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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빌리의 노래와 트로트의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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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필 by 박세회 2024.09.15
“우리 마모(mamaw; 할머니)는 늘 두 신을 모시고 살았다. 하나는 예수 그리스도, 다른 하나는 미합중국이었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미국 오하이오주 몰락한 러스트 벨트 지대 백인 노동 계층으로 태어난 J.D. 밴스의 2016년 자서전 <힐빌리의 노래>에 나오는 말이다. 그는 이 책으로 일약 스타덤에 올랐다. 그가 자란 러스트 벨트란 어디를 말하는가. 과거 미 북부 오대호와 미시시피강, 애팔래치아산맥이라는 축복받은 자연환경으로부터 오늘날 초강대국 미국을 건설한 중공업과 제조업의 핵심 지대, 말 그대로 미국의 엔진이었던 공업지대를 뜻한다. 그러나 값싼 해외 수입품과 오일쇼크로 공장이 문을 닫고, 산업 기반이 남부로 이전을 결정하며 텅 비어버린 현재의 러스트 벨트는 그야말로 붉게 녹슬어버린 지옥이다. 이곳에 남겨진 백인 극빈층들을 힐빌리라 부른다.
러스트 벨트의 힐빌리는 백인이지만 미국의 기득권 백인인 와스프(WASP; 백인-앵글로색슨 기독교인)와는 확연히 다르다. 가난한 처지는 비슷하지만 그나마 교외에서 비옥한 땅과 쾌청한 날씨만은 누리고 사는 레드넥(Redneck)과도 다르다. 힐빌리들은 썰렁한 갱도 입구를 어슬렁거리는 기계공과 날품팔이, 실업자들이다. 복지 수당으로 마약을 대물림하는 이들은 기초적인 교육부터 공동체 윤리와 의식이 무너져 있고 기성 정치를 강하게 불신한다.
J.D. 밴스의 가족은 가난한 힐빌리였다. 하지만 밴스에게는 그를 바른길로 인도해준 마모가 있었다. 마모의 청교도적 신앙심과 프런티어 정신을 동아줄 삼아 밴스는 해병대 자원입대, 오하이오 주립대 입학, 예일대 로스쿨을 졸업하며 성공한 기업가로 거듭났다. 이제 밴스는 그의 할머니와 가족들이 그랬던 것처럼 그를 따르는 수많은 이들과 함께 새로운 신을 섬긴다. 도널드 트럼프다. 세련된 언어로 힐빌리의 애가를 노래하던 밴스는 원래 트럼프를 ‘도덕적 재앙’이자 ‘미국의 히틀러’라 부를 정도로 혐오했다. 그랬던 그가 미친 거리의 전도사가 되어 국가주의적 폭언과 거침없는 조롱의 샤우팅을 통해 과거를 지웠다. 그리고 마침내 트럼프의 간택을 받아 재선을 노리는 트럼프의 파트너로 임명됐다. 컨트리의 전설 멀 해거드의 ‘아메리카 퍼스트’가 울려 퍼지는 선거 유세장에서, 밴스는 조 바이든 대통령으로부터 후보 자리를 물려받은 현 부통령 카멀라 해리스에 맞서 입신양명의 최종 단계, 미합중국의 바이스 프레지던트를 꿈꾼다.
힐빌리의 노래는 컨트리다. 20세기 초 아메리칸 드림을 꿈꾸며 신대륙으로 건너온 유럽 이민자들이 깊숙한 애팔래치아 산기슭에서 유럽의 전통 악기와 민요 가락을 정다운 가족들과 함께 불렀다. 이 투박한 음악이 미 곳곳으로 뻗어나간 개척자들과 라디오 방송을 통해 미 전역으로 퍼져나가자, 사람들은 이 장르를 애팔래치아 음악이라 뭉뚱그려 이야기했다. 컬럼비아 레코드는 최초로 상업 녹음한 이 새로운 대중음악 장르를 ‘힐빌리’라 명명했다. 이후 힐빌리는 부기우기와 로커빌리, 블루그래스와 내슈빌 사운드로 엮이고 섞이며 미국인의 정신과 정서 깊숙이에 자리 잡았다. 윌리 넬슨, 케니 로저스, 돌리 파튼 등 슈퍼스타들의 장르 진보를 거쳐 가스 브룩스와 빌리 레이 사이러스, 샤니아 트웨인의 컨트리로 계승되었다. 도시 사람들은 힐빌리의 음악을 즐겨 듣고 자라지 않는다. 그러나 그들이 그 음악을 듣지 않고 자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당신이 트로트를 좋아하지 않아도 주현미의 노래 한두 곡쯤은 지금 당장 따라 부를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과장을 조금 보태면, 모든 미국인의 혈관에는 컨트리 노래 선율이 조금은 흐르고 있다.
최근 컨트리의 성장세는 놀랍다. 컨트리는 2023년 미국 내에서만 22억6000만 회 이상 스트리밍을 기록하며 가장 큰 폭으로 성장한 음악 장르에 올랐다. 2024년 미국 대중음악의 꼭대기에도 컨트리 음악이 있다. 올해 빌보드 싱글 차트에서 가장 오래 1위를 차지한 곡은? ‘미국 컨트리계의 임영웅’이나 다름없는 모건 월렌이 피처링한 텍사스의 록스타 포스트 멀론의 노래 ‘I Had Some Help’다. 8월 현재 빌보드 싱글 차트 1위에 있는 노래는? 흑인 컨트리 신성 샤부지의 ‘A Bar Song (Tipsy)’다. 2024년 상반기에 발매 첫날 가장 많이 스트리밍된 앨범은? 카우보이로 변신한 비욘세의 ‘Cowboy Carter’다.
힐빌리의 노래가 컨트리를 낳은 건 사실이다. 그러나 최신 컨트리는 힐빌리들만의 노래가 아니다. 이제 컨트리는 메시지와 흥미뿐 아니라 젊은 세대의 공감이라는 세 마리 토끼를 모두 잡았다. 일하던 공장에서 두개골이 깨지는 재해를 당한 후 10년 동안 일용직 노동자를 전전하며 RV차에서 숙식을 해결하던 무명 가수 올리버 앤서니가 청년 세대의 분노로 미국 정계를 일갈한 노래 ‘Rich Men North of Richmond’의 방송 클립은 현재 1억5000만 뷰를 기록하고 있다. 이 노래는 폭발적인 반응을 얻으면서 빌보드 싱글 차트 1위에 오르는 전대미문의 기록도 세웠다. 지난해 ‘I Remember Everything’으로 차트 정상에 오른 신인 잭 브라이언은 비트 세대 소설가 잭 케루악풍의 메시지를 담은 노래들을 브루스 스프링스틴, 존 메이어 등의 거장들과 함께 풀어낸 새 앨범을 내놓았다. 비욘세의 ‘Cowboy Carter’는 ‘컨트리는 원래 검은색이다’라는 표어를 앞세우는 급진적인 작품이며, 숏폼 콘텐츠 유행을 이끄는 신인 다샤(Dasha)는 통속극 서사를 젠지(Gen.Z)들의 영상 챌린지로 이식했다. 이제 컨트리는 힐빌리의 것도, 백인의 음악도 아닌 모두의 음악이다.
컨트리의 기세를 짚다 보면 한국의 트로트 열풍이 다르게 보인다. <내일은 미스트롯> 오디션 이후 불붙은 트로트 열풍이 쉬이 꺾이지 않는다. 상암월드컵경기장을 점령하며 정점을 찍은 임영웅과 영웅시대의 위풍당당한 행진은 계속되고, 모든 세대를 놀라게 한 추석 특집 공연 이후 성대한 은퇴 투어를 진행 중인 나훈아의 위상은 높아만 간다. 우후죽순 트로트 경연 프로그램을 비판하는 목소리가 크다는데, 이제는 한국을 넘어 일본에까지 방송 포맷을 수출해 한일 합작 트로트 오디션을 만들고 있다. 대단한 화제성과 인기를 구가하는 방송이 끝나고 나면 방송 참가 가수들에게는 케이팝 아이돌 그룹 못지않은 조직적인 팬덤이 만들어진다. 합동 공연과 콘서트가 예고되면 전국 자녀들의 ‘효도 대리 티케팅’이 시작된다. 트로트를 소비하는 중장년층의 구매력은 상상을 초월한다. 30여 년 만에 방송 프로그램을 통해 팬덤, 조직화한 트로트가 이제 무시할 수 없는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으며 대중음악의 영역을 넘보고 있다. 문화계를 넘어 정치계에서도 트로트와의 접점을 마련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 명실상부한 트로트 장르의 중흥기다.
사실 ‘트로트’는 블루스와 재즈에 가까운 춤곡 장르 중 하나인 폭스트롯(Foxtrot)에서 유래한 단어다. 1960년대까지 한국의 대중음악과 가요는 곧 트로트였기에 트로트라는 명칭을 사용할 필요가 없었다. 배호의 스탠더드 팝, 미8군 출신 밴드들의 로큰롤과 재즈도 있었지만 지금 우리는 이 시기의 음악을 모두 트로트로 기억한다. 록 음악, 힙합 음악, 세련된 가요와 밴드 음악이 한국 음악의 역사를 각자의 위치에서 열심히 가꿔나갔지만, 1990년대 서태지와 아이들이 혁명을 일으키기 전까지 트로트는 한국 대중가요의 왕좌에서 내려올 생각이 전혀 없었다. 미국인의 혈관에 컨트리 멜로디가 흐르고 있다면, 한국인의 DNA에선 오음 장음계와 ‘뽕끼’를 발견할 수 있다. 20~30대에게도 장윤정의 ‘어머나’, 박상철의 ‘무조건’, 박현빈의 ‘샤방샤방’, 홍진영의 ‘사랑의 배터리’를 한 곡도 모르는 한국인을 찾기란 무척 어려울 것이다. 본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그렇다.
중요한 차이점이 있다. 아직 트로트는 모두의 음악이 아니다. 케이팝 팬들은 음원 차트 스트리밍 최상단을 장악하고 있는 트로트 가수의 음악에 관심이 없을뿐더러 새로운 경쟁 팬덤의 등장이 불쾌하기만 하다. 잘나가는 X세대로 젊은 날을 풍미했던 40~50대 중장년층은 트로트에 익숙할지언정 트로트를 즐겼던 이들이 아니다. 결국 한국에서 트로트를 적극적으로 소비하는 이들은 극히 제한적이다. 오늘날 트로트 열풍은 대중문화의 기민한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고 ‘누구누구 엄마, 누구누구 아빠’로 불리던 세대의 취향을 면밀하게 분석한 방송국, 그리고 세계에서 가장 체계적이고 헌신적인 한국 팬덤 문화의 합작품이다. 이제는 먼지 쌓인 ‘브라운관’ 앞으로 사람들을 다시 불러 모으며 한번 만들어진 열풍은 식지 않고 소셜미디어를 통해 확대 재생산되어 ‘트로트 대세’의 담론을 대중에게 믿게끔 한다.
만약 트로트가 정말 세대를 아우르는 음악이라면 임영웅, 영탁, 이찬원 등 트로트 슈퍼스타들은 왜 계속 트로트와 거리가 먼 음악을 내놓고 있을까? 트로트 경연 프로그램에서조차 트로트 외 다른 장르의 곡이 아무런 제약 없이 나오는 이유는 무엇인가? ‘한일가왕전’에 출연한 2007년생 가수 스미다 아이코는 1981년 콘도 마사히코의 ‘긴기라기니’와 2002년 보아의 ‘Valenti’, 밈으로 부활한 2004년 제이팝 히트곡 ‘사쿠란보’를 불렀다. 개그맨 다나카와 가수 마이진이 ‘한일톱텐쇼’에서 엑스재팬의 ‘Endless Rain’을 부르는 모습은 어떤가. 결국 트로트라는 이름으로 만들어지는 한국의 경연과 유행은 두리뭉슬한 과거의 음악을 통칭하는 영원주의와 끝없는 노스탤지어의 허기를 젊은 뮤즈들의 재현으로 소비하는 새로운 형태의 연예 비즈니스다. 실버 팬덤의 삶이 윤택해진 것은 장점이지만, 지금의 트로트 열풍에선 어떤 종류의 새로움도 끄집어내기 힘들다.
2023년 미국에서 컨트리 열풍이 불 때 현지 여론의 반응은 미심쩍었다. 도널드 트럼프 당선의 악몽을 잊지 못하는 진보 진영은 백인들의 백래시를 의심했고, 보수 진영은 컨트리 세계를 자신들의 송가로 가져오고자 안간힘을 썼다. 하지만 컨트리는 이제 인종과 진영을 가리지 않고 각자의 세계를 이해하는 창구의 기능을 수행하고 있다. 과거 밴스가 ‘힐빌리의 노래’로 러스트 벨트의 처지를 알린 것처럼 말이다. 트로트는 어떤가? ‘영피프티’와 ‘개저씨’ ‘MZ세대’와 ‘잼민이’가 다투며 ‘틀딱’과 ‘딸피’를 조롱하는 세대 갈등과 ‘페미’와 ‘한남’의 남녀 갈등의 공론장이 트로트가 될 수 있을까?

김도헌은 음악 웹진 ‘IZM’의 에디터부터 편집장까지 맡았던 대중음악 평론가로, 음악 웹진 ‘제너레이트’를 운영하고 있으며, 한국대중음악상(KMA) 선정위원이다.

Credit

  • EDITOR 박세회
  • WRITER 김도헌
  • ILLUSTRATOR MYCDAYS
  • ART DESIGNER 주정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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