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런던 새빌 로
런던 메이페어의 작은 거리. ‘새빌 로’라는 이름과 윈도에 전시된 멋진 양복이 아니라면 이 거리는 런던의 소란한 도심 한가운데에 있다고 하기엔 너무나 느긋하고 조용해 보인다. 도시의 오래된 성처럼 고요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다. 그러나 100m가 채 되지 않는 짧은 거리에 우리가 발을 디딘 순간 경외와 모종의 부담을 느끼는 까닭은 그들이 오랜 옛날부터 짊어지고 온 전통의 유산을 알기 때문이다. 거리의 놋쇠 장식은 처칠 수상, 더 거슬러 올라가 넬슨 제독의 손길이 닿은 것임을 알기에 여느 거리와 다르게 느껴지는 것이며, 그런 옛사람의 흔적과 발자취 하나에 이야기를 담아 지금까지 명맥을 유지해온 그들의 노력에 감탄이 이는 것일 테다. 전통과 역사라는 안개에 자욱하게 둘러싸인 이 거리에 출입하는 사람들은 누구일까. ‘새빌 로 슈트는 현대판 기사의 갑옷’이라는 영화 대사처럼 여전히 그들을 찾는 ‘현대의 기사’들은 누구이며 그들은 어떻게 현대의 ‘갑옷’을 맞추게 되었을까.
이곳을 방문하는 인간 군상의 스펙트럼은 다양하고 방대하지만 그들이 원하는 것은 새빌 로만이 제공할 수 있는 절대적 아름다움이다. 각계각층의 다양한 요구를 한 벌의 양복에 담아 우아함을 납득시키는 일은 영국 양복, 특히 그 제작을 맡아오던 새빌 로에서 몇 가지 기준을 마련케 했다. 섬 안의 조금씩 다른 인종과 문화들을 연방이란 제도로 통일시키고 해가 지지 않는 제국을 결속시키기 위해 그들은 정신적 교리와 외부의 통일된 규범이 필요했다. 영국 신사들의 매너라 불리는 기사도, 그리고 그것을 멋지게 포장하는 영국 양복은 국가의 존속과 번영을 꾀하는 수레바퀴의 두 축이었다.
오래된 문화라는 것은 아버지가 아들에게, 어머니가 딸에게 전하는 체득의 가치다. 미추에 대한 판별력이 개입하기 전 부모의 손에 이끌려 졸업과 결혼 같은 인생의 대소사를 빛내줄 옷을 맞춘다는 것은 새빌 로가 단지 유행이 아닌 세습의 문화를 지켜간다는 것을 방증한다. 아버지에서 아들로 이어져 내려오는 세대 간의 구매가 새빌 로를 유지시키는 중요한 소비 메커니즘이다. 가치가 검증해온 표준성과 각 하우스의 미감이 어우러져 오늘날까지 보편성을 바탕으로 한 지극히 개인적인 특수성을 손님에게 부여한다. 잘 만들어진 영국 슈트는 공식 행사, 포럼, 국가 간 협약에 가장 적합한 차림이며 이곳은 의뢰인에게 그런 표준을 제공한다. 영국 왕족뿐만 아니라 왕조가 이어지는 다른 국가의 로열패밀리, 정치인, 그리고 각국 대사들이 이 첫 번째 가치에 부합하는 손님이다. 이곳은 여전히 400년 전부터 공고하게 쌓여온 완전성의 모형을 만들고 있고 손님에게 역사의 권위를 부여한다.

런던 새빌 로
특정 직업군을 위한 특수복 제작도 새빌 로의 주된 업무 중 하나다. 종교인들도 새빌 로에 사제복이나 특별한 행사에 필요한 교의를 주문한다. 코사크(Cossack)라는 사제복 커팅이 발전해온 것은 이들의 출입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한번은 신실한 유대교 신봉자 코셔의 재킷을 만든 적이 있다. 코셔는 일상생활을 강한 종교적 교리로 구속하기에 그들이 입는 옷도 몇 가지 신앙의 원칙을 따라야 한다. 그들의 옷에는 한 번에 두 가지 물질을 넣어서는 안 된다. 양모로 짠 옷이라면 옷을 이루는 모든 부자재는 양에서 추출한 순수한 모직으로 구성해야 한다. 중간 가봉을 하러 숍에 방문한 랍비는 가봉복의 내부를 살펴보고 나서 이곳에 모직이 아닌 다른 물질을 넣었느냐고 물었다(새빌 로 양복에는 주머니 가장자리나 끝단의 보강을 위해서 리넨을 함께 넣어 봉제한다). 마로 만든 리넨 테이프를 넣어 봉제한 옷이라 나는 그렇다고 답했다. 그는 모와 마가 섞인 옷은 그들 종교 원칙의 순수성에 위배된다며 입을 수 없다고 말했다. 나는 조밀하게 엮은 그 가봉복을 해체하고 순수한 모직으로만 다시 만들었던 기억이 있다.
여전히 새빌 로 안에서는 여러 날을 힘겹게 버티며 연마해온 개인의 가치가 그것을 믿고 인정해주는 사람들에 의해 이어지고 있다. 수많은 체형과 취향이 그들의 손과 눈을 거쳐갔을 것이고 하루하루 쌓여 ‘비스포크’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 옷을 의뢰한 사람들에게 테일러드된 슈트로 만들 수 있는 최선의 이상을 표현하기 위해 오롯이 쓰이는 고민의 시간. 그것이 영국의 새빌 로가 추구하는 진짜 가치가 아닐까. →
나만을 위한 비스포크 슈트 찾는 법
」1 테일러 숍에 들어가면 숙련된 테일러가 손님을 세심하게 응시할 것이다. 이것을 흔히 ‘사이징업(sizing up)’이라고 하는데 말 그대로 손님의 체형, 습관, 기호, 심지어는 재정적 상황까지 고려하는 비스포크의 첫 번째 과정이다.
2 테일러의 말에 모두 따를 필요는 없다. 결국 옷을 입는 사람은 자신이다. 그러나 옆에서 조언해주는 테일러는 수많은 응대를 통해 쌓아온 자료로 합리적인 제안을 할 수 있는 조언자이다. 주문에 앞서 막연한 두려움이 있을 때 그들의 추천을 듣는 것은 좋은 방법이다.
3 세상에 존재하는 사람 수만큼 다양한 형태의 비스포크 슈트가 있다. 멋이란 각자가 가진 수많은 섬세한 음영의 다른 이름이다. 비스포크는 그것을 극대화시킨다. 다양한 선택지로 망설여질 때면 가장 기본적인 것을 고르면 좋다. 원단, 디자인, 핏 등 기본이 되는 것은 오래 입을 수 있다. 투버튼 네이비 블레이저는 고금과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사랑받아온 스테디셀러이자 베스트셀러다.
4 멋진 슈트를 맞춰 입었다면 문을 열고 외출하는 즉시 잊어라. 결국 옷은 나를 돋보이게 하는 도구다. 주객이 전도된 상태에서 멋을 내는 것은 불가능하다. 설령 상대방이 그 옷에 커피를 쏟는 실수를 하더라도 관대히 대하라.

전통과 품격이 흐르는 거리, 비스포크 슈트 명가
런던 새빌 로의 테일러. 새빌 로의 유서 깊은 양복 경연 대회인 골든 시어스 어워드(The Golden Shears Awards)에서 2017년 한국인 최초로 파이널리스트에 올랐다. 현재는 테일러 숍 캐드 & 더 댄디에서 근무한다. 한 땀 한 땀 빚어낸 비스포크 슈트와 함께 멋을 완결 짓는 마지막 한 땀은 입는 이의 매너, 여유로운 태도라는 진리를 전한다.