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이승택은 왜 노끈으로 돌멩이를 묶었나? | 에스콰이어코리아

[인터뷰] 이승택은 왜 노끈으로 돌멩이를 묶었나?

이번 전시에선 '묶기'의 개념이 가장 중요하다

박세회 BY 박세회 2022.05.24
자신의 작품 앞에 선 이승택 화백의 모습. PHOTO 조혜진

자신의 작품 앞에 선 이승택 화백의 모습. PHOTO 조혜진

갤러리현대에서 이승택의 개인전 〈(Un)Bound[(언)바운드]〉를 개최한다. 갤러리현대가 준비한 작가의 네 번째 개인전으로 이번 전시에서는 물질적 시각화의 역할을 담당하는 ‘노끈’ 혹은 ‘묶기’가 주요 개념으로 등장한다. 갤러리현대 측은 "노끈이 주요 매체로 등장하는 '묶기(bind)' 연작, 노끈이 직접적으로 등장하지 않지만 매어진 흔적을 간직한 다채로운 작품, 묶기의 개념이 한없이 자유로워진(unbound) 캔버스 작품에 집중해서 기획되었다"라고 밝혔다. 개인전을 앞두고 〈에스콰이어〉는 작가와 서면을 통해 이야기를 나눴다.


선생님의 작품들을 보면서 마음에 들어온 형태가 무엇이든 도전적인 자세로 그것이 기성품이든 아니든 상관없이 ‘이것을 어떻게 하면 예술로 만들까’를 연구하는 듯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실패하신 적도 있으십니까?
끊임없는 실험의 연속이죠. 이미 만들었던 것 중에서 시간이 지나 마음에 들지 않으면, 다른 걸 만들기 위해 해체된 작업들도 부지기수죠.
 
최근에 예술로 바꿔보고 싶은 기성품이나 일상의 사물이 있는지요?  
나는 무엇이든 내 수중에 들어온 걸 잘 못 버리는 성격이에요. 그래서 아직도 내 작업실에 수북이 쌓여있는 골동품이나 재료들이 많아요. 재료들을 한 참씩 두고 보다 보면 재료와 재료를 묶어서 순식간에 작업이 되곤 하죠. 아직도 내 손 길을 기다리고 있는 많은 재료들이 널려 있는데, 기력이 되는 한 작업을 지속할까 합니다.
이승택, 매어진 돌, 1989, 돌, 철사, 21(h) x 27 x 16.5cm.

이승택, 매어진 돌, 1989, 돌, 철사, 21(h) x 27 x 16.5cm.



만드는 과정에 대해서도 궁금한데요. 여기 이 묶는 작업들의 형태를 만들어내는 게 막상 생각해보면 자연스럽게 표현하기 매우 어려워 보입니다. 선생님께 중력이란 또는 압력이란 무엇입니까?  
나의 상당수의 작업이 중력이 완성하는 것들이에요. ‘묶기’ 시리즈에 눌림을 표현하는 압력은 매우 중요한 작업의 요소입니다. 우주 여행하는 시대에 내 ‘묶음 조각’들은 지구의 중력을 후세대에게 알릴 수 있는 예전에는 미처 생각해 보지 못한 중요한 요소이지 않은가 싶어요.
 
저는 선생님의 끈이 뭔가를 묶은 형태에서 욕망 비슷한 것이 느껴지기도 합니다. 예를 들면 도기를 묶는 작업에서 여체를 묶은 일련의 작업이 떠오릅니다.
개념으로 이해해 줬으면 좋겠어요. 사물을 결과물로서 바라보게 하는 게 아니라, 어떠한 상태에 있는, 형태의 변형 과정에 있는 유기체적인 생명감을 발현하는 트릭 같은 거 말입니다. 생명감의 발현을 가능하게 하는 장치가 바로 노끈이죠. 제가 노끈에 매력을 갖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한 타래의 노끈이 저절로 스스르 풀리는 걸 목격하면서부터죠. 실제 노끈이든 노끈의 있었던 흔적이든, 노끈을 닮은 형태든 신기하게도 노끈이라는 것은 우리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기막힌 물건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승택, 무제, 1975, 캔버스에 노끈, 87 x 87 x 4cm.

이승택, 무제, 1975, 캔버스에 노끈, 87 x 87 x 4cm.

 
마음 맞는 이들을 설득하고 서로 영향을 주고 받으며 하나의 ‘스쿨’을 내지는 경향을 이루시지 않은 이유가 궁금합니다. 예를 들면 원형회처럼 오랜 기간 동안 가깝게 지낸 동료들이 있으신지요?  
미술에 대해 진지하게 얘기하고, 토론을 할 동료들이 주변에 많지 않았어요. 일부 평론가들이 있었지만, 모두 먹고 살기 바빴던 시절이라 서구의 작가들처럼 살롱이나 스쿨을 일구어 갈 만큼의 여유가 없었죠. 미술이라는 게 요즘에나 미술 시장이 형성되어서 돈이 되지, 그 시절에는 생계를 각자 해결해 가면서 미술을 해야했기에 그럴 수가 없는 형편이었죠.
 
지난 국립현대의 전시에서 여러 번 말로만 들어왔던 이승택의 대학 졸업작품 ‘역사와 시간’을 보고 감탄했습니다. 그 작품처럼 대학생의 졸업 작품이 평론가들의 입에 계속 오르내리는 건 흔치 않은 일이지요?  
1958년작입니다. 대부분의 졸업 동기생들이 구상적인 작업을 제출할 때, 저는 이미 저의 사실적인 묘사력에 대해서는 (인천에 있는 맥아더장군 동상을 비롯하여) 여러 대작 동상 작업으로 이미 검증이 끝난 상태였기 때문에 오래도록 기록으로 남을 의미 있는 작업을 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나는 일제 치하의 이북 땅 함경남도 고원에서 태어나 유년기를 보내고, 십대에 해방을 경험했어요. 곧이어 고향 땅을 점거한 공산당의 개인의 자유를 박탈하는 폭력성을 경험하며, 한국 전쟁 중에 북상하는 국군에 합류해 20대에 서울에 정착하게 되었죠. '역사와 시간'은 나의 26년의 개인사를 통해 경험한 한반도의 역사를 은유적으로 표현한 작업이라고 할 수 있어요 거역할 수 없는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식민, 해방, 분단을 경험하며 좌우 이데올로기의 첨예한 대립 속에서 생존과 실존에 대한 절박한 문제를 미술로서 반응하며 미술가로서 살아가기를 결심하는 중요한 이정표가 되는 작품입니다. 교수님들은 아까운 재주를 썩히고, 이런 걸 만든다고 핀잔을 줬지만, 뜻을 굽히지 않고 끝까지 밀어 붙어야만 했지요. 미술가로서의 삶을 살아가기로 결정한 이상, 쉽게 타협할 수 없었습니다.
이승택, 무제, 2017, 캔버스에 머리카락, 55.3 x 70.2 x 2.5(d)cm.

이승택, 무제, 2017, 캔버스에 머리카락, 55.3 x 70.2 x 2.5(d)cm.



어떤 학자는 서구의 68세대의 진보적 실험을 개인적 수준에서 이룬 작가로 선생님을 가장 먼저 지목할 수 밖에 없다고 했습니다. 저는 언뜻 서구 68세대의 실험과 비교하기엔 결이 조금 다르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저는 익명의 군중이 세력을 형성하며 집단적 행동으로 세상을 변화시키겠다는 이상은 저의 성향과는 맞지 않는다고 생각했습니다, 미술은 미술가가 죽더라도 세대를 초월하여 울림을 주는 메시지를 전하는 힘이 있다고 믿습니다. 저는 저와 사랑하는 제 가족이 안전하게 살아가는 것이 그 무엇보다 지켜내야 하는 사명이었고, 그 사명을 다하며 미술가로서의 비전을 키워야 했습니다. 세상을 예민하게 관찰하며 변화하는 세상에 미술로서 반응하는 미술가가 되기를 꿈꿨습니다. 내가 살아냈던 1950년대와 1960년대는 서구의 모더니즘이 전개되는 상황과는 비교할 수 없는 열악한 환경이었어요. 저야 미술가로서 직관적으로 작업을 끌고 나가지만, 함께 토론하고 비평하며 성숙한 집단 지성을 일구어 갈 동료들이 주변에 없었죠. 그럴 형편이 전혀 안 됐죠.
이승택_(좌) 무제, 2017, 캔버스에 노끈, 135 x 175 x 7 cm (우) 무제, 2017, 캔버스에 노끈, 135 x 185 x 7 cm.

이승택_(좌) 무제, 2017, 캔버스에 노끈, 135 x 175 x 7 cm (우) 무제, 2017, 캔버스에 노끈, 135 x 185 x 7 cm.

 
‘지구 놀이’ 등의 작품을 보면 환경에 대한 선각을 매우 일찍 깨달으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아직 세상은 전혀 바뀌지 않고 있지요. 어떤 감정을 느끼십니까?  
1950년대에는 전쟁의 폐허 속에서도 아름다운 자연이 있었던 서울이 있었습니다. 중지도 해수욕장, 광나루 해수욕장등 한강변은 여름이면 해수욕을 즐기든 아름다운 강변의 모래톱과 섬들이 있었어요. 저는 급격한 산업화를 경험하며 무지막지한 속도로 서울이라는 도시가 개발되어 가는 과정을 지켜 보며, 구호뿐인 환경 운동이 아닌 미술로서 직관적으로 ‘하나뿐인 지구’의 소중함을 전달할까 고민했습니다. 상업용 풍선으로 제작되는 흰색 플라스틱으로 제작되는 지름이 5미터 7미터되는 벌룬을 구입하여 사실적으로 위성에서 바라 본 지구를 사실적으로 그렸습니다. 환경에 대한 메시지를 그 어떤 작가보다 일찍 시작한 것 같은데, 관람객들과 함께 호흡하며 나름대로 보람을 느낀 작업이기도 합니다. 그래도 팬데믹을 겪으며 전세계적으로 환경에 대한 지구적인 대응에 대한 공감대가 형성되는 것 같아 그래도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북경 관람하는 지구는 1994년인데, 그때 중국에 가는 일이 그리 쉽지는 않았을 듯 합니다.  
KOPAS라고 퍼포먼스 아트를 하는 후배들과 함께 참여한 미술 행사였기에 가능했습니다. 물론 천안문 광장 앞에서는 ‘지구 놀이’ 퍼포먼스를 하려다가 공안들로부터 제지를 받아 겨우 사진 한 컷 남기고 바로 철수해야 했습니다.
 
지구 놀이 같은 작품은 지금 다시 해 봐도 무척 큰 관심을 끌 것 같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당시 아이들의 반응이 궁금합니다.  
그 대형 지구를 들고 아이들을 함께 동참시켜 지구를 공중으로 날려보기도 하고, 함께 굴리기도 하며 퍼포먼스를 하다 보면, 아이들이 신이 나서 소리 지르고 환호를 치며 무리지어 한참을 놀며 고사리에 손에 만져지는 지구에 대한 애착을 보이지요. 그러다가 여기 저기 긁히면서 바람이 빠지게 되고, 지구는 점점 더 쭈글쭈글해 지기 시작해 마치 죽어가는 듯한 상태를 연출하기에 이르죠. 아이들이 직관적으로 힘들어 하는 지구를 보게 되는 게 아이들에게 가슴에 와 닿는 시각적인 또 체험적인 메시지를 줄 수 있지 않았나 싶습니다.
자신의 작품 앞을 걸어 지나는 이승택 화백의 모습. PHOTO 조혜진

자신의 작품 앞을 걸어 지나는 이승택 화백의 모습. PHOTO 조혜진

 
선생님 개인이 가진 역사적 상황이 선생님의 미술관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요?  
일제 강점기였던 초등학교 시절부터 찰흙 두상 등을 만들 때마다 일본인 교장으로부터 칭찬을받았고, 해방 후 고등학교 때는 공상정권이 집권하면서 읍사무소 앞에 세울 김일성 흉상을 만드는 등 줄곧 만드는 것에 대해 남다른 재주가 있다는 건 알고 있었죠. 군대 징집을 면할 정도의 소조 실력은 내가 대한민국으로 탈출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 때 남한으로 오지 못했다면, 내가 지금처럼 미술가로서의 삶을 살 수 없었다고 생각한다.  
 
저는 꽤 오랜 시간동안 작가님께서 응당 받아야 할 스포트라이트를 받지 못하셨다고 생각합니다. 그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미술가가 제대로 평가받기 위해서는 성숙한 집단 지성의 공감이 필요한데, 우리 나라의 현대사를 보세요. 제가 한창 ‘비조각’의 예술 세계를 전개해 가던 시절에는 일부 미술계에서만 인정해 주지 세상과 소통할 환경은 아니었습니다. 제가 1932년생이니까 올 해 구순인데, 여든이 넘어서 뉴욕과 런던의 유명 갤러리에서 개인전도 해 보고, 국립현대미술관에서 회고전도 하고, 갤러리 현대의 전속 작가로서 꾸준히 개인전도 할 수 있는 건 큰 행운이라고 생각합니다. 얼마 전에 이광형 카이스트 총장을 만나게 되었는데, 그 분도 TV를 거꾸로 두고 본다고 하시더라구요. 본인도 과학계의 이단아 였다고, 근데 세상이 바뀌어서 괴짜로 통했던 본인이 카이스트의 총장이 되었다면서 함께 공감할 수 있는 부분이 있었습니다. 과학이든 예술이든 아무도 시도하지 않는, 세상에 없는 것을 실현 가능케 하는 것이 결국에는 인류의 역사에 기여하는 길인 것 같다는 공감을 나눌 수 있는 참 뜻 깊은 만남이었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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