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FE

왜 누군가는 백인이 되는 꿈을 꾸는가

백인, 특히 미국 백인의 관점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사람들이 있다.

프로필 by 박세회 2025.10.29

나는 몇 해 전 한 매체에 1921년에 미국 오클라호마주 털사(Tulsa)시에서 일어난 인종 폭동 사건에 관한 글을 게재한 후에 특이한 경험을 했다. 한국에는 아직 모르는 사람들이 많은 이 사건은 쉬쉬하며 덮여 있다가 1990년대 말에 본격적으로 재조명되었고, 2000년대에 들어와서는 현지 고등학교 역사 시간에 가르칠 만큼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간략하게 설명하면 이렇다.

1920년대 털사시의 그린우드(Greenwood)구는 흑인들을 중심으로 경제가 크게 성장했고, ‘블랙 월스트리트’라고 불릴 만큼 부유한 흑인들이 많았다. ‘털사 인종학살’(Tulsa Race Massacre)이라고도 불리는 이 폭동은 잘사는 흑인들을 시기하던 백인들이 일으킨 사건이었다. 당시 백인들이 흑인을 죽이는 린치 사건들이 그랬던 것처럼, “흑인 남자가 백인 여자를 성폭행하려 했다”는 뜬소문에 분노한 백인들이 흑인 거주지를 찾아가 집과 상점을 모조리 불태웠다. 수백 명의 흑인들이 죽고 다쳤고, 블랙 월스트리트는 사라졌다.

이상한 일은 내가 그 글을 소셜미디어에 공유한 후에 시작되었다. 처음 보는 사람들이 그 포스트에 찾아와 댓글을 달기 시작한 거다. 전체 공개로 올린 포스트였으니 아마도 어떤 온라인 커뮤니티에 좌표가 찍혔고, 그걸 타고 들어온 사람들로 보였다. 그들 주장의 핵심은 “왜 흑인 편을 드느냐”는 것이었고, 털사 인종학살 같은 사건은 백인을 공격하기 위해 지어낸 가짜 역사에 불과하다는 말을 하고 있었다. 다른 곳도 아닌, 오클라호마주의 고등학교에서 가르치는 역사를 가짜라고 주장하는 한국인은 어떤 사람일까?

그중 유독 조롱 섞인 거친 말로 공격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황인종을 차별하는 사람이 흑인들이라는 걸 모르고 그들의 편에 서서 그들이 듣기 좋아하는 말을 한다”면서, “누구나 말은 그럴싸하게 한다, 쳐 맞기 전까지는”이라는 (아이러니하게도) 마이크 타이슨의 말을 인용하며, 내가 흑인에게 차별을 받아본 적이 없어 그들을 불쌍하게 생각한다고 했다. 그 사람은 알고 보니 한국에서 꽤 유명한 극우 남성 논객이었는데, 일본 문화를 좋아하는 것 같기는 해도 해외, 특히 미국에 거주한 적은 없는 듯했다.

나는 살면서 인종차별을 몇 번 경험해봤다. 미국에서 산 지 20년이 훌쩍 넘었고, 동부와 중서부, 서부까지 다양한 지역에 살았기 때문에 지역마다 문화가 얼마나 다른지 잘 안다. 하지만 차별적인 행동을 한 사람은 항상 백인이었다. 물론 뉴욕의 브롱스나 할렘처럼 흑인이 밀집된 곳에 살면서 차별을 경험한 아시아계도 없지는 않겠지만, 할리우드 영화 속 미국과 현실의 미국은 다르다. 한국인이 미국에 와서 차별을 경험한다면 그 상대가 흑인일 가능성은 극히 적다. 그런데 그는 왜 흑인에 대한 인종적 편견을 드러냈을까?

이건 단순히 미디어를 통해 갖게 된 흑인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이 아니라, 자신의 정체성과 관련되어 있다. 백인에 의한 식민지배나 노예제를 경험한 적 없는 한국인, 혹은 동아시아 사람 중에는 자신에게 백인, 혹은 최소한 ‘명예백인’이라는 지위를 부여한 것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데 이 ‘명예백인(honorary whites)’이라는 명칭이 실제로 법적인 지위를 나타내는 표현으로 쓰인 적이 있다.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백인들이 인종 분리 정책(아파르트헤이트)을 실시하던 시절, 주로 경제 파트너인 일본인이나 홍콩, 대만 출신 등의 동아시아 인사들에게 백인과 동등한 법적 권리를 부여하기 위해 ‘정치적 편의에 따라’ 만들어낸 말이다.

아시아에서 제일 먼저 산업화를 달성하고 서구 흉내를 내며 탈아입구(脱亜入欧)를 외치던 일본인들이 백인 대접을 받으려고 시도한 것은 그때가 처음이 아니다. 20세기 초에는 미국으로 이주한 일본인 다카오 오자와가 ‘자유로운 백인’과 흑인에게만 시민권을 주는 미국의 귀화법에 이의를 제기하며 자신은 피부가 희고, 미국 문화를 수용했기 때문에 백인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연방대법원은 일본인은 백인이 아니므로 시민권 취득 자격이 없다고 판결했다. 오자와는 미국인들이 생각하는 백인의 기준이 밝은 피부색이 아닌 유럽계라는 사실을 몰랐던 것이다.

이들이 백인으로 대접받고 싶어 하는 것은 단순히 법적 지위 때문이 아니다. 이들은 세계 사회에서 열등하다고 차별받는 집단에 속하는 것을 참지 못한다. 차별에 대한 상식적인 반응은 차별을 없애고 평등한 세상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 대신 강자와 자신을 동일시하는 방법을 선택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 행동에 관해서는 흑인들이 누구보다 잘 안다. 식민지배와 노예제도라는 인류사의 비극 속에서 가장 큰 피해를 본 인종 집단인 흑인들은 지배층의 가치를 온몸으로 받아들인 후 자기가 속한 집단을 차별적으로 바라보는 사람들이 누구이고, 어떤 사고방식을 가졌는지 잘 알고 있다.

흑인이자 프랑스의 정신과 의사였던 프란츠 파농(Frantz Fanon)이 <검은 피부, 하얀 가면>에서 말하는 ‘하얀 가면’은 “백인의 시선으로 세상을 보고, 백인의 기준으로 자신을 평가하며, 백인에게 인정받으려 하는 심리적 상태”다. 백인의 문화를 ‘표준’으로 받아들이고, 거기에 도달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차별하는 이들의 태도를 파농은 ‘자기혐오’와 ‘정체성의 혼란’으로 설명했다. 미국에서 노예제도가 살아 있던 시절에는 (대개는 상대적으로 피부색이 밝은) 집안 노예가 들판에서 일하는 바깥 노예를 무시하며 자신이 주인의 가족에 더 가깝다는 우월감을 갖곤 했다고 한다.

2025년의 미국을 노예제도 시절의 미국과 비교하기는 힘들다. 하지만 미국은 여전히 노예제도와 그걸 없애기 위해 벌였던 남북전쟁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최초의 흑인 대통령(버락 오바마)이 선출된 직후 ‘트럼프 현상’이 일어난 것을 생각해보자. 그건 아무리 미사여구를 동원해 좋게 해석해도—역사학자들이 지적하는 것처럼—결국 ‘패배한 남부’가 다시 고개를 든 것에 불과하다. 트럼프가 장악한 공화당에 대한 흑인 유권자들의 지지율이 10%대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흥미로운 것은 지금 아시아, 특히 동아시아계 유권자들의 공화당 지지율이 30~38%에 달한다는 사실이다.(줄어들고 있기는 하다.) 1970~1980년대 이후로 미국에 정착한 나이 든 한인들 중에는 지지하는 정당을 민주당에서 공화당으로 바꾸면서 트럼프와 마가(MAGA) 세력의 주장에 동조하는 유권자들이 눈에 띄게 늘었다. X세대를 포함한 비교적 젊은 세대들은 여전히 진보적인 성향을 보이지만, 86세대 이상의 열렬한 트럼프 지지자를 만나는 건 어렵지 않다. 이들의 주장과 사고방식은 트럼프를 지지하는 백인 유권자들과 구분하기 힘들다.

미국에 일찍 정착한 한인들이 흑인, 히스패닉과 함께 비백인(non-white) 정치세력을 형성하는 것을 거부하고 보수 백인들과 손잡는 데는 역사적인 이유도 있다. 바로 1992년의 LA 폭동이다. 근래 들어 다시 화제가 된 ‘지붕 위의 코리안(Rooftop Korean)’이라는 제목의 영상에서 보듯, 1992년 LA의 코리아타운을 습격한 사람들은 대부분 흑인이었고, 한인들은 총을 들고 건물 옥상에 올라가 삶의 터전을 지켰다. 그런 경험을 한 세대가 흑인들에 대한 반감을 버리지 못하는 것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거친 댓글을 달았던 극우 논객처럼 ‘흑인은 한인을 무시한다’는 말을 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결국 그때의 일을 얘기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상황을 잘 생각해보면, 백인 경찰들이 흑인을 불법적이고 가혹하게 폭행하고도 풀려난 게 폭동의 발단이었다. 당시에도 이미 백인들이 흑인의 분노가 백인들의 거주지로 향하는 것을 막기 위해 한인 이민자들이 총을 들고 코리아타운을 지키고 있는 모습을 미디어에서 반복적으로 보여줬다는 비판이 일었다. 1992년의 LA 폭동은 단순히 흑인이 한인을 공격한 사건으로 간단하게 설명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한국의 보수 노인들과 마찬가지로, 미국에 사는 나이 든 한인들을 트럼프 지지자로 바꾸는 데 보수 교회들의 역할을 무시할 수 없다. 내 경험이 특이한 게 아니라면, 이들의 정치적 변화는 오바마 정부 때 눈에 띄기 시작했다. 내가 다녔던 캘리포니아주의 어느 대형 한인교회에서 성소수자와 관련한 오바마 행정부의 정책을 비판하기 시작하더니, 교회가 점점 우경화되기 시작했다. 미국의 정치적 보수 교단과 교류하는 많은 한인 목사가 그들의 주장을 가져와 한인 교회에 소개했다. 이들이 트럼프가 등장하면서 적극적인 공화당 지지로 돌아섰다.

이들 중에는 미국의 유명 대학교들이 흑인과 히스패닉 학생들에게 부당한 가산점을 주는 바람에 아시아계가 가장 큰 피해를 본다고 믿는 이들도 많다. 아시아계 학생들은 백인보다 높은 점수를 받아야 하버드에 갈 수 있고, 흑인은 백인보다 낮은 점수를 받아도 하버드에 갈 수 있다는 단순 계산은 세상에서 가장 공정한 것은 시험 점수라는 사고에 익숙한 동아시아인들을 분노하게 했고, 이들은 DEI(Diversity, Equity, Inclusion : 제도의 다양성, 형평성, 포용성을 강조하는 미국의 정치 개념) 제도들을 폐지하려는 트럼프를 쌍수를 들고 환영했다. DEI를 폐지하기 위해 수십 년간 노력해온 한 백인 변호사가 만들어낸 이 논리는 수험에 목숨을 거는 아시아계 학부모들에게 더없이 주효했다.

의식 있는 아시아계 미국인들은 “아이비리그에 아시아 학생이 좀 더 들어가게 하기 위해 DEI 정책을 무너뜨리면 결국 우리 모두가 피해를 보게 된다”고 반대했다. 그러나 자녀의 아이비리그 입학을 목표로 한 부모를 설득하기란 쉽지 않았다. 여전히 많은 아시아계 부모가 아이비리그 입학을 미국 상류사회 진입과 동일시하는 착각에 빠져 있기 때문이다. 흑인들은 그런 착각을 하지 않는다. 그들은 자기가 아무리 공부를 잘해도, 아무리 뛰어나도 백인 사회는 자기를 동등한 존재로 받아들이지 않을 것을 안다. 하지만 아시아계, 특히 모범적 소수자(model minority)로 불리는 동아시아계 이민자들은 여전히 다카오 오자와와 같은 꿈을 꾼다. 찰리 커크의 사망 사건 이후 광화문에서 열린 자유통일당 집회에서는 찰리 커크를 추모하는 시간이 있었다. “우리가 찰리 커크다”라는 표어가 담긴 깃발도 있었다고 한다. 태극기와 성조기 그리고 가끔은 이스라엘 국기까지 든 이 시위대들도 꿈을 꾼다. 그 꿈속에서 그들은 백인이며, 지배자다.


박상현은 <오터레터>의 발행인으로, 여러 매체에 테크와 미디어, 문화에 관한 칼럼을 연재하고 있다.

Credit

  • EDITOR 박세회
  • WRITER 박상현
  • ILLUSTRATOR MYCDAYS
  • ART DESIGNER 주정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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