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된 작품 중 종이로 된 페인트 색상 스와치를 펀치로 뚫어낸 차드(chad) 쪼가리들과 그 색 이름을 나열한 ‘색상의 명칭들’부터 설명해주세요.
아마 1997년도일 거예요. 학부를 마치고 대학원으로 넘어가는 시점이었어요. 미국에서 건축 자재를 파는 홈 디포에 작업 재료들을 보러 갔는데, 벤자민 무어 같은 페인트 회사들이 제공하는 색상 샘플이 일렬로 한 10m가 넘게 진열되어 있더라고요. 손님들보고 가져가라고 만들어둔 거였죠. 한 색상 샘플 크기가 레터 사이즈였으니 샘플의 개수가 얼마나 많았을지를 생각해보세요. 그런데 어떤 페인트를 살까 하며 샘플들을 살펴보니 화가들이 쓰는 물감 회사의 색상 이름과 전혀 달랐어요. 화려한 형용사와 명사들이 난무하더라고요. 심지어 색상 명칭이 없는 경우도 있었고요. 예를 들면 ‘아메리칸 드림’이라든지 ‘델라웨어 갭’ 같은 명칭은 특정한 색이 아니라 그 색으로 칠했을 때 연출되는 공간의 분위기를 암시하도록 만든 이름이었어요.
저도 아까 그 색상표를 보고 심지어 시적이라고까지 생각했어요.
저도 그랬어요. 그래서 그걸 며칠에 걸쳐 조금씩 조금씩 집어 왔어요. 한 번에 너무 많이 집어 오면 이상하게 생각할 것 같았거든요. 심지어 한 가게에서 계속 가져오면 이상할 것 같아서 하루는 이 동네 또 하루는 저 동네의 홈 디포에 가서 한 브랜드의 샘플들만 가져왔죠. 다 컬렉팅을 한 다음에는 이것들을 내가 인지하는 9개의 기본색에 따라 나눴어요. 예를 들면 아까 말씀하신 ‘아메리칸 드림’은 약간 구름 낀 하늘색 계열이에요. 그럼 그건 ‘블루’ 통에 넣었어요. 마치 게임하듯이 9개의 박스에 색상 카드들을 분류하는 건데, 그 과정에는 자의적인 결정이 들어가지요. 어떤 카드는 심지어 명칭에 ‘노랑’이 들어가지만 제가 보기엔 흰색에 더 가까우면 흰색 박스에 넣었지요. 지금 아뜰리에 에르메스에 전시된 ‘색상의 명칭’은 그렇게 분류된 색상 카드를 펀치로 뚫어서 그 차드 쪼가리와 페인트의 이름을 보여주는 작품이에요. 이번 전시를 하면서 아뜰리에 에르메스의 안소연 아티스틱 디렉터님과 이런 이야기를 나눴는데, 디렉터님이 “지금 그거 어디 있느냐”고 하시더라고요. 실은 1997년에 처음 만들어둔 ‘색상의 명칭’은 수해를 입었거든요. 그런데 박스별로 나눠둔 레터 사이즈의 색상 스와치만은 그대로 있어서 다시 만들 수 있었어요. 레터 사이즈니까 에디션을 한 8개는 더 만들 수 있을 거예요.
1997년 작품의 연장선에 있는 게 바로 이번 작품과 그 전작을 아우르는 ‘색상 수집’ 연작이지요.
2003년에 처음 한 ‘오렌지 페인팅’은 어느 갤러리스트로부터 “오렌지색 그림이 있느냐”는 질문을 받은 게 작업의 단초가 되었어요. ‘오렌지’로 불리는 색은 무엇일까, 탐구해보기로 한 거죠. 1997년 ‘색상의 명칭’에서 사용한 방법론으로 발전시킨 거라고 볼 수도 있죠. 시중에 있는 아크릴 물감 중 ‘오렌지’로 명명된 것들을 전부 수집하고 회사 이름, 물감 이름별로 알파벳 순서로 정리해 3cm 두께의 가로형 스트라이프로 칠했으니까요. 강남의 중상류층을 위한 고급 아파트의 거실 높이에 맞게 그림의 높이를 정하고 또 2인용 소파의 너비에 맞는 사이즈로 그렸죠.
2004년에는 오렌지 페인팅의 방법론을 그대로 차용해 이를 9개의 색상으로 확장시킨 〈아홉 개의 색과 가구〉로 진화시켰고, 19년 뒤인 2023년에 같은 방법론의 작업으로 〈아홉 개의 색, 아홉 개의 가구〉라는 전시를 열었습니다. 박미나의 수많은 방법론 중에 유일하게 이어지는 연작이지요. 2004년의 작품과 2023년의 작품은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당시 아파트의 통상적인 천장고인 230cm를 기준으로 완성된 회화들은 전부 227cm의 세로 길이로 완성되었어요. 한 색상의 평균 두께는 2cm 정도였고요. 이번에 조사해보니 고급 아파트의 천장고가 30cm 이상 높아졌더군요. 또 같은 강남의 중상층이라고 봤을 때, 가구들도 커졌고, 고급화되어 있었어요. 다만 가구의 크기는 크게 바뀌지 않았어요. 침대도, TV 장식장도 조금씩 커지긴 했지만, 그것들은 우리의 신체 사이즈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기 때문에 기하급수적으로 커질 수는 없었죠. 한편 2004년 당시에 수집 가능했던 9개 색상군 물감의 개수는 모두 합해 632개였는데, 올해 작업을 시작하면서 물감을 전부 모아보니 일단 1134개가 되어 있었지요. 이런 여러 가지 것들 탓에 변한 것은 색 띠의 폭입니다. 넓어지고 높아진 화폭의 변화보다 물감의 수가 더 급격하게 늘어나는 바람에 이번에는 색상 두께의 평균 폭이 1.5cm(정확하게는 1.13cm에서 2.18cm 사이)로 좁아졌어요.
박미나 작업의 방법론에는 지구과학 같은 느낌이 있어요. 거대한 시추공으로 지층의 단면을 뽑아내는 것 같아요.
전 현실에서 우리가 경험하는 것들이 시공간의 축으로 되어 있다고 과학적으로 생각하는 걸 재밌어해요. 사회적인 현상이 있다면 이 시공간의 축을 내 나름의 방식대로 지그재그로 잘라서 평면 형태로 만들면 어떻게 될지를 생각하면서 작업하죠. 특히 같은 방법론으로 만든 다른 시간의 평면이 가진 차이를 보여주는 것도 흥미롭고요. 사실 이 작업은 방법론이 중요해요. 누구나 제가 설명한 대로만 하면 내년이고 내후년이고 재현할 수 있는 것들이죠. 그런 의미에서 저는 방정식을 만들어내고 있다는 생각을 종종 해요.
그렇다면 어시스턴트를 한 100명 쯤 써도 되는 게 아닌가요?
그렇죠. 저도 그러고 싶어요. 다만 한 달에 300만원씩 주면서 누군가를 쓸 수가 없어서 그렇지요. 저도 가끔 ‘내가 왜 이걸 하고 있나’라는 생각을 할 때도 있어요. 이 작업이 붓질이 중요한 작업은 아니니까요.
작품에서 작가 박미나를 지우는 것으로 보입니다.
전 학교 다닐 때부터 그랬어요. 비평 수업을 들을 때면, 어떤 게 주관적이고 어떤 게 객관적인 것인지를 설명해야 하는 상황에 제가 놓이곤 했어요. 나는 왜 그런 상황에 놓이게 되는지를 곰곰이 생각해봤는데, 전 제가 무엇을 보고 느끼는 것보다 우리는 무엇을 보고 우리의 평균값, 중간값은 무엇인지에 더 관심을 갖는 사람이라는 걸 깨닫게 됐어요. 이번 작업이 (내가 좋아하는 색이 아니라) 2023년도에 우리가 사용하는 물감의 전체를 찾는 작품인 이유죠.
그런데 우연을 완벽하게 지울 수는 없어요. 저는 방법론을 만들기는 했지만, 그 방법론에 따라서 할 때 뭔가를 선택해야 하는 상황이 꼭 벌어지거든요.
물감을 찾기 위해 서울에서 가장 큰 한가람 화방과 호미 화방을 찾는다고 해봐요. 우리나라에 있는 아크릴 물감의 데이터베이스를 전수 조사해 각 화방에서 살 수 있는 리스트를 출력해 갔단 말이죠. 리스트를 들고 실제 판매 중인 제품과 단종된 제품을 크로스 체크하면서 어떤 물감들을 사야 할지를 확인하는 과정에서 이번에 ‘스피드볼’의 아크릴 물감이 있다는 걸 알게 됐어요. 원래 스피드볼은 판화용 물감이에요. 그런데 이 스피드볼의 아크릴 물감이 잠깐 수입됐다가 이제는 수입이 중단됐다는 거예요. 그런데 시장에서 다 없어진 건 아니고 하필 할인 코너에 딱 3개가 남아 있었어요. 그럼 저는 그 물감을 2023년도의 아크릴 물감에 넣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를 생각해야 하는 거죠. 이미 수입이 중단된 제품이고 할인 코너에만 남아 있던 것들이라 만약 제가 하루나 이틀만 늦게 갔어도 보지 못하고 지나쳤을 제품이란 말이죠.
결국 전 넣기로 결정했어요. 다시 아까 하던 얘기로 돌아가면 주관이냐 객관이냐를 생각했을 때 인간 선택의 미묘한 부분들에 대해 질문하게 만드는 지점이기도 한 거죠.
얼마 전에 한 아티스트랑 인터뷰를 하던 중, 그런 얘기를 한 적이 있어요. 작업에 작가가 드러나지 않도록 작가는 함수처럼 기능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작가였어요. 방법론을 탐구하는 선생님과 매우 비슷했죠. 그 작가가 형용사 하나 없이 전장의 상황을 적나라하게 그려냈던 그랜트 장군의 자서전을 예로 들더군요. 그래서 전 ‘모든 산문은 픽션이다. 선택이 있는 한 논픽션은 존재할 수 없다’는 얘기를 했죠.
그랜트 장군의 이야기는 미술 비평 수업에서 종종 나오는 얘기예요. 아마 그 작가도 그래서 예로 들었을 거예요. 제 작업도 (글로 치자면) 형용사가 없어요. 저는 형용사가 너무 힘들거든요. 그런데 부사는 괜찮아요.
하나의 색상 안에 수많은 띠가 들어가는데, 그중 하나로 쌍을 이루는 가구를 그리죠. 그 색은 어떻게 결정하나요? 예를 들어 ‘2023-노란색-옷장’에서 옷장의 선 색은 어떤 과정으로 고르나요?
일단 아크릴 물감을 처음으로 만든 회사인 골든(Golden)사의 물감 중 중간값을 골라요. 노란색이라면 카드뮴 옐로 라이트, 카드뮴 옐로 미디엄, 카드뮴 옐로 다크 이런 식으로 색상 이름이 정해져 있어요. 그중 저는 중간값이라고 생각하는 카드뮴 옐로 미디엄을 선택하는 거죠.
지금은 아크릴 물감 사회에서 가장 급박한 변화는 뭔가요?
일단 색상이 늘어난 경위를 설명하자면 카드뮴을 예로 들 수 있겠네요. 카드뮴은 노랑, 빨강 등의 물감에 안료로 사용되는 화학물질인데, 이게 건강에 무척 안 좋아요. 그래서 요즘은 카드뮴 프리 카드뮴 옐로 라이트, 카드뮴 프리 카드뮴 옐로 미디엄 이렇게 또 다른 물감들이 만들어졌어요. 카드뮴은 안 들어 있지만, 카드뮴 느낌은 나는 옐로라는 뜻이죠. 2004년에는 이런 것들이 없었어요.
완벽한 칼국수 식감의 글루텐 프리 칼국수 같은 거군요.
맞아요. 지금 2023년이 카드뮴 프리 카드뮴 옐로가 카드뮴 옐로를 거의 대체하면서 이제는 아예 ‘카드뮴 프리’라는 명칭조차도 사라지며 교체되는 시점인 것 같아요. 미술사적으로도 사회학적으로 연결되는 고리들이 많지요.
블라디미르 나보코프는 서사 예술의 특징을 얘기하며 회화와 비교했지요. 회화는 한 번에 전체를 보고 그 세부로 들어가 감상하는 게 가능하지만, 글을 읽을 때는 시간을 들여 앞에서부터 끝까지 읽고 전체를 안 뒤에 세부를 다시 읽어야 한다. 이 말은 즉 회화가 시간과 기억의 개입이 적은 예술 장르라는 뜻이기도 하지요.
정확하게 시간의 감상법을 실험한 바넷 뉴먼이라는 작가가 있었어요. 2m도 넘는 거대한 작품인데 통로에 전시해야 한다는 디렉션을 남긴 거죠. 뒤로 물러서서 전체를 감상할 수 없게 한 거예요. 물론 뒤로 물러서지 않고도 작품 전체를 감상하는 데는 그리 긴 시간이 걸리진 않겠지만, 자신의 키보다 훨씬 높고 긴 작품을 걸어가며 경험한다는 건 새로운 방식이었죠. 미술사에서는 매우 중요한 전환이죠. 이렇게 시간과 이동의 경험이 확장되면서 설치미술이 생겨난 거거든요. 그런데 제 경우는 반대 방향으로 간 듯해요. 이런 얘기를 안소연 디렉터와 함께 나눴죠.
그래서 안소연 디렉터가 ‘공간을 내포한다’ ‘설치미술로 탈바꿈한다’는 표현을 쓴 거군요. 재밌어요. 예를 들면 이런 상상이 가능하겠네요. 수백 개의 베이스 드럼 소리의 샘플들의 파형을 수학적인 방식으로 합쳐서 하나의 소리로 만들고 그 파형을 평면 위에 선 형태로 고정하는 거예요. 소리의 단면을 가르는 거죠. 그렇게 생각하면 아까 ‘단면을 잘라낸다’고 말한 표현의 방법론이 시각 이미지만이 가질 수 있는 어떤 고유한 성질같이 느껴지기도 해요.
그렇죠. 학부 때 방금 우리가 얘기한 것들을 두고 계속 고민한 적이 있어요. 그때 한 작품이 걸어가면서 100걸음에 한 번씩 내 팔 길이 앞에 투명한 에스테이트 종이를 들고 내가 보이는 장면을 그대로 그리는 거였어요. 기숙사에서 학교 실기실까지 내가 그렇게 그린 그림들을 가져와서 격자무늬의 영역을 표시하고 그걸 수학적으로 등분한 다음 색과 선의 평균값을 내서 그림을 만들었어요. 비슷한 거죠. 제 머릿속 사고들은 이렇게 흘러요. 그렇게 사고가 되는 거예요.
도록에 있는 안 디렉터와의 인터뷰 중엔 렘브란트 흙색이나 티치아노의 울트라마린 블루 등을 물감의 역사에서 중요한 예로 들었어요. 잘 모르는 얘기라 흥미로웠습니다.
예로 든 이유가 있어요. 렘브란트 시절의 그림들은 화면에 있는 대상들이 다 흙빛이에요. 그 이유는 물감을 처음 만들었을 때는 다 흙에서 그 안료가 만들어졌기 때문이거든요. 그래서 당시의 물감들은 전부 그 흙이 난 동네의 이름이에요. 예를 들면, 옐로 번트 시에나, 번트 엄버 등이 그렇죠. ‘번트’는 또 흙을 태우느냐 아니냐로 갈려요. ‘로(raw) 시에나’가 있고 ‘번트(burnt) 시에나’가 있죠. 그러다가 나온 안료가 파란색이에요. 파란색이 보통 자연에는 없는 색이거든요. 아직도 아프가니스탄에서만 나는 라피스 라줄리라는 광석을 갈아 만든 안료가 바로 울트라마린입니다. 하늘이나 바다를 칠하는 이 광물이 미켈란젤로가 시스티나 채플을 그릴 때만 해도 금보다 더 비쌌어요. 심지어 울트라마린으로 거래 계약을 하는 경우도 있을 만큼요. 인상파 태동의 이유에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물감의 역사로 설명하자면 당시 프랑스에서 이 울트라마린의 파란색을 화학적으로 합성해 대량 생산하면서 파란색 물감의 가격이 낮아졌다는 점, 또 이동이 용이하게 물감이 튜브 안에 담기기 시작됐다는 점을 들 수도 있어요. 이동이 편리해져서 밖으로 나가서 그림을 그릴 수 있게 된 거죠.
아크릴 물감 1134개를 수집하며 느낀 또 다른 변화가 있을까요?
크게 네 가지 정도가 되는 것 같아요. 첫째는 앞에서 얘기한 카드뮴 프리가 대세가 되면서 ‘카드뮴 프리’라는 표현이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것, 두 번째는 ‘휴’ 물감의 발림입니다. 2004년에 제가 수업할 때만 해도 ‘휴’(hue)라는 단어가 들어간 건 쓰지 말라고 가르쳤어요. 당연한 거였죠. ‘휴’는 일종의 바나나 맛 우유와 비슷하다고들 얘기했어요. 바나나가 먹고 싶다고 바나나 맛 우유를 먹지는 않잖아요. 그런데 테크놀로지가 이 한계를 뛰어넘었어요. ‘휴’가 휴가 아닌 물감보다 더 좋은 경우가 생겨난 거죠. 예를 들면 셀룰리안 블루예요. 셀룰리안 블루는 안료가 불완전해서 셀룰리안 블루 휴가 셀룰리안 블루보다 발림성도 좋고 바르고 난 뒤 평가되는 질도 좋아요.
화학적인 방식으로 재조합한 위스키 얘기가 생각나네요.
또 다른 하나는 ‘펄감’ 있는 안료들이에요. 예전에는 ‘이리디센트’한 안료들이 테스트되는 시기였어요. 있는 건 알았지만 많이 쓰지는 않았죠. 예를 들어 페베오라는 물감 회사를 비롯한 몇 개 회사만 이리디센트한 안료들을 개발해서 가지고 있었는데, 지금은 많이 안정화가 되었는지 거의 모든 회사에서 다 조금씩 만들고 있더군요. 마지막은 맞춤 물감의 시대가 곧 다가올 거라는 예상입니다. 아까 우리가 함께 본 색상표처럼 지금은 물감 색이 정해져 있지요. 그런데 이제는 포토샵의 그러데이션 색상표처럼 수만 가지의 좌표 안에서 하나를 선정하면 그 색상을 제조해주는 단계로까지 기술이 발전한 것 같아요. 아직 우리나라엔 들어오지 않았지만, 아까 얘기한 아크릴 물감의 시초인 골든에서 이걸 하고 있어요. 그럼 이제 색상명은 사라지고 색상을 좌표로 설명하는 시대가 시작되겠죠.
그렇다고 해도 예를 들면 물감의 점도라든지 질감을 결정하는 다른 요소들이 있지 않을까요?
그것도 선택할 수 있는 게 있어요. 매트냐 바니시냐도 선택할 수 있고요.
위스키를 생각하니, 비슷한 환원주의적 사건들이 비슷한 시기에 일어나고 있군요. 작가님 작품을 이런 의미로 읽어낼 수도 있겠어요.
그래서 안 디렉터님한테 “다음에는 이 작업 못 할지도 모른다”고 얘기했어요. 색상명이 사라지면 할 수 없는 작업이지요. 제가 10개 정도의 작품군이 있지만 그중에서 시대를 건너뛰어 연작으로 낸 경우는 이 작품이 유일해요. 이번이 마지막이 될 것 같았기 때문이죠. 19년 전의 작업과 올해의 작업을 좌표로 꼭 찍어놓고 싶었던 거죠. →
아뜰리에 에르메스에서 열린 박미나 〈아홉 개의 색, 아홉개의 가구〉 전시 전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