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FE
'카톡 방 호러'에 관한 단상 "당신의 우정은 얼마나 무겁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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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 때가 왔다. 슬랙을 써야만 했다. 슬랙은 클라우드 기반 메신저 및 프로젝트 관리용 협업 툴이다. 업무 협조와 보완을 위해서는 카톡에서 직장 조직 관련 방들을 모조리 지우고 슬랙으로 옮겨가야만 했다. 몇 달 써보니 이게 꼭 나쁜 일은 아니었다. 개인 사생활 보호라는 부분에서도 장점이 있었다. 슬랙을 쓰면서 직장 컴퓨터에서는 아예 카톡을 지웠다. 당연히 몇몇 직원들과 나눈 회사 관련 뒷담화 같은 것은 내 컴퓨터에 저장되지 않았다. 먼 훗날 누군가가 나를 배임으로 고소할 수도 있을 증거 같은 것은 내 스마트폰에만 남게 된 것이다. 아이폰이라 비밀번호를 주지 않으면 열 수도 없다. 물론 내가 배임이 될 법한 대화를 나눴다고 주장하는 게 아니다. 예를 들자면 그렇다는 거다.
지난 몇 달간 가장 거대한 언론 홍보 효과를 누린 회사는 카카오일 것이다. 김범수 의장 구속 관련 이야기는 아니다. 도대체 몇 달간 지속됐는지도 더는 기억할 수 없는 하이브-민희진 사태 이야기다. 카톡을 처음 깐 건 민희진이다. 나는 그걸 보며 ‘상당히 영리하네’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딱히 전체적인 이야기와 결이 맞아떨어지는 건 아니지만 밈(meme)이 될 법한 카톡 내용만 살짝 공개한 것이다. “에스파 밟을 수 있죠?” “즐거우세요”가 화면에 뜨는 순간, 모든 것은 밈의 영역이 되어 폭발했다. 그리고 2024년의 장마처럼 징글징글하게 긴 카톡 전쟁이 시작됐다.
어느 날 평소처럼 네이버 뉴스 앱을 열었다. 모든 게 갑자기 지겨워졌다. 양쪽이 또 주고받는 중이었다. 구어체 기사 속에서 무속인과 주고받은 대화가 줄줄이 이어지는 순간이 절정이었다. 지겨움의 절정 말이다. 도대체 우리는 왜 실질적으로는 법률 다툼에 전혀 도움이 될 것 같지 않은 카톡 캡처본을 읽어야만 하는가 말이다. 사실 하이브도 알고 있을 것이다. 이런 자료가 딱히 법적으로 유리한 위치를 만들어주는 건 아니라는 사실을 말이다. 이건 그렇다면 이미지 싸움이다. 어차피 엔터테인먼트업계는 가오가 중요하다. 가오가 상하면 그 이후부터는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다. 민희진 대표가 “나는 명예가 너무 중요하고 그걸로 살아온 사람이거든요. 근데 이 새끼들이 내가 명예가 중요한 걸 알아…”라고 말한 이유가 다 있는 것이다.
나는 뉴진스의 열성적인 팬이지만 이 글에서는 하이브 편도 민희진 편도 들 생각이 없다. 중요한 건 이거다. 나의 가장 사적인 대화가 (하이브의 논리에 따르면) 회사 클라우드에 저장돼 있었기 때문에, 혹은 (민희진의 논리에 따르면) 반납한 컴퓨터를 포렌식해, 어쨌거나 유출되어 세상에 까발려진다면? 그렇다면 당신은 어떻게 할 것인가. 나의 카톡에는 수많은 방이 존재한다. 가장 친한 친구들과의 방은 딱히 걱정할 필요가 없다. 잠깐만. 내 우정이 그렇게 단단하던가? 아니다. 사람을 불신하는 마음은 품지 말자. 그러나 나의 우정을 너무 믿지도 말자. 위험한 방도 몇 개 있다. 이를테면 페이스북으로 친해진 친구들과의 방이다. 겹치는 멤버로 구성된 방이 몇 개나 있다. 당연히 그 방들은 비슷한 성향을 가진 사람들로 구성된 방이다. 꽤 친하다. 흠. 나는 친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페이스북의 우정도 너무 믿지는 말자.
어느 정도 친하다고 생각하며 친해지면 문제가 생긴다. 어느 순간 다 함께 비슷한 정치적 성향과 유머 감각을 공유한다고 확신하는 순간부터가 진짜 문제다. 그런 방에서는 그 방만의 선이 생기고 그 선 안에서, 종종 그 방 바깥의 정치적 올바름의 테두리를 너머서는 개그를 마구 치게 된다. 예를 들어달라고? 나도 예를 들고 싶지만, 그걸 여기에 밝히는 순간, 글쟁이로서 나의 생명은 끝이다. 말할 필요도 없다. 영영 종말이다. 그래도 비슷한 예를 들자면? 이런 개그다. 2008년 오바마가 대통령이 되는 순간을 친구 몇 명과 지켜보고 있었다. 우리 모두 오바마의 열정적인 팬이었다. 당선이 확정되는 순간, 친구 중 한 명이 과장된 경상도 아재 말투로 말했다. “깜X이가 대통령이 되다니 말세다 말세.”
우리는 웃었다. 죽을 것처럼 웃었다. 서로의 유머를 잘 이해하는 친구들이었으니 통용되는 유머였다. 만약 이걸 아주 냉철하고 객관적인 톤의 글로 풀어 쓴 다음 커뮤니티에 올린다면? 말한 친구도 웃은 우리도 모두 인종차별주의자가 된다. 아무리 반박 글을 써도 소용없을 것이다. 반박 기사나 반박 글이 원글만큼 많이 공유되는 일은 인류 역사상 없었다. 나는 지금도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않을 뿐만 아니라 내 개인의 치부까지 모조리 드러나는 올바르지 않은 정보들에 대해 생각하고 있다. 가만 생각해보니 나도 무속인과 나눈 대화가 있다. 신점을 치는 분들은 아니다. 이런 젠장. 그렇다. 분‘들’이다. 두 분이나 있다. 한 분은 수원 왕갈비 근처에서 사주를 보는 분이다. 다른 분은 한강 부근 오피스텔에서 별점을 치는 분이다. 두 분은 직업적으로 매우 높은 자부심을 가졌다. 카톡으로 1년간 애프터서비스도 해주신다고 하셨다. 나로서야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이었다.
당연히 나는 카톡으로 종종 이런저런 일들을 물어봤다. 일과 관련된 고민 같은 것도 친구처럼 물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만약 내가 슬랙을 쓰던 인터넷 미디어에 다니던 중 배임으로 고소당해 내 카톡을 법정 앞에서 줄줄이 까야 하는 상황이 왔다면? 그렇다. 나는 무속으로 매체를 경영한 ‘무속 언론인’이 됐을 것이다. “피고 김도훈은 지난해 무속인의 명령을 받고 회사 사무실 이사를 반대한 적이 있습니까?” “아니 어차피 이 사무실 올 때도 이사님이 풍수지리 보셨다면서요?” “그 사실이 남아 있습니까?” “아니 저도 말로 들은 거라.” “카톡 증거가 없으면 피고는 닥치세요.”
지난달엔 언론인 단톡방 하나가 터졌다. 국회와 대통령실 출입하는 남성 기자 3명이 최소 8명 이상의 같은 언론인을 대상으로 성희롱 발언을 오랫동안 나눈 것이 발각된 것이다. 남성 피해 사례도 있다고 한다. 가히 젠더 플루이드한 시대다. 단톡방 대화가 어떤 방식으로 유출됐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두고 볼 수 없었던 같은 단톡방 이용자의 폭로라면 나는 박수를 칠 것이다. 자, 여기까지 글을 읽은 독자 여러분 중 몇몇은 분명히 마음속으로 이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재수가 없었네’ 이유는 간단하다. 여러분에게도 감추고 싶은 단톡방이 있기 때문이다. 겉으로는 피해자에게 이입해야 한다는 사실을 너무 잘 알면서도 아주 약간의 우리 마음속 심연은 우리와 비슷한 인간에게 이입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걸 말로 꺼내어 말해선 안 된다.
문제는 거기에 있다. 말로 꺼내어 말하면 안 되는 심연이 어떤 통로로든 결국 기어 나오고야 말았다. 말을 글로 꺼내어 쓸 수 있는 메신저가 우리에게는 너무 많은 탓이다. 결국 ‘업무용 메신저에서 할 수 없는 말은 개인용 메신저에서도 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지키며 살아가야 한다. 그러나 인간이 어디 그렇던가. 우리는 결국 같은 실수를 할 것이다. 올바르지 못한 온갖 발언들이 유머로 뒤엉킨 단톡방의 기록은 내 스마트폰에서 지워도 허공의 구름 속에 저장되고 있다. 결국 기댈 것은 우정뿐이다. 믿음이다. 여러분은 단톡방의 그 모든 사람을 얼마나 신뢰하고 있는가. 방시혁 의장과 민희진 대표가 처음 만났던 때만큼 서로를 깊이 믿고 있는가? 지금 당신의 등줄기에 식은땀이 흐르고 있지는 않은가?
김도훈은 글을 쓰는 사람이다. <씨네 21> <geek>과 <허프포스트>에서 일했고, 에세이 <우리 이제 낭만을 이야기합시다>를 썼다.
Credit
- EDITOR 박세회
- WRITER 김도훈
- ILLUSTRATOR MYCDAYS
- ART DESIGNER 주정화
JEWELLE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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