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FE

30년전 서울의 모습은?

홍대, 서촌, 영등포 그리고 강남

프로필 by 박호준 2025.10.03
 2000년대 초, 국내 테크노 신을 이끌던 식보이 프로덕션이 열었던 팻보이 슬림 파티의 모습.

2000년대 초, 국내 테크노 신을 이끌던 식보이 프로덕션이 열었던 팻보이 슬림 파티의 모습.

빨간 구두의 행복한 저주

운명을 바꾼 결정적 순간이 있다. 갑자기 ‘스카(Ska)’를 찾아 나간 그 밤이다. 스카를 만난 건 정확히 말하면 1996년으로 이 기사의 기획인 1995년에선 살짝 벗어나지만, 그 시대 홍대 앞 분위기를 환기하기엔 큰 무리가 없을 것이다. 여하튼 당시 나는 이화여자대학교의 한국무용과 3학년으로, 무용실에 매여 있기보다 신촌 ‘락블럭’을 드나들며 불법으로 복제된 MTV에 흠뻑 빠져 있었다. 어릴 때부터 한국무용을 전공하고 사회가 정해놓은 길을 가야 하는 무용수로서는 좀 유별난 음악 애호가였달까.

그러던 어느 날 홍익대학교 앞에 있는 ‘스카’라는 음악이 좋고 재미난 곳이 있다는 말을 친구에게 스쳐 지나가듯 들었다. 신촌 락블럭의 지하 세계에서 음침하게 음악을 듣던 나에겐 솔깃한 정보였다. 온 가족이 제사로 집을 비운 밤, 나는 스카를 향해 길을 나섰다. 구글맵도, 카카오 지도도 없고, 스카의 전화번호도, 위치도, 스카의 간판이 어떻게 생겼는지도 모른 채 무작정 홍대로 향한 것이다. 홍대 정문 앞 공중전화에서 친구에게 전화해 물었으나, 스카의 존재를 알고 있는 그녀의 오빠는 집에 없었고 전화를 끊자 12시, 거리의 불들이 꺼지기 시작했다. 믿기 어렵겠지만 그땐 12시 이후 심야 영업이 불법이던 시절이다.

정처 없이 걷던 중 붉은 벽돌 건물 1층 검은 유리문 하나를 발견했다. 빛도 새어 나오지 않고 음악 소리도 전혀 들리지 않았지만 분명 뭔가 이상했다. 적막한 거리를 좁히며 천천히 건물에 다가가자 갑자기 딸깍 그 검은 문이 열리며 누군가가 다짜고짜 물었다. “혼자 오셨어요?” 나는 그렇게 “여자 한 명, 여자 손님 한 명”이라는 무전 소리를 들으며 돌계단을 거쳐 2층 미용실을 지나 3층으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돌계단이 나무 계단으로 바뀌며, 희미한 비트가 들리기 시작했고 심장이 쿵쾅쿵쾅 뛰었다.

“I will never know cause you will never show. come on and love me now.” 하필이면 그토록 사랑하던 카디건스의 ‘카니발’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테이블 8개가 놓인 작은 플로어(그때는 그곳이 그토록 찾던 스카라는 것도 몰랐다)에서 맥주병을 들고 몸을 흔들며 노래를 따라 흥얼거리는 사람들을 지나 바에 앉았다. 그날 처음으로 마신 잭 콕, 바 안쪽의 디제이 부스, 담배를 물며 대구포를 구워 주던 바텐더의 뿔테 안경까지 모든 이미지가 지금도 선명하다.

나의 홍대 10년은 그렇게 시작됐다. 나의 홍대 시절은 1기와 2기로 나뉘는데 주로 스카에 앉아 학교 밖 세상을 탐하던 시절, ‘스팽글’과 ‘이스크라’ ‘팬진공’ ‘마스터플랜’ ‘88우짜집’과 ‘기찻길 고깃집’에서 인디 밴드의 그루피(groupie)로 격렬히 놀며 무용 밴드 ‘림보’를 만들어 ‘언더그라운드’와 ‘발전소’ ‘클럽 빵’에서 공연을 하며 놀던 시절이 1기다.

처음 스카를 발견하고 무려 3년간 단 한 번도 흘러나오는 음악에 맞춰 춤을 추지 않았다. 그저 내 전용석인 냉장고 옆자리에 앉아 잭 콕을 마시며 음악을 들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남들에게 보여주는 것이 아닌, 내가 즐기기 위해서는 어떻게 몸을 움직여야 하는지를 몰랐던 것 같다. 나의 막혀 있던 기혈을 뚫어준 것은 영국의 일렉트로닉 밴드 ‘언더월드’였다. 어느 날 갑자기, 디제이 언니가 언더월드의 곡을 트는 순간, 난 자리에서 일어나 춤을 추기 시작했다. 한번 신으면 춤을 멈출 수 없다는 ‘빨간 구두’의 저주, 바로 2기가 시작된 순간이었다. 지금은 아는 사람이 드문 전설의 클럽 ‘상수도’에서 으스스한 테크노에 맞춰 춤을 추고, 힙합 클럽으로 바뀌기 전의 NBINB에서 일렉트로닉 음악과 춤에 빠졌다.

1998년부터 2004년까지 ‘마트마타’ ‘명월관’ ‘MI’ ‘히란야’의 스피커 앞에서 아무도 돌아보지 않고 혼자 춤만 추는 여자를 봤다면, 특히 마트마타의 가장 오른쪽에 있던 스피커에 바짝 붙어서 전동 안마기처럼 진동을 느끼던 사람을 봤다면, 그건 나였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나는 그 시절이 문화의 전환기이자, 나의 변곡점이었다고 본다. 미군 부대 앞에 가수와 악사들이 모이고, 압구정의 유학생들이 미국에서 들고 온 앨범을 돌려 들으며 한국의 힙합이 탄생했던 때처럼, 1990년대 후반의 홍대는 호르몬과 세기말 정신을 연료로 부글부글 끓고 있었다. 사실 그렇게 보낸 10년 동안 나는 생산한 것이 없다. 누군가가 자기 파괴적이라고 말해도 할 말은 없다. 그러나 나는 열심히, 막무가내로, 넘치도록 춤과 음악을 사랑했다. 지금 보니 빨간 구두의 저주는 온전한 축복이다.

WHO’S THE WRITER? 이양희는 공연예술의 언어를 다루는 예술가로, 일시적 극장을 만들거나 전시 형태로 작품을 선보인다. 한국 (신)전통 무용수로 출발하여 1990년대 한국에 부흥했던 언더그라운드 클럽 문화를 주체적으로 향유한 이양희는 '전통과 동시대 예술'이라는 혼종과 미지의 영역을 자기 몸의 역사로 관통한다. 1990년대 홍대의 시간을 담은 그녀의 작품은 <헤일> <헤도니스트> <어피셔나도> <쉬머링> 등이 있다.


1996년 철거가 완료된 국립중앙박물관(구 조선총독부) 건물 앞.

1996년 철거가 완료된 국립중앙박물관(구 조선총독부) 건물 앞.

애도와 사랑의 노래

1995년 8월 15일 광복 50주년. 경복궁 근정전 앞 암 덩어리처럼 자리하던 구 조선총독부 건물이 철거를 시작했다. 생중계된 것은 물론 전국에서 많은 사람들이 모여 지켜봤다. 당시 11살이던 나도 그곳에 있었다. 그땐 총독부 건물이 국립중앙박물관이었는데 하루가 멀다하고 그곳에 가서 만두를 먹었다. 반짝이는 상앗빛 대리석 계단을 우아하게 올라가던 나의 발과 어깨, 광장에 서면 높은 층고에서 웅장하게 들리던 사운드스케이프, 형광등이 아닌 노란 조명, 그리고 김이 솔솔 나던 만두까지 조선총독부 건물은 나에게 박물관 건축의 첫 경험이자 오감도가 열린 곳이다. 그곳이 철거되는 걸 보는 건 무척 충격이었고 오랫동안 기억에 남았다.

1995년 서촌의 이야기는 여기서 시작된다. 경복궁을 중심으로 동심원을 이루며 자리하는 동네 서촌은, 인왕산과 북악산을 병풍처럼 두르고 경복궁과 사직단이라는 조선 민족정기의 대표 건축물을 양 끝에 두고 자리한다. 유난 없이 지어진 집들이 자연과 동승하고, 높게 뻗은 콘크리트 아파트가 없어서 눈 돌리는 곳마다 산과 구름이 품에 안긴다.

나는 필운동에서 태어났다. 가끔 눈을 감고 그 집으로 간다. 담쟁이넝쿨이 붙어 있던 벽을 따라가면 나오는 알루미늄 대문, 벽의 길이에 비해 대문이 작아서 이상한 나라로 빨려 들어가는 것 같았던 입구를 지나면 양 갈래로 아이리스가 웅성거리며 가득 피어 있었는데 지금도 그 길이 그리워 눈물이 날 때가 있다. 꽃이 흐드러지게 피는 계절엔 길까지 보라색 얼굴이 들이밀어 흙으로 잘 넣어주던 내 손이 떠오른다. 계단참이 세 개나 있던 높은 계단을 오르면 강아지들이 꼬리를 흔들며 반겨주었다. 많게는 7마리까지 키웠는데 모두 길에서 만난 아이들이었고 내 일상의 대부분은 집 나간 개를 잡으러 다니는 일이었다. 울면서 동네를 휘젓고 다니는 나를 보면 동네 어르신들이 또 개가 집을 나갔냐며 함께 찾아주시곤 했다. 그 후로 체부동, 청운동, 누상동, 누하동, 효자동에서 살았고, 지금은 부암동에 산다. 서촌의 거의 모든 곳에서 살아본 셈이다.

놀랍게도 그때와 지금이 별 차이가 없다. 떡볶이 가게가 줄지어 있던 체부동 시장은 다양한 맛집이 즐비한 최고 상권이 되었고, 조흥은행은 우리은행으로, 누상동, 누하동의 한옥들은 낮은 다세대 주택이 된 정도다. 시간이 차곡차곡 쌓여 변한다기보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시대의 흐름을 거슬러 갑작스레 뒤집히는 쪽에 가깝다. 청와대 길에 통행금지 시간이 정해지거나, 총을 든 군인이 가방을 검사하는 장면을 불과 작년에 마주했으니 말이다.

1995년 내가 추억하는 서촌은 조선총독부 철거라는 거대한 역사의 소용돌이 옆에서 묵묵히 제자리를 지키며 소란한 시대의 이야기를 차분히 받아 안아주던 동네였다. 그날 이후로 나는 서촌을 단순한 거주지로 기억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거대한 담장 안에서 국가의 서사가 쓰일 때, 담장 밖에서 개인의 목소리를 잇고 삶의 시간을 겹쳐내는 또 하나의 궁이었다. 2025년의 서촌은 여전히 그렇게 존재한다. 올해 그 연속선 위에서 나는 <경복궁 생각>의 총감독으로 경복궁 전체 공간을 톺아보는 전시를 만들었고 서른 해 전, 어린 시절 철거 현장에서 느꼈던 충격과 웅성거림이 이번에는 수많은 관람객의 시선 속에서 또 다른 울림으로 되살아나게 도왔다. 전시를 준비하며 경복궁과 혈관처럼 얽히고 이어진 서촌의 길을 오가던 동안, 단순히 과거를 간직하는 공간이 아니라 시대의 굴곡을 품고 끊임없이 거듭나는 장소임을 실감했다.

정권에 따라 불쑥 예상하지 못한 일이 벌어질 때도 있지만, 기본적으로 서촌은 특정한 시기의 유행이나 도시개발 전략에 휘둘리는 편이 아니다. 상대적으로 시간이 느리게 흐르는 것 같은 골목과 마당, 담벼락과 시장, 그사이를 흐르는 사람들의 이야기 속에서 제 빛깔을 변주해낸다. 지금도 이곳을 걸으며 어린 시절의 아이리스 향을 맡고, 군인들의 총부리 앞에서 떨리던 가방 검사의 기억을 불러낸다. 그리고 알아차린다. 서촌이 품은 힘은 ‘변하지 않음’이 아니라, ‘변화를 견디는 능력’에 있다는 것을 말이다. 그래서 서촌은 나에게 언제나 엘레지, 곧 애도의 노래이자 사랑의 노래다. 잃어버린 것들을 기리는 동시에 여전히 살아 있는 것들을 어루만지는 노래. 1995년의 서촌이 그랬고, 2025년의 서촌 또한 그러하다. 그리고 앞으로의 서촌 역시 우리 모두의 불안과 희망을 함께 기록하며 서울이란 도시 속에서 가장 오래된 미래가 되어줄 것이라 믿는다.

WHO’S THE WRITER? 최인선은 음악, 미술, 브랜드 기획을 넘나들며 구조화된 전략과 서사를 설계해온 기획자이자, 바그네리안 대표다. 작곡 전공 후 클래식 음악 콘텐츠 디렉터로 경력을 시작했으며, 현재는 글로벌 기업들과 아트 프로젝트를 만들고 있다. 2025년에는 국가유산청 주최의 <경복궁 생각> 전시 총감독으로 참여했으며 예술성과 전략, 실무력과 해석력을 기반으로 다층적 기획을 수행하는 중이다.


아날로그 열차 상황판, 대우전자 광고가 걸려 있는 영등포역 역사 안.

아날로그 열차 상황판, 대우전자 광고가 걸려 있는 영등포역 역사 안.

영등포 펜스테이션

서울 토박이 아버지는 1995년 해체된 국립중앙박물관 건물을 끝까지 중앙청이라 불렀다. 우리 본가는 중앙청 뒤 자하문터널을 지나면 나오는 세검정의 낡은 한옥이었다. 자하문터널을 지나 직진하면 나오는 상명여대 사거리의 도로 가운데에는 바리케이트와 무장군인 초소가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상명여대는 1996년 상명대로 전환됐고 문민정부부터 청와대 앞길엔 일반 차량 통행도 제한적으로 가능해졌다.

본적지는 세검정 옆 신영동이지만 자란 곳은 서울 서남권이다. 강남도 강북도 아닌, 흔히들 서울이라 생각하지 않는 동네다. 내가 살던 동네는 1995년 3월 구로구에서 금천구로 분리됐다. 지금도 서울에서 도시철도 접근성이 가장 낮은 곳이라 70번, 108번, 133-2번 등의 버스를 타고 지하철역으로 가야 했다. 지금 보기엔 경기도 버스처럼 보이는 이 버스 번호들은 당시 서울시장이었던 이명박 전 대통령이 2004년 서울 대중교통 개편을 추진하며 전부 이름이 바뀌었다.

그때 내게 세상에서 가장 크고 복잡한 번화가는 영등포역이었다. 엄마가 부산 사람이라 1년에 한 번씩 기차를 타고 부산에 가던 때였다. KTX 개통 전이라 서남권 사람들은 굳이 서울역에 갈 필요가 없었다. 우리 가족 역시 영등포역에서 부산 가는 기차를 더 자주 탔다. 당시 영등포역은 번화가를 넘어 다른 세계로 통하는 통로 같은 느낌이 들었다. 서울역에 비해 어두워서 더 그리 느낀 것 같다.

영등포역의 어두컴컴함에도 시대적 조류가 있다. 영등포역은 한국 최초로 일본풍 민자역사개발로 만들어져 철로 위에 롯데백화점 영등포점이 세워진 구조다. 백화점과 말 그대로 일체화된 영등포역은 특유의 분위기가 있었다. 컴컴한 가운데 빛나는 간판의 인공 조명들, 이제 막 디지털화가 진행되기 시작한 열차 상황판, 어린 눈으로 보아도 세상이 넓구나 싶은 생각이 드는 다양한 종류의 인간군상, 간장과 고추장과 기름 냄새가 뒤섞인 음식 파는 곳들, 컴컴한 플랫폼으로 들어오는 디젤 기차의 기름 냄새까지 오감을 자극하는 도회지의 요소가 전부 그곳에 있었다. 나중에 가본 뉴욕 펜스테이션 지하가 그와 비슷했다.

중3 때인 1999년 영등포로 이사 와서 약 20년 가까이 이 동네에서 산 내게 영등포는 밝지도 어둡지도 않은 그저 영등포다. 다만 그때 영등포는 더 컸다. 서울 3대 도심 중 하나였다. 백화점만 3개라 당시 전통적 부촌인 여의도에서도, 신흥 중산층 지역인 목동에서도 영등포의 백화점에 왔다. 롯데와 신세계가 영등포점을 냈고, 1995년에는 신세계백화점 옆에 경방필백화점이 생겼다. 경방필백화점의 광고 모델은 박상원. 당시 개국 초창기였던 SBS 창사특집 드라마 <모래시계>에 출연해 인기가 높았던 시절이다.

영등포역을 지나 지하상가로 가면 문제집을 할인판매하는 큰 서점이 있었다. 거기서 가장 싼 문제집을 사서 풀며 대학에 갔다. 지하상가는 그때도 컸지만 무섭지는 않았다. 당시 서울 청소년에게 정말 무서운 곳은 동대문이나 이태원, 특히 이태원이었다. 6호선 개통 전의 이태원은 정말 무서운 별세계였다. 어렸으니 경방필백화점 뒤 성매매단지도 몰랐다. 그분들은 그곳에 있기만 했다. 지금도 거기서 10분 거리에 영등포초등학교가 있다. 영등포는 그런 곳이다.

영등포는 부도심으로서의 기능을 여전히 수행하는 중이다. 미군이 떠난 이태원과 전통적 공장지대가 떠난 성수와는 다르다. 문래동에서 1번 국도로 이어지는 경인권/경기권 공업지역이 살아있으며 영등포 권역 주변에 있는 유통상가와 공구상가 역시 활발하다. 문래동에서 가장 잘 되는 식당이 그 동네 금속가공집 사장님보다 매출이 높을 것 같지 않다.

영등포는 계속 개발되고 있다. 교통은 부동산의 영원한 변수고 영등포는 교통의 요지니 말이다. 그래도 내게 영등포는 똑같이 영등포다. 쇠 깎는 냄새, 근로자들이 자주 가는 양 많고 간 센 식당들. 내 눈엔 아직 그런 게 먼저 보인다. 경방필이 타임스퀘어가 되어 영등포에 롤렉스 매장이 들어와도 그 땅 소유주는 똑같이 경방이다. 그것처럼 영등포도 내게 여전히 영등포다. 변한 건 내 어릴 적 동네를 둘러싼 이름뿐이다. 시흥역(현 금천구청역), 구로공단역(현 구로디지털단지역), 가리봉역(현 가산디지털단지역), 지금은 모두 각자의 이름이 생긴 신림 1~12동도 그렇다.

WHO’S THE WRITER? 박찬용은 에디터, 칼럼니스트다. <에스콰이어> 등에서 피처 에디터로, <아레나옴므플러스>에서 피처 디렉터로 일했다. 손목시계, 엔터테인먼트, 브랜딩, 식품산업 등을 담당해 콘텐츠를 제작했다. 현재 한국의 신문, 기업, 방송 등에서 활동한다. 2025년 10월 단행본 <서울의 어느 집>을 출간한다.


1995년 제1회 서울모터쇼가 열린 코엑스 앞에서 찍은 영동대로.

1995년 제1회 서울모터쇼가 열린 코엑스 앞에서 찍은 영동대로.

낭만 혹은 야만의 시대

압구정 쏘나타 야타족. 젠지 세대라면 이게 대체 뭔 말인가 싶을 거다. 의미를 이해하면 문화 충격도 받을 거고. “야, 타!”라는 멘트가 통했다는 게, 현대 쏘나타로 그게 가능했다는 게 믿기 어려울 수도 있다. 하지만 야타는 사회 문제가 될 만큼 성행했다. 1995년쯤에는 뉴스를 도배할 정도였다. 물론 야타족의 전성기는 그리 길지 않았다. 1990년대 한국 사회는 모든 것이 빠르게 변했다. 자동차 산업과 문화도 마찬가지였다.

1990년대에는 자동차가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특히 1990년대 초중반은 역사상 가장 가파른 성장세를 기록했다(자동차등록대수 기준). 서울 올림픽의 흥행과 이로 인한 인프라 개선, 그리고 빠른 경제 성장의 효과였다. 덕분에 20대들도 차에 많은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각지고 권위적인 인상의 ‘아빠차’를 끄는 건 당연히 놀림거리였다. 하지만 자동차는 비쌌다. 1995년 최저시급은 1275원, 쏘나타 기본형은 약 950만원이었다. 2025년 최저시급과 쏘나타 기본형은 각각 1만30원, 2788만원이니 단순 계산으로도 3배 가까이 비쌌다. 당시 실질 연봉과 물가까지 반영하면 격차는 훨씬 더 커진다. 당시 젊은이들 사이에서 쏘나타의 체감 위상은 지금의 벤츠 E 클래스 이상이었다. 쏘나타로도 야타가 가능했던 이유다. 참고로 독일제 휠을 끼워 아빠차 느낌을 지운 현대 뉴 그랜저나 대우 아카디아의 존재감은 지금의 벤츠 S 클래스보다 더 강력했다. 남자인 나도 야타를 당하고 싶을 정도였다. 가끔 수입차를 마주치면 연예인을 본 것과 비슷한 수준으로 눈이 동그래졌다.

물론 20대들의 차에 대한 관심은 야타와 같은 ‘부의 과시’에 한정되지 않았다. 1990년대 중반부터 분위기가 서서히 달라졌다. 현대 티뷰론과 아반떼, 기아 엘란 등이 등장하며 자동차는 하나의 문화로 거듭나기 시작했다. 운전 재미 탐구, 성능 향상, 개성 표출 등 장르도 다양했다. 장안동이나 역삼동의 정비소에서 개조한 요란한 차들이 주말마다 서울 각지에 모였다. 청담동 웨딩홀 주차장, 학동사거리 맥도날드, 올림픽대로 탑공원(청담도로공원), 남산 식물원 주차장, 여의도/뚝섬 한강공원 등이 들썩였다. 노란색 전구를 파란색으로 변경한 차, 시끄러운 머플러를 단 차, 범퍼를 바꾼 차, 커다란 휠을 끼운 차들이 곳곳에 가득했다. 그러나 장소마다 모임의 성격은 조금씩 달랐다. ‘튜닝’은 민폐라며 조용히 수다만 떠는 무리가 있는가 하면 헬멧과 레이싱 슈트까지 착용하고 국회의사당 앞을 굉음과 함께 내달리던 괴짜도 있었다.

당시 자동차 마니아들은 하이텔, 천리안 등의 PC통신으로 정보를 나눴다. 사진 두어 장을 내려받으려고 모니터 앞에서 몇 시간을 허비하던 시절이다. 그러나 1990년대 후반 인터넷 커뮤니티의 활성화와 함께 정보 공유와 번개 공지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서울의 주말 자동차 모임은 점점 더 과열됐고, 결국 경찰의 표적이 되었다. 이후 자동차 모임은 대부분 서울 외곽으로, 수도권 외곽으로 자리를 옮겼다.

하지만 열기만큼은 쉽게 식지 않았다. 1990년대 후반 급격히 늘어난 수입차 덕분이었다. 자동차 누진세율 인하, 특별소비세 감면, 할부 금융 도입 등 IMF도 막을 수 없는 매력적인 제안들이 혈기왕성한 20대들을 수입차 전시장으로 유인했다. 그리고 BMW, 벤츠, 아우디, 폭스바겐 등 잡지에서나 보던 차들이 각종 자동차 모임에 섞이기 시작했다. 가끔 포르쉐 911이나 닛산 스카이라인 같은 희귀차들도 나타났다. 인적이 드문 지방 도로에선 주말 밤마다 개조한 국산차와 고성능 수입차의 가속 경쟁도 펼쳐졌다. 함께하던 무리들 대부분은 그 차들의 최고 출력, 최대 토크 같은 것도 몰랐다. 그저 유럽과 일본 차는 저렇게나 빠르구나, 국산차도 이제 가능성이 있구나 하며 즐거워했다.

어쩌면 폭주족이었던 아저씨의 라떼 시전처럼 보일 수도 있겠다. 나 역시 쓰는 내내 그런 느낌이었으니까. 낭만의 시대처럼 포장했지만 야만의 시대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는 것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이 시절이 부질없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1990년대가 없었다면 지금의 성숙한 카밋 문화도, 서킷 주행회도 없었을 테니까. 돌이켜보면 1990년대는 한국 자동차 산업과 문화의 격변기이자 황금기였다. 그 시절을 향유할 수 있었던 건 정말 행운이라고 생각한다.

WHO’S THE WRITER? 류민은 기획자이자 칼럼니스트다. 문화, 산업, 기술 등 자동차와 관련된 이야기를 텍스트 또는 영상으로 엮는 작업을 해왔다. 최근에는 제품 개발 전략이나 홍보/마케팅 분야의 컨설턴트로도 영역을 확장하고 있다.


Credit

  • ART DESIGNER 김동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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