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분노의 또 다른 이름은 '기쁨'일지도 모른다 | 에스콰이어코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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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분노의 또 다른 이름은 '기쁨'일지도 모른다

어떤 분노의 다른 이름은 기쁨 이후 인크레더블이 타블로의 레이블 하이그라운드와 계약하면서, 또 그전에 구두로 이미 계약을 약속한 게 아니냐는 의혹이 번지면서 여론은 더욱 험악해졌다.

김현유 BY 김현유 2022.02.08
 
인터뷰를 하다가 인터뷰이에게 뭔가 깨달음을 얻는 경우가 있다. 이 책의 커버를 장식한 카이 씨와 만났을 때다. 그는 이런 말을 했다. “전 평소엔 매우 플랫한 감정 상태를 유지하는 사람이거든요. 그런데 가끔씩 제 감정이 요동칠 때가 있어요. 그러면 ‘생각’이란 걸 하기 시작하죠. 내 감정이 요동치는 이유를 찾아내고 그것에 대해 많이 고민해요.” 그의 말을 듣고 명상의 이론이 떠올랐다. 마음을 비우고 고요한 수면 아래서 요동치는 감정의 정체를 살핀다. 그렇게 살펴보니 최근 선명하게 툭 하고 튀어나와 있는 나의 감정 하나가 보였다. 바로 분노였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나와 큰 상관도 없는 일에 대해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우리 집 거실 소파에 앉아 TV를 보며 소모하는 ‘쓸데없는’ 분노다. 이 하찮은 분노의 역사는 길고도 길다.
 
와, 짜고 치는 고스톱 너무 싫다.
2015년 여름의 어느 금요일 밤, 나는 우리 집 거실 소파에 누워 아내와 〈쇼미더머니4〉를 보며 극도의 분노에 휩싸여 있었다. 블랙넛이 ‘어차피 우승은 송민호’라는 명대사를 날리는가 하면, 죽부인을 들고 무대에서 성행위를 흉내 내는 바람에 온갖 연예 매체의 인턴 기자들이 토요일 아침에 쉬지도 못하고 〈쇼미더머니4〉와 관련한 기사를 쏟아내며 트래픽 이삭 줍기에 열중해야 했던 바로 그 시즌이다. 내 분노의 대상은 타블로와 지누션으로 이뤄진 프로듀서 팀 ‘팀 YG’였고 분노의 이유는 공정하지 못한 마이크의 향방이었다. 당시 〈쇼미더머니〉에는 특이한 룰이 있었다. 두 명의 래퍼에게 같은 곡으로 최종 리허설까지 다 시켜놓고 프로듀서가 마지막에 마이크를 주는 래퍼만 무대에 선다는 규칙이다. 마이크를 받지 못한 래퍼는 무대에서 실력을 증명할 기회도 얻지 못한 채 떨어진다. 팀 YG에선 수퍼비와 인크레더블이 누가 더 ‘오빠차’라는 노래를 잘 부르는지를 두고 싸웠다. 인크레더블은 가사를 절었다. 리허설에서 가사를 전 래퍼는 떨어지는 게 국룰이었다. 그러나 프로듀서 타블로는 두 래퍼의 우위를 판가름하기 힘들다며 리허설을 다시 할 것을 제안했고, 결국 최종 리허설에서 인크레더블을 선택했다. 그때 내 입에서 “와 진짜 싫다”는 말과 함께 욕설이 튀어나왔다. 이후 인크레더블이 타블로와 지누션의 소속사인 하이어뮤직과 계약하면서, 또 그전에 구두로 이미 계약을 약속한 게 아니냐는 의혹이 번지면서 여론은 더욱 험악해졌다. 대한민국 힙합 부흥의 트리거 〈쇼미더머니〉의 역사에서 가장 치욕적인 순간으로 남은 ‘오빠차 사건’의 전말이다.
 
공정을 위해 분노하는 건 어쩌면 일상에서 좀처럼 얻지 못하는 뿌듯한 경험이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예능 프로그램에서 벌어지는 일에 공정의 잣대를 들이대며 느끼는 분노는 간혹 매우 뿌듯한 감정을 보상한다. 2019년에는 역대급 사건이 벌어진 바 있다. 시작은 수학이었다. 그해 7월 〈프로듀스 X 101〉 네 번째 시즌의 데뷔 연습생을 모두 확정하고 끝난 후 몇몇 인터넷 커뮤니티에는 ‘7494의 비밀’이라는 내용의 글이 떠돌았다. 연습생들의 득표수 대부분이 7494로 나뉜다는 의혹이었다. 제작진이 실제 득표수를 발표한 것이 아니라, 일정한 득표 비율을 정해두고 고정된 상수를 곱해 발표한 게 아니냐는 의혹이 나왔다. 이 의혹에 엠넷은 부답으로 일관했고, 당시 내가 있던 뉴스룸 동료들 중에도 이를 커뮤니티 음모론쯤으로 치부하는 이들이 있었다. 이 사건이 이후에 어떻게 결말 났는지는 우리 모두가 안다. 문제가 불거졌던 네 번째 시즌뿐 아니라 앞서 있었던 모든 시즌에서 투표는 조작되었으며, 특히 시즌 4에는 실제 투표상 최종 순위 10위 안에 뽑힌 3명의 연습생이 조작을 통해 탈락한 사실이 드러났다. 안준영 PD는 징역 2년, 김용범 CP는 징역 1년 8개월을 선고받았다. 내가 한 일이라고는 분노한 것뿐이었지만 대법원이 원심 형량을 확정했을 때 2년에 걸친 나의 분노는 뿌듯함의 절정에 달했다.
 
분노에 반드시 공정의 잣대가 필요한 것도 아니다. 공정과 전혀 상관없는 일에서도 가끔 울컥울컥 화가 난다. 그렇게 화를 내는 것이 시간을 잊을 만큼 즐거운 일이라는 사실을 발견한 건 최근이다. 시청률도 화제성도 매우 저조한 〈피의 게임〉이라는 예능이 있다. 간단하게 말하자면, 게임에서 이겨야 살아남는 〈더 지니어스〉와 유튜브 채널 진용진의 기획 ‘머니게임’을 결합한 서바이벌 예능이다. 참가자들은 편을 나눠 카드 게임, 수식 만들기 게임 등을 치르고 진 편에서 투표를 통해 정해진 인원이 탈락한다. 탈락이 참가자들의 투표로 결정되기 때문에 짜고 편을 먹거나, 거짓 혹은 사실로 상대를 모함하고 배신하는 등의 모든 모략이 허용된다. 그야말로 아사리판에서 누가 살아남는지 보는 것이 이 프로그램의 재미다. 한참 빠져서 보던 중 “전 제가 한 말을 지켜야 해서 배신은 못 하겠어요”라고 말하는 한 참가자를 증오하는 나를 발견했다. “제일 싫어. 어차피 다 배신하는 판인데 혼자 갑자기 착한 척이야”라는 말을 아내에게 내뱉고는 내가 한 말을 다시 생각했다. 나는 아사리판에서 살아남기 위해 아무렇지도 않게 남을 밟는 참가자보다 아사리판에서라도 콩알만 한 자신의 신념을 지키고자 하는 사람을 더 미워하고 있었다. 그런 분노는 마치 엽기떡볶이와도 같다. 소화하는 것만으로도 지치고 힘들지만, 매주 방송 시간이 되면 다시 찾는다. 그날 이후 나는 내가 그저 분노를 즐기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간혹 일간지 기자들에게 ‘분노와 증오가 가장 잘 팔린다’라는 말을 듣곤 했다. 지금도 이 말이 틀렸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앞으로는 같은 말이지만 바꿔 말할 수 있겠다. “분노와 증오가 세상에서 가장 재밌을 때가 나에게도 있더라”라고. 분노와 증오를 신나게 즐기자는 뜻이 아니다. 나는 그리고 어쩌면 당신도 가끔은 격하게 분노와 증오를 즐길 수 있는 사람이라는 걸 인정해보자는 의미다. 지난 11월에 만난 개코 씨는 “어디 욕할 대상 없나 찾던 사람에게는 분노의 창구를 만들어주는 게 결국 힐링”이라는 말을 한 적이 있다. 그 말을 들으며 남 얘기인 척 혀를 쯧쯧 찼던 나 자신이 부끄러워졌다. 나의 분노가 가진 다른 이름은 뭘까? 타블로가 인크레더블의 손에 마이크를 쥐어줬을 때, 거친 말과 함께 내 온몸이 뿜어내던 열기는 분노할 기회를 반기는 기쁨의 아드레날린이 아니었을까? 온라인 미디어의 뉴스룸에서 〈프로듀스 X 101〉의 투표 조작 의혹에 대한 기사를 써 내려갈 때, 혹시 난 신나 죽겠다는 즐거운 표정을 짓고 있었던 건 아닐까? SNS의 구천을 떠도는 악플러들을 분노의 노예가 되었다며 불쌍하게 여기지만, 나 역시 공정에 기대 방구석에서 분노하는 것으로 힐링하고 있었던 건 아닐까? 생각해보라. 수퍼비가 마이크를 못 받은 일은 6년도 더 전이다. 그게 지금까지 이렇게 자세히 추억하며 주접을 떨 일인가? 나만 분노를 즐기는 쓰레기일까? 아닐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너무 슬프고 외롭지 않은가. 누구나 각자의 방에서 나름의 방식으로 분노를 즐기고 있다고 생각하는 편이 마음이 평안하다. 각종 위키에 ‘사건/사고/논란을 검색해보라. 아무런 대가 없는 익명의 사가들이 일필휘지로 적어낸 그 방대한 분노의 기록은 누구에게나 분노의 다른 이름이 기쁨일 수 있다는 사실을 방증하는 건 아닐까?
 

 
Who's the writer?
박세회는 〈에스콰이어 코리아〉의 피처 디렉터이자 소설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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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DITOR 김현유
    WRITER 박세회
    illustrator VERANDA STUDIO
    DIGITAL DESIGNER 김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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