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폴리에서 차로 30분가량 달리면 한적한 마을이 나타난다. 키톤의 본사와 아틀리에가 있는 아르차노(Arzano)다. 키톤의 창립자 치로 파오네(Ciro Paone)는 1968년 이곳에서 처음 브랜드를 설립했고 나폴리 전통 테일러링과 장인 정신에 대한 존중, 품질에 대한 열정으로 키톤을 최고급 슈트의 대명사로 만들었다. 키톤은 여전히 가족 경영 체제를 유지하고 있다. 창립자 파오네의 가족과 친척들은 대부분 브랜드의 중역을 맡고 있으며 아직도 나폴리 주변에 모여 산다. 창립자의 철학과 비전을 계승하는 혈연적 유대. 어쩌면 이것이 오늘날까지 키톤을 가능케 한 저력인지도 모른다. 슈트를 입는 사람이 줄어든 요즘도 이들은 흔들림 없이 브랜드의 유산을 이어가고 있다. 그것이 마치 자신의 소명인 것처럼.
키톤 본사에 들어서면 매끈하게 연마한 대리석 바닥과 웅장한 계단, 이탈리아 남부의 빛을 받아들이는 커다란 천창이 방문객을 환대한다. 클래식한 빌라와 신식 빌딩, 두 개의 건물을 하나로 연결한 독특한 구조. 공간은 그 자체로 키톤의 과거와 현재, 시작과 발전을 한눈에 보여주는 전시관 같았다. 긴 복도를 따라 미로처럼 이어진 공간 곳곳에는 파오네 가문이 수집한 방대한 그림과 예술품도 전시되어 있었다. 키톤의 장인들과 아름다움을 공유하고 싶어 한 창립자 치로 파오네의 유지를 따라서.
슈트의 시작은 패브릭. 본격적인 투어도 슈트 원단을 모아놓은 보관소에서 시작했다. 문을 열고 보관소로 들어서면 빼곡히 쌓인 수천 개의 패브릭 롤을 마주하게 되는데, 순간 그 방대한 양에 압도당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각각의 이야기를 담고 있을 원단이 보석처럼 반짝이는 것 같기도 했다. 이곳에 있는 대부분은 원단은 카를로 바르베라(Carlo Barbera)가 키톤을 위해 특별히 제작한 것. 이들은 지난 2009년 유서 깊은 모직 공장 카를로 바르베라를 인수해 원단의 패턴과 텍스처, 염료, 직조에 대한 폭넓은 가능성을 확보하고, 한층 더 조직적이고 통합적인 생산 체계를 마련했다.
허락을 구하고 원단을 직접 만져보기로 했다. 가장 먼저 손이 간 것은 키톤의 대표적인 패브릭 솔라로(Solaro)였다. 키톤이 처음 제작한 13.2마이크로미터의 이 초극세 울 패브릭은 테일러링계에서 우아함의 상징으로 통한다. 부드러운 감촉과 은은한 광택, 주름이 쉬 지지 않고 양면을 모두 활용할 수 있는 특징 덕분에 안감이 없는 나폴리식 슈트 마감에 이상적인 원단으로 꼽힌다. 12.8 마이크로미터 원사로 직조한 세계에서 가장 얇은 울 패브릭도 무척 놀라웠다. 실크에 비견할 만큼 부드럽고 가벼운 이 원단 역시 카를로 바르베라에서 제작한 것이라고 했다. 곧이어 담당자는 우리를 비쿠냐 패브릭 앞으로 안내했다. 캐시미어보다 부드럽고 가벼우며 연성이 뛰어나 패브릭의 보석이라고 불리는, 세상에서 가장 귀한 원사. 여름철에도 시원하게 입을 수 있는 서머 비쿠냐, 데님처럼 텍스처를 살린 데님 비쿠냐, 독특한 양면 패턴을 지닌 자카르 비쿠냐가 특히 눈길을 끌었다. 비쿠냐로 만들 수 있는 원단이 이렇게나 많다는 걸 그때 처음 알게 됐는데 담당자는 비쿠냐를 이처럼 다양하게 활용할 수 있는 곳은 키톤뿐이라고 자랑스레 설명했다. 신중하게 고른 원사, 고유의 특성을 보존하기 위한 최적의 직조 방식, 다채로운 컬러와 텍스처… 키톤의 패브릭을 직접 만져보니 이들의 열정이, 진심이 손끝에서부터 전해졌다.
최고급 원단을 쓴다고 모두 하이엔드가 되는 것은 아니다. 좋은 원단일수록 다루는 방식이 중요하니까. 키톤의 슈트와 재킷은 어떤 방식으로 제작되는지 궁금해졌다. 우리는 재킷이 만들어지는 아틀리에로 발걸음을 옮겼다. 키톤이 보유한 장인은 약 350여 명. 담당자는 장인들의 담당 파트가 구분되어 있으며, 키톤의 모든 제품이 이들의 손을 거쳐 100% 수작업으로 완성된다고 설명했다. 원단을 고르고 적합한 실을 선택하는 단계부터 재단, 봉제, 마감에 이르는 전 과정을 처음부터 끝까지 함께한다는 것. 실제로 건축 도면처럼 복잡하게 디자인된 키톤의 재킷은 1800단계를 거쳐 제작된다. 최고의 품질을 보장하고 모든 디테일을 케어하기 위해 재킷 한 벌을 만드는 데 무려 25시간이 걸린다. 그래서 매일 제작할 수 있는 수량도 100여 벌에 불과하다. 실제로 아틀리에에서 재킷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볼 수 있었는데 패턴을 자르고 가봉하며 지퍼와 단추, 심지어 단춧구멍을 마감하는 과정도 모두 장인의 손으로 이뤄졌다. 8kg의 빈티지 아이언으로 일일이 재킷을 다림질해 자연스러운 부드러움을 더해주는 마무리 과정도 인상적이었다.
최고의 원단, 정교한 재단과 깐깐한 공정, 수백 명의 장인이 쏟는 시간과 정성, 고집스럽게 고수하는 나폴리식 테일러링… 키톤의 아틀리에를 둘러보고 나니 이들이 만드는 슈트는 단순한 옷이 아니라 어떤 태도나 신념의 산물에 가까워 보였다. 전통을 계승하고 발전시키는 것, 우아함과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것, 시간과 품을 아낌없이 쏟아 이상에 가까운 결과를 만들어내는 것. 키톤이라는 이름 안에선 이 모든 가치가 같은 의미로 읽히는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