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레이터 노준구가 '이사'에 대한 전시를 연 이유 | 에스콰이어코리아
LIFE

일러스트레이터 노준구가 '이사'에 대한 전시를 연 이유

오성윤 BY 오성윤 2022.04.03
 
 
러시아의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출발한 헬싱키행 심야 버스는 새벽 1시가 되어서야 국경 검문소를 지나 핀란드 땅을 밟았다. 검문소의 러시아 군인들은 승객들의 여권을 하나하나 꼼꼼히 들여다보았고, 승객들은 한밤중에 까다로운 출국심사를 받으며 한 시간가량을 검문소에서 기다려야 했다. 버스는 얼마간 이동했으나 또 핀란드의 입국심사가 승객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체류 기간과 입국 목적에 더해 여러 질문이 이어졌다. 런던의 지하철 테러 사건이 얼마 전에 일어나서 그리 까다로웠던 걸까. 지난한 국경 통과 절차 후 버스는 다시 모든 승객을 태웠고 그제야 목적지를 향해 달릴 수 있었다.
이십대의 어느 여름밤, 나는 그 버스에서 그렇게 새로운 곳으로 무사히 이동하는 것에 형언할 수 없는 안도감을 느꼈다. 출국과 입국 과정이 생각보다 길었기 때문일까, 아니면 출국장과 입국장에 감돌던 묘한 분위기 때문이었을까. 핀란드의 밤길을 달리는 버스 안에서 나는 별일 없이 러시아 여행을 끝내서 다행이라는 마음과 함께 차마 말로 설명하기 힘든 ‘자유’를 느꼈다. 17년 전의 감정이라 무엇이 내 마음을 그리 충만하게 채웠는지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그때의 북받쳤던 감정의 무게만큼은 여전히 생생하다. 익숙한 곳에서 새로운 어떤 곳으로 이동하는 것의 즐거움과 그것이 주는 흥분. 아마 그 야간 버스에서 내가 몸으로 느낀 건 그런 것이었으리라 생각한다. 낯선 사람들이 뒤섞인 버스는 어두컴컴한 미지의 땅을 달리고 있었고, 그러나 저쪽 끝에서 아침이 밝아오며 미지의 세계가 서서히 선명해지고 있었다. 내 눈이 그것을 감각했던 그 즐거움을 여태 생생히 갖고 있다니, 나는 그것만으로도 참 감사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어쩌면 내가 〈이사의 기억〉이라는 전시를 열게 된 이유는 그때 만난 자유의 기억 때문인지도 모른다. 얼마간의 세월이 흐른 지금, 나는 낯선 곳으로 여행을 떠나거나 시각적 자극만으로 마음이 채워질 만큼 몸과 마음이 너그럽지는 못한 사람이 되었다. 나에게는 함께 삶을 살아가는 가족이 생겼으며 늘, 언제나, 쉴 틈 없이 해야 하는 일들이 있었다. 나는 내 몸과 마음이 예전처럼 쉽게 ‘자유’를 감각하지 못하게 된 원인으로 그런 환경적 변화를 지목하곤 했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어쩌면 그 원인은 다른 데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유로움을 갈구했던 그때의 마음이 다른 욕망에 짓눌린 것은 아닐까?’ 이를테면 나는 지난 17년간 더 행복한 삶을 바라며 살던 집을 떠나 다른 집, 다른 동네에 전입하기를 반복했다. 언제부턴가 ‘집’이라는 대상을 향해 욕망을 키웠다고 할 수도 있을 터인데, 그건 새로운 집과 새로운 동네에 대한 환상과도 같은 것이었다. 새로운 삶을 향한 욕망이 내 안에서 위태롭게 꿈틀대며 환상을 현실로 만들어줄 집과 동네로 이끌었던 것이다. 실제로 그런 욕망이 충족되고 환상이 실현되며 행복이 내 손안에 들어온 적도 있었다. 그러나 어찌 된 영문인지 잡았다고 생각했던 행복은 얼마 지나지 않아 신기루처럼 사라져버렸고, 나는 곧 다른 집과 동네를 향한 욕망을 품기 시작했다. 나는 의문을 품게 되었다. 왜 인간은 끊임없이 무언가를 욕망하며, 그것을 쥐는 순간 곧 사라지는 걸까? 그 답을 찾기 위해 나는 집과 이사에 대한 기억을 되살려 글과 그림으로 재현하기 시작했고, 그 결과물이 이번에 갤러리 밈에서 진행했던 개인전 〈이사의 기억〉의 내용이다.
〈이사의 기억〉은 이사를 통해 욕망을 충족하려 했던 내 지난날의 구구절절한 고백과도 같았다. 나는 그 전시를 하나의 완결된 큰 이야기 구조로 만들었지만, 사실 돌이켜보자면 그건 영원히 끝을 알 수 없는 반쪽짜리 이야기였다. 인간의 욕망이 이끄는 여정에는 끝이 없기 때문이다. 다만 작품에 펼쳐놓은 마지막 이사의 기억은 이 불완전한 반쪽짜리 이야기에도 일종의 충실한 결론을 만들어준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내가 작은 것에 벅차오름을 느꼈던 소중한 경험, 헬싱키의 새벽 도로를 달리던 버스의 기억과 비슷한 무엇을 품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달 말에 2년간 살던 집을 떠나 새로운 집으로 이사를 왔다. 책방을 열기 위해 북촌에 온 후 세 번째 집을 바꾼 셈이다. 이곳저곳을 옮겨 다니며 살던 곳을 떠나는 날에는 집 안의 모든 짐이 빠져나간 후 마지막으로 집과 작별인사 같은 것을 하게 되는데, 우선 텅 빈 거실, 화장실의 모습을 휴대폰에 담고 이곳에서 보낸 시간들을 회상해본다. 일부러 기억들을 꺼내는 것이라기보다는 나도 모르게 지나간 시간들이 주마등처럼 스쳐가는데 특별한 장면이 아니라 아내와 함께 밥을 해먹은 것, 딸과 소파에서 장난을 친 것, 화장실에서 딸을 씻겨준 것 같은 보통의 장면들이 떠오른다. 텅 빈 방에 추억의 장면이 소리 없이 여러 장 쌓인 느낌을 받으며 여기서 보낸 시간들이 참 좋았으며 별 탈 없이 잘 지내고 간다는 고마움을 집에게 인사하고 싶어진다. 돌이켜보면 이런 집과의 작별은 신도림의 아파트를 떠나올 때부터였다. 딸이 태어나 함께 살기 시작했던 곳이다. 책방을 열기 위해 북촌에 처음 살았던 허름하고 좁은 빌라를 떠나오던 날에도 집에게 고마움을 건넸었다. 어떤 집이든 그 집을 떠날 때 가족이 함께한 시간의 무게만큼이나 그리움과 고마움의 무게 또한 같은 것이리라. 하루하루 보통의 시간을 아끼고 소중하게 생각해야 한다. 새로 살게 된 집에서 또 얼마간의 시간을 보내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가족과 함께 보내는 평범한 시간에 정성을 들이자. - 2020년 2월 10일 원서동 2층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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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DITOR 오성윤
    WRITER 노준구
    ART DESIGNER 주정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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