 달리하게 된 사람들을 비난할 수는 없는 일이지만, 대중의 관심과 지지는 공화국에서는 중요하다. 전쟁의 존재 자체가 전쟁을 정당화하는 근거가 되었고, 그 근거가 미국인의 생명을 위험에 처하게 하며 미국의 이름으로 계속 사람을 죽이는 삐뚤어진 이유가 됐다.
 
2021년 여름, 탈레반이 빠른 속도로 진격해온 데에는 끔찍한 의문이 뒤따른다. 대체 왜? 20년 동안 피와 자금을 쏟아 넣었는데 스스로를 보호할 의지 또는 능력이 없는, 허점투성이인 국가기관밖에 남지 않은 이유는 무엇인가? 미군 측은 미군을 닮은 아프간군을 조직하려 애썼다. 정규군과 특수부대가 있는 군대, 그리고 무엇보다 전장에서 적과 교전해내면서 교전 이상의 임무도 완수할 수 있다는 신념을 가진 군대를 만들려 했다. 정말 자만심에 가득 찬 이야기다. ‘미군을 닮은’이라니. 스스로의 모습에 만족할 수 있는지, 거울을 들여다보라.
 
이 공동의 패배에서도 미국은 마치 이걸 미국만의 이야기로 만들고 싶어 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래야 할 필요가 있는 것만 같았다. 그래서 똑똑한 척하며 썰을 푸는 사람들, TV에 나와서 떠들어대는 사람들은 보기 흉한 이번 철군이 제국의 쇠퇴를 보여주는 것이라며 거창한 선언을 해댔다. 미국의 세기의 끝자락, 미국 예외주의의 종말을 알리는 사건이라는 둥 난리 법석을 떨었다. 무언가의 종말임은 분명했고, 무언가의 종말엔 히스테리가 따르기 마련이다.
 
그러나 비극은 그저 비극일 뿐일 때도 있다. 가끔 해석은 그저 잡음이다.
 
비극의 종결: 미군 13명과 170명이 넘는 아프가니스탄 민간인이 8월 26일 카불 공항의 자살폭탄테러로 사망했다. 이 미군들은 지난 몇 년 동안 이 전쟁에서 찾아볼 수 없었던 도덕적 목적을 완수하려다 죽었다. 스무 살짜리 해병대원들이 이방인들을 안전한 곳으로 인도하려다 죽었다. 자신이 태어날 때 시작된 전쟁의 마지막 희생자가 되었다. 그 아이러니가 너무도 으스스하다.
 
미국의 총사령관은 아프가니스탄 전쟁을 끝내겠다고 맹세했고, 자신의 말을 지켜 정말로 전쟁을 끝냈다. 그의 아들이 군인이었기 때문에 말발이 먹혔는지도 모르겠다. 조 바이든은 견고한 제도의 벽을 여러 개 뚫어야 했고, 미래의 역사가들은 그의 결의를 인정해주어야 할 것이다. 미국의 ‘영원한 전쟁’은 계속된다. 국가 안보 전문가들은 미국의 국경에서 일어나고 있는 ‘영원한 전쟁’이란 모호한 단어를 혐오한다. 일반 시민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게 도와주는 표현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프가니스탄에서의 철군이 무엇의 전조가 될지 누가 알 수 있겠는가. 아무것도 영원할 수는 없다. 심지어 영원한 전쟁조차도.
 
반드시 이런 식으로 끝나야 했을까? 협력자들이 겨우 비행기를 타기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탈레반 체크포인트와 절박한 군중들을 뚫고 가야 했나? 빼빼 마른 미 해병대와 낙하산부대원들이 또 다른 폭탄 테러의 끊임없는 위협 속에서 한 손에는 소총을 들고, 사람들을 줄 세우면서 다른 손은 아프가니스탄 아기를 향해 뻗어야 했나?
 
그렇지 않다. 그렇지 않다는 내 주장에 반대하는 사람은 정치적 거짓말에 속은 사람이거나 정치적 거짓말을 퍼뜨리는 사람이다. 우리에겐 눈이 있고 기본적인 감이 있다. 그걸 사용하려고 하기만 하면 된다. 어찌 됐든 미국의 협력자 중엔 남겨지는 사람이 있을 수밖에 없었다는 것은 냉엄한 진실이다. 또 하나의 ‘냉엄한 진실’은 한 달 안에 12만 명 이상을 대피시킨다는 것이 비록 기적에 가까웠다고는 해도, 애초에 이런 일이 필요하게 만든 계획 부족을 정당화할 수는 없다는 사실이다.
 
미 공군은 카불에서 인명을 구조했다. 그러나 바이든 정권에 대한 논란거리를 구조하지는 못했다. 미국인들은 ‘9·11 테러 사건’ 이후 ‘절대 잊지 말자(never forget)’고 말하며 힘을 북돋았다. 이제 아프가니스탄에 대해서는 잊어버리기 위해 무진 애를 쓰는 미국인들이 많을 것이다. 여기서 일어난 일, 지금도 일어나고 있는 일은 미국인들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역겹게 하고, 수치심과 두려움을 주기 때문이다. 또 많은 사람은 회피하기보다는 냉소적인 이유로 아프가니스탄에서의 일을 왜곡하려 할 것이다.
 
진실을 찾으려는 시도는 있어야 한다. 진실을 알기 위해서는 일단 진실을 찾아야 하고, 진실을 찾는다는 건 진실을 암시하는 것보다 훨씬 어렵다. 아프가니스탄 전쟁으로 삶이 달라진 여섯 명의 이야기를 모았다. 이들의 이야기가 전쟁의 전부를 보여주는 것은 아니다. 각기 다른 시간, 다른 동기에 따른 자신만의 관점을 담은 이야기다. 전쟁에는 일관성이 희박하고, 아프가니스탄 전쟁처럼 오래 지속된 전쟁의 경우엔 더욱 그렇다. 서로 다른 이야기들을 나란히 놓고 비교해 보면 독자들이 이 전쟁이 어땠는지,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지 더 잘 알 수 있지 않을까. 아프가니스탄에서 미국이 벌였던 전쟁은 끝났다. 이제 그 전쟁에 대한 기억과의 전쟁을 시작한다.
 


THE GENERAL

옛날 옛적에 사람들은 그를 ‘킹 데이비드’라고 불렀다.
아프가니스탄 전쟁과 미국의 자존심 모두를 구해낼 수 있는 사색가의 장군이었다.
 
좋게 보든 나쁘게 보든, 데이비드 퍼트레이어스가 남긴 유산을 살펴보지 않고 테러에 대한 전쟁을 평가할 수는 없다. 퍼트레이어스는 대중의 의식을 거스른 몇 안 되는 사령관이었다. 그는 이제 예순여덟이고, 군에서는 퇴역했지만 행동거지는 지금도 전시의 지휘관 같다. 사령관을 그만두기란 쉽지가 않은 모양이다. 나쁜 뜻으로 하는 말은 절대 아니다.
내가 그를 찾아갔을 때, 그는 메트로폴리탄 클럽의 펜트하우스 바 구석에 혼자 앉아 있었다. 은행원처럼 날렵하고 매끈한 슈트를 입은 채 휴대폰을 보며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센트럴 파크 옆에 있는 이 프라이빗 소셜 클럽은 몇 세대에 걸쳐 뉴욕 엘리트들의 안식처로서 옛 사회의 존재감을 유지하고 있다. 우리는 카불 점령 몇 주 전에 만났다. 아프가니스탄에서의 철군이 본격적으로 시작될 무렵이었다.
 
데이비드 퍼트레이어스, 전 아프가니스탄 미군 총사령관은 미군 철군이 너무 일렀다고 말한다.

데이비드 퍼트레이어스, 전 아프가니스탄 미군 총사령관은 미군 철군이 너무 일렀다고 말한다.

“이걸로 영원한 전쟁이 끝나지는 않을 거요. 우리의 관여가 끝나는 거지.” 퍼트레이어스의 말이다. “사실 나는 영원한 전쟁이 더 악화되지는 않을까 두렵소.” 그는 어떤 두려움을 품고 있는지 이어서 말한다. 그중엔 선견지명이 담긴 것도 있었다. 아프가니스탄 내전, 난민 위기, 급진적 지하디즘이 번성하게 될 피난처. 그의 말투는 교수 같고 설교적이다. 도널드 럼스펠드와 친구들이 난리를 쳤지만 실패했을 때 부시 대통령이 그의 도움을 구하려 했던 것도, 오바마 대통령이 아프가니스탄 전쟁을 살려내달라고 그에게 요청했던 것도 쉬이 이해가 된다. 하지만 언제나 그랬듯, 퍼트레이어스의 반군대응 전술 주장에서 가장 큰 문제는 시간이다. (CIA 국장을 지내기도 한 퍼트레이어스는 일부 주민들의 보호를 받으며 끈질기게 명맥을 이어가는 반군을 파훼하기 위해서는 현지 주민들을 동화해 마음을 얻어야 한다는 내용의 ‘대반란 전략’을 주창한 바 있다.) 이 긴 전쟁, 가장 긴 이 전쟁이 얼마나 더 지속되어야 할까? “이건 세대에 걸친 문제요.” 퍼트레이어스의 말이다. “우리는 10년 단위로 정의해서는 안 됩니다. 몇 년은 더더욱 안 되고… 그냥 계속해야 되는 겁니다.”
 
대반란(counterinsurgency)을 줄인 말인 COIN은 오래된 우유처럼 낡아버렸다. 이 전략의 가장 기본적인 내용은 반란을 일으키는 게릴라와 게릴라들의 활동을 돕는 주민들을 분리시킨다는 것이다. 퍼트레이어스가 추구한 대반란 전략은 막대한 자금과 골치 아픈 타협, 그리고 (또다시) 많은 시간을 필요로 했다. 미국에서는 정권이 바뀌고, 전쟁과 평화에 대해 다른 생각을 가진 새로운 정부가 들어섰다. 그러나 반란 세력을 명목상의 협력자로 바꾸기 위해 COIN이 쏟아부은 돈, 마음을 얻기 위해 애썼던 노력의 일부는 효과가 있었다. 나는 2007년과 2008년에 젊은 장교로서 이라크에 복무했다. 당시 COIN은 평정을 간절히 원하던 사람들에게 이를 가져다 주었다.
 
내가 아직도 COIN 정책에 대해 복잡한 감정을 품고 있음을 밝혀야겠다. 평정은 실제로 존재했다. 내 정찰소대에 있던 군인들은 모두 살아서 고국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우리는 부족 지도자들에게 뇌물을 엄청나게 주었다. 그건 더러운 짓이었다. 우리의 행동으로 인한 긴장 완화는 오래가지 않았다. 그때도 우리는 골목골목마다 미국 군인이 서서 지키고 있지 않으면 지속될 수 없지 않을까 걱정했다. 아니나 다를까, 우리가 떠난 지 불과 몇 년 뒤에 ISIS가 나타나 이라크 대부분의 지역을 차지하고 칼리프가 다스리는 지역임을 선포했다.
 
퍼트레이어스가 아프가니스탄 전쟁 사령관을 맡게 된 2010년은 병력 증강이 시작된 지 1년 뒤였다. 그때의 목표는 이라크 지역 대부분을 수복했다고 선언하는 것이었다. 미군과 비슷한 형태의 정규군을 확립하는 데 더욱 노력을 쏟는 것이 계획의 일부였다. 국가 수준의 정규군이란 아프가니스탄의 다양한 부족 집단 출신 군인들이 다른 집단들이 사는 지역에서 복무한다는 걸 포함하는 의미였고, 부족사회인 아프가니스탄에서 이건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무장한 외부인들이 헬만드 지역의 파슈툰 농부들을 찾아가 그들의 양귀비 밭을 불태우는 게 좋다고 설득했다. 그 외부인이 애틀랜타에서 온 머리가 희끗희끗한 병장일 때도 있었고, 판지시르 계곡의 타지크인일 때도 있었다.
 
2010년에 미군 498명이 죽었다. 미국이 아프가니스탄전에서 전사자를 가장 많이 낸 해였다. 외딴 곳으로 밀고 들어가자는 COIN의 명령에 따른 끔찍한 부산물이었다. 2011년에는 411명이 사망했다. 아프가니스탄 방위군의 사망자 추정치는 종잡기 힘들지만, 2013년의 조사에 따르면 아프가니스탄 방위군 사망자의 60% 이상이 조사 직전 3년 안에 발생했다. 얻은 것보다 시체가 더 많았다. 그래서 전쟁이 COIN보다 더 오래 이어졌다. 오바마는 2011년 여름에 아프가니스탄 방위군의 감축을 발표했고, 늘어가던 아프가니스탄 파병은 2012년에 끊겼다. 그 무렵에 ‘킹 데이비드’는 고국으로 돌아와 CIA 국장이 되었다.
 
10년이 지난 지금, 이러한 사실은 메트로폴리탄 클럽에 있는 킹 데이비드를 계속 괴롭히고 있다.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은 많이 다른데도 대중은 COIN이 만병통치약이 되길 기대했다. 퇴역한 퍼트레이어스는 오바마가 감축을 발표하게 한 미국 내 정치적 요소들이 적들에게 힘을 실어주었다고 본다. 그가 ‘투입’이라고 표현하는 요소들도 있다. “투입해야 할 병력뿐만 아니라…  거창한 아이디어, 적절한 리더들, 외교적 기여와 지원, 정보, 다양한 국제적 노력 등 적절한 다른 자원들까지. 이걸 제대로 파악하는 데 꼬박 10년이 걸렸소.”
 
무엇이 잘 이루어졌는지, 만약 이러저러한 것들이 달랐다면 어떻게 되었을지를 곰곰이 생각한다는 점에서 퍼트레이어스는 다른 모든 노병과 같다. 그렇지만 그는 흔한 노병이 아니다. 그는 제일 높은 자리에 앉았던 사람이다. 그가 말하는 도중에 끼어들려고 몇 번이나 시도해보지만, 적어도 우리가 메트로폴리탄 클럽에 있는 동안 그는 영원한 사령관이고 나는 영원한 졸병이다. 그는 자기 아들과 사위가 모두 아프가니스탄에서 복무했음을 지적한다. 그는 COIN이 젊은 리더들에게 강요하는 불가능한 요구가 무엇인지 잘 알고 있다.
 
그의 다음 약속 상대가 도착했다. 나는 그건 어찌 됐든 상관없다고 생각하며, 산전수전을 겪어온 재향군인들이 전직 사령관에게 물어보고 싶어 할 질문을 던졌다. “후회는 없나? 그 전쟁에서 겪은 일 중 당신을 잠 못 이루게 하는 것이 있나?”
 
퍼트레이어스는 2~3초 정도 거의 당혹한 듯한 모습이다.
 
“난 절대 잊지 못할 거요.” 그가 입을 연다. “산악 깊숙한 지대인 아프가니스탄 동부에서 아파치 무장 헬리콥터로 정찰 중이었소. 새벽 서너 시경이었지. 부대의 열감지기에 소총을 든 남성들이 잡혔소. 확인을 철저히 했고, 주위에 협력자로 볼 만한 사람들은 없었지. 그래서 ‘오케이, 적대적인 인물들이다, 처치하자’라고 결정했지.” 그의 목소리는 차분했다. “알고 보니 집을 지으려고 나무 막대기를 모으던 10대 소년들이었소.”
 
그가 표현한 후회는 전략적인 결정이라기보다는 전술의 일종이다. 하지만 나는 그게 진심이 담긴 대답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 “내 말은, 우리는 그 사람들을 보호하기 위해 주둔했던 것이니까요.” 
 

 

THE SNIPER

니컬러스 어빙에겐 인생의 끄트머리까지 가본 사람의 진지함이 묻어있다.
그는 미군 제3공격 대대에서 6년 동안 복무했다. 이라크에 세 번, 아프가니스탄에 세 번, 총 여섯 번 파병되었다. 아직도 그를 ‘리퍼’(Reaper)로 알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그가 스나이퍼로 활동하며 탈레반이 장악한 아프가니스탄 남부 도시 칸다하르에서 반란군 33명과 ‘반란군일 가능성이 큰 사람’(‘probables’) 12명을 죽였을 때 붙은 별명이라고 그는 말한다. “우린 시체를 찾지는 못했어요”라고 한다.
 
육군 레인저 부대 스나이퍼 출신인 니컬러스 어빙은 전투에 여섯 번 배치되었다.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에 각 세 번씩 갔다.

육군 레인저 부대 스나이퍼 출신인 니컬러스 어빙은 전투에 여섯 번 배치되었다.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에 각 세 번씩 갔다.

그건 2009년의 일이었다. 아프가니스탄이 다른 전쟁, 잊힌 전쟁일 때였다. 당시 미국 합동참모의장이었던 마이클 멀린의 말을 되새기는 것이 가장 정확하겠다. “이라크에서 우리는 해야 할 일을 한다.” 한편 “아프가니스탄에서는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한다”라고 멀린은 말했다.
 
어빙(34)은 대중을 상대로 떠들어대며 돈벌이를 하려 드는 재향군인이 아니다. 그는 가끔 할리우드 액션 영화의 컨설턴트로 일한다. 할리우드의 교묘한 술수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고 싶은가? 그라면 말해줄 것이다. 사람을 죽이는 게 어떤지, 친구가 피 흘리며 죽어가는 걸 지켜보고 나면, 사람이 어떻게 변하는지 알고 싶은가? 그는 그것도 말해줄 것이다.
 
“기습을 당했어요.” 그는 2009년 아프가니스탄 남부에서 있었던 총격전을 떠올리며 말한다. “갑자기 땅에서 총알이 날아왔어요. 괴상했죠. 우린 깊이 파인 곳으로 냅다 뛰어들어 거기서 맞서 싸우기 시작했죠. 내 친구 벤저민 콥 상병이 제일 먼저 총에 맞았습니다. 넓적다리 동맥이었어요. 피와 온갖 것들이 강물처럼 흘러나왔던 게 기억납니다.” 그는 소대장을 향해 “움직여야 합니다, 안전한 곳으로 가야 해요”라고 말했다.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소대장이 가슴에 총을 맞았다. “내 얼굴에 물이 확 튀었죠. 하지만 그건 물이 아니었어요. 그의 피였죠.” 소대장은 살아남았다. 콥 상병은 살아남지 못했다. 총격전은 12시간 동안 이어졌다. 전투가 시작될 때 그에겐 탄환이 210개 있었지만, 끝났을 때는 단 6발만 남아 있었다. “정말 미친 날이었죠.”
 
솔직히 인정한다. 어빙은 날 놀라게 했다. 목숨을 앗아가는 진짜 무서운 존재인 리퍼가 그토록 열렬히 반전 정서를 지니고 있으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는 진심이었다. 내가 그를 만난 것은 6월 말이었으니, 철군을 ‘어떻게’ 할지보다는 아직 ‘왜’ 해야 하는지가 중요한 시기였다. 샌안토니오에 있는 어빙의 집에서 그는 “철군을 100% 지지합니다. 내 입장은 예전과는 완전히 달라요. 거기서 달라진 게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 때문에 내 생각이 달라졌어요. 빈 라덴은 진작에 제거했지 않았습니까.”
 
“젊은이들이 거길 가서 내가 했던 일을 똑같이 하는 걸 지켜보는 것의 문제예요. 우리가 애초에 거기 갔던 이유는 다음 세대들이 가지 않아도 되게 하기 위해서였으니까요.” 어빙의 말이다. 우리는 현재 미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다양한 분열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다. 백인들이 많은 특수부대에 몸담았던 흑인인 어빙은 이런 분열들을 아주 잘 알고 있다. “대놓고 인종차별을 하는 녀석들이 있었죠.” 다른 대원들이 그를 ‘깜둥이’라고 부른 적도 몇 번 있었다. “사격장에서는 내가 차를 몰고 지나가며 총을 쏘는 걸 잘할 거라고 생각하는 놈들이 있었어요.” 그는 그들의 입을 닥치게 하기 위해 “보통 그들보다 총을 더 잘 쐈다”고 한다.
 
어빙이 보기에는 아프가니스탄과 지금의 미국 사이에 이어지는 점이 있다. 그는 자신과 같은 재향군인들이 일부 분열의 최전선에 왜 나서는지 이해하기 힘들어한다. 예를 들어 공군 출신인 애슐리 배빗이 바리케이드가 터진 문의 창문으로 기어 올라가다 캐피톨 경찰의 총에 맞아 숨진 사건 같은 경우다. “싸움이 너무 많았어요. 넌더리가 나는 시점이 오게 돼 있죠.”
 
어빙은 2010년에 퇴역했다. 퇴역 후의 삶에는 그가 군에 있을 때 의지했던 조직적 구조와 이뤄야 할 목표가 없는 것처럼 보였다.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가 그의 발목을 잡았고, 알코올 의존 문제가 있었다. 그는 전쟁에 발을 담근 삶이 그리웠다. 결국 도급업자로 다시 전쟁터에 돌아갔다.
 
그는 2016년 아들이 태어난 것이 폭력과 우울이 반복되는 나선으로 떨어지지 않도록 구해주었다고 말한다. “모든 게 달라졌습니다. 나는 술을 끊었고, 철학 책을 더 많이 읽게 됐어요. 그렇게 하려고 한 건 아니었는데 그냥 그렇게 됐어요. 안정된 마음 상태를 유지하는 게 얼마나 좋은지 깨달았죠. 언제나 편집증적이고 화난 상태로 사는 것보다요.”
 
아이가 있는 노병이라면 누구나 어떤 대화가 기다리고 있는지 안다. 살인, 죽음, 책임 등등에 대한 이야기를 나눠야 한다. 어빙이 그 대화에 대비하고 있는 자세는 확고하다.
 
“군 복무에 대해 뒤끝이 남아 있는 건 아녜요. 하지만 내 아들을 군대에 가게 하진 않을 겁니다. 어떤 식으로든 군에 복무하게 두진 않겠어요.”
 

 

THE MARINE

아프가니스탄 전쟁에는 전략적인 도박이 포함되어 있었다.
맞다. 스나이퍼의 스코프 속에서 사람이 핑크색 안개로 변하는 일이 그 전쟁에서 벌어진 것 역시 사실이다. 브리핑과 총격이 오가는 전투 사이의 거대한 간극을 살아내며 전혀 다른 배경을 지난 사람들과 함께 승리와 평화를 좇으려 신뢰하는 법을 배우는 것 역시 전쟁의 일부다.
 
해병대 영관급 장교 ‘레일라’는 익명을 조건으로 우리와 이야기했다. 그녀는 지금도 해병대특수작전사령부에 복무하고 있다.

해병대 영관급 장교 ‘레일라’는 익명을 조건으로 우리와 이야기했다. 그녀는 지금도 해병대특수작전사령부에 복무하고 있다.

“폭력으로만 해결되는 일들도 있어요. 잘 가다듬어둬야 하고 언제든 쓸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하죠.” 해병대 영관급 장교의 말이다. 여기서는 레일라라는 이름을 쓰려 한다. 탈레반이 권력을 되찾기 몇 주 전에 나눈 대화지만, 그 시점에는 이미 그 일이 가능할 것이냐가 문제가 아니라 언제가 될 것이냐가 문제였다. “그러나 이중성이 있었죠. 아프가니스탄의 산과 계곡은 너무나 아름다웠고 사람들도 정말 좋았어요. 그들은 생존자예요. 전 그들에게서 정말 많은 것을 배웠어요. 그곳에서 벌어진 비극에도 불구하고, 전 거기서 보낸 시간에 대해 정말 감사함을 느껴요.”
 
레일라는 30대 후반이다. 선임 참모 장교로, 다음 세대의 해병대원들을 지원하고 키워나가는 일을 맡고 있다. 그녀는 익명을 조건으로 인터뷰에 응했다. MARSOC(Marine Forces Special Operations Command, 해병대특수작전사령부)의 일원이기 때문이기도 하고, 스스로 전쟁에 대해 어떤 느낌을 갖고 있는지 아직 파악하지 못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레일라는 아프가니스탄에서 네 번 복무했다. 2010년, 2012년, 2013년부터 2014년, 가장 최근엔 2020년부터 2021년까지였다. 총 34개월 동안 복무하며 대부분의 시간을 헬만드 지역에서 보냈다. COIN, 대테러리즘, 자문과 보조, 레일라는 이 모든 걸 다 해봤다. 그녀의 커리어를 따라가다 보면 9·11 이후 미국이 펼친 캠페인의 미로를 헤매는 기분이 든다. 그런데도 그녀는 늘 헬만드에 돌아가게 됐다.
 
레일라의 삶에서 강렬한 순간 중 하나는 두 번째 복무 중 찾아왔다. 폭탄 공격에서 살아남은 직후였다. “우리의 MRAP(지뢰 방호 차량)가 IED(급조 폭발물)에 당했어요. 앞부분이 완전히 망가졌죠. 폭발 속도가 정말 충격적이었어요. 모든 게 느리게 움직이는 듯했고, 훈련받았던 게 갑자기 생각났죠. 모든 감각이 고조됐어요.” 2시간 뒤 그들은 기지로 사용하고 있던 곳으로 돌아왔고, 아프가니스탄 협력자가 식사를 가져다주었다. “오크라와 토마토를 섞고 갓 구운 빵을 곁들인 멋진 식사였죠.” 레일라의 말이다. “입술이 부어 있어서 씹기가 힘들었어요. 그래도 제가 평생 먹어본 중 최고의 음식이었죠. 전쟁과 사라질 수 있는 풍광과 문화의 멋진 면이 가진 이중성의 일부일 뿐이죠.”
 
입증된 것은 아니지만, 내가 만나본 바로는 이런 특수부대 출신들이 일반적인 재향군인들보다는 자신의 경험에 대해 더 나은 감정을 갖고 있는 것 같다. 이유는 명확하다. 나쁜 짓을 하고 있는 놈들을 자정에 급습해서 잡으면 의심의 여지가 없다. 이건 전쟁에서 중요하다. 참전의 목적을 되새기게 해준다. 레일라는 양쪽에서 다 복무해보았다. 양쪽이 상충한 것에 대한 그녀의 이해는 전형적인 좁은 시각을 넘어선다.
 
특수부대의 부담은 원래 컸는데, COIN 후에 더욱 무거워졌다. 죽이거나 사로잡으라는 급습의 요구와 지역 보안군의 수준을 높이라는 두 가지 목표가 주어졌다. 이 무렵에 특수부대에 배치되었던 사람들이 다들 그렇듯, 레일라는 실제로 진전되는 것을 목격했다고 단호히 말한다. 전장에서도, 정치적 화합의 영역에서도 나아졌다고 한다. 아프가니스탄 전쟁에 대한 미국 대중의 생각은 이미 굳어졌을지 몰라도 전쟁은 계속되었다. 밤에는 초록색의 나이트 비전으로, 2015년에서 2019년까지 폭격량을 여덟 배 늘려가며 이어졌다. 하루에 스무 번이나 폭격한 적도 있었다.
 
또 다른 중요한 사건은 레일라가 오바이드라는 젊은 아프가니스탄 장교와 친해져서 조언자 역할까지 해주던 세 번째 파병 때 일어났다. “우리의 아프가니스탄 파트너들은 우리와는 거의 독립적으로 활동했어요. 그들은 QRF가 필요할 때만 우리를 이용했거든요.” QRF(Quick Reaction Force)란 신속 대응군을 의미한다. “그건 큰 진전이었죠.”
 
오바이드 같은 아프가니스탄 특공대원들이 전국에서 모여들었다. 온갖 부족과 민족이 다 있었다. 그들은 엘리트였고, 미군들과는 달리 최고임이 입증된 인재들이었다. 이런 사람들로 한 국가의 정규군 전체를 구성하려면 수십 년이 걸릴 수도 있었다고 퍼트레이어스는 말한다. 2021년 여름에 탈레반이 아프가니스탄을 휩쓸 때, 정부의 정규군 상당수는 총 한 방 쏘지 않고 무기를 내려놓았지만, 맞서 싸운 이들도 있었다. 그들은 잘 싸웠다. 이들 중 상당수가 특공대원들이었다. 초기의 보고에 따르면 이들 부대 안에서 새 정권에 맞서는 저항 세력이 생기고 있다고도 한다.
 
아프가니스탄에서 복무했던 미국인은 약 80만 명에 달한다. 이들 중 대부분과는 달리, 레일라는 전쟁과 아프가니스탄에 작별을 고할 수 있었다. 2020년에 레일라는 자문역으로 배치되었다. 야간 순찰도, 시골 시장을 다닐 필요도 없었다. 곧 끝날 것처럼 보였다. 헬만드의 타맥 포장 지역에서 차를 기다리며, 레일라는 이 상황을 이해하려 해보았다.
 
“떠나자니 슬펐죠.” 레일라는 조심스럽게 말한다. 그녀는 아직도 아프가니스탄 업무를 맡고 있다. “앞으로 어떻게 되든, 우리는 우리가 당시에 가지고 있던 자원을 활용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노력을 했어요.” 레일라는 한숨을 쉰다. 레일라는 9·11 이후 미국의 전쟁에 참여하며 자신의 커리어 전부를 보냈다. 미군의 한 세대를 대표한다고 할 수 있는 사람이다. 승리는? 평화는?
 
“착잡하네요.” 레일라의 말이다.
 

 

THE INTERPRETER

칼릴 아랍은 중간에 끼어 있는 사람이다.
그가 버리고 온 옛 삶과 바다 건너의 새로운 삶 사이에 끼어 있다. 전쟁과 평화 사이에 끼어 있다. 무언가를 찾으러 나선 이들을 몇 세기 동안 마치 호박(amber) 속에 가둬둔 듯 괴상한 상황에 처해 있다. 그는 비극과 행운 사이에 놓여 있다. 그를 죽이고 싶어 하던 군부에서는 탈출했다. 탈출하지 못한 이들이 정말 많다. 그는 무엇보다 특별이민비자를 받아 미국에 와 있다는 것이 행운이고 고맙다고 말한다. 미군을 위해 일했던, 또는 그로 인해 생명을 위협받는 아프가니스탄인들을 위해 발급되는 비자다.
 
칼릴 아랍은 휴스턴에서 형제와 함께 살고 있다. 그들의 친척들은 피난할 수가 없어 거의 다 아프가니스탄에 있다.

칼릴 아랍은 휴스턴에서 형제와 함께 살고 있다. 그들의 친척들은 피난할 수가 없어 거의 다 아프가니스탄에 있다.

그렇다고 그가 고생을 하지 않았다는 건 아니다.
 
“난 책임감을 느껴요.” 휴스턴에서 형제와 함께 살고 있는 아파트에서 그가 말한다. 우리는 아프가니스탄에 있는 그의 가족들, 그가 몇 년 전에 미국을 위해 한 일이 그들에게 미칠 영향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난 그게 옳은 일이라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거기에 따른 결과가 있었고, 만약 내가 그때로 돌아가서 다시 결정을 내려야 한다면 난 전과 같은 결정을 하진 않을 겁니다.”
 
이 전쟁에 엮인 많은 사람과 마찬가지로 아랍(34)은 자신의 무모함을 돌아보았다. 탈레반이 저항도 거의 없는 외딴 지역들을 휩쓸고 지나가던 7월, 쥐 죽은 듯 고요한 가운데 줌으로 나와 이야기를 나누던 그에게서 조용한 우울감이 느껴졌다.
 
“황금 새장에 갇힌 새에 대한 옛 노래가 있어요. ‘우리(cage)는 우리야/ 아무리 금으로 된 우리라고 해도.’ 아프가니스탄 사람들뿐 아니라, 추방된 모든 사람에 대한 아주 흥미로운 비유라고 생각해요.”
 
아프가니스탄 북서부에 있는 고대 실크로드의 무역 도시 헤라트에서 태어나고 자란 아랍은 10대 시절 이웃집 옥상에서 2001년 침공의 첫 공습을 지켜보았다. “로켓이 목표물인 탈레반 근거지를 맞히는 모습을 본다는 건 정말로 기념할 만한 순간이었죠. 그건 그냥 파괴가 아니었습니다. 새로운 미래의 가능성이었어요.” 그는 몇 년 뒤 헤라트 지역 훈련소에서 통역가로 일하기 시작했다. 새로운 아프가니스탄을 위한 현대적 보안군을 만드는 일을 도왔다. “난 최전선에서 싸운 부대들과 일하지 않았어요. 대부분의 통역가들과 마찬가지였죠. 하지만 절대 쉬운 일은 아니었어요. 늘 위험했어요. 언제나 가격표가 따라붙죠.”
 
2010년 이탈리아의 마약 밀수 대응 전문 부대인 구아르디아 디 피난자와 일하던 아랍은 탈레반이 보낸 편지를 받았다. 탈레반은 그가 샤리아 율법을 위반했다며, 이생에서의 영원한 처벌을 내릴 것임을 어렴풋이 내비쳤다. 헤라트 사람들은 누구나 이런 편지가 공허한 제스처가 아니라는 걸 안다. 탈레반은 알맹이 없는 말을 하지 않으니까.
 
미국이 아프가니스탄을 가장 강력하게 점령했을 시점이었지만, 아랍에게 당시 집은 세상에서 가장 위험한 곳이 되었다. 아랍의 아버지가 모스크로 가는 길에 집 앞 뜰에 놓인 편지를 발견했다. 아랍은 운 좋게도 인도에서 배낭여행을 하던 중이었다. 아랍은 인도에 머물렀다. 그 뒤로 10년 동안 아시아와 유럽을 돌아다니며 떠돌이 생활을 했다. 2003년 규모는 작지만 점점 확대되고 있는 미국의 특별이민비자(Special Immigrant Visa, SIV) 프로그램에 지원했다. 그리고 기다렸다.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2019년 말에야 드디어 비자를 지니고 미국행 비행기에 탑승할 수 있었다.
 
아랍은 투표할 수 있도록 시민권을 얻고 싶어 하며, 수정헌법 제1조에 대해 놀라워하며 이야기한다. 그는 한때는 독실한 모슬렘이었지만 이젠 종교적으로 불가지론자이기 때문에, 근처에 있는 핑커톤 바비큐에 대해 거리낌 없이 찬사를 늘어놓는다. “전 유럽에서는 채식주의자로 살아갈 수 있어요. 하지만 텍사스에서는 안 돼요.” 그는 자신의 형제(마찬가지로 SIV를 받았다)와 함께 트럭 수송 업체를 세울 계획이다.
 
아랍과 나는 여름 내내 연락을 주고받았다. 그동안 탈레반은 아프가니스탄을 휩쓸며 전진했다. 자란즈가 함락되었다. 이어서 쿤두즈. 그리고 헤라트. 저항이 없지는 않았다. 다른 일부 지역들과는 달리, 헤라트 보안대는 맞서 싸웠다고 아랍은 자랑스럽게 말한다. “‘탈레반이 300명 죽었다.’ 사람들이 힘을 내기 위해 서로 이런 말을 주고받아요.”
 
아프가니스탄에 있는 아랍의 가족들은 정체가 드러나는 걸 피하기 위해 아프가니스탄 안에서 거처를 옮겼지만, 아랍은 자신이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이 많았다. 몇 달 동안 인권단체에서 SIV 지지 운동을 하는 데 헌신했다. 이젠 어쩐담? 그는 이런 무력감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저 집 밖으로 나가기 위해 한참이나 차를 몰았다. 목적지도 없이 넓게 펼쳐진 텍사스를 정처 없이 달린다.
 
“완전히 악몽이었어요. 제대로 해낼 시간, 사람들을 피난시킬 시간이 있었어요. 4월, 5월. 이젠 선한 사람들이 죽을 겁니다.”
 
아랍에게 이건 추상적인 말이 아니다. 휴스턴에 있는 그의 형제의 아내는 수년째 초청비자 인터뷰를 기다리고 있다. 예정된 분쟁, 관료적 타성, 팬데믹 때문에 여러 번 연기되었다. 탈레반이 카불에 입성한 날, 미 대사관은 그녀의 요청을 신속하게 처리했다고 연락했다. 하지만 그녀는 대사관에서 먼 곳에 살고 있다. 피난 비행기에 타기 위해 탈레반 검문소들을 거쳐 640km를 이동해 카불까지 가야 했다. 며칠 동안 공항 입장을 거부당했다. 카불 공항을 둘러싼 군중의 혼란 때문에 며칠을 더 기다렸다. 하지만 다 끝나갈 때쯤, 아프가니스탄에 남아 있는 아랍의 형제들이 완력을 써서 그녀를 미국 정부 인사와 만나게 해주었다. 그는 그녀를 비행기에 태워주었고, 그녀와 남편은 곧 재회하게 된다.
 
아랍은 부모님을 다시 볼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다. 부모님과의 접촉은 나날이 더 힘들어진다. 아랍은 탈레반이 인터넷과 전화선을 방해하고 있는 게 아닐까 의심한다. 그 점에 대해 추가 질문을 해보지만, 자꾸 딴생각이 떠올라 그를 방해한다. 과거의 선택들, 그가 알고 친하게 지냈던, 대피하지 못한 통역가들. 불운했던 이들.
 
“우리에겐 시간이 있었어요.” 그가 다시 말한다.
 

 

THE LIEUTENANT

9·11 때 오티스 햇필드는 네 살이었다.
그는 세계무역센터에서 10분 거리인 로어맨해튼에서 자라났다. 대피했던 기억이 어렴풋이 남아 있다. 어머니와 함께 업타운으로 달려가며, 불타는 빌딩들을 돌아보았다. “그 이미지들 중 진짜가 얼마나 되는지, 아니면 나중에 팩트를 알게 되며 심어진 건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우리 동네에는 여러 해 동안 여파가 남았어요.”
 
이제 스물네 살인 햇필드는 전쟁 중인 미국밖에 모르는 미국의 신세대에 속한다. 그게 거시적으로 어떤 의미를 갖는지는 사회학자들이 분석할 일이지만, 햇필드로서는 그로 인해 사명감이 생겼다. 그는 군인이 되고 싶었다. 그는 침실에서 제2차 세계대전 전투의 축적 모형을 만들기 시작했다. 중학생 때는 ‘COIN에 집착’했다. 친구들이 〈해리 포터〉를 열심히 읽을 때, 그는 퍼트레이어스 사령관의 대반란 매뉴얼을 읽었다.
 
오티스 햇필드는 아프가니스탄을 떠난 마지막 철군 부대원 중 하나였다.

오티스 햇필드는 아프가니스탄을 떠난 마지막 철군 부대원 중 하나였다.

 그의 부모님은 아트 딜러, 미술관 디렉터다. 외아들인 햇필드가 자신의 꿈을 좇는 걸 말리지 않았지만, 어찌 해야 할지를 몰랐다. 2010년(별로 오래전은 아니지만 시각에 따라선 전생에 가까운 옛날일 수도 있다), 그들은 망아지처럼 날뛰는 아들에게 붙여줄 방과 후 개인 교사를 구했다. 나는 이력서를 보냈다. 그의 어머니는 개인 교사가 필요하지만, 그보다도 더 필요한 것은 전쟁을 미화하지 않으면서 전쟁 이야기를 해줄 멘토라고 말했다. 그것도 해줄 수 있나요?
 
나는 그러겠다고 했다. 그렇지만 성인 남성이 소년에게 분쟁이 가져오는 파멸을 이야기하면서 매혹을 느끼지 않게 하는 방법이 있을까 싶었다. 그 전쟁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아이의 결정이 잘못되지 않았다는 확신을 갖지 못하도록 설득할 방법이 있을까?
 
지난 8월, 제10 산악 사단의 보병 소대장 오티스 햇필드 중위는 아프가니스탄에서 돌아왔다. 막 재향군인이 된 참이다. 20년 동안 미국 군인들이 이런 아찔한 긴 여정을 걸었고, 그는 마지막 대열에 속한다. 그는 자신이 원하던 전쟁을 얻었을까? 그런 사람이 있긴 한가?
 
“내가 뭘 기대했는지 기억나질 않아요.” 그가 어깨를 으쓱하며 말한다. “현실이 기대와 달랐다는 건 알겠어요.”
 
그들은 미국 대선이 끝난 직후인 작년 11월에 칸다하르 비행장에 도착했다. 당선자는 종전을 공약했지만 그의 전임자 두 명도 종전을 약속한 건 마찬가지였다. 이 전쟁은 햇필드의 생애 거의 내내 지속되었다. 태양만큼이나 확실한, 먼 곳에 있는 성능 시험장이었다. 이 전쟁이 왜 사라지겠는가, 게다가 그가 막 참전한 지금 끝날 리가 있을까?
 
햇필드의 소대가 순찰을 한 번 돈 뒤 더 이상 순찰은 없다는 연락을 받았다. 도착한 지 몇 주 만에 소대원 절반 정도가 귀국 명령을 받았다. 햇필드는 작전 센터 장교가 필요했던 카불의 ‘단호한 지원’ 본부로 보내졌다. 6개월 동안 내근직을 수행했다. 열성적인 보병 중위가 원하는 생활은 아니었지만, 그 덕분에 철군의 책략을 직접 목격할 수 있었다.
 
“(철군이 아니라) 후퇴(retrograde)예요.” 그가 내 말을 몇 번이나 바로잡아준다.
 
햇필드는 7월에 바그람 비행장을 통해 한밤중에 조용히 이루어진 철군을 통해 빠져나왔다. 쿠웨이트의 캠프 부에링에서 몇 주를 보냈다. 미군의 한 세대 전체가 집에 가는 길에 들렀다 가는, 전쟁과 문명 사이의 중간 가정에 비슷한 곳이었다. 햇필드를 포함한 군인 전부가 폰 화면을 통해 자신들이 방금 빠져나온 나라가 낡아빠진 도요타 픽업을 탄 무장 세력에 의해 함락되는 것을 지켜보았다.
 
“쿠웨이트에서는 가끔씩 전쟁에 대해, 우리의 역할이 무엇이었는지에 대해 말싸움이 벌어졌어요. 받아들이고 이해해야 할 일들이 아주 많았죠. 누가 찾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이 분쟁에 대해 종결되었다는 느낌을 찾고 있는 사람이 있어요. 현대의 전쟁에 대한 개념화는 오래전부터 현실을 반영하지 않는 식으로 이루어져왔어요”라고 햇필드는 말한다.
 
제10 산악 사단 일부는 대피 중 카불 공항을 지키는 일을 맡았다. 햇필드의 친구와 동료들이다. 운명이 조금만 달라졌다면, 햇필드와 소대원들 역시 거기 있었을 수 있다. 비자 검문소의 광기를 겪었을 수 있고, 애비 게이트의 자살 폭탄 테러 현장에 있었을 수 있다. 이런 비극이 벌어진 뒤, 햇필드는 자신이 이 인터뷰에 응하는 게 맞는지 모르겠다고 연락했다. 그는 자기가 가치 있는 말을 할 만큼 전쟁을 많이 목격하지 못했다고 느꼈다. 전사자들에게 초점이 맞춰지길 바랐다.
 
나는 그렇지 않다고 강하게 말했다. 그의 관점은 이 전쟁의 특정 시점을 초월하는 것이다. 그가 느끼는 혼란은 불가능한 것을 이해해보려는 정직한 젊은이의 혼란이고, 그 어떤 무기나 전략과 마찬가지로, 모든 무장 분쟁 어디에나 존재한다.
 
현재 햇필드는 뉴욕 서부 포트 드럼에서 수비대 리더의 삶에 적응해가고 있다. 엉망이었던 과거를 현재, 미래와 얼른 이어가려고 노력 중이다. 휴가 중 낮 시간은 부모님과, 밤 시간은 옛 친구들과 보낸다. 친구들은 대부분 예술이나 매체 쪽에 종사하고, 아프가니스탄에 대해서는 어떤 질문을 해야 할지조차 모른다. 그는 친구들이 물어보지 않는 게 기쁘다. “아직은 감정적 여유가 없어요.”
 
그러면 이제는? 이건 오티스 햇필드 중위만이 아닌, 미군 전체를 향한 질문이다. 러시아와 중국 같은 ‘거의 동급인’ 적국들 때문에 냉전 시절과 같은 대규모 작전 훈련이 다시 필요해졌다. 옛 관례가 다시 새로운 관례가 되었다.
 
하지만 햇필드는 지난 20년이 어느 정도 의미가 있길 바란다.
 
“지금 COIN을 지지한다고 하면 화를 낼 사람도 있겠지만, COIN에는 오늘날의 세상에 대한 통찰이 있어요. 요즘은 인터넷 연결이 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분쟁에 참여하죠. 인터넷 연결이 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전쟁의 내러티브를 씁니다.”
 
 

 

THE AFGHAN

카불은 힌두쿠시산맥에 둘러싸인 아프가니스탄 동부의 좁고 칙칙한 분지에 있는 도시다.
청동기 이전부터 인간이 거주해왔고, 현재 인구는 430만 명이 넘는다. 두라니제국의 두 번째 왕이 반란을 쉽게 제압하기 위해 궁궐을 카불로 옮긴 이래, 수세기 동안 경제적·정치적 중심지 역할을 해왔다.
 
영국은 아프가니스탄에서 전쟁을 세 번 치렀다. 처음 두 번은 카불을 작전 기지로 이용했고, 세 번째 전쟁에서는 폭격 타깃으로 삼았다. 후에 소련 점령기에는 적군(赤軍) 본부가 카불에 있었다. 그리고 21세기가 되자 다른 외세가 들어와 20년 동안 머물렀다.
 
탈레반이 카불을 함락시켰을 때, 파르콘다의 이웃들은 책을 태우기 시작했다. 그러나 파르콘다는 차마 그러지 못했다.

탈레반이 카불을 함락시켰을 때, 파르콘다의 이웃들은 책을 태우기 시작했다. 그러나 파르콘다는 차마 그러지 못했다.

탈레반은 8월 중순에 카불을 탈환했다. 탈레반 선봉대가 카불 외곽에 다다르기 전부터 이미 기정사실화된 결과였다. 그 어떤 영리한 정부 대변인도 막을 수가 없는 가속력이 붙어 있었다. 자란즈가 넘어가고 카불이 점령되기까지 약 열흘 동안, 군인과 민간인들에게 이론적으로만 존재했던 일이 피할 수 없는 현실로 다가왔다.
 
파르콘다(24)는 카불 남서쪽 가즈니에서 태어났다. 걸음마를 떼던 무렵인 2001년, 그녀의 가족은 카불로 이사했다. (파르콘다는 자신의 정체가 드러나지 않도록 이름을 다 밝히지 말아달라고 부탁했다.) 카불이 함락된 뒤 일주일 동안 우리는 이야기하고 문자 메시지를 주고받았다.
 
탈레반이 카불에 입성한 날 밤에는 잠들 수가 없었다고 한다. 너무나 으스스했다. 깊은 정적이 흐르는 가운데 가끔씩 총성과 사이렌소리가 들려왔다. “총을 쏜 건 탈레반이 아니었을 수도 있다. 폭력 조직들은 이걸 기회로 삼고 있다.” 그리고 헬리콥터. 미국인들, 인맥이 있는 아프가니스탄인들이 구름을 뚫고 전쟁에서 도망가고 있었다.
 
파르콘다는 탈레반 이후의 아프가니스탄에서 자라난 젊은 아프간인 세대에 속한다. 어릴 때부터 배운 자유와 민주주의를 믿는다. 미국의 침공이 아프가니스탄에 가져다준 것은 군인만이 아니었다. 국제 구호원, 사업가, 교사들도 데려왔다. 대학을 다닐 때 파르콘다는 상급 영어 수업을 들었고 컨설팅 기업에서 인턴으로 일하게 되었다. 졸업 후에 그 기업은 파르콘다를 연구원으로 채용했다. 개발 프로젝트를 맡아 일하다 알게 된 프로그래머와 결혼도 했다.
 
이것이 영원한 전쟁의 이면이다. 빼앗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내주기도 한다. 나를 포함한 많은 미국인들이 영원한 전쟁에 대해 이야기할 때 잘 고려하지 않는 면이다. 파르콘다는 자신이 기억하는 삶의 대부분을 개방적인 사회에서 보냈다. 젊은 여성이 공부하고 일하고 꿈꿀 수 있는 세상이었다. 지난 20년 동안 아프가니스탄 전부가 이랬을까? 그건 아니다. 하지만 파르콘다에겐 그랬다.
 
파르콘다는 미국의 철군이 최근 3개월 동안 피부로 느껴지기 시작했다며 “상황이 점점 더 긴박해졌죠”라고 말한다. “그리고 전쟁이 사방팔방으로 퍼졌어요.” 무장 세력들이 한 지역 한 지역씩 점령해나감에 따라, 파르콘다는 집을 떠나야 했던 사람들이 카불로 들어오는 것을 알아차렸다. “하지만 그다음엔 (사실은 48시간 내의 일이었다) 칸다하르, 마자리샤리프가 넘어갔고, 전 모든 게 다 무너져 내릴 것임을 알 수 있었죠.” 이게 우리가 처음 이야기를 나누기 단 하루 전의 일이었다. “모든 일이 순식간에 벌어졌어요.”
 
파르콘다는 화가 나 있었다. 미국 정부에 화가 난 것은 아니다(적어도 공식적인 입장은 그렇다). 아프가니스탄 정부에 분노를 느꼈다. 특히 아슈라프 가니에게 배신감을 느꼈다. 민주적 선거를 통해 선출된 대통령이었던 그는 해외로 도주했다. 현금으로 1억6900만 달러를 들고 갔다고 한다. 또 그게 사실이 아니라는 주장도 있다. 수많은 음모론도 돌고 있다. 가니는 파슈툰족이기 때문이다. 탈레반 대부분이 파슈툰족이다.
 
지금은 공포가 카불을 지배하고 있다고 파르콘다는 말한다. “거의 모든 상점이 문을 닫았어요. 심지어 빵집도 닫았죠. 길거리에서 여성이라곤 한 명도 볼 수 없어요.” 그녀의 이웃들 중에선 가지고 있던 책을 태우는 사람들도 있지만, 파르콘다는 차마 그럴 수는 없었다. “아직은 못 하겠어요.” 그래서 파르콘다 부부는 그날 오전 시간 대부분을 책을 숨기는 데 쏟았다. 직장에서 쓰던 중요한 서류들도 남겨두었다. 정상 상태로 돌아가기를 바라는 희망의 작은 표현이다. 휴대폰의 자료를 지우고 벽에 걸어두었던 그림도 뗐다. 가족들 모두가 이렇게 조심하고 있는 건 아니다. “부모님과 시어머니에겐 별로 걱정할 일이 아니죠. 그분들의 삶은 크게 달라지지 않을 거예요. 내 아버지는 의사입니다. 탈레반이 카불에 있지만, 아빠는 의사로서 진료를 계속하실 거예요. 남편의 형들은 가게를 운영해요. 생명에 위협이 가는 직업이 아니죠.”
 
파르콘다는 부모님의 담담한 태도가 더 심한 일도 겪어봤기 때문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탈레반의 첫 지배 시절, 소련과 미국의 점령기 때가 그랬다. 혹은 자신의 부모님이 “아프가니스탄의 이런 운명을 그냥 받아들인 걸 수도 있다”고 말한다. “잘 모르겠어요. 하지만 우리는 이걸 용인할 수 없어요. 우린 다른 것을 원해요.”
 
파르콘다 부부는 미국 정부기관과 일하지 않았기 때문에 SIV를 신청할 수 없다. 그래서 최대한 많은 이민 프로그램에 지원해두고, 기적적으로 그중 하나에 받아들여질 경우에 대비해 즉시 떠날 수 있도록 짐을 싸두었다. 합법적인 루트로 성공하지 못한다 해도 그들은 계속 시도할 것이다. 나는 그녀에게 앞으로 어떤 일이 일어날 것 같은지 물었다. “솔직히 전혀 모르겠어요.” 하지만 그녀의 목적은 분명했다. “무엇보다도 우리는 아프가니스탄에서 벗어나야 해요.”
 
이 모든 소동, 그녀가 알아왔던 거의 모든 것이 무너지는 와중에도 그녀는 자기가 제일 좋아하는 시 구절에서 힘을 얻는다고 했다. 13세기 시인 루미의 시다.
 
“그릇된 행동과 옳은 행동의 개념을 넘어선 곳에 들판이 있다
난 거기서 당신을 만날 것이다
영혼이 그 풀밭에 눕는 곳에서는
세상은 너무나 가득 차 있어
세상에 대한 이야기를 나눌 수조차 없다”
 
이 이야기가 지면으로 옮겨질 때, 파르콘다와 남편이 아프가니스탄을 벗어나 안전한 곳으로 가는 데 성공했다는 연락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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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edit

    WRITER MATT GALLAGHER
    photographs MALIKE SIDIBE
    JOHANNES EISELE/ AFP/ GETTY IMAGES
    TRANSLATOR 이원열
    DIGITAL DESIGNER 김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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