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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로트의 홍수가 지겨운 당신에게

트로트의 홍수가 지겨운 당신에게

BYESQUIRE2021.01.31
 
 

트로트의 홍수가 지겨운 당신에게

 
 
트로트를 내세운 TV 프로그램의 인기가 식을 줄을 모른다. 〈내일은 미스트롯〉, 〈내일은 미스터트롯〉, 〈사랑의 콜센터〉, 〈트로트의 민족〉, 〈트롯신이 떴다〉, 〈트롯 전국체전〉, 〈트롯 파이터〉 기타 등등. 내가 빠트린 프로그램들이 분명 있을 것이다. 제작진과 팬들에게 사과드린다. 항의는 내가 아닌 〈에스콰이어〉에 해주시면 된다. 'Trot'의 표기가 '트롯'과 '트로트'로 섞여 있는 것은 각 방송사에서 지은 프로그램 제목에 따른 것이니 이에 대한 항의는 내가 아닌 각 방송사에 해달라.
 
온갖 방송국에서 몰아치는 트로트의 홍수가 괴롭다는 호소가 주위 여기저기서 들려온다. 지겹다고들 한다. 네이버 검색창에 '트로트'를 입력하면 자동 완성으로 '트로트 지겨워'가 뜬다. 인기가 있고 장사가 되니 너도나도 몰려들어 트로트 프로그램을 쏟아내는 탓이다.
 
트로트가 주류 방송에서 한동안 뜸했던 것은 사실이다. 그래서 더욱 요즘의 트로트 붐이 강렬하고 낯설게 느껴지는 걸지도 모르겠다. 사실 나 역시 TV만 켜면 쏟아지는 트로트가 새삼 괴롭게 다가오는 상태다. 동거하는 60대 여성(이라고 쓰고 어머니라고 읽는다)이 TV조선 〈내일은 미스터트롯〉에 출연한 김호중의 팬이 된 데다가, 코로나19로 인해 둘 다 외출이 줄어들다 보니 김호중(및 같은 프로그램 출연자들)의 목소리를 굉장히 자주 들어야 하는 상황에 놓이고 만 것이다. 그 와중에 어머니가 ‘덕질’을 시작하신다는 생각도 못한 상황마저 벌어졌다.
 
나도 덕질이라면 좀 해본 사람이다. 지난 세기부터 해외 록 페스티벌을 다녔고, 유럽과 호주에서 롤링 스톤스 공연을 네 번 봤다. 걸그룹 레드 벨벳의 공연은 한국과 일본에서 두 번씩 봤다. 이제 막 덕질의 세계에 입문하신 어머니에 비하면 꽤나 경력이 긴 셈이다. 이미 덕질을 실컷 해온 입장에서 어머니의 때늦은 덕질을 차마 말릴 수도 없는 처지이다 보니 김호중의 CD와 함께 배송된 포스터 지관 뚜껑을 드라이버로 따 드렸고, 레드 벨벳 포스터를 방과 사무실 벽에 붙이며 익혔던 노하우를 알려드리기도 했다. 그러나 이렇게 해야 한다고 아는 척하며 벽에 붙여드렸던 김호중의 흑백 포스터는 24시간도 지나지 않아 떨어져버리고 말았고, 나는 결국 허당 덕후였던 게 아닐까라는 허탈함을 느끼기도 했다.
 
나의 덕질 이야기는 여기까지 하고, 한발 물러서 곰곰이 생각해보면 트로트 붐이 ‘새삼’스러운 일인가 싶기도 하다. 트로트가 인기 없었던 적이 있긴 했나? 서태지와 아이들이 ‘난 알아요’를 들고 데뷔해 대중음악의 판이 변신하는 것 같았던 1992년에도 MBC 10대 가수는 설운도, 현철, 주현미가 차지했다.
 
그렇다면 트로트는 '새삼스레' 유행하고 있는 것일까. 그것도 아닌 것 같다. 트로트는 늘 우리 옆에 있었다. 메인스트림 가요부터 인디 밴드 음악까지, 예전부터 '뽕끼'는 한국의 거의 모든 대중음악에 깊이 스며들어 있지 않았나?
 
음악 활동을 시작한 이래로 뽕끼를 의식적으로 배제하고 있는 나조차도 초등학생 때부터 '단장의 미아리 고개', '이별의 부산 정거장' 등을 들었다. 20대에는 트로트 음반에서 베이스 연주를 맡아 녹음한 적도 있다. '전국노래자랑' 공개방송에는 두 번이나 가봤다. 나뿐 아니라 한국에서 태어나 살아온 사람 대부분이 자의와는 상관없이 트로트의 정서를 장착한 채 살아가고 있지 않을까?
 
반대로 트로트가 아닌데 트로트라고 불리는 음악도 많다. 요즘 집에 있을 때면 거의 매일 본의 아니게 들어야만 하는 김호중의 노래는 주로 오페라 아리아다. 성악의 귀재로 유명한 그가 부르는 아리아를 트로트라고 할 사람이야 없겠지만, 그가 트로트 프로그램에 출연해 불렀던 노래 중에는 트로트보다는 어덜트 컨템포러리, 탱고 등으로 분류되어야 할 곡들도 있었다. 수없이 들어야 했기에 어쩔 수 없이 잘 알고 있는 사실이다.
 
결국 지금 한국에서 트로트를 '트로트 가수라고 자칭하는 사람이 부르는 노래'라고 정의할 수밖에 없는 셈이다. 그런 까닭에 트로트를 더 이상 음악 장르라고 할 수 없는 건지도 모르겠다. 비틀고 꺾는 창법만 쓴다면 다 트로트로 치니까. 임영웅이나 이찬원이 〈사랑의 콜센터〉에서 오아시스의 곡을 신청받아 트로트 창법으로 구성지게 부르는 모습을 상상해보자. “도혼 룩 배애핵인 앵거~~ 아 헐드 유 쎄에이히이~~~.” 트로트네, 트로트야. 뒤에서 정동원이 리엄 갤러거처럼 선글라스를 쓰고 탬버린을 치고 있으면 어울릴 것 같다. 노래방 점수는 몇 점이 나올까. 사실 〈내일은 미스터트롯〉을 하도 자주 보니 나마저도 취향이 생겨 정동원과 장민호를 좋아하게 되었다. 음악 활동 경력이 장민호와 비슷한 사람으로서 부끄럽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다. 정동원은 깔끔하고 고아한 맛을 담아 노래하고, 장민호는 잘생겼다. 어느 정치인이 SF 작가 윌리엄 깁슨의 말을 인용한 적이 있다. ‘미래는 이미 와 있다. 단지 널리 퍼져 있지 않을 뿐이다.’ 그렇다면 한국의 트로트는? ‘트로트는 이미 와 있었고 진작에 널리 퍼져 있었다.’ 그런데 왜 요즘 들어 그토록 성가시게 느껴지는가? 트로트를 전면에 내세운 프로그램들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났다는 점, 가시성이 엄청나게 커졌다는 점 때문일 것이다. 코로나 팬데믹 시기를 맞아 외출이 줄어들면서 집에서 TV를 보고 들어야 하는 시간이 많아진 탓도 있다.
 
그래도 딱히 불평할 생각은 없다. 이 힘든 시국에 어머니를 깔깔 웃게 해주는 건 손주들, 즉 나의 조카들, 그리고 트로트 가수들밖에 없는 것 같기 때문이다. 새해를 맞아 내가 바친 용돈을 받으시고도 웃지 않으셨던 어머니를 환하게 웃게 해주는 건 김호중뿐이다. 김호중이여, 대리 효도 고맙소. 새해 복 많이 받으소. 공익근무 성실히 마치고 멋지게 컴백하소.
 
그리고 저를 웃게 해주시는 레드 벨벳과 러블리즈 선생님들, 늘 건강하고 행복하세요. 부디 트로트는 하지 마세요. 아니, 하셔야 한다면 하세요. 그래도 응원할 거예요. 언제나 감사합니다. 이 주제와는 아무 상관없이 ‘레드 벨벳 강슬기 선생님 사랑합니다’라고 쓰면 지면 편집자는 아마 화를 낼 것이다. 그러나 최근 모든 대화를 기승전 김호중으로 끝내시곤 하는 나의 어머니는 이것이 바로 덕심이라는 것을 이해해주실 것이다. 이해는 항상 참 고마운 일이다.
 
Who`s the writer?
이원열은 번역가 겸 뮤지션이다. ‘헝거 게임’ 시리즈 등을 옮겼고 ‘원 트릭 포니스’와 ‘줄리아 하트’, ‘코스모스’, ‘라이너스의 담요’ 등의 밴드에서 활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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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EDITOR 김현유
  • WRITER 이원열
  • Illustrator 노준구
  • DIGITAL DESIGNER 김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