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rt2. 세계 곳곳에서 도착한 편지, '지금, 우리가 가장 두려워 하는 것' | 에스콰이어코리아
LIFE

Part2. 세계 곳곳에서 도착한 편지, '지금, 우리가 가장 두려워 하는 것'

세계 곳곳에서 슬프고 끔찍한 뉴스가 날아드는 시대. 어떤 소식도 오래 머물지 못하고 귓가를 스쳐가는 건 우리 사정이 너무 급하기 때문일까, 바야흐로 ‘각자도생의 시대’이기 때문일까? 우크라이나 키이우부터 이탈리아 밀라노까지, 세계 각국의 필자들에게 ‘지금 당신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에 대해 써달라고 요청했다. 지구 반대편의 삶을 뺨으로 느끼고자. 우리가 ‘우리’로서 좀 더 연결되어 있고자.

오성윤 BY 오성윤 2022.12.04
 
04 NEW YORK, USA
내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3.5달러짜리 베이글이다.
신현호(자유 기고가)
 
얼마 전에 유튜브를 보다가 혼자 폭소를 터뜨린 적이 있다. 한 여행 유튜버가 뉴욕 여행에 대해 이야기하던 중에 이런 표현을 남긴 것이다. “인당 3만원으로는 지붕 있는 식당에서 밥 못 먹는다.” 한국인 시청자들에게도 재미있는 표현이었겠지만 오래도록 뉴욕에서 살고 있는 내게는 그야말로 ‘빵 터지는’ 대목이었다. 한화 3만원이라면 최근 환율(1달러=1,416.25원; 10월 평균 매매기준율)로 21달러 정도 된다. 여기서 뉴욕시 8.875%의 소비세와 이제는 뉴욕의 표준이 되어버린 20%의 팁을 역으로 계산해 제하면, 3만원으로 먹을 수 있는 음식은 메뉴판에 대략 16달러라고 쓰여져 있어야 한다.
그 유튜버의 말은 물론 과장 섞인 농담이었다. 뉴욕의 (지붕이 있는) 많은 식당들 메뉴판에는 16달러 이하의 선택지들이 있다. 하지만 제대로 된 레스토랑에서 충분한 양을 먹기에는 부족한 돈이긴 하다. 평범한 다이너에서 브런치에 커피 한 잔 정도는 가능할지도 모른다. 캐주얼한 이탤리언 레스토랑에서 파스타 한 접시나 평범한 차이니스 레스토랑에서 단품 요리에 공깃밥 정도는 먹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저녁 식사 자리에서 메인 메뉴를 먹기에는 조금 부족한 돈이고 맥주나 글라스 와인 같은 음료는 포기해야 하는 액수다.
지난 1, 2년 사이 높아진 물가와 급상승한 환율 때문에 나도 모르게 자꾸 내 삶의 터전인 이곳 물가를 원화로 계산해보고 혼자서 놀라는 버릇이 생겼다. 출근길 아침 1, 2달러면 충분했던 길거리 푸드 카트의 베이글은 이제 3.5달러가 되었다. 아침 식사로 먹는 베이글 한 쪽에 5000원이라니 어쩐지 부담스럽다. 맨해튼 주거지의 평균 월세는 2021년 대비 28%나 상승했다고 한다. 방 하나가 딸린 원베드룸 아파트 월세의 중간값은 이제 4000달러가 훌쩍 넘는다. 월세가 600만원이라니, 매일 20만원을 창밖에 뿌리며 사는 기분이 그리 좋을 리 없다.
뉴욕은 내 기억에 한 번도 ‘가성비’가 좋은 도시였던 적이 없었다. 뉴욕은 언제나 전 세계에서 가장 비싼 물가를 가진 도시였다. 하지만 뉴요커들은 그 무시무시한 물가를 견뎌냈다. 여기는 말 그대로 기회의 땅이니까. 그저 이 도시에서 버티는 것만으로도 다른 도시에 비해 더 높은 소득을 올릴 수 있었다. 자산은 (가지고 있기만 하다면) 그 가치가 꾸준히 상승해왔고 앞으로 더 상승한다는 우상향의 믿음이 있었다. 하지만 만약 그 모든 것이 유동성이 만들어낸 신기루라면 어떻게 해야 할까?
2008년, 주택 가격의 버블이 터지면서 미국은 금융위기와 함께 2010년대를 맞게 되었다. 이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 미국이 선택한 방법은 양적 완화와 초저금리였다. 2010년대는 그야말로 유동성의 시대였다. 미국 연방준비제도(이하 연준)는 2016년까지 세 번의 양적 완화를 단행했고, 2020년에 시작된 코로나19 팬데믹은 돈을 더 풀어도 되는 좋은 이유가 되어주었다. (어쨌든 그때는 그게 필요한 일이었다.) 그리고 2021년이 지나면서 미국의 통화량은 정점을 찍었다.
지난 10년간 개인적으로든 직업적으로든 주식 투자를 했던 사람이라면 스스로가 ‘투자의 귀재’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스타트업을 시작하고 펀딩을 유치해내며 자신이 혁신적인 기업가라고 믿었던 사람도 있었을 것이다. 폭등하는 비트코인을 들고서 평범한 사람들을 ‘벼락거지’라며 비웃는 벼락부자들을 소셜 미디어에서 쉽게 만날 수 있었다. 모든 자산의 가격이 끝을 모르듯 상승하는 동안 꽤 많은 사람들이 꽤 큰돈을 벌었다. 꼭 낚시 실력이 좋아야만 월척을 낚을 수 있는 건 아니다. 지난 10년은 그냥 물고기가 너무 많았다.
전 세계 중앙은행들도 의아했을 것이다. “저렇게 돈을 풀고 있는데 왜 물가가 오르지 않지?” 흔히 인플레이션은 ‘화폐적 현상’이라고 한다. 재화의 가치가 갑자기 달라져서 물가가 오르는 건 아니라는 뜻이다. 돈이 많이 풀려서 흔해지고 나면 같은 가치를 가진 재화를 얻기 위해 과거에 비해 더 많은 돈을 지불할 수밖에 없고 이런 현상이 인플레이션이다. 물가 상승의 압력으로 각 나라의 통화 당국은 아무리 돈을 풀고 싶어도 무제한으로 풀지는 못한다. 하지만 달러 통화량이 이토록 늘어나는데도 전 세계는 한동안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저물가 상태였다. 이 설명하기 힘든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 ‘기축통화는 그래도 됨’이라는 현대 화폐 이론이 동원되기도 했다.
하지만 2022년이 시작되면서 그동안 밀린 고지서들이 도착하기 시작했다. 지난 몇 년간 풀린 유동성이 만들어낸 물가상승률은 무서울 정도다. 미국의 물가상승률은 8%가 넘는다. 내 연봉이 8%가 오른 것이 아니라면 사실상 연봉이 삭감된 것이나 다름없다는 의미다. 작년 말까지만 해도 인플레이션이 ‘일시적(transitory)’이라던 연준은 2022년이 되자 갑자기 금리를 4%까지 올렸다. 갑작스러운 금리 인상의 여파로 자산 가격은 곤두박질치기 시작했다. 일할 사람이 없다며 아우성치던 실리콘밸리의 테크 기업들은 구조조정을 하고 고용을 동결하기 시작했다.
아마도 이 인플레이션은 곧 잡힐 것이다. 다만 금리 인상으로 정교하게 수요를 조절해 물가를 잡고 다시 경기 확대 사이클로 넘어가는, 교과서에 나올 법한 아름다운 그림은 아닐지도 모른다. 연준의 제롬 파월 의장은 이미 고통을 예고했다. 경기가 박살이 나고, 부채 부담이 높은 한계 기업들이 도산하며, 금융기관들이 나자빠지더라도, 인플레이션을 잡기 위해서라면 연준은 금리를 계속 올릴지도 모른다. 마치 비가 올 때까지 드린다는 인디언의 기우제처럼. 그럼 지금의 인플레이션이 잡히고 나면 모든 상황이 끝나는 걸까? 나는 문득 문득, 이제 우리가 예전의 세상으로 다시는 돌아가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곤 한다.
세계화는 끝났다. 중국과 러시아가 예측 가능하고 신뢰할 만한 협력의 대상인지 많은 사람들이 의구심을 표하고 있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은 전 세계 에너지와 곡물의 가격을 요동치게 만들었다. 그동안 중국은 값싼 공산품을 미국에 수출했고 미국은 중국에 달러를 수출했다. 하지만 미-중 갈등으로 수십 년 동안 저물가의 원동력이었던 글로벌 분업은 종언을 고했다. 인도는 밀을, 인도네시아는 팜유 수출을 한동안 금지했다. 일본은 반도체 관련 소재의 한국 수출을 제한하고 있다. 그동안 달러의 패권을 지원한 사우디와 미국의 ‘페트로 달러’(혹은 쉬운 말로 ‘오일 머니’) 밀월 관계도 균열이 생기기 시작하는 것처럼 보인다. 브렉시트로 분열이 시작된 유럽은 지금 자기 앞가림하기에도 정신없어 보인다.
나는 세계가 한 시대의 끝자락, 어떤 정점을 지나 내리막길에 접어든 것 같은 서늘한 기분을 느낀다. 작금의 이 혼란이, 한 시대의 끝에서 다음 시대로 가는 문턱 앞에 펼쳐진 새로운 풍경이 아닐까? 그 새로운 시대가 어떤 곳일지 지금은 알 수 없다. 다만 당장 눈앞에 보이는 풍경 속에는 수십 년에 한 번 나타난다는 블랙스완이 떼를 지어 날아다니고 있다. 지금 사회활동을 하는 세대 중에 경제가 쪼그라드는 걸 경험한 사람은 없다. 그동안 우리는 저성장을 불평해왔지만 이제는 성장을 한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해야 할지도 모른다. 과연 우리 세대는 자본주의가 약속한, 젖과 꿀이 흐르는 언제나 우상향 하는 약속의 땅에 들어갈 수 있을까? 아니면 거대한 유동성의 바벨탑이 무너지는 한가운데에 있으면서도 그걸 모르는 걸까? 나를 두렵게 하는 것은 아침 대용으로 사는 베이글 한 쪽이 3.5달러라는 사실이다. 그걸 받아들 때마다 무심코 거대한 변화, 인플레이션과 그 이후의 세상,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대의 몰락을 어렴풋이 감각한다.
 
05 MILAN, ITALY
내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청년들의 이해할 수 없는 질문이다.
알레산드로 파시(저널리스트, 작가)
 
나는 1974년 5월 12일의 밤을 스쿠터 위에서 지새웠다. 이혼법 폐지 찬반을 묻는 국민투표 상황을 실시간으로 알리기 위해, 내가 속한 학생 단체 본부와 투표소를 거의 릴레이하듯이 오갔다. 열여덟 살의 나에게 그날 밤의 공기는 전율적으로 느껴졌다. 스스로를 자유의 수호자로 여긴 우리 청년들은 빼앗겨서는 안 될 이 권리를 지키기 위해 몇 달에 걸쳐 캠페인을 벌이기도 했다. 이탈리아는 혼인을 성사(聖事)로 간주해 이혼을 죄악시 여기고 강력히 반대하는 가톨릭 본거지, ‘바티칸의 나라’였기 때문이다. 이혼법 폐지가 확정되자 우리는 이탈리아인 대부분이 자유에 찬성했다는 사실에 고무돼 축제라도 벌어진 듯 시내를 돌아다니며 축하했다. 1946년 6월 군주제 유지 여부를 묻는 국민투표에서 이탈리아가 공화제로 변경된 때처럼, 1978년 합법화되었던 낙태를 다시 금지하기 위해 발의한 1981년의 낙태 금지 법안이 국민투표에서 부결된 때처럼, 이혼법 폐지 역시 역사적 순간이었고, 그 주인공은 우리였다.
며칠 전 스무 살 된 딸의 친구들과 이탈리아 총선에 관해 이야기할 기회가 있었다. 나는 두 가지 중요한 관점을 그들에게 꼭 이해시키고 싶었다. 누군가 우리의 권리와 자유를 위해 싸웠기 때문에 지금 우리가 더 나은 세상에서 살고 있다는 관점. 그리고 우리가 누리고 있는 민주주의를 결코 당연한 것으로 여겨서는 안 되며 투표를 행사하는 권리가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관점. 이탈리아의 새 총리 조르자 멜로니가 이끄는 극우 정부는 이 나라를 언제든지 파시즘 천국으로 바꿀 수 있을 것이고, 나는 그 사실에 심각한 두려움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다.
“예전엔 이혼이 정말 금지였나요?” “부부가 헤어지면요? 그럼 그땐 어떻게 했어요?” 이런 질문을 던지는 젊은 사람들을 만날 때면 나는 가끔 정말로 놀라곤 한다. 그리고 답해준다. 예전의 이탈리아 여성들은 거의 직업을 갖지 못했고, 보수를 받고 일하는 여성 자체가 드물었기에 이혼이라는 게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시절이었다고. 내가 이야기를 나눈 딸의 친구들 역시 아름답고, 지적이며, 활기가 넘치는 2000년대생들이었지만, 내 시각에 그들에게는 한 가지 문제가 있었다. 역사 의식이 결여됐고, 그렇기에 이 세상에서 그 누구도 그들을 위험하게 만들지 못할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는 점이었다. 이를테면 그들은 ‘영원히 현재를 살고’ 있었다. 그들은 정치를 인간과 거리가 먼 추악한 짐승 대하듯 했다. 그런 지점에서 그들은 확실히 우리 세대의 청년 시절과는 거의 정반대에 있는 것처럼 보였다. 우리가 살던 시대는 흑인과 백인의 갈등, 종교 분쟁, 민주당과 공산당의 대립 같은 문제들로 항상 분열되어 있었고 우리는 늘 분노에 가득 차 있었다. 하지만 적어도 우리는 자기 주변의 일이나 단편적인 재미가 아닌 더 넓은 테두리의 문제를 고민하는 일에 삶의 의미를 부여했다.
강경 우파들에 대해서는 말할 것도 없다. 그들을 생각하면 나는 잠도 잘 이루지 못한다. 나는 그들의 존재를 절대 용납할 수 없는데, 누구도 그걸 두고 관용이 부족하다고 할 수는 없다. 민주주의는 어떠한 경우에서든 지켜져야 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들은 정치적, 종교적 광신주의나 독재정권을 옹호하고, 폭력이나 전쟁을 선동하며, 다양성의 존중을 짓밟는 행위들을 일삼기 때문이다. 특히 독일과 이탈리아에서는 나치즘과 파시즘에 대한 그 어떠한 변론도 허락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유럽은 물론 전 세계 어디에서도 문제 삼지 않는 ‘레이브 파티’(대규모 댄스 파티)를 이탈리아에서만 범죄화하는 게 도대체 무슨 소용이 있을까? 이미 6000만 인구 중 500만 명이 이민자인 이탈리아에 더 이상 이민을 허용하지 않는다는 게 어떤 정당성을 가질 수 있으며, 그것이 초래할 이탈리아의 경제위기는 어떻게 할 것인가? 사회 취약계층과 LGBT를 비롯한 소수자들을 보호하지 않는다면 사회는 어떻게 사회로서 기능할 수 있을까? 코로나19 예방접종을 하지 않은 모든 의료 종사자들을 직장에 복귀시키고, 의료진 예방접종 의무 역시 폐지시키려는 멜로니 정부의 정책은 대체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사회는 세대 간의 오묘한 화학작용을 통해 굴러간다. 새로운 세대는 이전 세대가 했던 일들을 의심 어린 눈으로 바라볼 수도 있을 것이다. 이해한다. 우리 세대 역시 나중에야 생각을 고치게 됐지만, 한창때는 68혁명 세대를 그렇게 바라봤으니까. 그럼에도 우리가 무방비 상태가 되는 순간은, 취업에 간신히 성공해 말도 안 되는 수준의 연봉을 받게 된 청년들이 우리에게 이렇게 물을 때다. “이게 정말로 당신들이 원했던 세상이야?”
당연히 아니지. 2009년부터 발생한 라퀼라 지진을 비롯한 각종 재난들을 누구의 탓이라고 할 수 있을까. 코로나 대유행으로 집에 죄수처럼 갇혀 지냈던 록다운의 나날들, 그로 인해 집에서 속옷 차림으로 원격근무 하며 ‘스마트’하게 지냈던 나날들 역시 마찬가지다. 학교에도 못 가고 PC 앞에서 혼자서 공부했던 아이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원자재와 전자부품 가격이 급격하게 상승한 탓에 경제구조에 심각한 문제가 생긴 이 상황 역시 예기치 못했다.
이런 상황에서 혹자들은 말한다. 조르자 멜로니를 믿어보자고. 그래도 그녀만이 할 수 있는 일이 있을지 모른다고. 하지만 우리 같은 사람들에게 멜로니는 단지 극우 정부일 뿐이고, 검은 셔츠를 입고 한쪽 팔을 들어 파시스트 경례를 하는 그녀의 동조자들은 우습고도 무서운 존재일 뿐이다. 그리고 그건 단순히 이탈리아만의 문제가 아니다. 프랑스 극우당 국민연합(전 국민전선)을 이끄는 마리 르펜의 절친한 친구인 조르자 멜로니는 스페인 극우당 복스(Vox)의 집회에 가서 “우리는 동성애 결혼에 반대한다. 하느님, 국가와 가족!”이라고 외치는 사람이다. 가십이 아니라 실제로 증명된 행적이다.
밀레니얼 세대들은 TV보다 정치인과 반대파 언론이 웹상에서 서로 말싸움하는 꼴을 더 흥미로워 한다. 이런 흐름을 부정적으로 보는 사람도 있겠지만, 개인적으로는 민주적 의식에 도움이 되는 측면도 있다고 생각한다. 극우파 이슬람주의의 상징인 페즈를 머리에 썼거나 팔에 스바스티카 문신을 했다면 그 사실이 즉각적으로 전 세계에 퍼지는 시대니까. 독재정권이 들어서면 처음으로 하는 일이 웹 자체를 제한하거나 폐쇄하는 것도 그 사실을 알기 때문이다. 자유의 승리를 전하기 위해 스쿠터 위에서 밤을 지새웠던 시절에서 멀리 떠나와, 우리 역시 온라인에서 다시 한번 용기를 낼 수 있을 것이다. 헝가리나 폴란드가 이룩한 자유화처럼 이탈리아에서도 이 역사의 시곗바늘을 멈출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묻고 싶다. 지금 이 시대에 거리 시위는 어떤 의미가 있을지. 자기 권리를 주장하거나 문화적 다양성, 사회적 관용에 대해 말하기는 좋아하면서 기후 위기로부터 지구를 지키고 투쟁해야 한다는 주장은 왜 하지 않는지. 지구가 사막이 되어버린다면 자기 권리를 지키기 위한 작은 싸움들이 다 무슨 소용이 있는지. 우리는 좀 더 넓은 범주의 우리에게 유익한 것들에 대해, 이제 제대로 된 질문을 던져야 하지 않는지. 어쩌면, 질문이라기보다 자문이라고 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06 TAIPEI, TAIWAN
내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무력감이다.
에이드리언 초우(〈에스콰이어 타이완〉 부편집장) 
 
‘내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이라는 주제의 원고 청탁 메일을 보았을 때, 내 머릿속을 스쳐간 건 어린 시절의 어두웠던 기억이나 최근에 꾸었던 악몽 같은 게 아니었다. 바로 지금, 현실 세계에서 내 주변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이었다. 그들에게 위협적인 구석이 있다거나 내게 폭력을 가했던 것은 아니다. 다만 그들에게는 어떤 공통점이 있고, 나는 언젠가부터 알게 모르게 나까지 그것에 감염되는 건 아닌지 두려워해 왔다. 내가 코로나19보다 더 두려워하는 전염병, 그건 바로 ‘무력감’이라는 바이러스다.
 
TOBY
내가 아는 토비는 전형적인 ‘성난 젊은이’과다. 신문 편집 일을 하는 그는 30대 초반의 젊은 나이지만, ‘다푸 사건(2008년 대만 정부가 다푸라는 지역에 일방적 토지 수용 계획을 발표하고 공사를 진행했던 사건)’에 대한 항의부터 ‘해바라기 운동(2014년 대만의 대학생들과 사회운동 세력이 대만의 국회인 입법원을 점령했던 사건)’까지 정치적 목소리를 내야 하는 순간마다 빠지지 않고 참여했다. 가슴속에 흐르는 그 뜨거운 피는 흡연 구역에서 동료들과 떠들썩한 목소리로 정치적 논쟁을 벌일 때마다 느낄 수 있었다. 담배꽁초로 꽉 찬 재떨이가 그 증거였다. 그러나 마치 언제나 깨어 있는 청년 같던 그는 양안 관계와 중국의 군사적 위협 앞에서 짓이겨진 꽁초처럼 변해버렸다. 떨쳐버리지 못한 경멸과 냉담만이 연기 속을 자욱하게 채웠다.
처음엔 의아했다. 그러다 몹시 불안해졌다. 단 한 번도 주류의 가치관과 기존 규칙에 부딪히는 걸 두려워하지 않던 이 청년이 왜 이렇게 된 걸까? 어디서 그런 확신과 자신감을 얻었는지, 그는 중국의 무력 통일 위협을 두고 ‘종이호랑이’일 뿐이라고 단정 지었다. 그저 겁을 주려는 것뿐이라는 이야기였다. 올해 8월 낸시 펠로시 미국 하원의장이 대만에 방문하기 직전, 전 세계인에게 확실히 각인된(혹은 놀라게 한) 것은 대만의 ‘침착한 대처’라는 미명하에 감추어진 ‘회피적’ 태도였다. 그건 양안의 군사적 충돌이 거세질 때마다 대부분의 대만 사람들(특히 젊은이들)이 보이는 일반적인 반응이었다. 토비도 그중 하나였다.
“걱정 마. 낸시 펠로시가 대만에 왔을 때 대만 주식시장이 상승했거든.” 오랜만에 만난 토비는 술자리에서 호언했다. 낸시 펠로시가 왔던 날 퇴근하자마자 쑹산공항으로 달려가 직접 영접했던 그는 그새 잊어버린 듯했다. 소폭 상승한 후 그날 대만 주식시장은 200포인트 이상 폭락했다는 사실을. 그리고 그녀가 대만을 떠나자 중국 인민해방군이 사흘 연속 대만을 둘러싼 실사격 훈련을 실시하면서 대만을 봉쇄했던 사실을 말이다. 아이러니한 건, 그런 일촉즉발의 전쟁 위기 상황에서도 대만민의기금회(TPOF)가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대만인의 64%가 전쟁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 생각한다고 답했다는 점이다. 낸시 펠로시는 어쩌면 대만 주식의 ‘블랙스완’은 아니었을 것이다. 하지만 ‘회색코뿔소’가 된 중국과 강력한 군사적 위협 속에서 토비를 포함한 수많은 대만인은 마치 방 안의 코끼리를 애써 못 본 척하려는 사람들 같았다.
토비와 나는 신문사에서 일하던 시절부터 담배 한 개비 피우는 동안 곧잘 정치를 논하곤 했다. 하지만 최근, 오랜만에 함께 담배를 입에 물고 이야기꽃을 피우는 동안 나는 점점 마음이 무거워졌다. 여론은 ‘중국이 쳐들어올 것인가’ 하는 문제에 대해 계속 분분한 의견을 보이고, 정부는 오직 ‘미국이 대만을 방어하는 데 협조할 것인가’ 하는 주제로 논쟁을 벌인다면, 위협을 직시하고 국방을 강화하며 시민의식을 높이려는 일체의 의지는 그저 헛된 노력에 지나지 않을 테니까. 우리가 소중히 여기는 자유와 민주주의가 무력감이라는 이름의 어두운 그림자 속에 점점 사라져가는 듯했다.
 
KEVIN
케빈을 알게 된 지는 불과 2~3년밖에 되지 않았지만, 우리는 금세 오랜 친구처럼 격의 없는 사이가 되었다. ‘서로 못하는 말이 없다’고 해도 좋을 정도로. 밤부터 훤한 대낮이 될 때까지 위스키를 주고받을 수 있는 몇 안 되는 친구이기도 하다. 훤칠한 외모에 늘 뭔가를 숨기고 있는 듯 시크한 태도 때문에 사람들은 늘 그의 속내를 알 수 없어 한다. 그의 진짜 모습은 가까운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눌 때에야 비로소 드러난다. 그는 재치 있는 언변 속에 신랄한 풍자를 잘 넣으며, 말로써 상대에게 여지를 남기는 법이 없다. 그 완고한 성격에도 내가 그와 마음을 터놓고 지내는 이유는 그가 보여준 두 가지 측면이 너무나 감탄스러웠기 때문이다. 금문 고량주 한 병을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혼자 해치울 수 있다는 점(어쩌면 금문현에서 군 생활을 했기 때문일까), 그리고 동거녀와 그녀의 전남편 사이에서 태어난 두 아이를 마치 자기 자식처럼 아끼고 사랑한다는 점이다. 한번은 내가 그에게 “자네는 자네가 키우는 메인쿤 품종 고양이 같다”고 말한 적도 있다. 겉으로만 당당하고 속은 물러 터졌다고. 언제나 이치 따지기 좋아하던 친구였지만 그날은 고개만 돌릴 뿐 아무 말이 없었다.
그날 케빈과 비운 무수한 술병들 덕에, 나는 비로소 시크한 외견 속에 감춰진 그의 실제 얼굴을 발견할 수 있었다. 사실 그는 뼛속까지 자기 연민에 빠진 염세주의자였다. 신랄한 말들을 내뱉는 것으로 세상을 향해 무력하고도 소리 없는 항의를 하는 것 같았다. 솔직히 말해 그가 입을 다물고 감추는 건 그저 자조적인 위장에 불과했다. 아이와 동물을 향한 끝없는 관용은 그가 단념해버린 이 세상에 남은 마지막 지푸라기였다. 친구는 아주 오래전부터 일을 제외한 모든 것에 무감각해지기 시작했노라고 말했다. 아이와 동물의 순수한 눈빛을 마주해야만 겨우 부끄러움을 느꼈다. 그래서 그는 가끔 술이 약한 사람들이 부럽다고 했다. 적어도 술에 취하면 쓰러져 잠이라도 들 수 있고, 그러면 잠시나마 고민을 완전히 잊어버릴 수 있을 테니까. 케빈은 술을 꽤 마셔서 피곤에 찌든 상태라야 잠 못 드는 밤을 피할 수 있었다. 그러다 새벽이 오기 전 어떻게든 정신을 차리려 애쓰다가 문득 언제부터인가 인생이 재미없고 지루해졌다는 걸 깨달았다고 했다. “아마 난 이미 오래전부터 깨어나지 못하고 있는 건지도 모르지. 어쩌면 이것도 시간이 지나면 익숙해질 거야.” 케빈은 혼잣말하듯 중얼거렸다.
그저께도 케빈에게서 연락이 왔다. 11월 26일에 자기 집에서 술을 마시자고. 그날 여자친구가 아이를 데리고 부모님 댁에 가는 날이라 집이 빈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날짜를 확인해보니 그날은 대만 지방선거일이었다. 나는 투표를 하러 가오슝으로 가야 했다. “넌 투표하러 안 가?” 나는 언짢은 말투로 케빈에게 물었다. “뭐 하러 투표를 해? 선거, 민주주의, 미래 같은 것에 무감각해진 지 오래야. 정치인들이 하는 얘기는 그때뿐이라는 걸 다들 뻔히 알잖아?” 나는 뭐라고 더 불만을 표해야 할지 잠깐 동안 말을 고르지 못했다. 그리고 그 사이 케빈에게서 메시지 하나가 더 도착했다.
“너 그런 말 못 들어봤냐? 사람은 꿈이 없다고 죽지 않아. 죽는 사람들은 단지 현실을 몰라서라고! 투표로 이상적인 삶을 살 수 있는 게 아니라면, 민심을 대표한다며 사람들을 속이는 이들에게 한 표 던져봤자 그게 다 무슨 소용인데?”
 
GILBERT
길버트는 ‘천룡인’이다. 고향은 타이베이의 티엔무인데, 텍사스 휴스턴에서 고등학교와 대학교를 졸업하고 프랑스 파리에서 마케팅 과정을 마친 뒤 귀국했다. 영어를 유창하게 구사하고 파리지앵의 라이프스타일을 갖고 있었지만, 대만에서는 일자리를 구하기 쉽지 않고 애정 문제마저 잘 풀리지 않아 힘들어했다. 그의 고민에 대해 당사자보다 더 답답해한 건 나였다. 그는 금전적인 측면에서 봤을 때 금수저인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성공이라는 작은 원 안에 한 발을 먼저 내딛지 않았는가? 잠깐의 정체기가 뭐 그리 큰 문제란 말인가? 다 큰 성인 남성이 자신의 좌절에 대해 먼저 고백하기란 쉽지 않다. 몇 번씩이나 알코올이 촉매 작용을 한 끝에야, 길버트는 우물쭈물하며 문제의 근원에 대해 말을 꺼냈다. 그의 말을 들으며 나는 깨달았다. 문제의 근원은 개인의 노력만으로는 절대 해결할 수 없는 시스템에 있다는 것을.
“난 포기했어. 얼마 전부터는 미국 일자리를 알아보고 있거든. 대만은 페이가 너무 적잖아. 한 달에 4만~5만 달러(TWD, 한화 약 170만~210만원)를 버는 걸로 여기서 그럭저럭 살 수는 있겠지. 하지만 전혀 창의적이지 않은, 같은 일을 반복하는 직업뿐이야. 사장들은 계속 연봉 하향 조정은 안 되겠냐고 묻지. 야근해도 도시락 하나 안 주면서.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누군가가 성공을 꿈꿀 수 있겠어? 더구나 집값도 어마어마해서 다들 집을 못 사잖아. 내 동료 피터 말이 결혼을 못 하겠대. 여자친구랑 사귄 지는 오래됐는데 집도 차도 없으니 결혼을 할 수가 없다는 거야. 여자친구 어머님이 반대했대. 1년에 얼마를 벌어야 부모님께 집을 사드릴 수 있을까? 티엔무도 집값이 비싸거든. 근데 여자친구는 대체 집이랑 결혼을 하겠다는 건지, 나랑 결혼을 하겠다는 건지… I really don’t get it, fuck that. 난 대만이 좋아. 부모님도 대만에 계시고. 하지만 여기 계속 남아 있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어. 가끔은 이 나라가 희망을 잃은 사람들의 나라처럼 느껴져. 좀 과장됐나? 하지만 정말로 젊은 사람들에겐 희망이 없어. 대만 사람들 모두가 그렇게 죽어라 야근을 하는데 왜 사는 건 다들 힘들지? I feel sad about th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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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edit

    EDITOR 오성윤
    TRANSLATOR 이원열(영어)/우정호(이탈리아어)/김소희(중국어)
    PHOTO 게티이미지
    ART DESIGNER 주정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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