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B&M(이하 '비비엔엠')에서 지난 5월 21일부터 시작한 이불의 개인전 <PRINTS>가 6월 15일까지 열린다. 행위예술, 조각, 설치 등 여러 미디엄을 넘나들었던 X 세대를 대표하는 슈퍼스타 이불이 처음으로 대표 조각작품에 기반한 판화를 내놨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전시는 작가의 주제 의식과 시각언어에 기반한 5개의 연작들로 구성되어 있으며, 이들은 모두 세계적인 예술가들이 참여한 바 있는 싱가포르의 'STPI 크리에이티브 워크숍'의 레지던시(거주하며 작업하는 작가 지원 프로그램) 프로그램에 작가가 참여해 머물며 협업으로 제작했다. 또한 전시 오프닝에서는 1997년부터 2023년까지의 작가의 주요 인터뷰를 모은 인터뷰 선집 <Lee Bul: In Her Words >가 함께 공개됐다. 해당 인터뷰 선집은 올해 9월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정면에 설치되는 작가의 파사드 커미션 전시를 앞두고 출간되는 것으로 약 40년간 펼쳐 온 그의 작품 세계와 예술적 실천의 발전 과정을 살펴볼 수 있는 중요한 자료가 될 것이다. 참고로 뉴욕 메트로폴리탄의 파사드에 커미션에 선정된 한국 작가는 이불이 처음이다.
갤러리 비비엔엠 측은 해당 연작에 대해 "아름다움과 쇠퇴, 기술과 실패, 유토피아를 향한 꿈과 역사적 트라우마 등 서로 상반된 주제의 이면을 다루는 이불의 대표적인 바이오모픽 조각과 건축적 설치 작품의 개념과 형태를 반영한다"라고 밝혔다. 예를 들면 <Untitled – CC>(2023) 시리즈를 보고 작가의 사이보그 조각을 떠올리는 것은 어렵지 않다. 갤러리 측은 "사이보그 조각을 이차원적으로 재구성한 작품으로 구리 분말이 산화되며 발생하는 독특한 푸른 색감과 물성이 만들어내는 추상적 이미지가 돋보이는 작업"이라고 밝혔다.
<Untitled – SF>(2024) 연작 역시, 이불의 주요 설치 작품인 <Souterrain>(2012/2016)이 즉각적으로 떠오른다. 마치 석영 동굴처럼 수천 개의 파편화된 거울 조각들이 얽히고 섞여 있는 설치 작품에서 'Souterrain'은 단어의 뜻 그대로 땅의 아래 즉 지하 구조를 일컫는다. 갤러리 측은 해당 설치 작품이 "유토피아의 이데올로기와 맞물린 인류사의 흥망성쇠를 하나의 아방가르드적 건축 구조로 구현시켰다"라며 "‘Souterrain’ 은 지하 구조를 일컫는 단어인데, 작품 역시 어두운 터널과 같은 유사한 형태를 지니고 있다."라고 밝혔다.
여러 겹의 층위와 이질적 재료의 혼용이라는 점에서는 작가의 대표적인 평면 작품 연작 <Perdu>(2016—)가 떠오르기도 한다. <Perdu>가 조각적으로 접근한 입체적 회화라면 이 판화 연작은 삼차원의 공간을 한 장의 지면 위에 고도로 압축시킨 섬세한 종이 작업이라는 설명이다. 개인적으로 그의 두 평면 작업은 조심스럽고 서틀(subtle)한 태도에서 닮았다. <PRINTS>의 연작들에서는 스크린에 금속박을 입히고 구리 분말이나 철 가루와 같은 비전통적인 재료를 활용해 마치 판화라는 미디엄의 한계를 '똑똑' 하고 두드리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아크릴 페인트와 자개를 여러 겹으로 쌓은 <퍼듀> 시리즈가 평면에서 묘한 양감을 풍기는 것만으로 미디엄의 너머의 가능성을 상냥하게 보여줬던 것과 매우 비슷한 느낌이다. 평면을 탈출한다든지 깨부순다든지의 우악스러운 방식이 아니라 조심스럽고 무리 없는 태도가 과거 이불 작가의 종종 과격했던 퍼포먼스나 설치 작품들에서 받았던 인상과 사뭇 달라 더욱 기억에 남는다.
<Untitled – SI>(2023)와 <Untitled – PI>(2023) 연작은 작가가 STPI에서 레지던시 기간 중 제작한 드로잉과 콜라주를 바탕으로 했다. 갤러리 측은 "<Untitled – PI>는 부드러운 색감의 조합으로 인해 언뜻, 꿈속의 환상적 풍경을 그려낸 듯 보이지만 실제 핵폭발의 버섯구름과 실패한 모더니즘의 서사에 등장하는 기계적 구조의 실루엣을 지니고 있으며, <Untitled – PI>의 옅은 파스텔 톤과는 상반된 단색의 어두운 철 가루를 사용한 <Untitled – SI>는 세월의 흐름에 따라 녹슬어가는 철의 재료적 특성과 수없이 반복되어온 과거의 역사적 시간을 연결 지어 오늘의 현실을 비유하려는 듯 보인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