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콥 파브리시우스가 말하는 미술 전시를 여는 방법
카프카의 첫 문장이 독자를 소설 속으로 빨아들이고, 베토벤 교향곡 5번의 네 노트가 30분의 세계를 예고하듯, 미술 전시도 도입부로 그런 마법을 만들어낼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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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에르 파라시투스와 1234클레딩의 ‘SALE SALE Pop-up store’(2026) 전시 전경. © inside-out Art Museum
전시를 입고 거리로 나가다
」“어느 날 아침 그레고르 잠자가 불안한 꿈에서 깨어났을 때, 그는 침대 속에서 한 마리 흉측한 벌레로 변해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너무 자주 인용되어 지겨울 수도 있는 카프카의 <변신>의 첫 문장이다. 이 문장을 읽는 순간 모든 게 끝이다. 당신은 꼼짝없이 마지막 장을 넘길 때까지 그 소설 안에 갇히게 될 테니까. 그 서사의 감옥에서 빠져나올 도리는 없다. 음악에는 더 유명한 예시가 있다. 베토벤 교향곡 5번의 첫 네 음을 떠올려보자. ‘운명이 문을 두드리는 소리’라 불리는 이 동기(motif)는 단 2초 만에 앞으로 펼쳐질 30여 분의 세계 전체를 예고한다. 그렇다면 미술 전시는 어떤가. 우리는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에 대해서는 열심히 논하면서도 정작 전시가 관객을 사로잡는 최초의 순간에 대해서는 놀라울 만큼 무심하지 않았나? 전시도 버브의 ‘비터 스위트 심포니’ 인트로처럼 빠져나올 수 없는 올가미를 던질 수 있을까?
1990년대부터 온갖 실험적인 방법론과 뜬금없이 파고드는 위트로 사랑받아온 큐레이터 야콥 파브리시우스에게 전시의 오프닝은 최근에야 마음 두게 된 연구 주제가 아니다. 어쩌면 그는 이 주제를 본격적으로 연구하기 훨씬 전부터 이미 몸으로 그 질문을 던져왔는지도 모른다. 2003년 로스앤젤레스와 뉴욕에서 파브리시우스는 ‘Sandwiched’라는 퍼포먼스로 자신의 시간을 작가의 시간과 교환했다. 그는 작가들이 만든 샌드위치 패널(두 면의 보드를 묶어 몸 위에 쓰는 패널)을 뒤집어쓰고 이틀 동안 공공장소를 돌아다녔다. 행인들이 질문을 던지면 그는 작가가 시킨 대로 작가와 전시에 대해 홍보하는 대답을 돌려줬다. 큐레이터가 작가의 비전을 중개하는 홍보 매체가 된 것이다. “이제는 현대 고전이 된 애드리안 파이퍼의 1988년작 ‘코너드(Cornered)’에서 영감을 받았지요” 파브리시우스가 말했다.
2003년 로스앤젤레스 거리에서 샌드위치 보드판을 걸치고 있는 야콥 파브리시우스의 모습.
파이퍼는 갤러리 공간의 구석(코너)에 자신이 진술하는 영상을 재생 중인 텔레비전 모니터를 놓고, 그 앞을 뒤집은 나무 테이블로 마치 바리케이드라도 치듯 막았다. 모니터 위쪽 벽에는 파이퍼 부친의 출생증명서 두 장이 액자에 걸려 있다. 하나는 그의 인종을 ‘백인(white)’으로, 다른 하나는 “옥토룬(octoroon, 8분의 1 흑인 혈통)”으로 기재했다. 인종주의의 코너에 몰린 사람을 바라보며 당신은 어떤 판결을 내릴 것인가? 파브리시우스는 로스앤젤레스에 몇 달을 살면서 샌드위치 광고판을 든 사람들의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샌드위치 광고판을 걸치고 종종 음악을 틀어놓고 춤을 추며 형편없는 보수를 받는 사람들 중엔 불법 이민자들이 많았다. 아마도 그 모습은 국경과 국경 사이에 혹은 떠나온 나라의 빈곤과 당도한 나라에서의 비참 사이에 끼어 있는 모습으로 보였을 것이다. “파이퍼가 자신의 젠더와 인종 정체성을 분석했다면, 전 공공장소에서의 노동 조건과 직업 윤리를 다룬 거죠.” 파브리시우스는 이 작업을 이렇게 요약한다. 그러나 전시의 오프닝이라는 점에서 해석해보면 조금 다른 해석이 등장한다. 나는 그가 전시의 외연을 거리로 확장했고, 자신도 모르게 관객을 전시에 참여시켰다고 본다. “전시를 제 몸에 입고 다녔다고 할 수 있겠네요.” 그가 말했다. 그러니까 그건 화이트 큐브 안에 있어야 할 전시가 큐레이터의 몸에 강제로 실려 거리로 걸어 나간 순간이었다.
그의 공공장소 사랑은 뿌리가 깊다. 1997년 그는 스웨덴과 덴마크 사이의 무인도이자 해상 요새인 미델그룬스포르텟에서 <레스터에서 온 남자, 스웨덴 여자, 한 가정의 아버지, 그리고 게이 커플이 무인도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가?>라는 전시를 열었다. 조나단 몽크, 아니카 스트룀, 크리스티안 슈미트-라스무센, 엘름그린 & 드라그셋이 각각 일주일씩 섬에 머물렀고, 관객은 배를 타고 건너가 그곳에서 살며 작업하는 작가들과 대화를 나눴다. 공공장소인 섬 전체가 관객들의 눈에 보이든 보이지 않든 하나의 거대한 무대였다. 그에게 공공장소란 예술에 대한 어떤 편견도, 미리 결정된 관념도 없이 무장을 해제한, 아니 애초에 무장을 하지 않은 사람들을 만나는 곳이다. 예측 불가능하고 놀라운 순간들로 사람들을 인도할 수 있는 공간. 다시 말해 공공장소는 전시의 첫 음이 가장 순수한 형태로 방해받지 않고 울릴 수 있는 무대다.
쿤스트-베르케 앞 보도에 설치 된 레나타 루카스의 작품. 보도 블록의 턱이 어긋나 있는 걸 확인할 수 있다. Renata Lucas, ‘Kunst-Werke (Cabeça E Cauda De Cavalo)’, 2010 at KW Institute for Contemporary Art, Berlin PHOTO Uwe Walter
전시는 종종 바깥에서 시작된다
」전시가 미술관 문 안쪽에서 시작된다는 믿음을 무너뜨리는 일은 무척 흥미롭고 그 과정이 세밀할수록 아름답다. 파브리시우스가 즐겨 언급하는 사례는 2010년 베를린의 쿤스트-베르케에서 열린 레나타 루카스의 개인전 <Kunst-Werke (Cabeça E Cauda De Cavalo)>다. 벽돌로 된 분수의 테두리 절반을 스테인리스로 바꿔버린다든지, 문틈 아래 시멘트 바닥에 아날로그 레코드 플레이어를 박아버린다든지, 특정한 장소, 특히 도시의 흔한 경관을 건축적으로 개입해 비트는 것이 특기인 이 브라질 작가는 쿤스트-베르케 미술관의 정문을 중심으로 반원을 그린 뒤 이 반원의 호에 따라 미술관에 당도하는 보도를 정확히 7.5도 비틀어버렸다. 문득 미술관 양쪽에 있는 보도블록들이 정교하게 비틀려 있는 것을 깨닫고 나면 관객들은 이미 자신들이 전시 안에 들어와 있다는 것을 감각한다. 티켓을 끊기도 전에, 개인전의 시작을 알리는 전시 타이틀을 읽기도 전에, 길 위에서 전시는 이미 개막해 있었다.
파브리시우스는 이 작업을 “바깥의 거리까지 작품 안으로 끌어들인 거대한 프로덕션”이라 부른다. 개인전의 일부였던 비틀린 보도는 지금도 거리에 그 형태 그대로 남아 있다. 같은 공간에서 2023년 나딤 삼만이 큐레이팅한 <Poetics of Encryption>은 또 다른 방식의 증거다. 파브리시우스는 그 전시를 “어둡고 암호화되어 있으면서도 시적인, 지식의 기계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것 같았다”고 회고한다. 관객이 문턱을 넘는 순간 그룹전 전체의 분위기와 톤이 이미 결정되어 있었다는 얘기다. 흥미로운 것은 그가 도입부가 반드시 전시를 정직하게 예고할 필요는 없다고 말한다는 점이다. 그는 도입부의 ‘배반’ 역시 사랑한다. 그는 미하엘 하네케의 영화 <히든>의 오프닝, 되감기로 시작하는 그 놀라운 장면을 언급하며 말한다. “저는 반전이 있는 도입부를 좋아합니다”라며, 좋은 전시는 종종 도입부가 설정한 분위기를 기분 좋게 배반한다고 말한다. 루카스의 비틀린 보도가 그렇듯, 그 반전은 종종 공간의 반전이기도 하다. 안과 밖의 경계가 흐려지는 순간 전시는 건축의 문턱이 아니라 관객의 인식 속에서 개막한다.
매표소에서 시작되는 전시
」앞서 잠시 언급한 것처럼 야콥 파브리시우스는 노보 노디스크 재단(The Novo Nordisk Foundation)의 지원을 받은 자신의 박사후연구원(포스트닥터) 프로젝트로 전시의 오프닝을 파고들었다. <Setting the Tone of the Exhibition – The Anatomy of Exhibition Openings>가 그가 파고든 전시 오프닝 프로젝트의 총괄 타이틀이자 결과물이다. 그는 지금껏 이 연구를 바탕으로 네 곳의 서로 다른 기관에서 서로 다른 접근 방식, 분위기, 주제를 변주해가며 전시를 만들었다.
말뫼 시립미술관(Malmö Konstmuseum)에서 열린 <Setting the Tone of the Exhibition – The Anatomy of Exhibition Openings>에서는 다섯 개의 서로 다른 타이틀, 다섯 개의 서로 다른 서문, 각기 다른 키워드, 그리고 섹션별로 독립된 포스터와 아이덴티티를 가진 다섯 개의 전시를 동시에 진행했다. 그중 하나인 <아이윌미디벌퓨처유2>(iwillmedievalfutureyou2)와 연결된 전시가 스웨덴 릴리스 퍼포먼스 스튜디오(Lilith Performance Studio)에서 열리기도 했다. 같은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덴마크의 푼데르 바케 연구소(Institut Funder Bakke)에서 열린 <아직 문을 열지는 않았지만, 열심히 준비 중이며 여러분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We haven’t opened yet, but we are working on it and we are doing our best to meet your expectations…)>는 제도권 미술에 대한 비판과,실제 미술 전시의 오프닝 리셉션이 열리기 전에 어떤 일들이 일어나는지를 다루었다.
지난달 내가 목격한 베이징 인사이드아웃 미술관에서 열린 <Setting the Tone of the Exhibition (outside-in)>은 오프닝에 대한 실험 전시를 미술관 내부의 곳곳까지 밀어붙인 전시다. 이 전시의 진짜 도입부는 첫 번째 전시실이 아니라 매표소와 물품보관소다. 전시가 열린 인사이드아웃 아트 뮤지엄은 베이징 하이뎬구에 있는 문화 콤플렉스 베이징 중간예술지구(北京中间艺术区) 안에 있다. 베이징 중심부인 자금성에서 약 23km 떨어진 이 지구는 서울로 치면 파주 출판도시 같은 느낌으로 적당한 인파가 여유롭게 공연과 영화 관람 또는 미술 전시를 보고 쇼핑을 하기 위해 찾는 곳이다. 베이징 중심가에 있는 798예술지구처럼 엄청난 인파가 모이는 일은 좀처럼 없다.
그런데 이 전시의 오프닝을 위해 매표소에 들어갔을 때 나를 당황하게 한 것은 공항에서 입국 허가 도장을 받기 위해 기다릴 때나 볼 수 있었던 텐사배리어 줄이었다. 눈 바로 앞에 있는 매표소로 가기 위해서는 텐사배리어로 되어 있는 3개의 줄을 거쳐야 했는데, 이는 에바 그루빙거의 작품 ‘군중(Crowd)’(2007)이었다. 텐사배리어를 따라 지그재그로 걸어 매대로 향하면서 사실 아무것도 아닌 검은 줄 하나가 우리의 움직임을 어떻게 바꾸는지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었다. 그 밖에도 파브리시우스는 미술관의 구석구석까지 전시의 손길이 닿기를 원했고, 나아가 직원들이 직접 참여해 예술 작품을 신체적으로 대변하도록 이끌었다. 직원들은 1234클레딩(1234kleding)과 푸에르 파라시투스(PUER PARASITUS)가 만든 옷을 입고, 구디팔(Goodiepal)이 개조한 시계와 에릭 메리살루와 알리제 퀴트만이 만든 장신구를 착용했다. 결국 기묘한 일이 벌어진다. 작가들의 작품을 전부 보려면 관객은 갤러리스트에게 다가가 이렇게 물어야 한다. “지금 몇 시인가요?” 티켓을 건네는 손과 코트를 맡기는 카운터가 모두 오프닝의 일부가 되고, 관객과 직원 사이의 사무적 접촉은 작품을 매개로 한 상호작용으로 바뀐다.
클레어 배로(Claire Barrow)의 ‘Jump Scare’(2026) 전시 전경. © inside-out Art Museum
메인 전시장 입구에서 관객을 맞는 것은 클레어 배로의 트램펄린 성 ‘점프 스케어(Jump Scare)’다. 이전까지의 오프닝이 외연의 확장, 즉 소설의 첫 문장이 시작되기 전 작가의 서문에 해당한다면, 놀이공원의 요소와 작가의 어린 시절 기억이 뒤섞인 이 작품은 실제 본문의 첫 문장처럼 기능한다. 이곳이 놀이공원이자 참여형 경험의 장이며, 방문객이 자유롭게 거닐 수 있는 마법 같은 공간이 될 것이라는 선언. 한편 이 전시에는 벽면 레이블이 없다. 관객은 처음엔 브로슈어를 뒤적이며 작품과 제목을 맞추려 애쓰지만, 결국 대부분 책자를 덮고 작품 자체에 집중하게 된다. 파브리시우스는 이것이 의도된 불친절이 아니라고 말한다. 사람들이 도입부와 제목, 작가 노트를 마주하기 전에 먼저 공간 속에서 자기 자신을 자각하고 작품을 경험하도록 이끌려는 시도였다고. 도입부의 설계가 곧 전시 전체의 문법이 되는 구조. 3층으로 오르는 계단에서 베네딕테 비에레의 거북이들과 마주치고, 칼라 자카니니의 모빌이 층마다 보물처럼 숨어 관객을 계속 움직이게 하는 이 전시에서, 오프닝은 한 번 일어나고 끝나는 사건이 아니라 끝없이 갱신된다.
종이 위에서 시작되는 오프닝
」전시의 첫 음은 때로 공간이 아니라 종이 위에서 울린다. 관객이 초대장을 받아 들거나 포스터의 타이틀을 읽는 순간, 전시는 이미 시작된 것이다. 파브리시우스는 이 사실을 전시 재료로 삼아왔다. 앞서 언급한 덴마크 푼데르 바케 연구소에서 열린 연관 전시에는 단 보가 만든 초대장과 광고물, 오브제가 작품으로 포함됐고, 1998~1999년 뱅크(BANK)가 미술계의 보도자료를 첨삭해 되돌려보낸 프로젝트 ‘The Bank Fax-Bak Service’가 함께 걸렸다. 전시 제목은 <아직 문을 열지는 않았지만, 열심히 준비 중이며 여러분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라는 하나의 긴 문장이지만 그곳에서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작품처럼 보이지 않는 종이들이다. 예를 들어 뱅크의 작품은 뉴욕과 런던의 갤러리들이 기자들에게 보낸 보도자료에 빨간 줄을 긋고 파란 글씨로 첨삭한 작품이다. 1998년부터 1999년까지 그들이 첨삭한 300개의 보도자료를 관람하는 갤러리스트들의 심정은 어땠을까? 또 열심히 준비 중이라는 전시장에 당도했을 때 단 보의 초대장과 이십 년 전에 첨삭한 보도자료가 전시되어 있는 걸 보았을 때 관객의 심정은 어땠을까? 나라면 아마 미친 듯이 크게 웃었을 것이다. 제목을 읽는 순간 당신은 이미 이 전시의 농담 안에 들어와 있다.
참고로 파브리시우스는 15명의 큐레이터들과의 대담을 묶은 <Setting the Tone of the Exhibition – The Anatomy of Exhibition Openings>라는 책을 낸 바 있다. 지금 한창 한국어판을 편집 중인 이 인터뷰집에서 파브리시우스가 한스 울리히 오브리스트와 나눈 대화의 핵심 역시 전시의 접근 방식과 제목의 미학이었다. 파브리시우스가 문장형의 긴 제목으로 우리를 현혹한 후 ‘짜잔’이라고 외치며 귀여운 마술을 보여주는 사랑스러운 사람이라면, 오브리스트는 감각적이고 잊히지 않을 선언적인 제목을 선호한다. 하지만 이 인터뷰에서 정작 흥미로운 것은, 선언적인 제목의 대가가 고백하는 실패담이다. 오브리스트는 리히터와의 전시에서 열 개쯤 되는 제목을 제안했다가 전부 퇴짜를 맞았다. 리히터의 반응은 이랬다고 한다. “이건 시간이 지나면 금방 촌스러워질 것 같다”, “너무 길다”, “일반 관객이 이해하기 어렵다.” 천재적인 ‘스파링 파트너’에게 얻어맞으며 그가 배운 것은 기다림이다. 완벽한 제목을 찾지 못했다면 마지막 결정의 순간까지 기다릴 것. 실제로 오브리스트는 자신이 큐레이션한 역사적인 전시 중 하나인 <떠도는 도시들(Cities on the Move)>을 기획했을 때, 카탈로그가 이미 인쇄되고 개막이 2주 앞으로 다가온 시점에야 우연히 집어 든 카차리의 책에서 제목을 건져 올렸다고 한다. 뒤셀도르프의 술집에서 사전을 넘기다 이름을 얻은 제로 그룹처럼, “결국 제목짓기에는 어떤 우연이 관여한다”는 것이다. 아직 편집 중인 이 책에는 이처럼 큐레이션과 관련해 엄청나게 디테일한 이야기들이 잔뜩 들어 있으니 전시 기획자를 꿈꾸는 학생이라면 아주 즐겁게 읽을 것이다.
부산비엔날레에서 작품을 설치 중인 야콥 파브리시우스의 뒷모습.
문학과 음악의 도입부
」‘톤 세팅’은 본래 음악의 언어다. 곡을 시작하며 이어질 분위기와 정서를 예고하는 제스처. 파브리시우스가 자신의 연구에 이 음악 용어를 가져온 것은 우연이 아니다. 음악을 떠올리면 즉각 소환되는 라벨의 ‘볼레로’가 주제의 제시와 반복을 사유하는 교본이라면, 라몬스의 ‘Blitzkrieg Bop’을 여는 ‘Hey, ho, let’s go!’는 “2초짜리 선전포고”다. 어떤 도입부는 끝없이 늘어지고, 어떤 도입부는 짧고 강렬하다. 전시도 마찬가지다. 파브리시우스가 늘 돌아가는 다른 곳은 문학이다. 그는 J. G. 밸러드의 1975년작 <하이라이즈>의 첫 문단을 암송하듯 꺼낸다. “훗날, 발코니에 앉아 그 개를 먹으며, 로버트 레잉 박사는 지난 석 달 동안 이 거대한 아파트 건물 안에서 벌어진 기이한 사건들을 곱씹었다.” 그리고 덧붙인다. “서스펜스으으으.”
음악보다 글로 설명하기 쉬운 소설의 도입부를 생각해보자. 소설의 도입부가 중요한 이유는 그 안에서 서사적 약속과 매혹적인 목소리의 등장이 한데 묶여 작동하기 때문이다. 첫 문장은 앞으로 벌어질 일을 예고하는 동시에, 이야기를 들려주는 목소리가 누구인지(별개의 화자인지 혹은 등장인물인지)를 알려주고, 이 목소리 시점의 한계를 약속하며 동시에 호기심을 넘어서는 문학적 말하기의 매력으로 독자를 사로잡아야 한다. 흥미로운 것은 이것이 파브리시우스 개인의 취향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가 열다섯 팀의 큐레이터를 인터뷰하며 발견한 공통된 맥락 중 하나가 바로 문학에 대한 강한 관심, 소설이나 작가를 전시의 주제를 형성하는 방식으로 활용하는 방법론이었다. 김해주와 호세 로카가 물의 흐름과 의미, 전시 사이트와의 연결성이라는 공통 관심사를 지역의 역사 속에서 길어 올리듯, 큐레이터들은 저마다의 첫 문장을 찾아 헤맨다. 전시란 결국 공간에 쓰인 이야기라면, 첫 문장을 고르는 것은 큐레이터의 가장 중요한 결정 중 하나일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꼭 약속한 대로만 전시를 보지 않는다. 가끔 우리는 전시에서 길을 잃고 헤매며, 미로에 갇힌 듯한 서스펜스를 즐긴다. 같은 책에 실린 큐레이터 전효경과 파브리시우스의 대화를 잠시 다시 생각한다. 한국 밀레니얼세대 작가들의 스크린 매개 경험을 전시 서사로 직조한 전효경의 <드림 스크린>(2024, 리움미술관)의 첫 문장은 잘려 나간 지붕이다. 관람객은 6미터 층고 탓에 온전한 집을 세울 수 없어 지붕 윗부분이 잘린 빅토리아풍 파사드와 마주하며 전시에 입장한다. 전효경의 말대로 집의 “최초 인상”만 가져온 이 입구는, 완결된 건축이 아니라 “이야기 속으로 들어갔다가, 이야기가 끝나면 세트에서 빠져나오는” 세트 디자인의 문법을 따른다. 소설의 첫 문장이 화자와 시점의 한계를 약속하듯, 이 파사드는 관람객에게 당신이 볼 것은 미술관이 아니라 누군가의 집이며, 그 집은 어딘가 잘못되어 있다고 예고한다. 실제로 그 집이 참조한 구조의 원본은 리크리트 티라바닛이 제안한 캘리포니아의 윈체스터 미스터리 하우스다. 죽은 이들의 유령에게서 도망치려 방을 하나씩 덧지은 탓에, 방들의 배치를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집. 그 서사는 전시 어디에도 직접 언급되지 않지만, 전효경의 표현처럼 하나의 ‘방법론’으로 작동한다. 도면은 의도적으로 제공되지 않고, 관람객은 길을 잃으며, 전모는 관람을 마치고 에스컬레이터로 올라가는 출구에서야 내려다보인다. 첫 문장이 걸어둔 서스펜스가 마지막 문장에 이르러서야 풀리는 소설처럼, 이 전시의 도입부에서 한 약속은 끝에서야 완성된다. 서스펜스으으으.
2025년 2월 13~16일, 릴리스 퍼포먼스 스튜디오에서 열린 가수 겸 퍼포머 남혜지의 ‘TOUCHED’ 공연 모습. 뒤에 배경으로 이근민 작가의 작품이 보인다. © Elin Lundgren / Lilith Performance Studio
Credit
- EDITOR 박세회
- PHOTO 부산비엔날레
- ART DESIGNER 주정화
MONTHLY CELE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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