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래시장 속 신기한 심야 공간 5

시장 속 상점들이 문을 닫기 시작하면, 그제야 불을 켜는 가게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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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락

가좌역 모래내시장에 있는 뮤직바

뮤직바 극락이 문을 연 건 가좌역 모래내시장이 재개발로 사라질 거라는 소식 때문이었다. 입지가 사라질 예정이라서 그 한복판 건물 2층에 가게를 오픈했다는 말이 좀 이상하게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밴드 CHS의 프런트맨이자 이 공간의 주인인 최현석 사장의 설명에 따르면 그게 정확한 표현이다. “사실 여기가 제 밴드 작업실이었어요. 공간을 얻어서 연습도 하고 친구들 불러서 파티도 몇 번 하고 그랬는데, 없어진다고 하니까 자주 오던 친구들이 아쉬워하더라고요. 차라리 남은 기간 동안만이라도 공개하면 어떻겠느냐고. 그래서 그때부터 뮤직바로 운영하게 된 거죠.” 극락은 정말로 시장 한가운데에 위치해 있다. 반찬 가게와 정육점 사이에 노래방으로 향하는 작은 입구가 있고, 그 2층으로 올라와 왼쪽, 불상이 그려진 작은 종이가 붙은 문이 극락의 입구다. 최고의 입지적 장점은 역시 소음에 대한 관대함이다. 최현석 사장의 말에 따르면 이 도심 외곽 시장은 길에 담배꽁초 하나 떨어져 있으면 바로 육두문자가 날아오는 드센 곳인데, 드럼을 아무리 두들겨도 컴플레인이 없었다고 했다. “연습 잘했어? 신나게 하대” 하고 말 뿐. 그리고 밤이 되면 마치 정전이라도 된 듯 일대가 어두워진다. 극락 한 곳만 빼놓고 말이다. 이런 조건들로 인해, 그리고 미뤄진 재개발로 인해 극락은 지난 2년 동안 서울의 인디 신에서 커다란 입지를 차지하게 되었다. 많은 뮤지션이 서고 싶어 하는 공연장이 되었고, 영상, 사진, 공연 기획 등 다양한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이 공간을 아지트 삼으면서 문화의 전초기지가 되기도 했다. 하지만 최현석 사장은 이 공간이 시한부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고 말했다. “원래는 저쪽까지도 다 시장이었거든요. 그간 굉장히 축소됐고, 사실 여기도 언제 부수고 들어와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이에요. 제가 만약 정말 영업만 하는 사람이었다면 진작에 떠났겠죠.” 극락은 여전히 최현석 사장의 작업실이다. 인터뷰차 찾아간 날에도 그는 한쪽에 앉아 기타를 치고 있었고, 평소에도 연습을 하는 도중에 손님들이 들어오는 경우가 있다고 했다. 그러면 다들 안 나가고 그냥 연습하는 걸 구경하더라고. 극락이 독창적인 분위기를 갖는 건 단순히 인테리어의 문제가 아니라, 궁극적으로 그가 공간을 대하는 이런 마음 때문이다. “모르겠어요. 이게 장사라거나 사업이라는 생각은 여전히 크게 들지 않아요. 그냥 저는 여기 오는 사람들이 행복해 했으면 좋겠어요.” 운영 측면에 관한 질문을 받았을 때, 그가 내놓은 답이다.

동묘830

동묘시장에 있는 와인바

연극배우이자 성우인 김국진 사장은 어려서부터 빈티지 마니아였다. 20대 때부터 동묘시장을 뻔질나게 들락거리며 옷을 샀는데, 그때 느낀 점이 하나 있었다. 젊은 사람들이 이렇게나 많은 동네에 그들이 쉬어갈 만한 곳이 하나도 없다는 것. 830은 그렇게 목마른 자 우물 파듯 만든 공간이다. ‘공간’이라고 얼버무려 쓴 이유는 830의 업태를 선명히 분류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카페로 시작했죠. 어른들의 놀이터 같은 공간을 만들고 싶었으니까. 그러다가 술을 팔기 시작했고, 지금은 또 라이브 공연도 준비하고 있어요. 커피를 하겠다는 친구가 있어서 다시 카페도 겸할 것 같긴 한데, 그 친구가 갑자기 잠수를 타서 또 어떻게 될지 모르겠고….” 김국진 사장은 공간부터 만들어 놓고 뭘 할지 고민한 게 바보 같은 일이었다며 너스레를 떨었지만, 사람들이 830을 찾는 이유에는 그 ‘무목적’이라는 성격도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무슨 놀이를 할지 모르는 채로 일단 발길을 옮겨볼 수 있는 곳, 그게 놀이터의 핵심이니까. 830의 진가 역시 커피나 와인, 칵테일 같은 콘텐츠에 있지 않다.

7개월에 걸쳐 그가 직접 하나하나 뜯어고친 공간 자체에 있다. 830의 위치는 사실 동묘시장의 활기가 홀연히 잦아드는 깊은 골목. 하지만 공간을 채운 물건들 대부분은 주말 아침마다 그가 직접 동묘시장에서 사온 것들이다. 그리고 단순히 ‘힙’한 느낌을 넘어 오묘한 분위기를 내는 건 아마 그 사이사이 들어찬 ‘친구 찬스’들 덕분일 것이다. 룸에 걸린 거대한 페인팅은 친구의 아버지인 선학균 화백의 작품이고, 묵직하고 우아한 테이블은 대리석 사업을 하는 지인의 선물이라고 했다. 인테리어를 하는 친구, 커피 사업을 하는 친구까지 주변 사람들의 응원이 깃들지 않은 게 없다. 하지만 ‘내부 투어 프로그램이라도 운영해야 되겠다’고 농담하자 김국진 사장은 손사래를 쳤다. 그냥 보이는 대로만 즐기면 좋겠다고. “저희가 좀 그런 것 같아요. 저도 그렇고 일하는 친구들도 그렇고, 다 묵묵하게 재미있는 걸 좋아하는 취향이죠. 그런데 저희 말고도 분명 이런 걸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지 않을까요? 호들갑 떨지 않고 기다리면 알아봐줄 거라고 생각해요.” 김국진 사장이 사뭇 진지한 투로 말했다. “그래도 자영업이니까 그 시기가 좀 빨리 왔으면 좋겠는데” 하는 사족을 붙이며 또 금세 웃기는 했지만.

장생건강원

강남 영동시장에 있는 전통주 전문바

장생건강원이라는 공간의 단초는 서정현 사장의 이력에서 나왔다. 그의 정체는 국내 유수 특급 호텔의 바에서 두루 근무하고 세계대회에 국가대표로 출전한 바 있는 실력파 바텐더. 그리고 대한민국 전통주 홍보대사다. 그는 ‘서울 셀렉션’을 비롯한 다양한 시도를 하며 전통주 칵테일 분야에 애정과 자부심을 갖게 되었고, 윤상엽 사장과 의기투합해 처음 바를 차리기로 했을 때도 ‘전통주’와 ‘시장’이라는 키워드로 새로운 분야를 개척하고자 했다. 그리고 또 하나의 단초는 그렇게 계약한 강남 영동시장 매물의 간판에서 나왔다. 그 자리에서 지난 20년 동안 운영되었던 한약방 ‘장생건강원’의 간판에서. 두 사장은 철거 직전에야 간판에서 새로운 영감을 얻었고, 상호를 그대로 계승하기로 했다. ‘헬시 푸드’라는 키워드도 함께. “갑자기 좋은 아이디어가 떠오른 거죠. 제가 인삼, 도라지 같은 재료로 칵테일을 만들어오기도 했으니 건강원 콘셉트의 바를 한번 해보면 좋겠다고. 사실 저희 같은 바텐더들에게는 어떤 재료로든 칵테일 맛을 잡을 수 있다는 자신이 있거든요.” 그래서 장생건강원의 메뉴판은 이런 문구로 시작한다. “먼저, 20년간 이 자리를 꾸준히 지켜온 노부부의 노고에 진심으로 감사드리며, 장생건강원은 전통 시장의 상생과 공생을 목적으로 건강원 콘셉트에 적합한 신개념 음료를 선보입니다.” 여기서 ‘상생’이란 젊은 층의 시장 유입으로 인한 활성화 같은 막연한 기대 효과를 말하는 게 아니다. 장생건강원은 영동시장 상인들과 실질적인 협업을 도모한다. 재료의 많은 부분을 영동시장에서 사오기도 하거니와, 백미는 ‘마켓 컬래버레이션’이다. 매달 시장 안의 가게 하나씩을 선정하고 협업해 새로운 창작 칵테일을 선보이는 것이다. 해산물 가게, 참기름집, 냉면 가게, 김밥 가게에 이르기까지. “웃기다고 할지도 모르겠는데, 그게 실제로 효과가 있어요. 만약에 빵집과 협업해서 칵테일을 만든다, 그러면 손님들이 돌아가는 길에 빵을 사가는 거죠. 하루에 5개씩 팔리던 게 몇십 개 팔려요.” 장생건강원 맞은편에 2호점을 내서 커피와 붕어빵을 파는 이유도 궁극적으로는 시장 ‘어머니 아버지들’과 교류하기 위해서라고 했다. 그리고 ‘굳이 그렇게까지 친분을 쌓는 이유는 더 나은 협업을 위해서인가’ 물었을 때는 이런 답을 내놓기도 했다. “그런데 그건 어떤 목적을 위해서가 아니라 당연히 해야 하는 거죠. 우리가 시장 안의 일원으로 함께 어울려야 하잖아요. ‘굳이’가 아니라 ‘무조건’이라고 생각해요.”

사운드독

후암시장에 있는 재즈클럽, 사운드독

재래시장 안에 재즈클럽을 차린 이유를 물으면, 김성 사장에게서는 알듯 말듯한 답만 돌아온다. “여기라면 오래 할 수 있을 것 같았거든요.” 다만 그와의 인터뷰는 후암시장 골목에 선 채로 진행되었고, 그래서 어렴풋이 의중을 알 것도 같았다. 매장을 바라보는 그의 눈이 마치 5년 전 처음 이 공간을 마주했을 때를 더듬는 듯했으니까. 재즈클럽 사운드독이 들어선 곳은 후암시장 뒷골목 끝자락, 황해수산과 공주종합유통 사이였다. 아마도 임대료가 갑자기 훌쩍 뛸 위험이 높지 않아 보였을 것이고, 목이 좋다고 말하기는 힘든 곳이지만 재즈클럽을 하기에는 좋은 구석도 있었다. “1층이라는 입지의 장점이 소리의 30% 정도는 밖으로 빠져나가요. 지하에 있으면 소리가 다 갇혀버리거든요.” 시장은 재즈클럽이 시작할 시간이면 대부분 영업이 끝나기 때문에 소음 민원의 위험이 적다. 매장 전면의 대부분을 유리창으로 구성한 것도 시장 뒷골목이라는 입지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다. 유리창 파사드를 가진 재즈클럽의 매력은 상상 이상이다. 인터뷰를 하는 동안 지나치는 행인 대부분도 발길을 멈추고 업장 내부를 기웃거렸고, 공연이 진행되는 동안에는 외국인 커플이 길거리에 멈춰 앉아 창 너머로 연주를 감상하기도 했다. 하지만 김성 사장이 생각하는 이 입지의 가장 큰 매력은 다른 데 있었다. “사운드독에서 몇 차례 연주했던 피아니스트 폴 커비가 어느 인터뷰에서 그렇게 말했더라고요. 자기가 전 세계 재즈클럽을 다 가서 연주해봤지만 재래시장 안에 있는 재즈클럽은 처음 봤다고. 그런 측면이 좋은 것 같아요. 일단 다른 클럽과 차별화가 되잖아요.” 물론 사운드독이 입지적 매력 하나 때문에 국내외 걸출한 뮤지션들이 찾는 재즈클럽이 된 건 아니다. 이 작은 재즈클럽은 놀랍게도 매일 라이브 공연을 하며, 그 모든 공연을 김성 사장이 직접 주관하고 관람한다. 그리고 매일 들으면서도 질리거나 고통스럽지 않기 위해 뮤지션들에게 ‘관객이 좋아할 음악’보다는 ‘정말로 당신이 하고 싶은 음악’을 주문한다. 또 하나 재미있는 점이 있다. 그럼에도 인근에 사는 시장 사람들이 한 번씩 들어와 공연을 보며 술을 마시기도 한다는 것. 이렇게 ‘진짜’를 추구하면서도 문턱이 낮은 재즈클럽은 아무래도 찾기가 쉽지 않다.

쓰흡

서울중앙시장에 있는 전통주 맛집

두 사장이 알려준 ㅆㅎㅍ(‘쓰흪’이라 읽는다)을 제대로 즐기는 법은 다음과 같다. 가급적 바 좌석에 앉는다. 대뜸 안주부터 시키기에 앞서 전통주, 맥주, 와인까지 80종에 달하는 주류 리스트를 찬찬히 훑어본다. 술에 대해서건 음식에 대해서건 일단 사장에게 물어본다. ‘극도의 I’인 김슬지 사장보다는 ‘극도의 E’인 이보미 사장에게. 참, 그리고 가게로 올 때 신당 서울중앙시장 큰길에서 동쪽 방향 골목길로 와야 한다. 지도 앱들은 자꾸 신당역 2번 출구 쪽에서 올라가라고 알려주는데, 그 길에서는 식자재 시장의 강렬한 동물 내장 냄새를 맞닥뜨리게 된다. “그런데 손님들 얘기를 들어보면 그런 경험이 좋은 점도 있나 봐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속 토끼굴처럼 무섭고 어둡고 냄새나는 골목 끝에 색다른 분위기의 가게가 있으니까요. 입지 때문에 저희 가게를 더 예쁘게 봐주시는 부분이 있는 거죠.” 이보미 사장의 설명이다. 연신내에서 각각 주점과 식당을 운영했던 두 사람은 사교성 외에도 모든 면에서 성향이 정반대다. ㅆㅎㅍ은 그래서 시작되었다고 했다. 두 사람이 좋아하는 걸 다 모아놓으면 좋을 것 같아서. 공통점도 있었다. 이보미 사장과 김슬지 사장은 둘 다 술을 좋아하고, 전형적인 것보다는 재미있는 걸 선호하며, 재래시장에서 장 보는 취미가 있다. 그것들이 모두 고스란히 ㅆㅎㅍ의 근간이 되었다. “저희가 새벽

4시까지 영업하거든요. 그러다 보니 영업을 마친 주변 상인들이 와서 술을 마시는 경우가 많아요. 메뉴에도 시장 식재료가 반영되는 부분이 많고요.” 촬영을 위해 부려놓은 음식에도 좋은 예시가 있었다. 시장 순대를 튀겨서 만든 ‘깐풍순대’나 족발과 오겹살을 넣어 만든 ‘마감국수’ 같은 것들. ㅆㅎㅍ이 추구하는 요리의 정체는 무국적 요리이며, 모토는 ‘해장’이다. ‘안주로 해장하면서 계속 술을 마실 수 있게 만들자.’ 메뉴판부터 분위기, 안주까지 ㅆㅎㅍ은 머무는 내내 ‘이 가게 주인장들 정말 술 좋아하는구나’ 저절로 감탄하게 되는 주점이다. 그럼에도 굳이 첨언하자면, 30분의 인터뷰 동안 두 사장은 “저희가 술을 정말 좋아한다”는 말을 다섯 번 넘게 했다.

CREDIT
  • EDITOR 오성윤
  • PHOTOGRAPHER 박기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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