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FE

문화예술계 거장들이 30년 이상 사용하며 작업의 영감을 얻은 물건들

모든 물건은 낡는다. 하지만 어떤 것들은 세월이 흐르면서 더 노련해지고, 견고해지며, 깊어지기도 한다. 8명의 거장이 30년 넘도록 사용한 도구, 30년이 넘도록 곁에 두고 지침으로 삼아온 물건을 들여다보았다.

프로필 by 오성윤 2025.09.27

등나무 의자/ 허영만(만화가)

<무당거미>를 연재하고 있을 때인 1981년, 만화책 출판을 하던 삼현출판사 박봉희 사장(우리는 늘 ‘박영감’이라고 불렀다)이 선물해준 의자다. 작업실을 이사할 때 선물로 챙겨준 것이다. 동남아에서 수입한 물건으로, 등받이 각도를 조절할 수 있고 발을 뻗을 수 있는 받침까지 갖춰져 있어 처음 본 순간부터 감탄했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지금에 와서 새삼 감탄하게 되는 것. 그건 이후 45년이 흐르도록 한 번도 고장 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세월이 흐르며 의자가 내 안에서 갖는 의미도 단순한 가구를 넘어 ‘부서지지 않게 오래 곁에 두고 싶은 물건’으로 변모해왔다. 지난 45년간 몇 번의 이사를 더 했지만 이 의자는 늘 내 방, 내 책상 옆에 놓였다. 그리고 오전 내내 작업을 하다 점심 식사 후에 의자에 기대어 짧은 오침을 취하는 것이 언젠가부터 루틴이 되었다. 푹신한 소파나 두꺼운 이불 위에서 쉬었다면 깊이 잠들어 머리가 무거워졌을지도 모를 일이나, 이 의자에서는 15~20분 정도 누워 있다 일어나면 몸이 개운해진다. 늘 같은 자리에 앉아 묵묵히 내 낮잠을 받아주었달까. 덕분에 지난 세월 내내 변함없는 휴식 시간을 선물 받았다.막사발/ 조병수(건축가)..

막사발/ 조병수(건축가)

대학생 때부터 막사발을 좋아했다. 완벽하지 못한, 어쩌면 못생겼다고까지 할 수 있을 형태를 띠고 있지만 직접 사용해보면 조금씩 다른 감흥을 얻게 되기 때문이다. 막사발을 두 손으로 쥐어보면 특유의 굴곡이 손 안에 따뜻하게 와닿고, 찌그러진 부분, 유약이 덜 발려 드러난 흙의 거친 속살이 내 마음을 편안하게 받아주는 것만 같다. 내가 건축을 통해 추구하고자 하는 ‘막의 미’ 개념이 바로 이 막사발에서 나왔다. ‘막의 미’는 비움의 미학이다. 때로는 덜 다듬어진 미완의 형태가 마음을 비우게 해주는 아름다움을 품을 수 있다는 것이다. 내가 설계한 ㅁ자 집, 땅집, 지평집 등이 이런 미감을 표현하는 작업에 들어간다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이 막사발은 1993년도쯤, 한국으로 돌아왔을 때 처음 들였던 막사발이다. 굽과 중앙이 좀 깨지고 훼손된 채로 내 손에 들어오게 되었는데, 그래서 지금껏 더 자주 들여다보게 되는 것 같기도 하다.

가위 / 최성우(보안여관 대표)

올해 4월 어머니의 뒤를 이어 국가무형유산(국가 무형문화재) 궁중채화 보유자가 되었다. 궁중채화란 옛 왕실의 각종 연회와 의례에 사용되는 장식용 가화(假花, 조화)를 만드는 작업을 뜻한다. 이제서야 하는 말이지만 어머니가 내게 처음 궁중채화를 권했을 때는 도망을 좀 다녔다. 남자가 꽃을 만든다는 것도 좀 민망하게 여겨졌고, 보안여관이라는 현대 미술 공간을 운영하는 사람이 전통 공예를 한다는 것이 왠지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렇게 한동안 도망 다닐 때 어머님께서 도구를 주셨다. 만날 때마다 하나씩 “이거 너 가져라” 하셨다. 그게 쌓여 어느새 한 세트가 되었고, 이수자를 거쳐 국가무형유산 보유자가 되도록 여태 어머니의 도구들로 궁중채화를 하고 있다. 어머니의 인장인 붉은 실 매듭도 그대로 두고. 이 손가락만 한 작은 가위는 개중에서도 가장 처음 받은 도구다. 작고 날이 휘어져 있어 톡톡 건드리거나 작은 꽃잎을 표현할 때 좋다. 궁중채화를 위해 제작한 가위는 아닌데 묘하게 채화 작업에 잘 맞다는 뜻이다. 그러니 어머니도 20년이 넘도록 사용하셨겠지. 내게로 이어지며 생긴 차이점은 그 용도가 일상으로까지 확장되었다는 것이다. 작업을 할 때도 가장 많이 사용하는 도구일뿐더러, 손에 너무 익은 탓인지 늘 곁에 두고 편지봉투를 열거나 포장을 뜯는 일에까지 사용하고 있다.

책 <훈민정음> / 정병규(북 디자이너)

국내에 북 디자인이라는 분야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던 때인 1982년, 타이포그래피를 공부하기 위해 프랑스 파리로 유학을 떠났다. 제대로 배워 오겠노라 결기를 품고 떠났으나 솔직히 말하자면 생각보다 별게 없었다. 대부분 이미 한국에서 독학으로 배운 내용이라 그랬을 것이다. 파리에서 알파벳으로 타이포그래피를 배우며 오히려 크게 느낀 것은 한글의 특수성이었다. 한글은 기나긴 역사 속에서 자연스레 진화해온 여느 문자와 달리 1443년에 창제된 문자이며, 그 ‘매뉴얼’을 가진 유일한 문자이니까. 이 매뉴얼, 즉 훈민정음 해례본이 있다는 게 한국의 디자이너들이 가진 업보요, 축복이라면 축복이라고 할 수도 있을 테다. 그런 연유로 한국에 돌아와 훈민정음과 관련된 자료를 모으고 연구하기 시작했다. 당시만 해도 강신항 선생의 책이 표준으로 회자되었는데, 개인적으로는 유창균 선생의 책이 마음에 걸리는 바가 많았다. 책이 낡기 시작한 1990년대에는 큰 판형의 하드커버 버전도 나왔다. ‘큰 책에서 작은 책으로 진화하는 것이 상례인데 이 책은 오히려 커졌구나’ 하며 즐거워했던 기억이다. 대외적 직함은 ‘북 디자이너’지만, 나는 늘 훈민정음을 공부하는 것이 내 업무라고 생각해왔다. 그리고 내가 보기에 디지털 시대에 와서 한글은 다른 문자가 품지 못하는 새로운 가능성을 더 많이 보여주는 것 같다. 그런 생각을 하면 괜히 마음이 바빠지고, 아마 앞으로도 이 책의 도움을 많이 받게 되지 싶다.<span style="font-size: inherit;">

펜더 스트라토캐스터 컬렉터스 에디션 1982 기타 / 신윤철(서울전자음악단 기타리스트)

1980년대에 들어서 기타 회사들은 심각한 경영난을 맞았다. 펜더가 찾아낸 타개책 중 하나는 새로운 기술 대신 1950년대에 기타를 만들던 방식으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1982년에 출시된 스트라토캐스터 컬렉터스 에디션이 그 결과물인데, 그해 중학생이던 나는 아버지(기타리스트 신중현)께 이 기타를 물려받았다. 기쁘면서도 내가 과연 이 기타에 어울리는 수준의 연주자가 될 수 있을까, 걱정했던 기억이 난다. ‘골드’라는 이름을 붙여주고 열심히 연습을 했더랬다. 아버지께 물려받은 기타라고 하면 다들 이 기타의 벗겨진 칠과 낡음에서 ‘유산’의 맥락을 읽는 듯하다. 하지만 사실 1980년대생은 일렉트릭 기타 분야에서 꽤 젊은 축에 속한다. 그리고 아버지는 이 기타를 들이고 <세 나그네> 음반 녹음에 사용한 후 바로 내게 주셨다. 받았을 당시에는 거의 새 물건이었다는 뜻이다. 아마 아버지의 손길보다는 김도균 형님(밴드 백두산 기타리스트)의 손길과 발길질이 더 많이 묻었을 것이다. 형님이 이 기타를 자주 빌려가서 공연 때 쓰셨는데 그때마다 던지고 밟고, 거친 퍼포먼스를 펼치기 일쑤였다. 그걸 보며 감명을 받은 고등학생 시절의 나도 이 기타를 던지고 밟으며 연주했었고 말이다. 이 기타는 여전히 내게 1순위다. 뭘 하든 중요한 날은 무조건 이걸 들고 나선다. 손 닿는 부분들이 많이 망가져 손가락에 힘을 얼마나 주느냐에 따라 음정이 어긋날 정도가 되었는데도 그렇다. 유독 얇은 기타 넥이 손이 작은 내게 딱 맞기도 하고, 무엇보다 소리가 다르기 때문이다.

안경 / 김서룡(패션 디자이너)

패션 디자이너로 일을 시작한 지 올해로 꼭 30년이 되었다. 내년 초쯤 기념 행사를 할까 하고 전시하면 의미가 있을 만한 물건을 떠올려보았는데, 내 주변 물건들 대부분이 온통 그쯤 된 것들이었다. 워낙 뭘 잘 사지도 버리지도 않는 성격이라서. 이 안경은 서른 몇 해 전에 대구의 한 안경점에서 구매한 것이다. 모양이 예뻐서 샀는데 언젠가부터 디자인 업무에 필수적인 물건이 되어버렸다. 젊을 때는 시력 교정용으로, 지금은 돋보기로. 사이즈가 내 얼굴에 꼭 맞아 잘 흘러내리지도 않고 무게도 가벼워 오래 쓰고 있어도 피로감이 적었기 때문이다. 단단하면서도 가벼운 프레임의 소재감도 좋았다. 일전에 안경 회사와 컬래버레이션 작업을 하며 이런 소재를 쓰면 좋겠다고 한 적이 있는데, 그쪽에서도 반색을 하더니 곧 이제는 이런 소재를 구할 수가 없다는 답을 돌려주었다. 사진에서 보다시피 한쪽 다리 끝에 붕대가 감겨 있는 것도 그런 이유다. 언젠가 파손되었는데, 여러 곳 수소문해봐도 복구 수준의 수리는 어렵다고 하더라. 예전 사진들을 보면 이 안경을 컬렉션 발표 같은 자리까지 끼고 나가기도 했다. 지금은 오로지 디자인 작업을 할 때만 쓰고 있다. 공식 석상에서 이런 독특한 안경을 소화하기에는 내가 나이를 먹기도 했고, 안경 상태도 더 이상 밖에 나갈 만큼 좋지 않고. 하지만 이렇게 내게 꼭 맞는 안경을 또 찾기는 어려울 것 같고 그다지 찾을 마음도 들지 않기 때문에, 조금 더 버텨주었으면 좋겠다.

테크닉스 SL-1200 MK3 턴테이블 / 박민준(DJ)

테크닉스사의 SL-1200 시리즈는 단순한 턴테이블이 아니다. DJ 문화와 오디오 역사를 상징하는 아이콘이다. 이렇게 단정적으로 말할 수 있는 이유는 실제로 DJ 부스에 설치된 턴테이블의 99%가 해당 모델이기 때문이다. DJ용 턴테이블에 관한한, SL-1200을 대체할 수 있는 모델은 지금껏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나는 1996년 아르바이트로 어렵게 번 돈을 털어 MK3 모델을 구매했다. 개당 30만원이었으니 당시 물가와 고등학생의 경제 수준을 생각하면 정말 큰 결심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평생의 동반자가 되리라는 모종의 확신이 있었기에 꼭 가져야만 했다. 디제잉에 대해 막 알아가던 그때, 테크닉스 턴테이블은 디제이의 자격증과도 같은 것이었고 그 정밀함, 내구성, 문화적 표준으로서의 오리지낼리티는 대체 불가능한 ‘멋‘이었다. 놀랍게도 (하지만 테크닉스 유저들에게는 당연하게도) 햇수로 30년을 소장하는 동안 이 턴테이블은 한 번도 현역이 아닌 적이 없었다. 큰 고장도 없었고, 부족한 점을 느껴본 적도 없다. 30년 전이나 지금이나 턴테이블 앞에 서 있을 때가 가장 행복하고, 떨리는 순간이며, 동시에 가장 겸손해지는 순간이기도 하다. SL-1200 MK3는 그렇게 내게 디제잉의 의미와 개념이 변하지 않는 가장 큰 이유다.

SINAR 4 × 5 원판 필름 카메라 / 김용관(사진가)

1993년 12월, 프리랜서로 독립하기 직전에 산 카메라다. 다양한 화각의 렌즈, 삼각대, 가방까지 풀세트로 1000만원쯤 했다. 잡지사에 처음 들어갔을 때 내 초봉이 18만원이었으니 막 독립한 사진가의 첫 카메라치고는 꽤나 거금을 들였던 셈이다. 구매에 동행했던 친구가 괜히 본인이 손을 덜덜 떨 정도로. 하지만 사실 내게는 딱히 고민의 여지가 없었다. 지난 시절 잡지사에서 내가 사진을 배우고 성장한 게 해당 카메라를 통해서였기 때문이다. 내가 할 줄 아는 것, 내가 잘할 수 있는 것, 내가 열심히 할 수 있는 것 모두 이것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카메라가 바로 내 자산이었고, 시작한다면 최고의 도구로 해나가고 싶었다. 신용카드, 신용대출 개념도 없던 때라 어머니가 차려주는 밥 먹고 버스비만 챙기면서 3년 정도 2개의 적금을 꾸준히 유지했고, 결국 500만원씩 대출 받아 구입했다. 그리고 2개월 후에 회사를 나왔다. 물론 이제는 이 카메라를 사용하고 있지 않다. 작업 과정 측면에서 의미가 있을 듯한 프로젝트에 한 번씩 사용해보기도 하지만, 이제는 대형 필름 구하기도 힘들고 프로세스도 너무 번거롭다. 그렇다고 물건을 처분하기도 어려웠다. 이건 나의 ‘한 부분’ 같았던 카메라니까. 내 꿈과 목표와 시작이 깃들어 있는 물건이니까. 상징적인 의미로 여전히 사무실 한쪽에 자리를 지키고 있다.

Credit

  • PHOTOGRAPHER 김형상
  • ASSISTANT 송채연
  • ART DESIGNER 최지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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